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2화 〉 [짐꾼] 낙하
“그렇다는데?”
나는 빈 허공을 바라보며 그렇게 말했다.
“…네가 대답을 유도한 거잖아.”
그러자 아무 것도 없는 빈 공간에서 대답이 돌아왔다.
애써 이성적인 척을 하고 있지만 목소리의 떨림은 감출 수 없다.
“용사님도 너무하시지. 겨우 그런 걸로 기분 나쁘다니, 안 그래?”
“너, 너도 똑같은 말 했잖아.”
“오, 나랑 용사를 같은 취급해주는 거야?”
“읏, 닥쳐…!”
세리아가 빽 소리를 질렀다.
그래놓고는 아차 싶었는지 황급히 자기 입을 막았다. 목소리가 도중에 급히 끊긴 걸 보면 아마 그렇겠지.
“걱정도 많네. 어차피 마차 안에서는 아무 것도 안 들려. 너희가 더 잘 알 텐데?”
나는 자연스레 그녀의 엉덩이가 있을 부분으로 손을 뻗었다가, 다시 거두었다.
아참, 아린 그 년이랑 약속했었지.
“…이제 와서 겁에 질리기라도 한 거야?”
약간의 불만이 섞인 목소리로 그녀가 말했다.
슬슬 답답하겠지.
지금까지는 내 협박에 굴해 어쩔 수 없다는 식으로 합리화를 하며 나를 통해 자기 성욕을 풀었을지 몰라도, 이젠 불가능하다.
그래도 자존심이 있지 자기 처녀를 뺏어간 상대에게 먼저 부탁을 한다?
어지간히 달아오르지 않는 한 그럴 일은 없을 것이다.
그런데 지금이 그 적기인 것 같다.
나는 최대한 뻐팅기기로 했다.
“네 친구가 날 무섭게 협박해서 말이야. 너한테 먼저 손대지 않기로 했어.”
“…아린이?”
“그럼 유니겠어?”
세리아에게서는 대답이 돌아오지 않았다.
아린을 탓할 수는 없겠지.
그녀는 좋은 의도로 한 것이고, 실제로도 내가 손을 안 대고 있으니 좋은 결과를 낳고 있다.
보통 사람이라면 백이면 백 잘된 일이라고 생각하지, 안 좋은 일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을 것이다.
뭐, 이년은 보통 사람이 아니지만.
나는 그녀가 있는 방향에서 시선을 돌리고 느긋하게 머리 뒤로 깍지를 꼈다.
“그렇게 된 거니까 돌아가서 잠이나 자든지, 알아서 해. 난 좀 쉬고 있을 테니.”
나는 마부석 등받이에 기대 눈을 감았다.
누가보면 자는 줄 알겠지만 절대 아니다.
자는 척만 할 뿐.
“…불침번 제대로 안 서? 그러다가 몬스터라도 나타나면 네가 책임질 거야?”
“참나, 수도로 가는 길목에 몬스터가 어딨어? 용사 그 놈이 쓸데없이 걱정이 많은 거지.”
태평한 소리로 들릴지도 모르지만 사실 틀린 말은 아니었다.
이런 거대한 마차가 다닐 수 있을 만큼 정비된 길인데, 설마 몬스터 관리도 제대로 못하겠는가?
지금까지 몇 번 왕국 경비병과 마주쳤던 걸 보면 주기적으로 그들이 순찰을 도는 것 같았다.
그러니 사실 이렇게 불침번을 설 이유도 거의 없다.
몬스터는 당연히 없고, 설마 이런 곳에 도둑이라도 들겠는가?
“…흥.”
그녀도 비슷한 생각을 하고 있었는지 더 이상 말을 붙이지는 않았다.
나는 자세를 편하게 고쳐 잡으며 자는 척을 했다.
잠시 적막이 흘렀다.
그녀의 발소리가 들리지 않았으니 아마 여전히 근처에 있을 것이다.
그렇지만 나는 굳이 그 사실을 티내지 않았다.
세리아는 내가 자고 있다고 믿어야 하니까.
그렇게 잠시 기다리고 있자 아주 작은, 잘못 들은 게 아닐까 싶을 만한 목소리가 나지막이 들려왔다.
“…정말 자는 거야?”
“…….”
대답하고 싶은 마음을 꾹 참고 끝까지 못 들은 체 했다.
“일어나있는 거 다 알아.”
“…….”
“에, 에릭한테 전부 말할 거야….”
푸흐흐, 귀여운 말을 하는군.
설마 날 웃겨서 확인해보려고 한 거라면 제법 괜찮은 수였다.
웃음을 참는데 애 좀 썼다.
“…진짜 자는 거야? 불침번도 안 서고… 쓰, 쓰레기 같은 남자….”
혼잣말인지 나 들으라고 하는 소린지 슬슬 모르겠다.
“후우….”
그러더니 길게 한숨을 쉬곤 다시 조용해진다.
설마 진짜 자러가랬다고 자러간 건 아니겠지?
살짝 눈을 떠볼까 싶었지만 생각해보니 안 보이는 상태 그대로일 것 같아 가만히 있기로 했다.
저벅.
세리아의 발걸음 소리가 들린다.
진짜 가는 거야?
저벅.
그런데 어째 점점 다가오는 거 같은데.
저벅.
이젠 정말 내 바로 옆에서 들린다.
“…야.”
내 바로 위에서 들리는 목소리에 흠칫 놀라 반응할 뻔했다.
“일어나 있는 거 다 알아.”
“…….”
허세겠지?
아님 정말 눈치를 챘나?
뭐 사실 들킨다고 별 일 생기는 것도 아니니 상관없지만, 그래도 나는 꾸준히 자는 척을 했다.
“…후으, 변태 같은 년 진짜….”
그녀의 목소리가 멀어졌다.
조금 거리를 벌린 듯한데, 아무래도 돌아가 잘 생각은 없는 것 같았다.
“……읏.”
그리고 마침내, 그녀의 입에서 기대하던 소리가 나왔다.
더 이상 참지 못한 그녀가 스스로를 위로하기 시작한 것이다.
이동할 때는 주변에 자기 동료들이 있다.
그녀가 마음 놓고 자위할 수 있는 시간은 밤에 불침번을 설 때뿐인 것이다.
사실 그녀의 오늘 불침번은 이미 끝났다.
용사 놈이 불침번 서기 전이 세리아의 차례였다.
그러나 역시 이 변태년은 고작 그 짧은 시간으로는 만족하지 못한 듯 싶었다.
어쩌면 이미 알아버렸을지도 모른다.
더 이상 자기 혼자서는 만족할 수 없다는 사실을.
어제 불침번을 서다 깨달은 사실인데, 더 이상 자위가 그다지 기분 좋지 않았다.
느껴지는 건 똑같은데, 자꾸 부족하다는 생각이 드는 것이다.
세리아를 따먹었을 때의 그 쾌감이 너무 강렬하게 머릿속에 남아버렸다.
이미 새로운 세계를 알아버린 내 몸은 이제 고작 이런 걸로는 만족할 수 없게 되어버렸다.
그럼 그녀는?
세리아도 마찬가지 아닐까?
난 그렇게 생각했고, 지금 이 상황이 그 답을 증명해보이고 있었다.
“하읏… 읏….”
손으로 입을 막았는지 소리가 거의 새어나오지 않았다.
그렇지만 그 상황이 오히려 나를 더 꼴리게 했다.
“…후읏, 읏.”
거리를 살짝 벌렸는지 그녀의 미약한 신음소리 말고는 아무 것도 들리지 않는다.
마차 안에서는 용사가 아무 것도 모른 채 잠들어 있고, 건너편 텐트에서 듣기에는 너무나도 작은 소리.
그녀의 조용한 일탈을 지켜볼 사람은 나밖에 없다.
아니, 이 경우에는 들을 사람이라고 해야겠지.
나는 얌전히 그녀의 연주를 감상하기로 했다.
“하아… 하아… 으읏, 뭐하는 거야 나….”
자위하다말고 갑자기 현실을 자각했는지 어쩔 줄 몰라 하는 세리아.
하지만 그녀의 손가락이 멈추는 일은 없었다.
“하으… 으으….”
자기가 굉장히 꼴사나운 모습이라는 건 알고 있으면서 자위는 그만두지 못하는 건가?
처음 봤을 때도 느꼈지만 정말 답도 없는 변태다.
“후우… 모자라….”
작게 중얼거린 대사를, 나는 놓치지 않았다.
역시 그녀도 혼자서는 만족하지 못하는 것이다.
그녀에게 필요한 건 자기 손가락이나 무생물이 아닌 남자의 몸이다.
그러나 건방진 세리아는 아직 그 사실을 인정하지 않았다.
다시 그녀의 발걸음이 다가오길래 나도 모르게 긴장하고 말았는데, 그녀는 마부석 앞까지 다가오더니 아까와 별반 다르지 않은 신음을 냈다.
“흐으, 흐으….”
뭐가 달라졌지?
가만히 듣고 있는 입장에서는 소리가 조금 더 커졌다는 거 말고는 차이점을 느낄 수 없었다.
설마 나한테 들려주려고 다가온 건 아닐 테고, 뭔가 더 좋은 자위도구를 쓰고 있는 것 같지도 않다.
퍽!
“윽!”
내 의문은 그녀가 마부석에 무릎이 찍히면서 해소되었다.
둔탁한 소리와 함께 순간적으로 울려 퍼진 비명소리. 그리고 갑자기 조용해진 그녀.
그녀는 마부석에 자기 보지를 비비며 자위를 하고 있었던 것이다.
딱히 손으로 하는 것보다 기분 좋지는 않을 거 같은데, 뭔가 특별한 플레이라도 하면서 쾌감을 느끼고 싶었던 모양이다.
“…자, 자고 있어?”
“…….”
방금 전 실수로 내가 깰 것을 우려했는지 그녀가 소곤소곤 물었다.
나는 적당히 몸을 뒤척이는 척하면서 팔 하나를 그녀 쪽으로 슥 내밀었다.
“…너 일어나 있지.”
대답은 하지 않았다.
다만 바닥에 힘없이 늘어져 있는 손을 뻣뻣하게 세웠을 뿐이다.
“미, 미친 새끼 진짜….”
손가락을 하늘위로 쭉 치켜세운 채 가만히 그녀를 기다렸다.
황당한지 나를 향해 욕설을 뱉긴 했지만, 그 이상의 말은 뱉지 않았다.
“내, 내가 창년줄 알아? 너 같은 거에게 다시… 다시 갈 리가….”
“…….”
난 대답하지 않았다.
이제부터는 그녀의 선택이다.
나는 그녀에게 먼저 손을 대지 않기로 했으니까.
“…나한테는 손 안 대겠다며?”
무시.
나와 아린이 한 약속은 내가 먼저 손을 대지 않는 것뿐이다.
그녀가 스스로 원해서 접촉한다면 약속을 어긴 것이 아니다.
“나, 나보고 직접 오라고?”
그제야 눈치를 챘는지 세리아의 목소리에서 당황스러움이 묻어나왔다.
“미쳤다고 내가….”
그녀는 그렇게 중얼거리면서도 그 자리에 못 박힌 듯 움직이지 않았다.
나는 그년의 보지 모양에 맞춰 자극이 더 잘 되도록 손가락을 살짝 구부렸다.
“…흐읏.”
살며시 새어나온 신음.
이거면 충분하다. 머지않았다.
잠깐의 침묵이 너무나도 길게 느껴졌다.
그래서 그런지 그녀가 마침내 계단을 밟고 마부석 위로 올라왔을 때, 나는 무심코 눈을 뜰 뻔했다.
끼익.
밧줄로 이어진 계단이라 그런지 소리가 제법 크게 났다.
그녀는 여전히 망설이는지 한 계단을 오를 때마다 시간이 걸렸다.
그리고 세리아가 마침내 마부석 위로 올라왔을 때.
그녀가 입을 열었다.
“너… 자고 있는 거지?”
이제 와서?
순간 의아했지만 세리아는 나에게 질문을 하고 있는 게 아니었다.
“그, 그러니까… 나는 너랑 하고 있는 게… 아닌 거지….”
픽, 웃음이 새어나올 뻔했다.
결국 이렇게 되는 건가.
그녀는 나 없이는 이제 만족할 수가 없다.
그렇지만 나에게 안기는 것은 여전히 거부감이 든다.
“도구… 너는 도구야….”
그래. 원한다면 도구처럼 써라.
나는 그녀가 만족할 수 있게 손가락을 살짝 벌려 크기를 키웠다.
“흐읍….”
그녀가 내 반응에 숨을 삼켰다.
저벅저벅.
그녀의 발소리가 점차 가까워졌다.
세리아는 내 손 바로 위에서 멈춰 섰다.
“후으… 으읏… 이게 아닌데….”
그녀는 자기 의사가 아닌 듯 칭얼거리지만, 지금 이 상황은 오롯이 그녀 혼자만의 판단이었다.
스르륵.
무언가를 벗는 소리가 나더니 바닥에 천 같은 가벼운 물건이 톡 떨어졌다.
“으읏… 기, 기분 안 좋으면 용서 안해…!”
쯔걱!
그리고 내 손가락을 따뜻하고 축축한 무언가가 덮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