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7화 〉 [신관] 올바른 길로
굳게 닫힌 문 앞.
나는 문을 두드리기 전에 마음을 가다듬었다.
너무 흥분해서는 안 된다.
그 남자에게 화풀이를 하러 온 것이 아니니까.
나는 그를 올바른 길로 이끌어야만 한다.
그것이 가장 좋은 해결책이니까.
세리아에게 모든 이야기를 들었다.
물론 중요한 내용들은 일부러 빠뜨린 것 같았지만, 그녀의 반응을 보면 대충 짐작이 간다.
가장 먼저 든 감정은 분노였다.
감히 세리아에게 손을 댄 그를, 가만히 내버려둘 수가 없었다.
그러나 그것이 행동으로 터져 나오기 전에 나는 신관으로서의 나를 자각해 억눌렀다.
그를 그 자리에서 죽이는 것은 좋은 해결책이 아니다.
그 다음으로 든 감정은 의문이었다.
왜 세리아는 그 남자를 죽이지 않고 내버려두었는가?
우수한 마법사인 세리아가 왜 그런 힘없는 남자에게 휘둘리는지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물론 지금은, 다소 믿기는 힘들어도 그가 마법을 깨우쳤다고 하니 조금 다르겠지만 그 전에라면 얼마든지 기회가 있었을 텐데?
이에 대한 세리아의 대답은, 그녀답다면 그녀답다고 해야 할까.
바보 같으면서도 쉽게 무시할 수 없는 그런 내용이었다.
확실히 용사님이라면 남들의 손가락질이나 자신의 동료가 모욕 받는 것을 참지 못하시겠지.
세리아가 흔들린 것도 이해가 간다.
그러나 그게 전부라면 세리아는 용사님을 제대로 이해하고 있지 못한 것이다.
용사님은 진상을 알게 되시면 정말 괴로워하겠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녀가 스스로 늪에 발을 들이는 것을 절대 원하지 않을 것이다.
세리아라면 그 정도 사실은 곧장 알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는데.
역시 세리아보다는 내가 더 용사님을 잘…….
아니, 이건 추한 질투다.
서로에게 순위를 매기며 경쟁해서는 안 된다.
그렇지만, 그 여자는 남에게 안긴 주제에 곧장 용사님한테 달려가서…….
나도 모르게 주먹에 힘이 들어갔다.
뒤늦게야 그 사실을 깨닫고 화들짝 놀랐다.
…내가 왜 이러지?
뭔가 이상하다. 왜 갑자기 세리아에게 이런 부정적인 감정이 드는 거지?
세리아와는 정말 좋은 친구라고 생각하고 있는데.
내 마음속 깊은 곳에서는 그녀를 경쟁자라고 생각하고 있었던 걸까?
신관씩이나 되어서 이런 추한 마음을 가지고 있다니.
아직 내가 미숙한 탓이다.
고위 성직자가 되었다고 나도 모르게 자만하고 있는 것이다.
질투. 미움. 시기. 원망.
전부 새벽녘의 이슬처럼 해가 뜨면 사라져라.
우리 인간은 본래 가장 어두운 새벽에서 태어났으니, 이런 부정적인 감정에 쉽게 물드는 것도 당연한 일.
우리는 항상 우리의 더러운 부분을 덜어내야만 한다.
새벽 속으로.
모든 것을 품는 새벽 속으로.
나는 여신님께 기도를 올렸다.
어째서인지 왼쪽 쇄골이 살짝 따가웠지만, 벌레겠거니 싶어 신경 쓰지 않았다.
내 부정적인 감정을 모두 어두운 새벽 어딘가에 두고 돌아왔다.
나도 할 수 있으니, 그도 할 수 있다.
혼자 하지 못하겠다면, 내가 도와주면 된다.
그것이 우리, 새벽의 신관이니까.
똑똑.
두드리자마자 문이 벌컥 열렸다.
순간 놀라 뒤로 물러설 뻔했지만, 살짝 뒤로 도망친 발을 다시 가지런히 모았다.
“아린 아가씨. 무슨 일이십니까? 머리 감을 도구를 꺼내드릴까요?”
누가 들으면 머리 감을 때만 부르는 사람인 줄 알겠네.
……생각해보니 그럴 때 말고는 그다지 부를 일이 없었구나.
나는 조금 부끄러워져 헛기침을 잠깐 하곤 그의 얼굴을 정면으로 바라보았다.
“당신에게 할 얘기가 있습니다.”
“저에게요?”
그는 아무것도 모른다는 듯 의문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분명 알면서 이러는 것이다.
처음에는 몰랐는데, 생각보다 음습하고 머리를 잘 쓰는 남자다.
그러니 그를 상대할 땐 조심해야한다.
저 남자의 말에 넘어가선 안 된다.
“당신과 세리아에 대해서요.”
“…….”
침묵하는 그.
대답을 궁리하는 중인가?
그렇다면 그에게 생각할 시간을 주지 말자.
“일단 들어오시죠.”
“여기서 하겠어요. 오래 끌진 않을게요.”
그는 나를 방 안으로 들이려 했지만 당연히 받아들일 수 없는 제안이었다.
설마 억지로 내 순결을 뺏으려고 하지는 않겠지만, 혹시 몰라 세리아에게 미리 말을 해뒀다.
나에게 무슨 일이 생기면 그녀가 내 몸에 걸린 마법으로 상태를 눈치 채고선 곧장 용사님을 부를 것이다.
“음, 날이 추운데요.”
“괜찮습니다. 그보다 슬슬 본론으로 들어가도 될까요?”
나는 계속되는 그의 제안을 단칼에 거절하고, 곧장 본론으로 들어갔다.
그와 오래 이야기해서 좋을 것 하나 없다.
빠르게, 본론만 얘기하고 돌아오자.
“무슨 얘기를 하시려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그렇게 하십시오.”
“세리아에게 손 떼세요.”
그러자 처음으로 그에게 눈에 띄는 반응이 나타났다.
그는 순간 당황한 듯 자기 턱을 쓰다듬더니 신중하게 말을 꺼냈다.
“무슨 말씀인지는 모르겠지만, 전 딱히 세리아 아가씨와….”
“그녀를 협박해서, 당신의 성욕을 해소하는데 이용했죠?”
그제서야 그는 눈에 띄게 당황하기 시작했다.
입 밖으로 뱉고나니 화가 치밀어 오른다.
이런, 이런 남자에게, 세리아는…….
분노에 떠는 주먹을 진정시키고 나는 다시 마음을 가다듬었다.
그래. 분노도 같이 버리자.
질투. 미움. 시기. 원망. 그리고 분노까지.
나는 그를 처벌하기 위해 찾아온 것이 아니니까.
“무슨 말씀이신지 저는…….”
“됐어요. 당신의 변호는 듣지 않겠습니다. 저는 당신을 처벌하거나 그럴 생각이 없습니다.”
“그럼…?”
이 남자는 노골적으로 안심한 표정을 지었다.
정말 이래놓고도 끝까지 부인할 셈인가?
그에게서 동의를 받아내는데 쓸데없는 시간을 소모하고 싶지 않았다.
“남성분들이 성과 관련해 강한 충동을 느낀다는 건 알고 있습니다. 그것 자체는 잘못된 것이 아닙니다. 저희는 모두 여신님의 피조물이니까요.”
원인은 몰라도, 인간에 관한 일이라면 전부 여신님의 안배.
우리로서는 미처 다 헤아릴 수 없는 목적이 있을 것이다.
우리가 새벽을 모르는 것처럼.
“음….”
그는 나와 이런 얘기를 한다는 것이 조금 부끄러워졌는지 턱을 쓸던 손으로 입가를 가렸다.
확실히 이성과 성에 관련된 이야기를 하는 것은 다소 부끄러울 수 있다.
그렇지만 나는 불순한 목적으로 얘기를 하는 게 아니라, 어디까지나 그를 올바른 길로 이끌기 위해서 말하는 것 뿐.
부끄러워할 이유는 전혀 없다.
“그렇지만 여신님께서는 여러분에게 타인을 강제로 취하면서까지 그런 성적 충동을 해소하라고 말씀하지 않으셨습니다. 이는 전부 여신님의 시련입니다. 충동을 올바르게 해소할 줄 알아야합니다.”
이런 성적인 충동이 우리에게 도움이 되진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런 부정적인 감정이 우리 인간에게 있다는 사실은, 이 자체가 여신님이 내린 하나의 시련으로밖에 해석할 수 없다.
간혹 다른 주장을 하는 이단들도 있지만, 그들은 여신님의 뜻을 곡해하는 어리석은 무리들이니 귀담아 들을 필요 없다.
“아니, 대체 무슨 방법으로….”
“예를 들면 단련이 있겠죠. 실제로 많은 분들이 무술을 단련하는 것으로 그런 부정적인 충동을 해소하시곤 합니다.”
수도원에서는 일상적인 일이다.
한창 때의 소년소녀들이 그런 충동에 사로잡히는 건 자연스러운 일.
그럴 때마다 그들은 자신의 몸을 혹사시키는 것으로 성욕을 억누르곤 했다.
“아니면 독서 같은 건 어떨까요? 올바른 독서는 마음속의 부정을 몰아내고….”
“무슨 개소리야 시발.”
잘못 들었겠지?
이 남자에 대한 내 마음속 부정한 인식 탓에 그렇게 들린 게 틀림없다.
“죄송해요, 잘 못들은 것 같네요.”
“무슨 개소리냐구요.”
“네?”
뭐가 문제지?
내가 눈을 끔뻑거리고 있자, 그는 어이가 없다는 듯 표정을 콱 구겼다.
“아니, 뭐 그런다고 부랄에 쌓인 정액이 사라지기라도 한답니까? 딸이라도 치지 않는 이상 그런다고 해소 안 됩니다.”
“부, 부….”
그런 천박한 말을….
역시 이 남자는 어린 시절 그를 올바른 길로 이끌어줄 어른이 부족했던 것이 틀림없다.
그래서 이런 충동을 제어하지 못하고 그것을 자연스러운 것으로 받아들이는 것이다.
생각보다 그의 상태는 안 좋은 듯싶었다.
“아 시발, 실수로 질러버렸네…. 아무튼, 그런 거 다 효과 없고, 애초에 저랑 세리아 아가씨는 아무 관계도 아닙니다.”
그는 잠시 혼잣말을 중얼거리더니 내 말을 전부 부정했다.
여전히 아무것도 모르는 사내다.
“…괜찮습니다. 많이 어긋났지만 아직 돌아올 수 있습니다.”
“아니, 뭐가 말입니까?”
“제가 도와드리죠. 여신님께 부끄럽지 않은 삶을 살아갑시다.”
사실 세리아의 이상한 버릇을 생각하면 교정이 더 시급한 건 그녀 같지만….
그녀는 죽어도 내 조언을 들으려 하지 않으니 별 효과가 없었다.
잘 됐다. 이 기회에 둘 다 올바른 길로 이끌어 보도록 하자.
용사님의 파티에서 누가 짐꾼이랑 눈이 맞았다느니, 여자 마법사가 이상한 취미를 가지고 있었다느니 하는 얘기가 도는 것도 곤란하니까.
세리아도 이런 걸 걱정했던 걸까. 조금은 이해가 간다.
하지만 그녀는 접근 방식이 잘못되었다.
문제를 해결하려면 자기만 희생하면 되겠지라는 안이한 생각을 할 것이 아니라, 이렇게 그가 바뀔 수 있도록 직접적인 도움을 주어야한다.
나는 그에게 구제의 손길을 내밀었고,
곧장 거절당했다.
“그건 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