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5화 〉 [용사] 알현과 대기
다행히 늦지 않게 왕궁에 도착했다.
아린은 여전히 머뭇거렸지만 적어도 마음만큼은 단단히 먹었는지 더 이상 걸음을 지체하지 않았고, 나는 이를 응원하자니 왠지 그녀가 더 부끄러워할 거 같아서 일부러 신경 쓰는 태도를 보이지 않았다.
왕궁에 도착한 우리들은 그 뒤로도 또 한참을 기다려야했다.
대체 뭐 이렇게 절차가 복잡하고 많은지, 도중에 기다리다 지쳐 잠들 뻔했다.
심지어 거의 하루 종일 기다렸는데도 우리에게 허락된 알현시간은 약 10분 남짓이었다.
10분.
용사라고 딱히 거들먹거리고 싶은 건 아니지만, 아무리 그래도 이건 좀 너무한 거 아닌가?
기다리는 내내 그런 생각이 들었지만 지나가는 관리들에게 불평해봤자 의미도 없는 짓이라 나는 그저 딱딱하게 굳은 얼굴로 가만히 앉아있었다.
그렇게 참으로 긴 대기 끝에 우리는 마침내 왕의 얼굴을 마주할 수 있었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마주하진 못했다.
왕 앞에서 고개를 빳빳이 들고 다닐 수는 없으니까.
“고개를 들어라, 용사와 그 일행이여.”
머리 위로 중후한 목소리가 들렸다.
“고개를 들라, 용사와 그 일행!”
옆에서 관리 하나가 왕의 말을 복창했다.
어차피 다 들리는데 굳이 한 번 더 말할 필요가 있나?
잘 이해는 안가지만 아무튼 그게 규칙이란다.
난 그제서야 왕의 얼굴을 볼 수가 있었다.
들어왔을 때 얼핏 보기로는 중후한 목소리에 걸맞게 상당한 풍채를 자랑했는데, 정작 그의 얼굴은 피로에 찌들어있었다.
솔직한 심정으로는 한 마디 쏘아붙이고 싶었지만, 애초부터 그럴 수는 없었고 그의 얼굴을 보니 그럴 마음도 사라졌다.
“사천왕 중 하나를 격퇴했다지? 그대들에게 거는 기대가 내 상당히 크다.”
아린이 일러준 대로 아까 복창하던 관리를 쳐다보니 그가 고개를 끄덕거렸다.
감사인사를 올려도 된다는 뜻이다.
“감사합니다, 폐하.”
이거면 되나?
고개를 숙인 채로 눈만 살짝 들어 살펴보니 관리가 못마땅한 표정을 짓고 있었지만 딱히 다른 몸짓을 보이지는 않았다.
…좀 문제는 있어도 아슬아슬하게 통과인 듯싶었다.
“내 그대들의 공을 치하하고자 하니, 원하는 것이 있으면 말해보거라.”
우리가 원하는 것. 그야 자금이다.
애초에 짐꾼을 추가로 고용해서 부산물을 모아야할 만큼 자금난에 허덕이는 것이 우리 파티 아니던가.
보상은 금전적인 것으로 받기로 합의했다.
내가 그 사실을 전하자, 이미 예상했다는 듯 왕은 별 고민 없이 명쾌한 대답을 돌려주었다.
“내 듣기로 여로 중 숙박으로 인한 고충이 많다 하였다. 앞으로 이 대륙 어디에서도 그런 고충을 겪지 않게 조치해줄 터이니, 염려 말도록.”
…무슨 말이지?
숙박비가 많이 드니까 그 걱정을 없애주겠다고?
슬쩍 동료들을 둘러봤으나 그녀들도 비슷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으음, 다시 물어볼 수 있는 상황도 아니고 여기서는 가만히 있어야겠지.
“그리고 그대들의 노고를 치하하는 자리를 일주일 뒤 개최할 예정이니, 참석할 수 있도록. 이상이다. 앞으로도 많은 활약을 기대하지.”
어? 뭐라고?
“퇴장!”
뭐라고 반응하기도 전에 짧은 알현이 끝났다.
잠깐만, 이게 대체 무슨 소린데?
더 자세한 얘기는 우리를 데리고 나간 관리에게서 들을 수 있었다.
왕이 우리에게 내린 보상은 앞으로 모든 숙박시설을 무료로 이용할 수 있는 왕가의 직인이 담긴 문서였다.
뭐, 숙박비용도 상당했던 것이 사실이므로 좋은 보상이라면 좋은 보상이지만…….
우리가 예상한 형태는 아니라서 조금 당황스러웠다.
그 뿐만이 아니었다.
사천왕 중 하나를 격퇴했다는 사실을 대대적으로 홍보하기 위한 궁정 행사가 일주일 뒤에 열리는데, 우리는 그 때 그 자리에 참석해야만 했다.
당연히 직전까지 아무도 그 사실을 몰랐지만, 뭐라고 할 수는 없었다.
누구한테 따질 것인가?
알현을 마치고 곧장 나갈 생각이었던 우리에게는 황당하기 짝이 없는 소식이었다.
물론 아직 어디로 가야할지도 못 정하긴 했지만 이러면 또 숙소는 어떻게 구해야한단 말인가?
이 사실을 관리에게 호소하자 그는 이제 우리가 왕궁의 공식적인 손님이 되었으므로 손님 전용 객실을 제공해준다고 했다.
놀랍게도 1인 1실이었다.
다만 한 가지 문제가 있다면, 이 자리에 제렌 씨가 없기 때문에 그에게 아무런 말도 못했다는 점이다.
궁 밖으로 나가려면 안전과 여러 행정적인 문제로 인해 복잡하고 까다로운 절차를 거쳐야한다고 관리는 덧붙였다.
함부로 나가지 말라는 소리다.
세리아는 항마결계 하나 없으면서 무슨 안전이냐고 투덜거렸지만, 이건 선택이 아닌 이미 확정된 사실이었다.
그렇게 우리는 일주일 동안 수도의 가장 화려한 궁궐 속에 갇히게 되었다.
첫날에는 도통 화려한 방에 적응이 되지 않았지만, 이틀이 지나고 사흘 째에 접어드니 제법 익숙해졌다.
그 사이 우리는 방 안에만 꼼짝없이 틀어박혀 있었다.
듣기로 세리아는 한 차례 나갔다왔다 했는데, 나간 김에 제렌 씨에게 상황을 전하고 왔다고 알려주었다.
그는 밖에서 우리를 기다리기로 했다.
사실 그 동안은 무급이나 다름없는데, 그럼에도 그는 우리를 기다리기로 한 것이다.
그의 성의에 나는 왠지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이렇게나 성실하고 착한 사람인데, 나는 용사씩이나 되어서는 볼품없는 의심에 사로잡혀 그를 나쁜 사람이라 확신했던 것이다.
이번 수도행에서 나는 내가 얼마나 잘못된 생각을 하고 있었는지 깨달을 수 있었다.
나는 지나치게 크고 화려하고 푹신한 침대에 누워 한숨을 내쉬었다.
이 정도 넓이면 우리 넷이 다 같이 누울 수도 있을 것 같다.
침대에 누운 채 하릴없이 고개만 까딱거리고 있었더니 문득 내 팔목이 눈에 들어왔다.
왼팔에 새겨진 넝쿨과 장미 셋.
큼지막한 장미가 둘, 내 엄지손가락에 가려질 만큼 작은 장미가 하나다.
나는 내 엄지로 장미를 살며시 가려보았다.
보이지 않는다.
대체 왜?
이건 세리아의 장미인데, 유독 이것만 이상하게 점점 작아졌다.
내 착각이라기엔 그 차이가 너무나도 명백했다.
내가 그녀의 마법을 너무 많이 써서? 그럴 리는 없다.
마법을 쓰려면 스태프가 필수기 때문에 스태프가 없는 나는 그녀의 마법을 거의 쓴 적이 없었다.
우리가 모르는 무언가 다른 원리가 있을 게 분명한데, 그걸 알 수가 없었다.
점점 작아지기 시작한 이후로는 왠지 무서워져 세리아의 마법을 사용할 엄두도 못 냈다.
잠시 바라보며 고민하던 나는 결심하고 벌떡 일어났다.
이렇게 혼자서 고민해봐야 아무 소용없다.
세리아에게 직접 묻는 수밖에.
특히 이틀 전 그날을 기점으로 장미는 순식간에 작아져버렸다.
당연히 나와 그녀가 관계를 맺은 게 원인이 아닐까 싶었지만, 그렇다면 그 전부터 조금씩 작아지던게 설명이 안 됐다.
게다가 하면 할수록 작아진다니… 그런 거라면 앞으로도 그녀들과 관계를 맺을 수 없다는 뜻 아닌가?
나는 세리아의 몸 안에 내 것을 밀어 넣었을 때의 그 감촉을 아직도 잊지 못했다.
혼자 손으로 하는 것 따위는 비교도 할 수 없는 그 쾌락을.
그렇지만 차마 그녀에게 대놓고 다시 한 번 하자는 부탁을 하지 못해 속으로만 끙끙 앓았다.
사실 몸을 섞은 그 다음날 바로 그녀에게 문양에 대해 묻고 싶었지만, 자꾸 이 생각이 나 묻지도 못했던 것이다.
그래, 지금 바로 물어보자.
결심을 한 나는 방 밖으로 나왔다.
문을 나서니 복도 곳곳에서 호위병이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그들은 나를 잠깐 바라보더니 자기 임무에 충실하려는 듯 다시 시선을 앞으로 고정했다.
이렇게나 철통같이 감시를 하고 있으니 누가 들어올 일은 절대 없어보였다.
자, 그래서 세리아 방이 어디지?
솔직히 비슷한 방이 너무 많아서 모르겠다.
“으음… 아, 저기! 잠시만요!”
나는 지나가던 시종 하나를 붙잡고 물어보기로 했다.
“으음… 마법사라면, 아, 그 많이 드시는 분 말하십니까? 제가 안내해드리겠습니다.”
“앗, 감사합니다.”
친절한 사람이었다.
그런데 뭐? 많이 드시는 분?
“그녀가 많이 먹나요?”
딱히 세리아가 식사량이 많지는 않은데.
“네, 첫 날에는 평범하게 드셨던 거 같은데 둘째 날부터 식사를 항상 2인분씩 요구하시길래 그렇게 드리고 있습니다.”
“2인분이요?”
…왜? 잘 이해가 가지 않았다.
“네. 대신 식사를 자주 안하십니다. 하루에 한 번 내지는 두 번 정도입니다.”
“아….”
그 말을 들으니 감이 잡히는 부분이 있었다.
마법연구. 그녀는 마법 연구를 하고 있는 것이다.
이전에도 가끔씩 무언가 감이 잡히는 부분이 있으면 그녀는 숙소에 틀어박혀서 하루 종일 연구만 했다. 그러니 당연 식사도 제때 할 리가 없다.
잠깐 이상한 상상을 했던 나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시종의 뒤를 따라갔다.
하긴, 사실상 여기 갇혀있는 상태니까 그렇게 시간을 보내는 것도 나쁘지 않겠거니 싶었다.
“여기입니다.”
시종은 나를 한 방 앞까지 안내했다.
내가 있는 방과 똑같이 생긴 문이었다.
내부도 같지 않을까?
“감사합니다.”
“이 정도야 당연한 일이지요. 필요하시면 언제든 불러주세요.”
시종은 꾸벅 인사하며 제 할 일을 마저 하러 갔다.
세리아가 이 방 안에 있는 거구나.
방 안은 고요했다.
아마도 빈 방일 옆방처럼 이 방도 비어있는 것처럼 보였다.
똑똑.
“세리아?”
대답은 없었다.
아무런 소리도 나지 없었다.
자리에 없는 건가?
그렇지만 밖에 나간 거라면 시종도 그 사실은 알고 있었을 것이다.
마법 연구에 집중하느라 안 들리는 걸까.
쿵쿵.
“세리아!”
한 번 더 두드렸다.
안 들리는 모양이다.
어쩔 수 없지, 다음에 오…….
갑자기 아무런 소리도 없이 문이 열렸다.
“하아, 하아… 에, 에릭? 무슨 일이야?”
그 안에서 새빨간 얼굴을 한 세리아가 한 손에 스태프를 든 채 문을 열고 나왔다.
얌전히 책상에 앉아서 수식과 씨름하고 있는 줄 알았더니, 다소 헝클어진 머리와 옷을 보면 꼭 그런 것도 아닌 것 같았다.
“그, 잠깐 물어보고 싶은 게 있어서 왔는데… 바쁘면 다음에 올까?”
“자, 잠시만… 아, 괜찮대. 들어와.”
“응?”
“아니, 괜찮아. 들어와.”
그녀의 말실수에 의아해하면서도 나는 그녀의 방에 발을 들였다.
어딘지 모르게 약간의 마력이 감돌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마법 연구 중이라 그런 거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