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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사 파티의 짐꾼-60화 (60/236)

〈 60화 〉 [용사] 잊지못할 밤

“오, 빠른데? 혹시 여기서 계속 일할 생각 없어?”

“아, 하하… 제안은 감사하지만….”

“일급도 두 배로 올려줄게, 어때?”

가게 주인 아저씨가 눈을 빛내며 내 어깨에 큼지막한 손을 올렸다.

나는 어색하게 웃을 수밖에 없었다.

칭찬을 듣고 싫어하는 사람은 없다지만, 나는 사실 좀 떨떠름한 상태였다.

그야 내가 한 게 아니니까….

주인 아저씨는 반쯤은 진담이었는지 입맛을 쩝쩝 다시며 다음 주문을 받으러 가게 안으로 돌아갔다.

그러자 대야에서 투명한 물의 정령이 슬며시 고개를 들었다.

“고마워.”

내 말을 알아듣지는 못하더라도 일단은 감사의 인사를 전했다.

지금 설거지를 하고 있는 건 사실 내가 아니라 이 녀석이다.

일하기 전에 미리 불러둔 유니의 정령.

여러모로 유니가 설거지를 하는 게 더 좋겠지만, 내가 워낙에 접객을 못해서 결국 바꿨다.

유니는 촌장 딸이라 그런지 사람들과 대화하고 그들의 기분을 맞춰주는데 능숙했다.

그저 시골 고아였던 나는 그런 일에 영 서툴다. 용사가 되기 전에는 정말 아무 짝에도 쓸모없는 꼬마였으니까.

“앗.”

잠시 딴생각을 하는 사이 정령이 다시 물로 흩어져버렸다.

큰일 났네. 다시 불러야하나?

직접 하면 절대 시간 내로 맞출 수 없다.

그렇지만 정령을 부르려면 유니의 정령술을 이용해야 한다.

나는 슬며시 일어나 가게 안을 살폈다.

유니는 양손에 술잔을 들며 바쁘게 테이블을 돌아다니고 있었다.

어떻게 저런 큰 잔을 한 손에 두 잔씩 들고 다닐 수 있지?

촌장의 집에서 연회가 자주 벌어져서 그런가, 그녀는 신참이라고는 믿기지 않을만큼 자연스러웠다.

그리고 술집 안에 있는 사람들도 남정네가 술을 나르는 것보다는 여자가 날라주는 걸 더 좋아하는 것 같았다.

설마 유니한테 이상한 짓을 하진 않겠지?

나는 매의 눈초리로 사람들을 감시했다.

“흐허허! 우리 딸 같아서 아주 귀엽구만 그래!”

“딸이 살아있었으면 딱 아씨 같았겠는데….”

“아이고, 또 궁상은. 마시기나 해 이 사람아!”

조용히 들어보니 아저씨들에게는 그냥 자기 딸처럼 귀엽게만 보는 듯 했다.

휴, 다행이다.

나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무슨 일이 있으면 유니가 당연히 말해주겠지만, 그래도 불안한 걸 어쩌겠나?

“에릭, 아직 멀었냐!”

“앗, 네! 금방 갈게요!”

큰일이네, 이걸 언제 다 하지?

역시 정령을 부를 수밖에 없는 것 같다.

나는 속으로 유니에게 사과하며 그녀의 손이 빌 때를 노렸다.

뭔가를 들고 있을 때 하면 깜짝 놀라 떨어뜨릴지도 모르니까.

“히잇! 에, 에릭…?”

미안, 유니!

나는 나중에 그녀에게 사과하리라 다짐하고는 재빨리 정령에게 설거지를 부탁했다.

사람과는 비교도 안될만큼 빠른 속도였다.

“휴우, 정말 깜짝 놀랐다구, 에릭.”

“미안… 시간이 없어서 그만.”

일당을 받고 우리는 숙소로 돌아가고 있었다.

단 둘이서 수도의 한복판을 걷고 있으니, 왠지 모르게 감상적인 기분이 들었다.

유니랑 수도를 걷는 날이 올 줄이야.

마을에 있었을 때는 상상도 못했는데.

유니는 촌장의 딸이기도 하고, 마을 내에서 제일 예쁜 처녀였기 때문에 우리 또래 남자애들 사이에서 인기가 높았다.

어릴 때야 아무 것도 모르고 같이 마을 여기저기를 쏘다니곤 했지만, 고아인 나와 촌장의 딸인 그녀 사이에는 높은 벽이 있었다.

유니와 촌장님도 그런 걸 신경 쓰지 않았지만, 마을 사람들은 아니었다.

“에릭?”

“아, 응, 미안. 뭐라고?”

“또 옛날일 생각하는 거야?”

어떻게 알았지?

내가 눈을 동그랗게 뜨자 유니가 슬며시 내 손을 잡았다.

“표정이 안 좋았는걸.”

“아… 미안.”

“항상 나쁜 일만 있던 건 아니었잖아. 즐거운 일, 기쁜 일. 그런 것만 생각하며 살아도 모자란데 우울한 생각만 해선 되겠어?”

그녀의 위로에 약간은 자조적인 웃음이 새어나왔다.

항상 그녀에게는 위로만 받는구나.

“또 스승님이 해주신 얘기야?”

“아앗, 어떻게 알았지?”

안 들킬 거라고 생각했는지 유니가 화들짝 놀랐다.

그야, 유니가 이렇게 그럴싸한 말을 할 리가 없잖아.

우리들은 서로를 바라보며 웃음꽃을 피웠다.

숙소로 돌아가는 길에 우리의 즐거운 추억들이 가득히 자리잡았다.

“앗, 에릭. 어서와.”

“용사님, 어서오세요.”

숙소에 들어가니 세리아와 아린이 우리를 반겨주었다.

“제렌 씨는?”

“아직 안 왔어.”

요즘 그의 귀가가 늦다. 듣기로는 늦게까지 일을 하고 있대나.

그렇게까지 돈이 부족한 걸까?

어디까지나 임시고용된 짐꾼인 만큼, 그는 우리 파티의 재정에 관여할 필요도 이유도 없었다.

그도 돈을 아낀다면서 우리와 같은 숙소를 쓰고 있긴 하지만 어디까지나 그가 일하고 버는 돈은 그의 몫이었다.

“두 분은 또 데이트인가요? 부러워요, 정말.”

“데, 데이트 아니야! 일하고 온 거야!”

유니는 손을 휘휘 저으며 빨개진 얼굴로 부정했다.

데이트… 사실 딱 그런 느낌이긴 했다.

나도 덩달아 부끄러워져 헛기침을 하며 테이블에 앉았다.

그러자 낯선 향기가 내 코를 간지럽혔다.

어라, 뭐지 이건?

지금껏 맡아본 적 없는 향이다.

내가 킁킁 거리며 냄새를 맡고 있자 세리아가 어색하게 눈을 돌렸다.

세리아? 이거 세리아의 몸에서 나는 향인가?

“…그냥 한 번 바꿔봤어. 이, 이상해?”

예전에는 진한 장미향이 났는데, 지금은 뭐랄까, 그녀에게서 은은한 향이 감돌고 있다.

지금까지의 세리아와는 조금 다른 이미지긴 한데, 그래도 어울렸다.

“좋은 거 같아.”

“그, 그래? 에릭도… 좋아하는구나.”

“응?”

“아, 아냐.”

세리아는 초조한 표정으로 계속 다리를 꼬았다가 풀기를 반복했다.

“알현까지 이틀 남았죠?”

“응, 그런데 옷은 이대로 입고 가도 괜찮을까?”

기능상으로는 아무 문제없지만, 아무래도 이 나라에서 가장 높은 왕을 만나는 건데 이런 후줄근한 복장으로도 괜찮을지 조금 걱정이 들었다.

“괜찮아요. 처음 알현 신청했을 때 별 말 없었다는 건, 이대로도 큰 문제없다는 뜻이니까요.”

아린의 말을 듣고 나서야 조금 안심이 되었다.

“저녁은 다들 드셨나요?”

“아니, 우린 아직.”

“아, 미안. 나는 먹고 왔어”

보아하니 세리아만 먼저 저녁을 먹고 온 것 같았다.

“그 교수님이랑?”

“응. 박학다식한 분이라 여러모로 도움을 많이 받고 있거든.”

유니의 물음에 세리아가 고개를 끄덕였다.

세리아는 마탑에서 각인마법에 대한 정보를 찾다가 루에 교수를 만났다고 한다.

정말 똑똑한 사람이라 요즘 세리아는 그녀를 쫓아다니며 많은 것을 배우고 있었다.

우리에게 새겨진 문양 말고도 개인적인 가르침을 받고 있는 것 같은데, 양 쪽 다 환영할만한 일이다.

“새로 알게 된 사실이 있나요?”

“…아마 추측이지만, 감정을 매개로 작동하고 있을 가능성이 크다고….”

“감정?”

내 착각인지 세리아의 얼굴이 살짝 빨간 것 같았다.

“그러니까… 각인마법의 접근법에서 살펴보면 이런 건 ‘주인’에게 ‘노예’의 힘이 흘러들어가는 구조니까….”

주인. 노예.

영 듣기 껄끄러운 말이다.

그렇지만 세리아의 말에 따르면 그냥 학술적인 용어에 지나지 않는다고 한다.

본래 음마들의 문양을 연구하며 나온 개념이라 어쩔 수 없는 것이라고.

그래도 좀 듣기 거북한 건 어쩔 수 없다.

그녀들이 노예라거나, 내가 주인인 게 아니다.

다만 우리의 문양이 주인인 음마가 노예들의 힘을 흡수하는 구조와 유사하기 때문에 그렇게 부르고 있는 것뿐.

알고는 있어도 여전히 살짝 얼굴이 찌푸려졌다.

“…둘의 연결을 이어주는 것이 정신적인 유대일 가능성이 높다고 하시더라고.”

“그럼 저희가 용사님과 더 밀접한 관계가 되면 힘이 커질 수도 있다는 거네요?”

“아마 그럴 거라고 하시던데….”

말을 마치고 머리카락을 꼬고 있는 세리아는 뭐랄까, 복잡해 보이는 얼굴이었다.

역시 그녀도 노예니 뭐니 이런 말을 하는 게 부끄럽겠지.

세리아를 배려해서 이 얘기는 그만두기로 했다.

“그래, 이 정도만 해도 충분한 것 같으니 오늘은 여기까지만 하자. 우린 저녁 먹을 건데 세리아는?”

“나는 먼저 올라가 있을게.”

세리아는 그렇게 말하며 먼저 일어났다.

저녁을 안 먹은 우리는 대신 숙소에서 맛없는 스프를 먹었고, 제렌 씨는 우리가 저녁을 다 먹고 올라갈 때 쯤 돌아왔다.

여성진은 3인실에서 자고, 나는 좁은 1인실.

제렌 씨는 우리랑은 별개로 돈을 지불해 1인실을 쓰고 있다.

그 좁은 1인실에서 나는 악몽 탓에 벌떡 일어났다.

“으으….”

기분 나쁜 꿈이었다.

무언가를 소중한 걸 빼앗긴 듯한 꿈이었는데 무슨 내용이었는지는 잘 기억나질 않는다.

등이 식은땀으로 축축한 걸 보니 상당히 안 좋은 꿈이었을 것이다.

다시 누울 기분도 아니고, 목도 말랐기 때문에 나는 잠시 1층에 내려가기로 했다.

물통이 거기 있었으니 그거라도 마시고 다시 자야지.

하도 낡아 밟을 때마다 끼익 비명을 지르는 계단을 조심조심 밟으면서 내려가자, 어둠 속에 사람형체를 한 무언가가 의자에 앉아있는 것이 보였다.

귀, 귀신인가?

옛날에 들었던 무서운 이야기들이 떠올라 나도 모르게 몸이 굳어버렸다.

“…흐읏, 에릭?”

그 귀신은 세리아와 똑같은 목소리로 나에게 말을 걸었다.

아니, 귀신이 아니라 그냥 세리아였다.

“휴우, 세리아였구나. 이 시간에 어쩐 일이야?”

“읏, 응… 그, 그냥 중간에 깨버려서… 에릭은?”

“나도 잠을 설치는 바람에 그냥 물이나 마시려고.”

나는 그렇게 말하며 다시 물통을 찾아 더듬거렸다.

어두워서 잘 보이지가 않으니 원.

“후읏… 우, 우리 둘밖에 없네.”

“응? 그렇지.”

이 시간까지 여관 주인이 깨어 있을 리가 없다.

이미 자기 방에서 자고 있겠지.

다른 투숙객들도 마찬가지다. 이런 오밤중에 깨는 인간은 거의 없다.

있더라도 이렇게 캄캄한 밤에 굳이 내려올 사람이 우리 말고 또 있을까?

그러고보니 문득 의아해졌다.

세리아는 왜 여기서 이러고 있지?

목소리가 좀 떨리는 것 같고.

“아, 그게… 다들 자는데 시끄… 응, 아니, 방해될까봐….”

“방해? 뭐가?”

“…아, 아무 것도 아니야.”

뭐지?

의아했지만 그녀가 말하고 싶지 않다면 굳이 캐묻고 싶진 않다.

나는 궁금증을 접어둔 채 다시 물통을 찾았다.

아, 이건가?

바가지의 손잡이가 잡히는 걸 보니 맞는 거 같다.

“…에릭, 혹시 지금 나 보여?”

“어? 아니?”

“아… 그, 그렇구나….”

뒤에 한 말은 목소리가 작아서 거의 들리지 않았다.

그녀가 있는 방향을 슬쩍 돌아봤지만, 워낙에 어두워서 잘 보이지도 않았다.

그냥 사람이 거기에 있다는 사실 말고는 아무 것도 구분할 수 없었다.

아무 말도 안했다면 정말 귀신인 줄 알고 도망갔겠지.

그녀가 조용하기에 나는 다시 고개를 돌려 바가지로 물통에서 물을 퍼 한 모금 마셨다.

미지근한 물이었지만 갈증을 해소하기엔 충분했다.

잠시 걷다보니 그 불쾌했던 기분도 금세 가라앉아 지금 다시 돌아가면 기분 좋게 잠들 수 있을 것 같았다.

다시 계단을 올라가려고 몸을 돌리던 나는, 난데없이 무언가가 껴안는 바람에 소리를 지를 뻔했다.

“우왁… 어, 어? 세리아?”

“에릭….”

그녀가 나를 안고 있었다.

뒤에서 껴안은 거라 보이지는 않았지만, 이 낯선 향은 그녀의 새로운 향이었다.

세리아는 마치 녹아내릴 듯한, 달콤한 목소리로 내 귓가에 속삭이고 있었다.

“저, 저기, 세리아… 그… 닿고 있는데….”

부비적부비적.

그녀가 나를 꼭 껴안은 채로 내 등을 문지르고 있었다.

하필이면 속옷도 안 입고 있는지 부드러운 감촉이 그대로 내 등에 전해졌다.

“세리아… 혹시 아파?”

“……하아.”

나는 자연스레 흥분해버렸지만, 그녀가 이러는 게 정상은 아닌 듯싶어 걱정이 들었다.

혹시 열이 난다거나 그래서 나한테 안기듯 쓰러진 거 아닐까?

“에릭… 이, 이런 걸 싫어하는 건 아는데… 미안해.”

그녀는 달콤한 신음소리를 내며 자신의 가슴으로 내 등을 계속 문질렀다.

나는 어떻게 반응해야할지 몰라 어색하게 두 손을 반쯤 든 채 멍청히 서있었다.

“하아… 나 좀 도와주면 안 될까…?”

“어, 어떻게?”

내 물음에 그녀는 울먹이는 목소리로, 내 목에 얼굴을 묻으며 대답했다.

“나, 나 좀 진정시켜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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