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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사 파티의 짐꾼-49화 (49/236)

〈 49화 〉 [용사] 수도로

뜬 눈으로 밤을 지새우다시피 하며 맞이한 아침.

드디어 오늘, 우리는 이 성에서 빠져나간다.

수도에서 반납하는 조건으로 우리는 영주에게서 비싼 마차를 빌렸다.

영주는 마부를 한 명 붙여주겠다고 했지만, 제렌 이 남자가 대신 몰 수 있다길래 그에게 맡겼다.

처음에는 단칼에 거절할 생각이었는데, 가만히 생각해보니 마부 역할을 그에게 맡기면 적어도 이동 중에는 딴 생각을 못 할 터.

그의 행동을 봉쇄할 좋은 기회였다.

그를 좀 더 믿어보기로 했지만 그걸 위해서 굳이 파티원들과 그를 붙여두고 싶은 생각은 없었다.

정말 그가 결백하다면, 이번 여로를 통해 증명해보이겠지.

***

“와아, 진짜 이걸 타고 가는 거야?”

눈이 동그래진 유니가 호들갑을 떨며 내 어깨를 흔들었다.

그렇지만 아무도 그녀를 말리지 않았다.

다들 비슷한 심정이었기 때문이다.

“이, 이런 걸 타도 되는 걸까요?”

“마… 마탑용 마차보다도 큰 거 같은데.”

세리아와 아린도 입을 떡 벌린 채 한 마디씩 했다.

이 정도면 마차가 아니라 그냥 움직이는 숙소 아닌가?

마차는 어제 우리가 묵었던 방만큼이나 거대했다.

그런데도 이 큰 마차를 움직이는 건 고작 말 두 마리였다.

“정말 두 마리서 이걸 끌 수 있는 거야?”

다른 말보다 훨씬 근육질이긴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이렇게 큰 걸 얘네들이 끌 수 있는 걸까?

“쟤네 말 아니야. 생긴 것만 말이지 거의 몬스터에 가까운 애들이야.”

세리아는 그렇게 말하며 그 중 한 녀석의 근육을 툭 건드렸다.

살짝 찌르면 터질 것처럼 빵빵한 근육이다.

쟤네들한테 한 대 걷어차이면 그냥 즉사 아닌가?

세리아 말로는 성격이 순해서 괜찮다지만, 난 아무래도 영 불안했다.

“그러시면 안에 들어가 계시지요. 마차는 저 혼자서도 충분합니다.”

제렌이 슬쩍 다가와 그렇게 말하자 자존심이 긁힌 기분이 들어 나도 모르게 날 선 대답을 해버렸다.

“그건 당신이 나설 문제가 아닙니다.”

너무 차갑게 말한 것 같아 슬쩍 반응을 보니 세리아랑 유니가 이쪽을 걱정스러운 듯 바라보고 있었다.

그나마 유니는 마차에 정신이 팔렸는지 내 말을 못 들은 것 같아 다행이라고 할까.

“아무튼, 출발하죠.”

나는 애써 얼버무리며 마부석 옆에 올라탔다.

마차가 워낙에 커서 그런지 마부석도 굉장히 넓었다.

여기서 누울 수도 있을 것 같다.

우리는 영주의 대리인에게 마지막 인사를 건네고 수도 방향으로 마차를 몰았다.

거리를 지나갈 때마다 시선이 전부 이쪽으로 쏠리는 게 영 어색한 기분이었다.

하긴, 이런 걸 타고 다니면 누가 봐도 귀족인 줄 알겠지.

내가 용사기는 해도 귀족은 아니라 이런 시선은 굉장히 낯설었다.

용사일 때 사람들이 나를 바라보는 시선은 기대와 동경이었는데, 지금 저들의 시선에서 느껴지는 것은 질투와 원망이었다.

도시 사람들의 영주에 대한 인심이 어떤지를 다른 그 무엇보다도 잘 보여주는 증거였다.

…우리한테는 친절한 사람이었는데.

귀족들이란 다 그런 것일까.

나는 복잡한 기분으로 마차에 등을 기댔다.

마차는 진동 하나 없이 정말 편안하게 이동하고 있었다.

그가 말을 잘 모는 것인지 아니면 마차가 워낙 비싼 거라 그런지는 모르겠지만, 눈을 감으면 여기가 숙소 안인지 마차 위인지 모를 지경이었다.

“피곤하시면 주무시고 계십쇼. 무슨 일 있으면 깨워드리겠습니다.”

그 남자가 나를 배려하듯 잠시 눈을 감은 나에게 말을 건넸다.

아니, 여기서 잠들 순 없지.

목적을 잊어서는 안 된다.

“괜찮습니다. 그냥 생각보다 느낌이 좋아서….”

“하하, 그러게 말입니다. 뭐 마차를 많이 몰아본 건 아니지만 저도 이렇게 좋은 건 처음이군요.”

적당히 말을 받아넘기니 그가 넉살 좋게 말을 이었다.

별로 잡담을 하고 싶은 마음은 없었지만 이상하게 한 두 마디 예의상 나누다보니 제법 분위기가 달아올라 어느 샌가 나는 대화에 열중이었다.

“뭔가 재밌는 얘기 하네?”

갑자기 마부석과 마차 내부를 잇는 창문이 벌컥 열리더니 유니가 고개를 쏙 내밀었다.

“우왓! 유니, 무슨 일이야?”

“나도 그 쪽으로 넘어가도 돼?”

유니는 그렇게 묻고선 내 대답도 듣지 않고 좁은 창문 사이로 꾸물꾸물 기어나왔다.

“유니! 어디가세요!”

창문 너머로 아린의 목소리가 들렸지만 유니는 지친 표정으로 대답 없이 빠져나왔다.

“어… 아린이 부르는 거 같은데?”

“자, 잠시만 여기 있을게.”

그렇게 대답하는 그녀의 얼굴에서 굉장한 피로감이 느껴졌다.

“왜 그래?”

“우으….”

마부석에 거의 엎어진 채 앉아있는 그녀를 바라보며 묻자, 유니는 곧장 울상을 지었다.

“아린이, 아린이 자꾸 재미없는 얘기만 해….”

“응?”

“자꾸 몸을 단정히 하라, 욕망에 넘어가서는 안 된다, 막 이런 얘기만 한단 말이야. 우리 아빠 같아.”

그녀의 아버지라면 촌장님.

나는 자연스레 어린 시절 우리들을 모아두고 설교하던 촌장님의 모습을 떠올렸다.

그 자리에 아린이 들어가 있다고 생각하면… 의외로 딱 맞는다.

역시 신관은 신관이란 걸까.

아무래도 유니는 아린의 설교를 듣다 도망쳐 나온 것 같다.

“그래, 그럼 바람 좀 쐬다 들어가. 일단 똑바로 앉고.”

나는 그렇게 말하며 유니가 제대로 앉을 수 있게 도와줬다.

지금 자세는 좀 위험하기도 하거니와, 자칫 잘못하면 치마가 말려 올라가 속옷까지 보이는 사태가 발생할 수 있기 때문이다.

뭐 나야 어릴 때 지긋지긋하게 봐서 별 감흥은 없다만, 저런 남자에게 유니의 속옷을 보여주고 싶진 않았다.

“짜잔. 감쪽같지! 근데 무슨 얘기 중이었어? 되게 열심히 떠들던데.”

유니가 바른 자세로 척 앉고선 칭찬해달라는 듯 우쭐거리며 물었다.

“아, 뭐, 그냥 옛날 얘기 중이었어.”

그녀의 말을 듣고 나니 너무 즐겁게 떠든 것 같아 조금 뜨끔했다.

이런 남자랑 친하게 지낼 생각은 없었는데….

“두 분은 어릴 때 같은 마을에서 사셨다고 하시던데, 정말입니까?”

“응! 소꿉친구야!”

그의 물음에 유니는 나와 어깨동무를 하는 것으로 긍정했다.

내 쪽으로 너무 몸을 기울였는지 그녀의 머릿결이 내 코를 간지럽혔다.

“호오… 어쩐지 두 분 사이가 유달리 좋아 보인다 싶더니, 그런 이유가 있었군요. 전 두 분이 사귀시는 줄로만 알았습니다.”

“어? 그, 그렇게 보이나? 에헤헤.”

유니가 볼에 살짝 홍조를 띤 채 웃었다.

그 말에 왠지 나까지 부끄러워져 괜히 헛기침을 했다.

“뭐랄까, 다른 분들과는 분위기 자체가 다르다고 할까요. 용사님도 더욱 살갑게 대하시는 것 같았습니다.”

“어? 그, 그런가?”

모두 다 평등하게 대하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내 착각이었나?

“아니야! 에릭은… 다들 똑같이 소중하게 대해주는 걸. 그치?”

“응? 아, 그렇지, 응.”

유니는 나에게 찰싹 달라붙으면서 그에게 장난스럽게 혀를 베에 내밀었다.

순간 유니가 쓸쓸해 보이는 것 같았는데, 이러는 걸 보면 그냥 착각이겠지?

그 뒤로도 우리가 옛날 얘기를 하며 추억을 되새기는 동안, 그녀에게서 그런 기색은 조금도 찾아볼 수 없었다.

우리의 추억 얘기는 아린이 마부석 쪽의 창문을 열고 유니를 다시 부르면서 끝이 났다.

“유니, 언제까지 거기 있을 건가요?”

“히익! 조, 좀만 더 있다 갈게!”

“당신에게도 도움이 되는 이야기라구요. 자꾸 도망가지 말고 얼른 들어오세요.”

아린은 유니를 한 번 보더니, 잠시 그 남자를 향해 시선을 돌렸다가 다시 유니를 훑어보았다.

“자, 얼른요.”

“우으으, 알았어….”

유니가 다시 꾸물거리며 창문 안으로 들어가려 하길래 나는 황급히 그녀를 말렸다.

“잠깐만! 그러지 말고 그냥 문으로 들어가! 마차 멈출 테니까.”

“응… 고마워….”

그녀는 그다지 고맙지 않은 얼굴로 다시 마차 안으로 들어갔다.

“딱히 별 일 없었죠?”

“응? 응.”

“그럼 됐어요.”

얼핏 들리던 둘의 대화가 다시 문이 닫히자 사라졌다.

다시 마부석에는 둘만 남고, 그 뒤로는 별달리 특별한 일 없이 날이 저물었다.

그래. 그렇게 3일 동안 지켜봤는데 정말 아무 일도 없었다.

그동안 있었던 일이라고는 제렌 그 남자와 하루 종일 마부석에 앉아있던 것밖에 없다.

내가 품어왔던 의심이 무색해질 만큼 평온한 날들이었다.

식사할 때나 불침번을 설 때, 나는 평소보다 더 주의 깊게 그 남자를 살폈지만 그는 정말 아무 것도 하지 않았다.

그 전에는 그렇게나 수상한 행동을 많이 보였으면서, 이상하게 최근 며칠 사이에는 처음 봤을 때처럼 다시 얌전해졌다.

가끔 세리아가 그 남자를 이상하다는 듯 흘겨보기는 했지만, 그것 빼고는 이전과 똑같았다.

정말 내 착각에 지나지 않았던 건가?

그렇게 믿을 뻔했다.

내가 그런 교묘한 그의 함정에 넘어가지 않을 수 있었던 건, 전부 아린 덕분이었다.

“분명 무슨 꿍꿍이가 있을 거예요.”

“역시 그렇겠지? 아린도 혹시 뭔가 아는 게 생기면 알려줘.”

“……네. 그럴게요.”

아린은 잠시 우물쭈물하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너무 오래 시간을 끌면 안 되니 슬슬 돌아가죠.”

저녁 먹기 전에 잠시 적당한 핑계를 대고 나왔으니, 너무 오래 지체하면 곤란했다.

“그럼 제가 먼저 들어갈 테니, 용사님은 조금 이따가 오세요.”

“알았어.”

우리 둘이 동시에 자리를 떴다가는 누가 봐도 수상한 밀회였으므로, 우린 서로 다른 핑계를 대며 시간차를 두고 만나 하루의 성과를 보고했다.

혹시 그 남자가 세리아나 유니에게 이상한 짓을 하진 않았는지를 서로 보고하는 시간이다.

그다지 성과는 없었지만 아린 말대로 의심의 끈을 아직 놓을 수는 없었다.

적어도 수도에 도착할 때까지만 지켜보자.

그러고도 정말 아무 일 없었으면, 의심을 조금 풀어도 괜찮겠지.

나는 나무에 등을 기댄 채 아린이 먼저 돌아가길 기다렸다.

이쯤이면 됐겠지.

볼일을 보러 나왔다는 핑계였기 때문에 나도 너무 오래 시간을 끌 순 없었다.

다들 나를 기다리고 있겠지?

스튜가 완성되기 직전에 빠져나왔으니 어쩌면 먼저 먹고 있을지도 모른다.

오늘은 고기도 들어갔으니, 너무 늦으면 정말 국물밖에 안 남을 수도 있다.

얼른 들어가야지.

그렇게 생각하며 마차 쪽으로 돌아가는데, 수풀 저 너머로 낯익은 빨간 머리카락이 보였다.

…세리아?

왜 혼자 저기 있지?

방향을 보니 나와 아린의 반대쪽으로 이동한 것 같다.

혹시 혼자가 아니라던가?

순간 마음속에 불길이 타올랐다.

아니야, 아니겠지.

나는 반사적으로 마차 쪽을 살폈다.

아직 좀 거리가 있어 제대로 보이지는 않지만, 대충 세 사람 쯤 있는 것 같다.

어? 그럼 인원 맞잖아.

그래도 불안감이 달아나질 않아서, 세리아에겐 미안한 얘기지만 조금 더 가까이 가보기로 했다.

혹시 정말 볼일이 급한 것뿐이라면 어쩌지?

높낮이로 보아 쪼그리고 앉아있는 것 같은데, 그런 거면 내가 그냥 변태가 되어버리지 않는가.

그렇지만, 확인하지 않고서는 도무지 견딜 수가 없다.

“……읏.”

조금 다가가니 그녀의 목소리가 들렸다.

설마 마차 쪽에서 내가 보이는 건 아니겠지?

이상한 오해를 사는 것만큼은 사절이다.

아니, 오해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긴 하지만….

아무튼 오해다.

딱히 나한테 남이 볼일 보는 모습을 훔쳐보는 변태같은 취미는 없다.

그냥… 불안할 뿐이다.

“…으읏.”

조금 더 다가가니 점차 그녀의 목소리가 선명해진다.

이걸 무슨 소리라고 해야 하지?

숨을 죽였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구멍 난 물통처럼 슬며시 흘러나오는 소리였다.

…정말로 볼일 보고 있는 건가.

바보 같은 생각을 한 내가 부끄러워졌다.

그래, 돌아가자.

너무 과민반응한 거야.

얼른 가지 않으면 다들 이상하게 생각하겠지.

“…흐읏, 으읏… 하아….”

그렇게 생각하며 몸을 돌리려고 했는데, 그녀의 입에서 새어나온 건 도무지 무시할 수가 없는 신음소리였다.

정말, 정말로 내 예상대로인가?

나는 너무나 다급한 나머지 그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버렸다.

그리고 마주치고 말았다.

쪼그리고 앉아 양 손으로 자기 가랑이 사이를 문지르고 있는 세리아와.

“엇….”

“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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