〈 67화 〉 [짐꾼] 주종관계
용사와 그 일행이 알현을 위해 왕궁으로 떠났다.
뭐 그런 곳하고는 연이 없어 잘 모르겠지만 더럽게 오래걸린댔으니 저녁쯤에나 오겠지.
아직 돈에 여유는 있지만 딱히 할 것도 없어 막노동이나 하고 일당을 챙겼다.
숙소로 돌아오면 다들 돌아와있겠거니 싶었는데 이상하게 아무도 없었다.
주인장에게 물어보니 아직 안 왔댄다.
아니 그냥 얼굴만 비추고 오는 거 아니었나? 뭐 이렇게 오래 걸려?
잠깐 더 기다려봤지만 올 기미도 없길래 그냥 먼저 방에 올라갔다.
돌아오면 부르겠지.
그렇게 이틀이 지났다.
이 새끼들 나 버린 건가?
자연스레 그런 생각이 들었다.
분명 하루 이상 걸릴 일은 아닌데 나를 찾아오지 않는다는 건, 날 버렸다는 소리 아니겠는가.
이 꼴 안 나려고 세리아 이년을 완전히 타락시키고 용사한테 살갑게 굴었는데….
아무래도 신관 이 시발년이 망쳐버린게 아닐까 싶었다.
둘이 날 쉽게 버리지는 않을테고, 유니랑은 딱히 별 접점이 없었지만 성격이 더러운 년은 아니니까 나를 이렇게 말도 없이 버릴 리가 없다.
그럼 남은 건 성격 더러운 신관이다.
이 시발년 같으니라고!
뭔 병신같은 저주 걸었을 때부터 알아봤다.
그럼 이제 어쩌지? 그놈들은 벌써 수도를 빠져나갔을까?
어떻게 해야 따라잡을 수 있을까를 잠시 고민하다보니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내가 왜 굳이 따라가야하지?
전에는 무척이나 단순한 이유가 있었다. 개년들을 다 따먹고 싶었으니까.
그런데 지금은? 굳이 그래야하나?
충실한 노예가 한 마리 생겼는데 포기하는 것도 좀 아깝다.
그렇지만 그게 이미 떠난 배를 쫓아갈만큼 중요한가?
아니, 마법사 노예면 충분히 중요하지.
그년만 데리고 다녀도 평생 먹고사는데는 지장 없을 거 아냐.
그럼 또 어떻게? 작정하고 숨는다면 이 넓은 도시에서 그들을 찾기란 거의 불가능하다.
그렇게 열심히 대가리만 굴리고 있을 때였다.
쿵쿵!
문 밖에서 누군가가 급히 계단을 오르는 소리가 났다.
우리 말고도 사람이 있었나. 있기야 하겠지만 딱히 존재감 없는 놈들이라 신경도 쓴 적 없었다.
애초에 이런 숙소에 하루 이상 묵는 놈들도 별로 없다.
계단을 오른 그 발걸음은 이윽고 복도를 달려와 내 문 앞에서 멈췄다.
뭐지? 날 찾아왔다고?
똑똑.
다급한 발걸음 소리와는 달리 조심스러운 노크였다.
“누구…?”
“저, 저에요 주인님.”
익숙한 목소리였다.
뭐야 나 두고 도망친 거 아니었어?
설마 마왕 퇴치 같은 가망없는 일은 포기하고 날 따라다니기로 다짐한 건가? 벌써 이렇게까지 교육이 잘 되었을 줄이야.
반신반의하며 문을 열어보니 불안한 듯 주위를 두리번거리던 세리아의 표정이 단박에 밝아졌다.
“아! 드, 들어가도 될까요?”
“들어와서 해명해봐.”
근데 그건 그거고 이건 이거지.
내가 차가운 얼굴로 그렇게 말하자 세리아의 어깨가 움츠러들었다.
만 그녀가 들어오자마자 문을 쿵 닫았다.
“그, 그게, 피치못할 사정이 생겨서….”
그녀는 내가 화내지는 않을까 조마조마하며 사정을 설명하기 시작했다.
한참을 기다려 겨우 알현했더니 갑작스레 행사 일정이 잡혔고, 그거 때문에 왕궁의 공식적인 손님이 되어서 별궁에 갇힌 신세라고?
이건 또 뭔….
어처구니 없는 얘기였지만 귀족 새끼들이 제멋대로 구는게 하루이틀인가?
그놈들보다 더 위인 놈이라면 그러고도 남을 것 같다.
그런데 그런 거라면 시종이든 누구든 시켜서 기별 정돈 넣어줄 순 있잖아.
결국 그렇게 할 만큼 날 중요하게 여기지 않았다는 소리지.
용사 파티의 인성이 다시 한 번 드러나는 순간이었다.
세리아 이년도 내 손에 떨어지지 않았다면 아무 짓 안하고 있었을 게 뻔하다.
내 심기가 불편한 걸 알아챘는지 그녀가 재빨리 납작 엎드렸다.
“주, 주인님… 그리고 이건 제 작은 성의에요. 부, 부디 받아주세요.”
“성의?”
그녀는 조심스레 내 눈치를 살피며 자신이 쓰던 스태프를 내밀었다.
이건 그녀가 자기 스승한테서 받으며 애지중지하던 스태프 아닌가?
그리고 동시에 자기 보지에 박았던 거기도 했다.
“이 더러운 걸 나한테 주겠다고?”
“더, 더럽… 으읏, 이거, 조, 좋은 스태프에요….”
그녀가 공손히 바친 스태프를 들고 몇 번 휘둘러보니 제법 감촉이 좋았다.
“제 스승님이 쓰시던 걸 물려받은 건데… 불 마법에 특화되어 있긴 해도 좋은 재료들로 만든 거라 정말 쓰기 좋아요…. 귀한 거라 주인님이 저 대신 써주셨으면 좋겠어요.”
“흐음….”
무슨 꿍꿍이인가.
이거 주면 이 년 스태프가 없지 않나?
그리 생각하고 그녀의 허리춤을 보니, 새 스태프가 대롱대롱 매달려있었다.
아 그 시련의 동굴인지 뭐시긴지에서 받은 그거구만.
손에 익은 스태프가 더 좋다면서 한사코 쓰길 거절하더니, 저번에 나한테 스태프를 못 사준게 마음에 걸렸던 모양이다.
근데 사실 내가 마법사 할 것도 아니고, 정 필요하면 그녀 걸 빌리던가 그 때 훔친 작은 스태프만으로도 충분하다.
“이거 팔아도 되냐?”
“네? 그, 그거 엄청 귀한… 으읏, 주, 주인님이 원하신다면…!”
그녀는 눈을 꾹 감고 몸을 부들부들 떨었다.
그녀의 소중한 추억이 담긴 스태프를 팔아서 흥청망청 쓰는 것도 제법 즐거운 경험이 될 것 같지만, 뭐 그건 언제라도 할 수 있으니 일단 받아두자.
어째 더 좋은 거 생겼으니 필요없는 걸 나한테 떠넘기려는 것 같기도 한데, 어차피 이 파티의 마법사는 그녀였으니 가장 좋은 스태프를 세리아가 쓰는 건 뭐 어찌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어차피 그녀는 이제 내 소유물이나 다름없으니, 그녀가 더 좋은 걸 쓰든 말든 상관없었다.
세리아 것이 곧 내 것 아니겠는가.
“그래, 뭐 알았어. 일단 받아주지.”
그 말에 세리아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정말 팔아버리는 건 아닐까 걱정한 모양이다.
“감사의 인사는?”
“아… 바, 받아주셔서 감사합니다.”
내가 이 더러운 물건을 받아주는 건데, 당연히 감사해야지.
나는 그녀를 흉내내며 스태프를 허리춤에 대충 착용했다.
잘 안되네, 어떻게 하는 거야?
“제, 제가 도와드릴까요?”
“와서 해봐.”
세리아는 내 허리춤을 매만지며 근사하게 스태프를 고정시켰다.
“어, 어울려요….”
아부인지 진심인지는 모르겠지만, 아무튼 기분은 나쁘지 않았다.
이러고 있으니 정말 마법사가 된 기분이다.
예전에는 저 하늘 위의 존재라고만 생각했는데.
세리아를 바라보니 그녀는 무슨 말을 하고 싶은 듯 계속 입을 오물거렸다.
“하고 싶은 말이라도 있냐?”
“그, 그게… 염치 없는 말이지만, 혹시 주인님만 괜찮으시다면….”
뭐 지금은 기분이 좋으니 가벼운 부탁이라면 못 들어줄 것도 없지.
턱짓으로 계속하라고 신호를 보내가 그녀가 부끄러워하며 말했다.
“오, 오늘은 같이 시간을 보낼 수 있을까요…?”
세리아는 나와 연인 같은 하루를 보내고 싶어했다.
***
딱히 박아주고 싶은 마음은 안 들었으니 그냥 둘이서 외출이나 하기로 했다.
물론 돈은 그녀가 낸다.
솔직히 이렇게 애새끼들처럼 구경하고 돌아다니는 건 익숙한 경험이 아니라 좀 어색하긴 했지만, 원래 이 자리에 용사가 있어야 했다는 점을 생각하면 절로 웃음이 나왔다.
그녀의 말에 따르면 지금쯤 용사는 자기 방에 틀어박힌 채 하릴없이 시간을 낭비하는 중이라 한다.
그가 자기 여자들 관리도 못하고 시간을 낭비하는 동안, 나는 착실하게 그녀의 마음속 지분을 뺏어오는 중이었다.
뭐, 이제 용사 지분도 거의 남아있지 않는 거 같지만.
“어머, 세리아?”
그녀가 팔짱을 끼고 여기저기 돌아다니던 와중, 뒤에서 모르는 여자가 그녀를 불렀다.
“루, 루에 교수님?”
세리아의 표정이 당혹으로 물들었다.
누군데?
“요즘 발걸음이 뜸하다 했더니… 그런 거였군요.”
“아, 아니, 이건….”
그녀가 당황하며 말을 더듬었다.
괴롭혀주기 딱 좋은 타이밍인 것 같아 엉덩이를 꽉 붙잡으며 물었다.
“누구야?”
“읏, 그, 마탑의 교수님… 각인마법에 대해 잘 아시는 분이세요….”
문양?
그러고보니 잘 아는 교수님과 만났다고 했지.
그게 그녀인 모양이다.
확실히 아름다운 여자였다.
지적이면서 동시에 요염한 분위기가 풍긴다.
그렇지만 천박하진 않다. 아무한테나 다리를 벌릴 그런 여자는 아니다.
왠지 위험한 년 같은데.
근거는 없지만 그런 느낌이 든다.
“아, 그럼 이 분이 그?”
“그, 그건 아닌데, 그게….”
세리아는 망설이고 있었다.
나를 뭐라고 설명할까?
연인? 파티 동료? 아니면 주인님?
“주, 주인이에요….”
아니, 이걸 이렇게 당당하게 밝힌다고?
그녀의 당당함에 오히려 내가 놀랐다.
당연히 파티 동료라거나 뭐 그런 식으로 퉁칠줄 알았는데.
“주인? 아… 그런 거군요. 후후.”
그런데 이년도 정상인은 아닌지 그 말을 듣고선 납득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뭐야, 시발, 내 감성이 이상한 거야?
“당황한 얼굴이네요. 그런 뜻이 아니랍니다. 힘을 제공하는 자는 ‘노예’, 그 혜택을 받는 자가 ‘주인’. 그냥 학술용어일 뿐이에요.”
그게 뭔….
별 거지같은 용어가 다 있네.
“안 그래도 주인과도 만나보고 싶었는데 잘 됐네요. 혹시 시간 있어요? 드리고 싶은 얘기가 좀 있는데.”
“그게….”
그녀가 내 눈치를 살폈다. 가도 되냐고 묻는 눈빛이다.
열심히 듣지는 않았지만 세리아가 지난 며칠 동안 열심히 이 교수 뒤를 졸졸 쫓아다니며 가르침을 받았다는 건 기억하고 있다.
별 진전은 없었지만 이 문신에 대해서도 많은 얘기를 나눴다고 했지.
나는 직감적으로 이 문신이 무엇인지는 이해하고 있지만, 더 자세하게 알아두는 건 나에게도 이득이 되면 됐지 손해인 얘기는 아니다.
내가 고개를 끄덕이자 세리아는 눈에 띄게 기뻐했다.
“그, 그럼 같이 가요, 교수님!”
“후후, 두 분 관계가 재밌네요. 마치 진짜 주종관계 같아요.”
나와 그녀의 움직임이 순간 굳었다.
세리아는 어색하게 자기 팔을 풀면서 나와 거리를 벌렸다.
“농담이에요, 농담. 자, 들어가죠. 제가 잘 아는 가게가 있답니다.”
루에 교수는 자연스럽게 우리 둘을 이끌고 어느 외진 가게로 향했다.
“어머, 세리아. 장미가 전보다 더 까매졌네요.”
“네. 전에 말씀하셨던대로 감정의 변화가 색에 영향을 미친 게 아닐까 싶은데요….”
조용한 찻집.
나 같은 놈이랑은 안 어울리는 곳이다.
그렇지만 내가 이 대화에 끼지 못하는 건, 찻집의 분위기 때문만은 아니겠지.
“흐음… 색과 감정 사이의 관계는 세리아도 알다시피 연구가 많이 부족한 분야라 저로서도 대답을 드릴 수 있는게 없네요.”
“역시 그렇군요. 혹시 교수님이라면 뭔가 알고 계시지 않을까 싶었는데….”
“후후, 저도 모든 걸 아는 건 아니랍니다. 색 말고 다른 변화는 없었나요? 뭐, 크기라던가 그런 쪽으로요.”
“그게….”
어쩌구저쩌구.
이거 전부 말해도 되는 건가? 싶을만큼 자세한 얘기가 둘 사이를 오간다.
저 사람이 소문내면 어쩌려고 이렇게 미주알고주알 다 털어놓는 거지?
내 의아한 시선을 눈치챘는지 세리아가 보충설명을 덧붙였다.
“아, 교수님은 믿을 만한 사람이라서… 이 일도 전부 비밀로 부쳐주시기로 했어요.”
저 사람을 얼마나 오래 봤다고 저렇게 철썩같이 믿고 있지?
뭐, 마법사끼리의 무언가가 있나보지.
평소에 봐왔던 세리아의 지혜를 믿고 그냥 넘어가기로 했다.
“걱정마세요. 저는 나름 입이 무겁답니다.”
생긋 웃는 교수.
여러 남자 울려봤을 듯한 미소였다.
내가 아린의 저주를 받고 있는 상태만 아니었다면 무심코 하반신이 반응해버리지 않았을까 싶을 만큼 매력적이다.
그런데 그녀는 내가 아무 반응을 보이지 않은 것이 신기했는지 아주 잠깐 놀란 표정을 짓더니 다시 원래대로 돌아왔다.
세리아는 눈치를 못 챈 것 같지만, 방금 그 놀란 표정은 누가 봐도 ‘이게 안 되네?’하는 표정이었다.
즉 그녀는 의도적으로 날 흥분시키려 했던 것이다.
역시 이 년, 수상한 년이다.
“그보다 세리아, 연인에게는 존댓말을 쓰는 편이었군요? 의외에요.”
“네? 여, 연인? 아, 그, 헤헤….”
세리아는 연인이라는 말에 화들짝 놀라더니 내 쪽을 흘긋 바라보며 얼굴을 붉혔다.
“연인 아닙니다.”
그렇지만 나는 칼 같이 관계를 부정했다.
세리아는 내 노예.
결코 연인 따위가 아니다.
그녀가 연인들이나 할 법한 행위들을 에릭 대신 나를 통해 해소하는 건 알고 있었고, 그러는만큼 나에 대한 의존도가 높아지는 거니까 나도 그대로 내버려두긴 했다.
그렇지만 나와 세리아의 관계는 철저한 주종관계지 결코 연인관계가 되어서는 안 됐다.
나는 지금 그녀의 말을 단칼에 자르면서 그 사실을 명확히 했다.
“아….”
“어머, 너무 친해보이길래 그만 오해해버렸네요.”
세리아가 아쉬운 소리를 냈지만 무시했다.
착각은 자유지만 나는 그녀의 연인 따위로 남을 생각은 추호에도 없다.
잠시 말이 없어진 세리아는 내 시선을 피하더니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자, 잠시 화장실 좀 갔다올게요.”
그녀도 깨달은 것이다.
자기가 나를 통해 그 결핍을 해소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그리고 내가 요구하는 것은 그런 달콤한 연인관계가 아닌, 마음 깊숙한 곳에서부터 우러나오는 진실된 복종이라는 것을 알아차리고 만 것이다.
그녀는 나를 주인으로 모시고 있다.
그렇지만 그와 동시에 나를 연인처럼 대하려고도 했다.
둘은 결코 양립할 수 없다.
잠시 그녀가 달콤한 환상에 빠지게 내버려뒀지만, 어차피 언젠가는 깨질 꿈.
나는 이번 기회를 틈타 그녀의 헛된 망상을 바늘로 터뜨려버렸다.
루에 교수는 방긋 웃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뭐, 다소 혼란스러워하는 것 같지만 이미 그녀에게는 선택지 따윈 없다.
이제와서 용사에게 돌아갈 순 없으니.
포기해라.
연인과 데이트도 하고 사이좋게 보내고 싶다는 소녀같은 꿈을.
네 상대는 이제 용사도 아니고, 너는 더 이상 꿈꾸는 소녀로 남을 수도 없다.
“엄격하시네요.”
세리아가 자리를 비우자 그녀가 생긋 웃으며 말했다.
뭐라고 답해야하지?
함부로 대답하기 난처한 질문이었다.
“전 좋다고 생각해요. 노예가 기어오르게 내버려두는 주인은 언젠가 신세를 망치는 법이죠.”
…그 학술용어 어쩌구 하는 얘기 맞지?
“그녀가 첫 노예인가요? 축하드려요. 시작이 좋으시네요.”
그녀는 당혹스러워 하는 나를 요사한 청록빛 눈동자로 바라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