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4화 〉 [신관/용사] 알현
-***-
“어?”
없었다.
아무리 짐을 뒤져봐도 보이질 않았다.
그 대신 명백하게 보이는 누군가의 흔적.
누군가가 우리 짐을 뒤졌다.
온 몸에 소름이 쫙 돋는다.
대체 누가? 뭘 훔쳤지?
조심스레 주변을 둘러보니 유니와 세리아가 아무 것도 모른 채 쿨쿨 자고 있었다.
우리 셋이 잠든 동안 누군가 여길 왔다갔단 말인가?
창문도, 문도 굳게 잠긴 채다.
누군가가 들어오려 했다면 적어도 셋 중 하나는 눈치 챘을 텐데… 어떻게 된 거지?
“…무슨 일이야?”
자고 있는 줄 알았던 세리아가 슬그머니 일어나 내게로 다가왔다.
“세, 세리아, 큰일 났어요. 도둑이 든 거 같아요!”
“도둑? 문 잠겨있잖아.”
“누, 누군가 저희 짐에 손을 댔어요!”
내 말에 세리아는 멍하니 우리 짐을 내려다보더니 손으로 자기 입가를 가렸다.
그녀의 입꼬리는 살짝 휘어있었다.
웃고 있다고? 이 상황에서?
……아니, 그럴 리가 없지. 내 착각일 것이다.
“뭐가 없어졌는지는 확인했어?”
“아, 아뇨 아직…. 당장 유니부터 깨우죠.”
역시 마법사라 그런 걸까.
이런 큰일이 일어났음에도 그녀는 침착했다.
“일단 잃어버린 것이 있나 확인부터 해보자. 유니는 그 다음에 깨워도 될 것 같아. 괜히 아침 일찍부터 걱정시킬 필요는 없잖아?”
“그, 그래도….”
유니의 짐도 확인해야하는 거 아닌가?
그렇게 생각하며 유니와 세리아의 짐을 곁눈질했는데, 그녀들의 짐에는 별다른 흔적이 보이지 않았다.
우선 내 짐부터 확인해보자는 그녀의 말이 어딘가 못마땅했지만 일단은 그녀의 말을 듣기로 했다.
신관복은 멀쩡하다.
평소에 입는 옷도 들어있고, 부끄러워서 입진 못하지만 새 신관복도 고이 모셔져있다.
경전도, 그 외에 돈이 될 만한 것은 모두 무사하다.
…도둑이 든 게 아니었나?
“잘 찾아봐, 분명 도둑이 들었으면 뭔가 가져갔겠지. …옷이라던가.”
“음… 앗? 어?”
그녀의 말을 듣고 자세히 살펴보니 당연히 있어야 할 것이 없었다.
“왜 그래? 뭐가 사라졌어?”
세리아가 나에게 물었지만 나는 대답할 정신이 없었다.
아니, 그래도 이건 이상하잖아.
왜 이것만 없지?
“중요한 거라도 사라진 거야?”
“세, 세리아….”
그냥 도둑이 아니었다.
“…제 속옷이 사라졌어요.”
변태였다.
-***-
알현 당일이 찾아왔다.
우리는 오늘 아침 일찍 일어나서 알현 준비를 할 예정이었다.
“아린, 괜찮아?”
“네? 아, 네, 네! 괜찮아요 용사님!”
그런데 아린의 상태가 조금 이상했다.
평소 누구보다 일찍 일어나던 그녀가 제일 늦게 내려왔던 점도 그렇고, 뭐가 그리 신경 쓰이는지 신관복 밑단을 꾹 누른 채 주변을 불안하게 돌아보며 내려온 것도 그렇고 여러모로 평소와는 달랐다.
“뭘 잃어버렸대.”
제렌 씨 옆에 앉아있던 세리아가 빵을 스프에 쿡 찍어먹으며 무덤덤하게 대답했다.
“뭐를?”
“세, 세리아!”
잃어버렸다고?
내가 별 생각 없이 물어보자 아린의 얼굴이 순식간에 새빨갛게 물들면서 그녀의 입을 막았다.
“알았어. 말 안 할게.”
세리아의 말을 듣고서야 아린은 간신히 그녀를 놓아주었다.
“용사님! 별 거 아니니까 신경 쓰지 마세요!”
“그, 그래? 알았어….”
그녀의 반응을 보면 별 거는 아닌 것 같았지만 그녀가 이렇게 필사적으로 입막음하려는 걸 보니 개인적인 사정 같았다.
“으응? 무슨 일이야?”
유니도 모르는 일인지 고개를 갸웃했다.
“아, 아니에요! 정말로!”
“아닌 거 같은데?”
유니가 눈만 깜빡이며 대답했다.
그녀의 말대로 누가 봐도 아린의 지금 모습은 문제가 있는 사람의 반응이었다.
“그으… 뭘 좀 잃어버려서 그래요.”
“중요한 거야? 같이 찾아줄까?”
“아, 아뇨, 오늘은 그럴 시간 없잖아요. 그리고 그렇게 중요한 것도 아니라… 다시 사면 돼요.”
내가 벌떡 일어나려고 하자 그녀가 손사래를 쳤다.
“…그래? 잘 모르겠지만 중요한 거면 꼭 말해줘.”
“물론이죠, 용사님.”
그녀는 애써 웃어보였다.
여전히 밑단을 꾹 누르고 있는데, 왜 그러지?
“우리 슬슬 나가야 하지 않아?”
“앗, 그렇지 참.”
세리아의 말에 정신을 차렸다.
그래. 오늘은 알현 당일.
준비에 시간이 한참 걸릴 것을 생각하면 지금 바로 출발해야한다.
“아린, 괜찮겠어?”
“네, 걱정 마세요, 용사님. 별 일 아니니까요.”
여전히 그녀의 표정은 불안해보였지만, 아린은 알현을 망칠 수는 없다며 우리들을 재촉했다.
“…세리아, 정말 평소에도 이런 걸 입고 다녀요?”
“응, 얼마 전에 새로 샀어. 예쁘지 않아?”
“조금… 노출이 과한 게….”
우리 뒤로 그녀 둘이 소곤소곤 속삭였지만 작아서 잘 들리진 않았다.
“나 빼고 비밀얘기야?”
“설마 그러겠어? 개인적인 얘기야, 유니.”
“우으, 진짜지?”
둘이 속닥속닥 얘기 나누는 걸 본 유니가 부루퉁한 얼굴로 세리아를 바라보자, 그녀는 아린을 흘깃 바라보더니 유니에게 다가가 그녀의 기분을 풀어주었다.
“으읏… 세리아….”
혼자 남은 아린은 세리아가 멀어지자 불안한듯 주변을 둘러보며 조심스레 우리 뒤를 따라왔다.
“어디 아파, 아린?”
“아, 아뇨! 그냥… 이, 잃어버린 물건 생각을 하느라….”
볼도 빨갛고 몸도 좀 움츠러들어있다.
나는 그녀가 혹시 어디 아픈 게 아닐까 걱정이 들었지만, 그녀는 날 자꾸 밀어냈다.
“저, 저는 용사님 뒤에서 따라갈 테니… 걱정 마세요!”
“으, 응….”
그녀의 태도는 완고했다.
나는 어쩔 수 없이 아린의 곁에서 물러날 수밖에 없었다.
그렇지만 걱정을 안 할 수는 없는 노릇.
왕궁으로 향하면서도 내 시선은 자꾸 아린에게로 돌아갔다.
길거리를 걷고 있는 아린의 얼굴에서는 김이라도 새어나올 것 같았다.
고개를 푹 숙이고 좌우만 두리번거리는 그녀는 마치 속에 보여주면 안 될 거라도 들어있는 듯 신관복 밑자락을 누른 채 조심스레 걷고 있었다.
그 탓에 자꾸 우리 발걸음보다 늦어 자연스레 뒤쳐졌는데, 그럴 때마다 그녀는 혼자 남겨진 아이처럼 울상을 지으며 총총걸음으로 달려왔다.
그녀는 괜찮다고 했지만, 나는 도무지 이 상황을 가만히 내버려둘 수가 없었다.
“얘들… 읍!”
“요, 용사님, 부탁이니까… 아무 말 하지 말아주세요.”
허겁지겁 달려온 아린이 내 입을 틀어막았다.
“응? 불렀어 에릭? …아앗!”
“어머, 아린. 대담하네.”
아린은 나를 자기 쪽으로 잡아당긴 채 내 입을 막고 있었다.
나는 아슬아슬하게 균형을 유지 중이었고 그녀는 그런 나를 넘어지지 않게 지탱하면서 한 손으로 내 입을 막고 있는 중이었다.
서로 지나치게 붙어 있어 아무래도 괜한 오해를 산 것 같다.
“규, 규칙 위반!”
“나한테 뭐라고 할 처지가 아니네, 아린?”
“…아, 아앗, 아니에요! 이건, 그….”
아린은 황급히 변명하며 나를 다시 밀쳐냈다.
그 바람에 아린의 옷자락이 펄럭이자 그녀는 비명을 지르며 주저앉았다.
“…저기, 아린, 정말 몸이 안 좋은 거라면 혼자 돌아가도….”
“괘, 괘, 괜찮아요…. 아, 아무 것도 아니에요….”
확실히 이 나라의 왕과 알현하는 건 우리 모두에게 있어 중요한 일이지만, 무슨 일인지는 몰라도 이런 상태에서까지 그걸 고집할 필요가 있을까.
나에게는 우리에게 도움 하나 안 주는 왕보다는 파티원이 더 소중했다.
“안 되겠다, 우리 돌아가자. 알현은 다음 기회에….”
“용사님.”
쪼그려 앉아있던 아린이 표정을 굳히며 일어났다.
“알현은 정말 중요한 기회에요. 지원을 많이 받을수록 저희는 마왕토벌이라는 목표에 더 가까워질 수 있고, 그러기 위해서는 지금 상황이 얼마나 심각한지 폐하께 설명을 드려야 해요.”
“그래도….”
“저 때문에 알현을 포기하지 말아주세요, 용사님. 제가 긴장을 많이 해서 그랬던 거지, 전 정말 괜찮으니까요. 자 봐요, 문제없죠?”
아린은 내 손을 잡으며 생긋 웃었다.
그녀는 알현을 반드시 성공적으로 마무리해야한다고 말했다.
무엇인지는 몰라도 아린은 그것을 위해 자신의 문제를 참으려고 하고 있었다.
그렇게까지 그녀에게 참을 것을 강요하고 싶지는 않다는 게 내 본심이지만, 무슨 말을 해도 아린은 끝까지 고집을 부리겠지.
내가 잠시 대답을 고민하자, 세리아가 한숨을 쉬며 말했다.
“정말 별 거 아니야, 에릭. 그냥 부끄러워서 그래. 내 팬티를 빌려줬거든.”
“어? 패, 패… 뭐라고?”
잘못 들은 거지?
“세리아!”
“됐어, 자꾸 더 숨기니까 오해받잖아. 그냥 팬티를 잃어버려서 내 걸 빌려줬는데 아린이 입던 게 아니라서 어색해하는 것뿐이야. 그걸로 끝! 별 거 아니지?”
패, 팬티….
자연스레 아린의 아래쪽에 시선이 갈 뻔해서 나는 고개를 하늘로 치켜들었다.
“저, 정말이야?”
“으읏… 네, 네… 쓸데없는 일로 고집 부려서 죄송해요.”
“그, 그렇구나…. 아, 알았어.”
으윽, 그런 거였어?
나는 화끈거리는 얼굴을 감추며 그녀에게서 시선을 돌렸다.
맞은편에서는 유니가 시선을 또록또록 굴리고 있었다. 그녀도 어떻게 반응해야할지 몰라 난감해 하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나도 똑같은 표정을 짓고 있겠지.
눈이 마주치자 그녀도 어색하게 웃었다.
“이, 이젠 신경 안 쓰니까 괜찮아요… 빨리 가죠.”
나도 괜히 더 이 화제로 이야기하고 싶지 않아 재빨리 고개를 끄덕였다.
“앗, 먼저 가 에릭! 난 아린이랑 같이 갈게!”
“어? 응.”
유니는 뭔가 좋은 생각이 났는지 아린 곁으로 달려가 그녀의 귀에 뭐라고 속삭였다.
그러자 아린의 표정이 단박에 펴졌다.
“저, 정말요? 고마워요 유니!”
“에이, 이정도로 뭘. 그런 거면 미리 말해주지 그랬어!”
“그, 그러게요… 제가 정신이 없었나봐요.”
음, 잘 모르겠지만 문제가 대충 풀린 걸까?
유니는 빛의 정령을 부르더니 짧은 명령을 내렸다.
“자, 이제 끝! 빨리 가자!”
“시간을 지체해서 죄송해요, 용사님. 빨리 가죠.”
아까보다 훨씬 밝은 표정으로 아린이 재촉했다.
좀 전처럼 어두운 그늘이 그녀의 얼굴을 가리고 있지 않아 마음이 놓였다.
“후후, 아린도 참. 이런 걸로 부끄러워하긴.”
내 옆에서 세리아가 키득 웃었다.
그녀는 입가를 살짝 가린 채 눈꼬리를 휘며 웃고 있었는데, 왠지 살짝 요염하게 보였다.
“대체 뭘 준거야?”
“…보여줄까?”
“어? 아, 아니, 괜찮아!”
세리아가 치마 밑단을 잡고 살짝 들어올리길래 나는 기겁을 하며 손사래를 쳤다.
“농담이지, 뭘 그렇게 깜짝 놀라고 그래?”
그녀가 깔깔 웃었다.
으으… 적응이 안 되네.
이틀 전 그날, 나와 세리아가 관계를 맺은 그 날 이후로 세리아는 종종 나한테 이런 장난을 쳤다.
뭐, 서로 몸까지 섞었으니 이 정도가 뭔 대수냐 싶을 수도 있겠지만, 아직 나는 이런 장난에 도무지 적응을 할 수가 없었다.
세리아는 아무렇지 않아하는 걸로 봐선 내가 이상한 거겠지?
나도 좀 자연스럽게 대처할 필요가 있었다. 아린과 유니에게 의심받지 않기 위해서라도.
“섹스까지 한 사이잖아.”
“…윽!”
세리아가 귓가에 속삭이자 나는 흠칫 놀랐다.
그, 그야 그렇긴 하지만….
사실 그 때의 일은 뭐랄까, 너무 갑작스럽기도 했고 휙 지나가버려서 좀 미묘한 기분이었다.
기분이 좋았던 건 사실이고, 평생 잊지 못할 기억이지만… 부자연스러웠다고 해야 할까, 살짝 걸리는 부분이 있었다.
뭐라고 콕 집어 말할 순 없지만, 하여튼 그런 찝찝함이 마음 속 한 구석에 자리 잡고 있는 것이다.
“용사님?”
“에릭?”
얼음장처럼 굳어 있는 나를, 서로 떠들던 둘이 의아하게 바라봤다.
이미 세리아는 슬쩍 한 걸음 뒤로 물러선 뒤였다.
“아, 아냐. 빨리 가자.”
나는 티내지 않기 위해서라도 걸음을 서둘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