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용사 파티의 짐꾼-59화 (59/236)

〈 59화 〉 [마법사] 그녀의 향

나는 고개를 들고 주변을 둘러봤지만 이미 그녀는 자리를 뜬 뒤였다.

교수 같은 게 아니라 정말 교수, 아니면 하다못해 그 분야의 권위자였다.

절호의 기회를 놓치고 말았다.

아니지, 그녀는 매일 이 시간이면 도서관에 있다고 했다. 그럼 내일도 그녀를 만날 수 있겠지.

내일 다시 그녀를 만나 문양에 대해 직접 물어보면 많은 도움이 되리라.

…직접 보여줘야 하나?

아무리 말로 열심히 떠들어도 직접 보는 것만은 못하겠지.

그렇지만 이걸 보여주는 건 아무래도 좀 그렇다.

뭐랄까, 문양 자체가 좀 문란해보이니까.

사실 그것 때문에 요즘엔 전처럼 어깨가 드러나는 옷을 입지도 못한다.

이미 사정을 알고 있는 우리 파티원이라면 몰라도 모르는 남자들한테까지 보여주고 싶진 않았다.

게다가 이제는 내 문양 자체가 달라져버렸으니 에릭에게도 보여줄 수 없다.

혹시 눈치 채면 어쩌지 싶어 고민도 많이 했지만, 에릭은 이에 대해 언급을 하지 않았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해명할 필요가 없는 건 다행이지만, 마치 나에 대해 별 관심이 없는 것 같아 울적해지기도 했다.

나는 주변에 아무도 없는 것을 확인하고 옷을 슬쩍 들췄다.

왼쪽 쇄골에 새겨진 빨간 장미. 아니, 검붉은 장미라고 해야 할까?

이전과는 달리 그 끝이 까맣게 물들어 있었다.

“하아….”

나만 이런 거겠지?

최근에는 같이 씻은 적이 없어 문양을 제대로 확인하지는 못했지만, 얼핏 보니 아린과 유니의 문양은 그대로인 것 같았다.

왜 나만 이렇게 변한 거야….

처음에는 혹시 몰라 열심히 문질러봤지만 아무 것도 변하지 않았다.

그냥 우연일 것이라고, 그렇게 스스로를 위로했지만 현실은 잔혹했다.

내가 그와 몸을 섞을 때마다, 조금씩 장미는 어둠에 물들고 있었다.

“으읏….”

인정할 수 없다.

아직 아무 것도 모르는데.

색이 변한다는 것이 무슨 의미인지도 모르면서, 나는 부정부터 하고 있었다.

…절대 그런 의미는 아닐 것이다.

꼼지락.

나는 무심코 허벅지를 비비고선 흠칫 놀랐다.

대체, 대체 무슨 생각을 한 거야!

도서관에서 추잡한 생각이나 하고 있다니, 부끄러워 죽을 것 같았다.

그러나 그보다 부끄러운 건 내가 했던 상상의 내용이었다.

…혼자 하는 것과는 비교도 안 됐지.

아니, 그건 전부 문양 때문이지 결코 그 남자가 잘해서가 아니다.

분명, 분명 에릭은… 잘 할 것이다.

상대를 배려하지도 않는 그런 난폭한 남자보단 에릭이 더 상냥하고, 부드럽게 안아주겠지.

그 남자는 여자를 너무 모른다.

그렇게 난폭한 남자를 대체 누가 좋아한다고….

“읏, 흐읏….”

이건… 이건 그냥 내가 쌓여서 하는 것뿐이다.

그 남자랑은 아무 상관없다.

그래. 그 날 이후로 그 남자가 나한테 손을 안 대니까… 아니, 그냥 혼자 하다 보니 만족할 수가… 아니, 아니.

아무튼 그 남자랑은 상관없다.

“하아… 하아….”

나는 허벅지를 오므리며 슬쩍 손가락을 가랑이 사이로 가져갔다. 자연스레 하반신에 온 몸의 신경이 쏠린다.

주변에는 아무도 없고. 잠깐 만지는 정도라면 아무도 눈치 못 챌 것이다.

그래, 잠깐이면 된다. 누군가 올라오기 전까지만.

그 때까지만 잠시…….

“흐으읏….”

그 뒤로도 한참동안 도서관 2층에는 아무도 올라오지 않았다.

아무래도 내 몸에 이상이 생긴 것 같다.

예전에도 자위를 자주 하긴 했지만, 이렇게 밖에서 무절제하게 한 적은 없었는데.

지금의 나는 그야말로 발정 난 원숭이 같았다.

그 누구보다 똑똑하고 모범이 되어야 할 마법사가 그런 추잡한 짓이나 하고 있다니.

이래서야 당당하게 마법사라고 이름을 댈 수야 있겠는가?

무엇보다 가장 답답한 점은 밖에서까지 이런 변태 같은 짓을 했는데, 여전히 만족할 수가 없다는 점이었다.

대체 왜? 무엇이 부족해서?

예전에는 이렇지 않았는데, 아무리 생각해도 이건 전부 문양 탓이다.

그리고 그 문양은… 됐다, 생각하지 말자.

나는 살짝 붉은 얼굴로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걸음을 재촉했다.

으으… 냄새 난다거나 젖은 게 들키지는 않겠지?

그랬다간 정말 남은 기간 내내 방안에만 틀어박혀있을 거다.

혹시 누가 날 쳐다보진 않나 불안하게 시선을 좌우로 굴리던 나는 어느 화려한 건물에 순간적으로 시선을 빼앗겼다.

온통 분홍색으로 칠한 벽면과 유리창을 통해 비치는 형형색색의 액체가 담긴 통.

향수 가게였다.

이렇게나 외관에 공을 들인 걸 보니 제법 돈이 많은 가게 같았다.

판매하는 향수들도 제법 고급이리라.

생각해보니 슬슬 향수도 다 떨어져가긴 했지….

나는 주변에 아무도 없는 걸 다시 한 번 확인하고 손에 혹시 냄새가 배지는 않았나 킁킁거리며 확인했다.

이정도면 괜찮은 것 같은데… 그래도 혹시 모르잖아?

나는 무심코 주머니에 손을 넣었다가 허전한 감촉에 정신을 차렸다.

…이런 일에 돈을 쓸 순 없지. 가뜩이나 돈도 부족한데.

그래도 미련을 완전히 버리지는 못해 좀처럼 떨어지지 않는 발길을 억지로 떼면서 나는 허름한 여관으로 돌아왔다.

“아무도 없네?”

“전 있는뎁쇼, 아가씨.”

“그런 뜻이 아니잖아.”

나는 실없는 농담을 던지는 그를 찌릿 째려보고는 주변을 둘러보았다.

꾸벅꾸벅 조는 여관 주인을 제외하고는 그와 나밖에 없었다.

내가 가장 먼저 돌아온 건가. 뭐, 다들 금방 오겠지.

그와 반대편 의자에 앉아 팔짱을 낀 채 잠시 기다렸다.

슬쩍 그를 바라봤는데, 그는 내 쪽으로는 시선 한 번 던지지 않았다.

…진짜 성욕을 잃어버린 거야?

예전 같았으면 벌써 추잡한 농담 같은 걸 던지며 엉덩이나 가슴을 쓰다듬고 있었을 텐데.

흥, 변태에게 딱 알맞은 처벌이지. 오히려 잘 됐다.

나는 코웃음을 치며 고개를 휙 돌렸다. 그렇지만 겨우 그 정도로 내 고개가 자꾸 돌아가는 것을 막을 수는 없었다.

“…오늘은, 그, 돈을 벌고 온 거야?”

“그렇죠. 마침 저쪽에서 집을 새로 짓는다길래 가서 좀 도와주고 일당을 챙겼습니다.”

“그렇… 구나.”

“여비에 보태세요.”

그렇게 말하며 그는 망설임 없이 돈이 든 자루를 테이블 위에 턱하니 올려놓았다.

“아, 아니, 너는 우리 파티원도 아닌데 그럴 필요 없어.”

“무슨 섭섭한 말씀을. 같이 여행하는 처지 아닙니까. 정 안 내키시면 그냥 개인 비상금으로라도 쓰십쇼.”

“아니, 그래도, 그….”

나는 한사코 거절했지만 그는 고집을 부리며 내 주머니에 자기 돈주머니를 쑤셔넣었다.

잠깐 그의 손이 내 몸에 닿았을 때 나는 긴장했지만, 그는 이를 의식조차 하지 않는지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잠깐의 실랑이가 끝나고 나와 그는 서로 입을 다물었다.

뭐, 이렇게 어색한 분위기는 별로 좋아하지 않으니까 말이라도 걸어볼까.

이 남자와 대화하는 건 결코 내가 바라는 것이 아니지만, 어디까지나 내가 이 분위기를 견딜 수 없기 때문에 이러는 것뿐이다.

“…뭐라 안 하네? 반말 써도.”

“음? 아, 그거 말입니까. 뭐, 아가씨 기분만 상하는데 굳이 강요하고 싶은 생각은 없습니다. 하하, 예전의 저는 좀 추잡한 놈이었죠.”

말을 거니 괜히 두 배로 어색해졌다.

뭐야, 이 사람은?

정말 그 남자 맞아?

사실 도플갱어가 몸을 바꿔치기한 게 아닐까?

내가 그를 찌릿 노려보자 그는 정말 순박한 척 웃었다.

남들은 몰라도 나는 안 속는다.

이 남자가 어떤 남잔지 아니까.

“…거짓말.”

“의심하는 것도 당연하죠. 제가 나쁜 짓을 한 건 사실이니까요.”

그는 어깨를 으쓱했다.

거짓말. 분명 거짓말이다.

…그럼 더 이상 못 속일 상황을 만들면 되잖아?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드륵.

나는 의자에서 일어나 그의 옆자리로 이동했다.

“아가씨?”

“…자꾸 아닌 척 할 거야?”

그의 얼굴 가까이 다가갔다.

우리 둘 사이의 거리가 점점 줄어들고, 마침내는 손바닥만 한 거리까지 가까워졌다.

누가 보면 유혹하는 것처럼 보일지도 모르지만, 이건 그의 거짓말을 간파하기 위한 작전.

결코 유혹이 아니다.

“으음….”

그는 조금 난감한 듯 고개를 돌려버렸다.

“…난 알고 있어. 전부 거짓말이잖아.”

“저기, 이렇게 다가오시면 다들 오해할 겁니다.”

“아무도 없잖아.”

누가 들으면 정말 오해할지도 모르는 대사.

그렇지만 아무도 없으니 괜찮다. 여관 주인은 아직 세상모르고 자고 있으니.

끈질기다. 아직도 인정을 안 하는 건가.

나는 조금 더 그에게 다가갔다.

내 얼굴을 조금 더 아래로. 그를 향해.

붉은 머리칼이 그의 얼굴에 닿을 듯 말 듯 아슬아슬한 거리를 유지했다.

“엣취!”

그러자 그가 기침을 하면서 나를 툭 밀쳤다.

어?

“죄, 죄송합니다, 아가씨. 그… 머리카락 때문에 간지러워서 그만.”

“…뭐?”

내가 얼빠진 얼굴을 하고 있자 그는 정말 미안하다는 듯 나에게 연신 사과했다.

내 약점을 붙잡고, 강제로 이런저런 행위를 강요하던 그의 모습은 온데간데없었다.

…누구야, 너.

진짜 그는 어디 있어?

돌려줘.

“하하… 그나저나 예전부터 생각한 거지만, 아가씨에게는 그런 강렬한 향보다는 조금 은은한 것이 어울릴 것 같습니다.”

“…뭐, 뭘 안다고 참견이야?”

왠지 자존심이 상해 날 선 대답이 튀어나가고 말았다.

마치 내가 유혹했는데 거절당한 것 같은 느낌.

굉장히 불쾌했다.

“이미 화려하시니까, 향수는 반대로 좀 은은한 걸 쓰는 게 더 느낌이 살지 않을까 싶습니다.”

“흥, 아무 것도 모르네.”

나는 고개를 홱 돌려버렸다.

“…네 취향이 그냥 그런 거 아니야?”

“하하, 그럴지도요.”

나는 불만스럽게 입술을 깨물며 그를 바라봤다.

내가 이 남자보다는 향수에 대해 더 잘 안다.

들을 가치도 없는 조언. 무시하자.

그보다는 다음 작전이다.

내가 가까이 다가가도 꿈쩍 않는 걸 보면. 조금 더… 미끼가 필요할 것 같다.

미끼. 그래, 그를 속이기 위해서니까.

나는 여관 주인을 다시 한 번 바라봤다.

여전히 자고 있다. 좋아.

“후우….”

나는 옷단을 슬며시 쥐며 살짝 들어올렸다.

덜컹!

“우으… 나 술 냄새 배이지 않았지?”

“괜찮아. 정말 아무 냄새 안 난다니까?”

문을 열고 에릭과 유니가 들어왔다.

달아올랐던 머리가 둘을 보니 빠르게 식었다.

내, 내가 무슨 짓을….

“오, 어서 오십시오.”

“응, 제렌 씨도 안녕! 세리아도 먼저 와있었구나!”

“아, 응….”

나는 어색함이 티나지 않게 살며시 자리에 앉았다.

…내가 무슨 짓을 한 거지?

뭐, 미끼? 거짓말?

그냥… 그냥 유혹한 거잖아!

부끄러워서 지금 당장이라도 강물 속에 머리를 처박고 싶은 심정이었다.

미쳤어, 미쳤어, 미쳤어.

“두 분께선 주점에서 일하고 오신 겁니까?”

“엇, 어떻게 아셨습니까? 맞아요.”

“원래는 내가 설거지 담당이고 에릭이 나르는 역할이었는데, 도중에 바꿨어요. 에릭이 잘 못하더라구요, 히히.”

세 사람이 자연스럽게 잡담을 하는 동안 나는 한 마디도 끼어들지 못했다.

자괴감.

엄청난 자괴감 때문에 미쳐버릴 것 같았다.

그러면서도 또 시선은 자연스레 그를 향한다.

…진한 향보다는 은은한 향이라.

에릭도 분명 그 쪽을 더 좋아할 것이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