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8화 〉 [마법사] 그녀의 향
하늘 무서운 줄 모르고 높이 솟아오른 건물.
주변의 그 어떤 곳과 비교해도 이 건물의 높이를 따라올 곳이 없다.
심지어 황궁조차도 여기보다 높지는 않다.
세상에서 가장 높은 건축물을 꼽으라면 모두가 주저 없이 이름을 댈 이곳은, 루드니엘 마탑이었다.
에릭 이전의 용사와 함께 마왕을 물리쳤다고 전해지는 전설 속의 마법사 루드니엘의 이름을 딴 이 마탑은 그 높이만큼이나 끝없는 지식을 자랑하는 마법사들의 고향이었다.
여전하구나, 이곳도.
여기서 공부했던 건 일 년 남짓밖에 안 되는 짧은 시간이었지만, 그 일 년은 정말 알차고도 유익한 시간이었다.
언젠가 우리가 마왕을 처치하고, 만약, 정말 만약에 에릭이 나를 선택하지 않는다면… 이곳에 뼈를 묻을 생각도 하고 있다.
루드니엘 마탑은 그럴 가치가 있는 곳이었다.
“마법사인가?”
피곤한 표정의 문지기가 얼굴을 문지르며 수정구를 가리켰다.
마법사임을 증명하고 들어가란 뜻.
나는 아무 망설임 없이 수정구에 손을 올렸다.
“으음?”
수정구가 붉게 물드는 것을 본 문지기는 의아하다는 듯 나와 수정구를 번갈아 바라보았다.
“들어갈게요.”
귀찮은 일에 엮이고 싶진 않아 곧장 안으로 들어섰다.
그가 내 마력파장을 보고 당황한 이유, 보나마나다.
어느 유명인과 닮은 파장이라 놀랐겠지.
당연히 그 유명인이란 3류 마탑에서 이곳으로 전학 오고선 1년 만에 여신의 선택을 받아 용사와 함께 모험을 나서게 된 어느 천재미소녀 마법사를 말한다.
누구냐고?
굳이 대답할 필요는 없을 것 같다.
나는 간만에 차오른 자존감을 안고 당당한 걸음걸이로 도서관에 향했다.
그리운 마탑 안으로 들어서니 여기저기서 시선들이 나에게 꽂히는 것이 느껴졌다.
마탑을 나선지 그리 오래 지나지 않았으니 아직 나를 아는 사람이 남아 있을 터, 조사에 방해를 받고 싶지는 않으니 그들을 모조리 무시했다.
뭐, 날 알아보고 말을 거는 사람이 있다면 대답정도는 돌려줘도 괜찮겠지.
나는 새어나오는 미소를 애써 감췄다.
그러나 그 미소는 도서관에 도착할 쯤엔 굳이 감출 필요도 없이 이미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
왜 아무도 아는 체를 안 하지?
설마 날 전부 잊었나?
주변을 슬쩍 둘러보니 아는 사람이 없었다.
그 짧은 시간 내에 인원이 교체됐을 리는 없고, 그냥 우연일까.
하긴 동기들은 대부분 아직 졸업 전일 테니 지금쯤 한창 수업중일 것이다.
그렇지. 어차피 나를 아는 사람이라고 해봐야 교수님과 동기들뿐.
이 시간에 나를 아는 사람이 없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나는 살짝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도서관의 2층 계단으로 향했다.
어차피 1층에는 별로 중요한 책이 없다.
내가 찾아야 할 건 문양, 즉 각인마법에 관련된 책.
이런 전문지식은 2층에나 가야 찾을 수 있다.
아직 한산한 시간이라 그런지 2층에는 아무도 없었다.
사람이 괜히 많으면 어색하니 오히려 잘 됐다. 시간도 자리도 남아도니 느긋하게 둘러봐도 괜찮겠지.
나는 서가에 적힌 분류를 살피며 조금씩 안쪽으로 들어갔다.
정보마법, 생활마법, 불마법… 아, 흥미로운 책들이 많이 보인다. 얼음마법, 독마법, 그리고… 몬스터 생태학. 찾았다.
사실 각인마법이라고 하면 그럴싸해 보이지만, 실상은 독립된 분과로도 존재하지 않는 비인기 학문이다.
이렇게 인기가 저조한 이유는 아마 각인마법이 여태껏 이룬 성과가 거의 없어서겠지.
개념 자체는 상당히 오래된 것으로 알고 있다. 몬스터 생태학과 마법역사학에서는 이것이 음마의 원시마법이었을 것이라고 추측한다.
지금도 음마들에게는 그 흔적이 남아있지만 거기에는 어떠한 마법적인 효과도 담겨있지 않다. 그저 이성을 유혹하는 데에만 쓰일 뿐.
적어도 지금까지의 연구 동향은 그랬다.
그래서 사실 나도 큰 기대는 품고 있지 않지만, 문양과 관련해 가장 먼저 떠오른 건 이 쪽이므로 미약한 희망을 걸고 찾아온 것이다.
냉정하게 생각하면 그렇게 가능성이 높은 가설은 아니다.
현재 우리는 이것을 여신님이 내려준 문양으로 추측하고 있는데, 그 음탕한 마물들하고는 전혀 다른 개념일 것이다.
실제로 음마들의 무의미한 문양과는 달리 우리의 문양은 확실한 힘을 가지고 있지 않은가. 그들이 그 사실을 몸소 입증했다.
에릭, 그리고… 그 남자가.
나도 모르게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신경쓰지 말자.
지금은 잊자.
사실 문양에 대한 정보가 가장 절박한 건 나다.
다른 그 누구보다도 내가 제일 궁금하다.
그 원리를 반드시 파헤쳐야했다.
그렇지 않으면 내 가설을 그대로 믿어버릴 것 같으니까.
내가 그 더러운 남자에게… 아니, 절대 그럴 일 없다.
분명 다른 이유가 존재할 것이다.
나는 자꾸만 새어나오는 마음을 억누르며 서가 안으로 들어가 책 제목을 하나씩 살폈다.
…그런데 책이 너무 많아서 찾기가 힘드네.
절로 한숨을 새어나온다.
“뭘 찾으시나요?”
갑자기 뒤에서 들린 목소리에 순간 너무 놀라 비명을 지를 뻔했다.
나, 나밖에 없는 거 아니었어?
뒤를 돌아보니 청록색 긴 머리카락의 이지적으로 보이는 안경 쓴 여성이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예쁜 사람이었다.
같은 여자가 봐도 정말 완벽하다 싶은 느낌이 들 만큼 아름다운 모습.
나는 그녀와 눈을 마주친 순간 잠시 할 말을 잃고 말았다.
“아…. 그, 그게, 책을 좀 찾고 있거든요….”
으으, 나 바본가?
당연히 도서관에 책을 찾으러오지 그럼 뭘 찾으러 오겠어?
그녀의 압도적인 외모에 기죽은 나는 무심코 멍청한 대답을 해버렸다. 그러나 그녀에게는 제법 마음에 드는 대답이었는지, 그녀가 쿡쿡 웃었다.
“그렇군요, 그건 제가 미처 몰랐네요. 혹시 실례가 아니라면 무슨 책을 찾으시는지 여쭈어도 될까요? 자랑은 아니지만 여기 책들의 이름 정도는 거의 다 외우고 있답니다.”
“우와….”
거짓말이겠지? 이 많은 책을?
혹시 사서일까.
나는 의심을 풀지 않은 채 찾는 주제를 알려주었다.
“와, 각인마법? 혹시 그 쪽 전공자세요?”
“아, 아뇨…. 그냥 개인적인 흥미로.”
난 어디까지나 불마법 전공이다.
뭐 다른 마법도 교양 수준으로는 익히고 있지만, 적어도 이런 인기 없는 분야까지 통달할 수준은 아니었다.
“마침 운이 좋으시네요. 전 루에라고 해요.”
“네? 아, 세리아에요.”
갑작스런 소개에 얼떨떨했지만, 말하는 것을 보니 관련 전공자인 것 같았다.
루에는 내 손을 잡고 붕붕 흔들며 생긋 웃었다.
“각인마법은 아무래도 음마들의 각인 연구가 대부분이죠. 책은 몇 권 있지만, 가장 좋은 건… 여기 있는 『음마의 생태』하고, 아, 사실 각인 그 자체에 대한 책도 있답니다. 후후, 조금 부끄럽지만 『도형과 마력적합성』이라는 책이에요.”
그녀는 그렇게 몇몇 권을 재빠른 솜씨로 골라와 내 앞에 차곡차곡 쌓아주었다.
책 이름을 거의 외우고 있다는 건 거짓이 아닌 것 같았다.
아니, 이렇게 추천까지 막힘없이 나오는 걸 보면 책 이름만이 아니라 내용까지도 꿰고 있다는 뜻 아닌가?
역시 루드니엘 마탑. 사서부터가 수준이 달랐다.
“이 정도면 최근 연구동향까지는 무리 없이 따라오실 수 있을 거예요.”
“가, 감사합니다, 이렇게까지 도와주실 줄은….”
“이런 비인기 학문에 흥미를 가져주시니 제가 더 감사하죠.”
뜻밖의 행운을 만났다. 이대로라면 예상보다 일이 빠르게 진척될 것 같다.
“각인마법도 생각보다 종류가 많은 거 아시나요? 사실 마법으로서의 의미는 거의 없다시피 하지만, 북부 야만인과 서부 엘프의 각인을 보면 정말 그 종류가 상상을 초월할 만큼 많거든요. 사실 독립분과로 나뉘어도 손색이 없다고 생각하는데…. 혹시 따로 찾으시는 게 있나요?”
“아, 아하하… 그렇군요. 전 그냥, 음, 식물… 문양이라던가 그런….”
“식물?”
루에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역시 이쪽에 대한 연구는 없는 걸까? 워낙 연구가 덜 된 분야다보니 그렇다 하더라도 이상할 건 없었다.
“흐응… 그렇군요.”
그녀의 입가에 미소가 걸렸다.
아까와는 조금 다른 느낌의 웃음이었다.
“엘프들이 간혹 그런 문양을 자신의 몸에 그려넣는다고 하죠. 보통은 나뭇잎 무늬지만, 개중에는 간혹 나뭇가지나… 꽃 같은 걸 그리는 경우도 있다고 하더군요.”
“꽃….”
“후후, 더 자세하게 알고 싶으시면 엘프학 서적을 찾아보는 게 어떨까요?”
루에는 그렇게 말하고선 벽에 걸린 시계를 바라보았다.
마법사들의 독자적인 기준으로 만들어진 이 시계는, 마탑 곳곳에 설치된 가장 표준적인 형태의 시계였다. 마법사가 아니고서는 제대로 읽지도 못한다.
“전 이만 가봐야겠네요. 매일 이 시간에는 도서관에 있으니, 혹시 더 궁금한 게 있으면 찾아와요. 기다리고 있을게요.”
그녀는 그렇게 말하며 안경을 고쳐 쓰고는 나를 뚫어져라 쳐다보다 밖으로 나갔다.
예쁘고 똑똑한데다가 말도 조리 있게 잘 한다.
저 정도면 교수직을 맡아도 모자라지 않을 것 같은데.
배울 땐 잘 몰랐는데, 역시 이곳은 정말 굉장한 곳이었구나.
괜히 대륙 최고의 마탑 소리를 듣는 게 아니었다.
정보량도, 이곳에 있는 사람들의 지식수준도, 다른 마탑과는 비교 자체가 불가능했다.
그녀 덕분에 자료 찾을 시간이 많이 줄었으니, 다 조사하고도 시간이 남으면 잠깐 불 마법 서적도 찾아보자.
어쩌면 마법개량의 실마리를 얻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
나는 즐거운 마음으로 가장 위에 놓인 책을 집어 들었다.
『도형과 마력적합성』 - 루에 아스트라.
익숙한 이름인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