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용사 파티의 짐꾼-55화 (55/236)

〈 55화 〉 [용사] 삐걱거리는

그리고 며칠이 더 지났다.

이렇게까지 편안하게 이동한 적이 있나 싶을 만큼 평온한 나날이었다.

역시 수도로 통하는 길목이라 그런지 몬스터나 도적들도 보이지 않고, 이따금씩 지나치는 사람들도 가볍게 목례를 하며 지나간다.

아마 이 마차가 귀족의 마차라서 그런 것이겠지.

슬슬 불침번을 설 필요 없지 않나, 하는 생각도 든다.

앞으로 이렇게 편하게 이동할 기회도 거의 없을 텐데, 그렇다면 이럴 때 확실하게 쉬는 편이 좋지 않을까?

그래서 모두에게 의견을 듣기로 했다.

수도에 도착할 때까지 불침번 서지 말까?

“불침번? 없으면 난 좋아!”

유니는 무조건 찬성이었다.

둘이서 여행하던 첫날밤에도 불침번 소리에 입이 댓 발 나왔었지. 여전히 귀찮은 모양이었다. 하긴 그렇지 않은 사람이 어디있겠냐만은.

“조금 불안하긴 하지만, 확실히 이 길은 안전한 것 같네요. 괜찮지 않을까요?”

아린은 조금 고민하는 기색을 보였지만 결국 찬성에 한 표를 던졌다.

그녀 말로는 어차피 자기는 일찍 일어나니까 별 상관없단다.

새벽의 여신을 섬기는 몸이라 일찍 일어나는 걸까?

세리아와 유니가 슬쩍 귀띰해줬는데, 그녀는 마지막 불침번을 거의 같이 선다고 한다. 이러면 사실상 불침번을 두 번 서는 셈이 아닌가. 왠지 조금 미안해졌다.

“확실히 안전한 길이긴 합니다만, 용사님. 본인의 신분을 잊지 말아주십시오. 언제 사악한 마물들이 용사님을 노리려들지 모릅니다.”

그에 비해 제렌 씨는 방심하지 말라며 날카로운 충고를 던졌다.

하긴 우리는 놀러온 게 아니다. 휴식도 좋지만, 언제나 위험에는 대비하고 있는 게 좋겠지.

그의 말을 들으니 다시 반대쪽으로 내 의견이 기울었다.

세리아의 의견도 들어볼까.

그녀도 불침번을 별로 좋아하는 것 같진 않았으니 찬성할 것 같은데, 그렇다면 그녀들을 생각해서라도 한 발 물러나는 것이 좋겠지.

그에게는 미안한 말이지만 이번에는 그녀들의 의견을 따르도록 하자.

“나, 나는… 제렌 니… 씨 말에 일리가 있다고 생각해.”

세리아는 그를 슬쩍 바라보며 말하다가 화들짝 놀라더니 어색하게 말을 끝맺었다.

뭔가 평소와는 말투가 달라 갸웃했지만 그녀는 팔짱을 끼고선 홱 고개를 돌렸다.

왜 그러지?

아무튼 그녀도 반대라.

예상과는 반대의 상황이 나와서 나는 조금 당황했다.

찬성과 반대가 두 표씩.

이러면 내가 정해야하나?

“두 분이 그렇게까지 불침번에 관심이 많으신 줄은 몰랐네요.”

의외로 아린이 쌀쌀맞게 말을 툭 던졌다.

잠시 생각에 잠겨있던 나도 잘못 들은 게 아닌가 싶어 고개를 휙 치켜들었을 정도다.

“자다가 죽는 것만큼 억울한 일도 없지 않습니까? 마음은 이해하지만, 이럴 때일수록 더 주의해야한다고 생각합니다.”

“그, 그렇지…! 준비해서 나쁠 건 없으니까, 응, 나도 불침번은 남기는 게 좋다고 생각해.”

고민 없이 곧장 반박하는 제렌 씨와 다소 횡설수설하며 변명하듯 말하는 세리아.

평소의 이지적인 모습은 찾아볼 수도 없었다.

“으음….”

아린은 대답이 만족스럽지 않았는지 제렌 씨를 쏘아봤다.

저렇게까지 불침번이 불만이었나?

하긴 나라도 불침번까지 서고 남들보다 일찍 일어나야한다면 별로 기분이 좋지 않을 것 같긴 하다.

그럼 역시 안 하는 쪽으로 하는 게 맞을까?

이번에는 아린을 배려해서라도 그녀가 좀 쉴 수 있게 해줘야할 것 같다.

“으음, 듣고 보니 맞는 말 같다! 어차피 졸리면 마차에서 자면 되잖아.”

그런데 내가 입을 열기도 전에 유니가 고개를 연신 끄덕이며 입장을 바꿨다.

“유니?”

아린도 그녀의 갑작스런 돌변에 당황했는지 휙 돌아본다.

“응… 그치만 정말 자다가 마족이 습격하면 어떡해? 어차피 잠은 이동하면서도 실컷 잘 수 있으니 괜찮잖아.”

“하아….”

아린은 완전히 생각을 굳힌 유니의 말을 듣고 한숨을 푹 내쉬었다.

“알았어요. 그럼 그냥 불침번은 그대로 서는 걸로 하죠. 괜찮을까요 용사님?”

“어? 응….”

안 하는 쪽으로 가자고 말할 생각이었는데, 이렇게 되면 어쩔 수 없다.

그 대신이라기는 뭐하지만 아린의 불침번 순서는 마지막으로 넣어줘야지.

그렇게 다짐하면서 임시 회의를 마쳤다.

“잘먹었어요, 유니.”

“응, 오늘도 맛있었어.”

아린과 세리아는 먼저 식사를 마치고선 저녁을 담당한 유니에게 고마움을 표했다.

딱히 명시적으로 정해둔 건 아니지만, 별 일이 없는 한 저녁은 유니가 만들었다.

이유는 단순한데, 우리 파티에서 요리를 배워본 사람이 유니밖에 없기 때문이다.

마탑과 교회에서 귀하게 자란 둘이 요리를 해본 적이 있을 리도 없고, 나도 부엌에는 별로 들어가 본 적이 없다.

제렌 씨…는 잘 모르겠다. 물어본 적은 없지만, 왠지 어느 정도 할 수 있을 것 같긴 하다. 의외로 그에게는 이것저것 할 줄 아는게 많으니까.

그렇지만 유니가 요리하는 걸 좋아하기도 하고, 딱히 그도 하고 싶다는 의사를 내비치진 않았기에 그냥 이대로 두고 있었다.

“응! 그릇은 저기다 둬!”

유니는 뿌듯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설거지 정도는 우리가 직접 하고 싶지만, 유니는 자기가 하는 편이 더 좋다면서 한사코 고집을 피웠다.

그리고 사실 유니가 직접 하는 것도 아니고 정령이 대신 한다.

물속에 담가두면 알아서 정령이 말끔하게 씻어주는 데다가, 꺼내는 즉시 물기가 쭉 빠져 따로 말릴 필요도 없다.

정말로 가사에 특화된 직업이었다.

유니랑 결혼한다면, 가사도 어렵지 않겠지…….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아, 아니, 물론 아직 그런 걸 고민할 단계는 아니지만!

“용사님? 얼굴이 빨가신데 괜찮나요?”

“어? 아, 아냐. 괜찮아.”

얼굴에 티가 다 났나보다.

나는 내 볼을 문지르며 애써 상상을 머릿속에서 지워버렸다.

나와 유니, 제렌 씨까지 식사를 마치고 나자 아린이 헛기침을 하며 우리의 시선을 모았다.

윽, 설마 그걸 또 할 셈인가?

아린을 제외한 우리 모두의 시선이 순간 맞닿았다.

“그럼 여러분, 식사도 마쳤으니 잠깐 올바른 의식함양에 대한 가벼운….”

“나, 나는 피곤해서 먼저 들어가 볼게.”

“세리아, 당신은 가면 안 되죠.”

“으, 응? 내가 왜…?”

먼저 마차로 도망가려던 세리아가 붙잡혔다.

“마차의 상태가 걱정되는 군요. 좋은 말씀 많이 나누시고….”

“당신도 마찬가지에요.”

“후우….”

제렌 씨도 붙들렸다.

아린이… 아린이 이상해졌어…!

전에는 이런 끔찍한 설교 같은 걸 하지 않았는데 요즘 무슨 바람이 불었는지 밤마다 이러고 있다.

아마 세리아의 이야기를 들은 게 화근이 아니었을까 싶지만, 나한테는 별 걱정 안 해도 된다면서 매일 밤마다 이러는 걸 보면 본인이 제일 걱정하고 있는게 아닐까 싶다.

나에게 따로 별 말이 없었던 걸로 보아 딱히 우려할 만한 일은 없었으리라 믿지만, 역시 이건 종교인으로서의 본능 같은 걸까.

솔직히 이런 설교는 그다지 쓸모없다는 생각이 들지만 아린을 위해서 그 말은 마음속에 꾹 담아두기로 했다.

“나, 난 싫어…!”

“유니! 어디 가요!”

“어차피 어제랑 똑같은 얘기잖아!”

그러나 유니는 질린다는 듯 몸서리를 치며 벌떡 일어났다.

“무슨 소리에요, 주제부터가 다르잖아요! 어제는 올바른 정신에 기인하는 올바른 힘에 대한 얘기였고 오늘은….”

“흥, 몰라, 재미없어!”

“재, 재미없다구요…?”

유니는 그렇게 말하며 내 쪽으로 뛰어왔다.

“자, 가자!”

“응? 어, 어딜?”

“빨리!”

나는 얼떨결에 그녀의 손에 이끌린 채 같이 도망쳤다.

어차피 길 한복판인 건 똑같은데….

아린이 돌아오라고 소리치고 있었지만 유니는 들리지도 않는지 후다닥 뛰었다.

내 손을 붙잡고 뛰면서도 유니는 즐거운지 계속 히히 웃고 있었다.

“하아… 하아… 안 쫓아오겠지?”

“굳이 이렇게까지 안 해도 됐을 거 같은데….”

어차피 금방 돌아갈 건데 굳이 도망칠 필요가 있었을까.

뭐, 그래도 이러고 있으니 어릴 때 같이 산속을 뛰어놀던 기억이 나 즐겁긴 했다.

“헤헤, 그냥 오랜만에 에릭 손잡고 뛰어보고 싶었어. 옛날 생각나지 않아?”

그녀도 마찬가지였나보다.

그렇지만 그걸 위해서 아린의 설교를 망쳐버린 건 조금 너무한 거 아닐까….

라고 생각했는데, 유니는 그 말을 듣더니 불만스럽게 내 볼을 쿡쿡 찔렀다.

“흥, 에릭은 아직 3일째라서 그래. 우린 6일째거든?”

우리가 마부석에 앉아있는 동안 유니와 세리아는 계속 저 얘길 들었던 것인가.

왠지 그 말을 들으니 조금 가엾어졌다.

“그리고… 다들 자꾸만 앞서가니까….”

“응?”

“아냐, 아무 것도. 히히.”

그녀가 뭐라고 중얼거린 것 같았는데, 잘 들리진 않았다.

맘 편히 웃는 그녀를 보니 딱히 걱정할 일은 아닌 것 같다.

이렇게 되어버렸으니 어쩔 수 없지.

잠깐 유니랑 놀다 들어가야겠다.

“으음.”

그런데 딱히 할 게 없었다.

어린애도 아니고 우리가 흙장난하며 놀 나이는 지나지 않았는가.

무엇보다 깔끔하게 관리된 도로에는 딱히 그런 놀이를 할 만한 공간도 없었다.

“여기 길 망치면 혼나겠지?”

유니가 그렇게 묻는 걸 보니 비슷한 생각을 했나보다.

이렇게 바닥이 평평하게 잘 다듬어진 걸 보니, 흙의 정령 같은 걸 불렀다간 분명 무슨 일이 생길 것만 같았다.

“여기 생각보다 재미없는 곳이네.”

유니가 입숙을 비죽이며 투덜거렸다.

그렇긴 했다.

뭐 애초에 놀라고 만든 곳도 아니긴 하지만.

“우으, 그럼 좀 쉬고 있을래.”

유니는 그렇게 말하며 땅바닥에 철퍼덕하고 누웠다.

“앗, 그대로 누우면 더럽잖아, 유니!”

“자연은 더럽지 않아. 더러운 건 우리 인간이야!”

“응…?”

그녀를 일으켜 세우려던 나는 이상한 말에 멈칫했다.

이건 또 무슨 소리지?

“정령들이 그랬어.”

“정령들이 그런 소리를 해?”

말할 수 있었구나, 걔네들.

나한테는 아무 말도 안하면서.

내가 진짜 정령사가 아니라서 그런 걸까.

“응. 막 자연을 파괴하고 부수는 건 인간뿐이래.”

“엘프도 나무로 집 짓지 않아?”

“어… 그런가?”

사실 나한테 물어봐도 모른다. 그냥 들은 얘기니까.

내가 언제 또 엘프 같은 이종족을 봤겠는가.

“나도 잘 몰라, 히히.”

그녀는 정령들에게 들었다는 주장을 재빠르게 포기해버렸다.

덕분에 정령들이 생각보다 과격한 친구들이었다는 사실을 알았다.

설마 내가 정령사도 아닌데 막 자기들을 부린다고 나한테 해코지하는 건 아니겠지?

왠지 좀 불안해져서 앞으로 정령은 최대한 안 부르기로 했다.

“세리아도 따라올 줄 알았는데 안 오네.”

“세리아가? 그럴 리가.”

그녀 성격상 마음에 안 들면 대놓고 귀를 막고 말지, 이렇게 같이 도망칠 사람은 아니다.

“그치만 젤 듣기 싫어했는걸. 아, 그래도 그런 것 치고는 왠지 얌전하긴 했어.”

“그래…?”

마법사의 관점에서는 무언가 도움이 되는 이야기인가? 아니면 그녀 본인에게 와닿는 이야기라던가?

뭐 어느 쪽이든 우리랑은 그닥 상관없는 이야기다.

“그런데 에릭.”

“응?”

“아린이랑 세리아하고는 잘 되가?”

“어, 으, 응?”

갑작스런 말에 나는 순간 할 말을 잃고 말았다.

“요즘 둘이랑 친하게 지내는 거 같아서… 막 나 빼놓고 비밀 얘기하는 거 아니지?”

“아, 아니지! 그럴 리가 있겠어!”

아… 맞나?

생각해보니 하나 같이 유니에게 얘기하지 못할 것들이었다.

그래서 얘기한 적도 없었다.

“미안, 유니. 왠지 요즘 좀 소홀했던 거 같네.”

“…아니야. 모두에게 기회를 준 건 나니까.”

유니는 내 왼팔을 빤히 바라보다가 대답했다.

“기회?”

“에릭을 다 같이 사이좋게 나눌 기회 말이야!”

내가 무슨 말인지 이해를 못하고 있자 그녀가 풋 웃음을 터뜨렸다.

“다들 에릭이랑 사이좋게 지내고 싶어 하니까, 나만 독점하고 있으면 미안하잖아!”

“독점이라니, 누가 들으면 오해하겠다.”

“히히, 그치? 근데 다들 처음에는 우리 둘이 사귀는 줄 알고 다가가질 못하더라구.”

“어? 그랬어?”

이건 처음 듣는 소린데.

세리아와 아린 둘 다 처음에는 어색했는데, 난 그게 그냥 만난 지 얼마 안 돼서 그런 줄로만 알고 있었다.

그런 내막이 있었구나.

어쩐지 어느 날을 기점으로 급격이 셋의 사이가 좋아졌다 싶었더니. 허심탄회하게 서로의 속마음을 털어냈던 모양이다.

그보다….

사귄 줄로만 알았다니.

나는 왠지 부끄러워져 시선을 돌렸다.

“아앗, 왜 도망쳐?”

그러자 유니가 양손으로 내 얼굴을 꾹 잡고선 다시 자기 앞으로 돌려놓았다.

“앗, 그….”

그녀를 정면으로 바라보고 있자 괜히 더 의식하게 되어 부끄러웠다.

“으히히, 사귄다는 말에 신경 쓰는구나.”

유니는 내가 부끄러워하는 이유를 깨닫고는 심술궂게 웃었다.

“그럼… 정말로 해볼래?”

“어? 뭐… 를?”

유니는 조용히 미소만 지었다.

그러더니 그녀는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내 얼굴을 붙잡은 채로 서서히 다가왔다.

이대로라면, 그녀의 입술이 나한테…….

콩.

그러나 입술끼리 부딪히기 전에 이마가 먼저 부딪혀버렸다.

유니는 후다닥 물러나 눈물을 찔끔 흘리며 자기 이마를 매만졌다.

생각보다 아팠나보다.

“우으, 바보….”

“어, 내 잘못인가?”

“바보!”

유니는 한참을 툴툴거리더니 돌아가자고 손을 내밀었다.

“이제 끝났겠다, 가자.”

“왠지 좀 아린한테 미안한 걸.”

“히히, 가서 사과하지 뭐.”

우리는 손을 잡고 다시 마차로 돌아왔다.

“응? 조용하네?”

“벌써 끝났나봐.”

우린 소곤소곤 얘기하며 더 가까이 다가갔다.

“앗, 아린.”

유니가 먼저 아린을 보고는 살짝 손을 흔들었다.

혹시 화난 건 아닌지 슬쩍 눈치를 보면서.

아린은 팔짱을 끼고 눈을 감고 있었다.

그녀의 전신에서는 심기가 불편하다는 신호가 풀풀 새어나오고 있다.

나머지 둘은 어디갔는지 보이지 않는다.

“여, 역시 화난 걸까?”

유니가 소매를 잡아당기며 속삭였다.

그걸 이제 와서 걱정할 거면 도망을 안 치는 게 좋지 않았을까…. 하지만 굳이 얘기하진 않았다.

왠지 그게 이유는 아닐 거 같다는 느낌이 드니까.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