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7화 〉 [용사] 수도
“아, 용사님, 유니….”
불쾌함을 온 몸으로 뿜어내던 아린이 눈을 뜨고 우리를 바라보자, 그 이상한 기운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졌다.
“미, 미안, 에헤헤….”
“후우… 아니에요. 다 제가 부족한 탓이죠.”
유니가 어색하게 웃으며 사과하자 아린은 살짝 웃으며 그녀의 사과를 받아주었다.
화… 난 건가?
아까 전의 모습은 누가 봐도 화를 내는 모습이었는데, 지금 보니 또 아닌 것 같아 긴가민가하다.
“용사님.”
아린은 생긋 웃으며 나에게 다가왔다.
“이젠 걱정하실 필요 없어요.”
***
그렇게 우리는 왔던 만큼의 시간을 한 번 더 달려 수도에 도착했다.
정말 평온한 여행이라 간만에 마음 놓고 쉴 수 있었다.
별로 얻은 것은 없지만, 이런 것도 가끔씩은 나쁘지 않은 것 같다.
나머지 시간도 제렌 씨와 이런저런 얘기를 하면서 보냈는데, 그 날을 기점으로 갑자기 음담패설의 빈도가 확 줄었다.
혹시 다른 사람으로 바뀐 게 아닐까 순간 의심했을 만큼 갑작스러운 변화였다.
그러나 그 점을 제외하고는 여전했으므로, 나는 그가 그저 마음을 고쳐먹었나 하고만 생각했다.
덕분에 수도에 도착할 즈음이 되어서는 그에 대한 의심이 상당부분 걷힌 상태였다.
적어도 여기까지 오면서 그는 수상한 행동 하나 보이지 않았다.
세리아에게 지나치게 접근한다거나, 나와 그녀 사이의 거리를 은근슬쩍 벌려놓는다거나 그런 짓을 하지도 않았다.
내 각오가 허탈해질 만큼 그는 성실했다.
역시 그냥… 내 오해였나 보다.
내 머릿속에서 한창 그에 대한 재평가가 이루어지고 있을 때, 우리는 마침내 수도에 도착했다.
정말 입이 떡 벌어질 만큼 크고 웅장한 도시.
그것이 이 나라의 수도였다.
처음 왔을 때는 용사가 되었다는 사실에 정신이 없어 제대로 구경도 못했지만, 정말 굉장한 곳이다.
그리고 우리는… 그 굉장한 도시의 제일 허름한 여관에 옹기종기 모여 있었다.
“…그렇게 심각해?”
“응…. 사실 여기에 묵어도 3일 정도가 최대야.”
“아니 대체 어쩌다….”
돈이 없었다.
우리가 수도까지 오는데 걸린 시간은 약 2주 정도. 당연히 그 동안 몬스터는 한 마리도 보지 못했다.
그 말은 곧 그 기간 동안 수입도 전무했다는 말이다.
들어오는 돈은 없는데, 나가는 돈은 많다. 당장 2주 동안의 식비를 마련하는 데만 상당한 돈이 들어갔다. 그것만으로도 간당간당한데 제렌 씨 일당도 챙겨줘야 한다.
“저는 괜찮습니다. 용사님과 함께할 수 있다는 것 자체만으로도 저에겐 가장 큰 보상이 되니까요.”
그는 넉살 좋게 웃으며 그렇게 말했지만, 아무리 그래도 돈을 떼어먹는 건 좀 그렇지 않은가.
그가 이 말을 할 때 왠지 아린과 세리아가 굉장히 이상한 것을 보는 표정으로 바라보고 있었는데, 왜 그런지는 잘 모르겠다.
“역시 마차 말고 돈으로 받을 걸 그랬나 봐요.”
“우으… 미안해, 내가 괜히 마차 타자고 그래서….”
사실 영주에게서 금전적인 보상을 받았으면 다 해결되는 문제였다.
그런데 우리가 그걸 마차로 대신 받아서 문제였을 뿐. 이런 고급마차가 공짜로 굴러갈 리가 있겠는가?
어쩌면 돈을 주기 싫은 영주의 계략이 아니었을까.
이제 와서 그 선택을 후회한들 이미 늦었다.
지금쯤 영주의 별장에서 정비를 받고 있을 그 마차는 이미 우리 손을 떠난 지 오래였다.
그동안 돈 걱정을 한 적도 없었고, 이럴 기회는 별로 없을 것 같아서 나도 마차를 빌리자는 의견에 동의했던 건데, 설마 그 대가가 이렇게 뼈아플 줄이야….
“아니야. 결국 결정한 건 나니까 너무 자책하지 마. 파티장이면서도 상황의 심각성을 눈치 못 챈 내 잘못이야.”
“…그렇게 따지면 내가 금전관리를 못한 탓이니까, 내 실수야. 미안해.”
세리아는 그렇게 말하며 미안한 듯 고개를 숙였다.
세리아가 이런 중대한 사안을 발견하고도 몰래 숨겼을 리는 없다.
그렇다면 정말 우리 파티의 재정이 이렇게 파탄 날 때까지 그 사실을 몰랐단 말인가?
어째 요즘 세리아가 자꾸 딴 생각을 하며 집중을 못하는 것 같긴 했지만, 정말 이대로라면 무슨 조치가 필요할 듯싶었다.
“…뭐, 지나간 일은 어쩔 수 없지.”
그렇지만 나는 그녀를 대놓고 책망하지는 않았다. 그런 일은 정말이지 나와 맞지 않는다.
다른 사람에게 책임을 묻거나, 벌을 주는 그런 일은 아무리 노력해도 거부감이 든다.
좋은 파티장이 되기 위해서는 꼭 필요한 일이라고 다들 그랬는데, 아무래도 나는 평생 좋은 파티장이 못 될 운명인가보다.
“그럼 어디든 그냥 바로 떠나면 안 돼? 아무 몬스터나 사냥해서 돈을 모으면 되잖아.”
“수도 근처에 몬스터가 있을 리가 없죠. 그리고 잊었나요? 저희는 폐하도 알현해야 해요.”
“후우….”
그래, 사실 이게 제일 큰 문제다.
알현.
수도까지 올라왔으니 우리에게는 한 번 쯤 그 결과를 보고할 의무가 있었다.
딱히 성과가 없진 않다. 누가 뭐래도 우린 사천왕 중 하나를 잡았으니까.
이름이… 헨리였나? 잘 기억은 안 나지만, 정말 강한 상대긴 했다. 적절한 순간에 이 힘이 발휘되지 않으면 꼼짝없이 전멸했겠지.
“…….”
나는 슬쩍 내 팔목을 바라보았다.
지금은 헐렁한 옷을 입고 있어 팔뚝에 새겨진 문신들이 선명하게 보였다.
아름다운 세 송이 장미. 그 중 한 송이만 눈에 띄게 작다.
이쯤 되면 의심의 여지도 없다. 꽃은 점점 작아지고 있었다.
대체 왜? 사용에 제한이 있는 것일까?
“용사님?”
“아, 응, 미안. 뭐라고 했지?”
아린이 의아한 듯 나를 바라보며 물었다.
이런, 잠시 정신을 놓고 있었나 보다.
“알현까지 한 일주일 정도 남았는데, 어떻게 할까요?”
“일주일… 으음….”
알현을 신청하고 곧바로 왕을 만날 수 있으면 좋겠지만, 왜 그런지는 잘 몰라도 그를 만나려면 굉장히 오랜 시간을 기다려야했다.
세리아가 말해주길 이것도 내가 용사라 많이 줄어든 것이라 한다.
왕은 원래 이렇게 바쁜 존재인가?
덕분에 우리도 꼼짝없이 발이 묶였다. 수도에 왔는데 용사가 왕을 알현하지도 않고 나갈 수는 없는 노릇 아닌가.
“아무래도… 돈을 벌어야 할 거 같아.”
세리아는 머뭇거리며 자기 생각을 밝혔다.
“일을 하자는 거야?”
“그렇죠. 도시에서는 대신 일을 해주고 매일 돈을 받는 제도가 있으니까요.”
유니의 뚱한 물음에 아린이 대신 대답했다.
나도 그런 제도가 존재한다는 건 들어봤지만, 실제로 해본 적은 없다.
그야 우리가 살던 작은 마을에서는 그럴 일이 없었으니까.
나랑 유니에게는 낯설기 그지없는 제도였다.
“그래서 생각해봤는데, 에릭, 유니. 수도에 딱히 연줄 없지?”
“어? 응….”
있을 리가 있나?
수도에 연줄은커녕 아는 사람 그 자체가 없다.
“나랑 아린은 마탑이랑 교회 지부가 있으니까 거기서 자료를 좀 찾아볼게. 너희는 여비를 마련해줘.”
“또 나뉘는 거야?”
유니가 마음에 안 든다는 듯 볼멘소리를 냈다.
어쩐지 자꾸 도시에 올 때마다 인원이 쪼개지는 것 같다.
“그건… 그렇지만, 지금 할 일이 많아서 어쩔 수 없어. 사천왕에 대한 정보도 찾아봐야 하고, 이 문양이 무엇인지도 알아봐야 해. 게다가 여비도 부족한 상황이잖아.”
세리아는 마치 준비된 대사를 읊듯 빠르게 자기 할 말을 마치고는 입을 꾹 다물었다.
어째선지 그녀의 시선이 불안하게 흔들렸다.
“우으… 그래도….”
“저도 나뉘는 건… 아니, 이제는 괜찮겠지만….”
아린과 유니는 그다지 내키지 않는 듯 했다.
솔직히 나도 그렇다.
“그냥 다 같이….”
“그것도 좋은 방법이지만, 제 생각에는 함께 다니는 게 더 좋을 것 같습니다.”
의외의 의견이었다.
유니를 제외한 우리 모두는 눈을 동그랗게 뜬 채 제렌 씨를 돌아봤다.
“어, 왜들 그렇게 보십니까? 수도 치안이 좋다고는 해도, 어디까지나 중앙 쪽에만 해당되는 얘기거든요. 안전을 생각하면 다 같이 다니는 편이 좋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안전 문제를 따질 거면 저번에 하는 편이 더 낫지 않았을까?”
왠지 불만인 듯한 세리아가 팔짱을 꼈다.
“그건 그렇네요. 그 땐 이 생각이 안 났는데… 왜 그랬지?”
그는 딱히 할 말이 없다는 듯 머리만 긁적였다.
내가 하려던 말을 그가 대신 해버린 바람에 나는 괜히 무안해졌다.
“…그래서 싫어?”
세리아는 그를 바라보며 물었다.
왠지 화를 내는 듯한, 아니, 슬퍼하는 듯한 태도에 가까웠다.
“어, 음… 그냥 제 생각이었습니다.”
“흠, 흠. 세리아.”
아린이 헛기침을 하며 그녀를 부르자 세리아가 흠칫 놀랐다.
“뭐, 그리 내키지는 않지만 저도 어느 정도는 세리아 의견에 동의해요. 옛날 자료를 찾아보려면 교회 서고에 들어가야 하는데, 여기선 저밖에 못 들어가니까요. 마탑도 마찬가지 아닌가요?”
“응…. 우리도 마법사가 아니면 못 들어가.”
요컨대 마탑과 교회에서 정보를 찾아볼 수 있는 건 본인들밖에 없다는 소리였다.
사천왕에 대한 정보야 그런 케케묵은 장서들을 뒤지는 것보다 도시 곳곳을 돌아다니며 모으는 게 더 효율적이겠으나, 문양에 대한 정보를 얻는 것도 그에 못지않게 중요한 정보다.
세리아와 아린이 문양에 대해 찾고, 나머지가 여비를 마련하면서 겸사겸사 사천왕에 대한 정보를 모으면 딱 좋을 거 같긴 한데….
생각할수록 세리아의 의견이 타당하게 느껴졌다.
사실 이렇게 인원을 나눈 것도 원래 제렌 씨가 무슨 짓을 할지 몰라서가 아니었던가.
수도까지 오면서 알게 된 그는, 특히 최근 며칠간의 그는 정말 무해한 남자였다. 약간 불량한 측면이 있긴 하지만 큰 결점은 아니기도 했고.
…믿어도 될까?
나는 그동안 쌓아온 의심과, 이번 여행에서 쌓아올린 신뢰를 서로 저울질했다.
“뭐, 일거리야 찾으면 얼마든지 구할 수 있으니 그 쪽에 대해서는 걱정 안하셔도 됩니다. 정 안되면 용사님과 둘이서 막노동이라도 하죠, 하하!”
그의 말을 듣고 다니 저울이 신뢰 쪽으로 더 기울었다.
그래, 그가 정말 흑심을 품고 있다면 나와 거리를 두려고 하지 않겠는가.
어쩌면 내가 괜히 의심만 품고 있다 이제야 그의 본모습을 알게 된 것일지도 몰랐다.
한 번만 더 믿어보자.
나는 그렇게 결심했다.
“세리아 말대로 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