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용사 파티의 짐꾼-45화 (45/236)

〈 45화 〉 [용사] 두 사람은

“무슨… 소리야?”

잘못 들은 거겠지?

세리아는 고개를 푹 숙이더니, 내가 불안해질 만큼 가만히 그러고만 있었다.

역시 뭐라도 말해야겠지?

“그….”

그러나 내가 말을 다 마치기도 전에 그녀가 갑자기 나에게 달려들었다.

“와앗! 왜, 왜 그래?”

순간 나도 모르게 경계해버렸지만, 그녀는 나를 가만히 안고 있을 뿐이었다.

그녀와 이렇게 직접 포옹한 건 처음이라 나는 순간 돌처럼 굳어버렸는데, 그녀는 아무런 말도, 행동도 없이 그저 날 안고만 있었다.

“…흐윽.”

내 어깨에 고개를 파묻은 그녀에게서 아주 작은 소리가 들렸다.

이렇게 가까이 있지 않았다면 듣지 못했을 소리다.

“세리아.”

이유는 모르지만,

아니, 어쩌면 알면서 외면하고 있는 것일지도 모르지만,

나는 더 묻지 않고 그녀를 안아주었다.

그녀의 떨림이 진정될 때까지.

“이제 됐어.”

그녀가 살짝 맹맹한 목소리로 말했다.

내가 그녀의 등에 두른 손을 내리자, 세리아가 고개를 들었다.

“에릭.”

“응?”

“난 아직 대답을 못 들었어.”

…이걸로 넘어간 거 아니었어?

평소라면 이 정도에 만족하고 돌아갔을 텐데, 오늘의 그녀는 조금 달랐다.

끝장을 보려는 것 같았다.

어쩌지.

아직 밑에는 아린과 유니도 있다.

잠시 눈을 데굴데굴 굴리며 시간을 좀 끌어봤지만, 그녀는 내가 대답할 때까지 놓아줄 생각이 없는 것 같았다.

“방금 전 걸로….”

“그걸로 넘어가겠다면 실망할 거야.”

오늘의 그녀는 굉장히 날카로웠다.

날카로우면서도, 너무 연약해보였다.

“나는….”

“거부하지 않으면 좋다는 걸로 받아들일게.”

그리고 그녀는 내 볼을 잡더니 그대로 키스했다.

쪽.

“으읍?”

어? 어어?

너무나도 갑작스런 상황에 머리가 제대로 돌아가질 않았다.

지, 지금 키스한 거야?

그녀는 내 볼을 붙잡고 마치 내 입술을 훔쳐가려는 듯 빨아들였다.

동그랗게 뜬 내 눈과 반대로, 그녀의 눈은 살며시 닫혀 있었다.

그녀는 자신의 존재를 남기려는 듯, 아니 무언가를 닦아내려는 듯 자신의 입술을 나에게 문질렀다.

나는 낯선 감각에 뻣뻣하게 몸이 굳어버리고 말았다.

이, 이럴 때는 어떻게 해야 하지?

다시 그녀를 안아주어야 하나?

내가 고민하는 사이, 어느새 그녀의 혀가 내 잇몸에 닿았다.

이, 이런 거까지?

그치만 이건, 이건 너무…….

순간 정령의 시야로 훔쳐봤던 그들의 키스가 생각났다.

보는 것만으로 흥분됐던, 그 격렬한 키스….

그녀의 행동은 그 때를 떠올리게 했다.

츄르릅, 츄릅.

그녀의 혀가 거칠게 내 이와 잇몸을 구석구석 문질렀다.

역시, 역시 그런 거겠지?

혀와 혀를…… 그들처럼 혀끼리 키스를…….

부풀어 오르는 기대감을 안고 나는 입을 조금씩 벌리며 그녀를 맞아들일 준비를 했다.

끼익.

그러나 계단 밑에서 들리는 낡고 소름끼치는 소리가, 우리 둘만의 공간을 거침없이 찢어버렸다.

퍽!

세리아는 순간 당황해 나를 밀치고 뒷걸음질쳤다.

균형을 잃을 뻔했지만 가까스로 한 발을 뒤로 빼 넘어지지 않고 버텼다.

우리의 시간을 방해받은 불만이라도 한 마디 해주려고 고개를 돌렸더니, 이미 계단을 다 올라온 아린이 미소 한 점 없는 얼굴로 세리아를 바라보고 있었다.

“우으, 안 보여 아린! 뭔데? 무슨 일이야?”

아린의 뒤에는 유니가 무슨 상황인지 궁금해 이리저리 고개를 내밀며 상황을 살피는 중이었다. 아린은 일부러 그녀가 상황을 보지 못하게 하려는 듯 그녀의 시야 대부분을 가린 상태였다.

“…아린.”

“세리아.”

세리아의 얼굴에 당혹과 부끄러움이 뒤섞였다.

순식간에 얼어붙은 공기에 나도 당황스러웠다.

이래서야 마치 둘이 싸우는 것 같지 않은가.

내가 중재라도 해야 하나 고민하던 찰나, 날카롭던 아린의 표정이 풀어지며 그녀가 팔짱을 꼈다.

“반칙이에요!”

“…응?”

“먼저 앞지르지 않기! 약속했잖아요?”

“…응. 그랬지.”

아린은 마치 어린아이를 혼내듯 팔짱을 끼고 대놓고 화난 척을 하며 그녀를 꾸짖었다. 그 모습은 정말 화가 났다기 보다는 마치 연극처럼 과장된 몸짓이었다.

“어? 세리아가 무슨 짓 했어?”

유니가 좌우로 통통 튀면서 상황을 조금이라도 더 눈에 담으려는 듯 애를 썼다.

“세리아가 반칙을 저질렀어요! 유니, 그걸 준비하죠!”

“아앗, 그걸 말하는 거지? 좋아, 세리아! 각오하는 게 좋을 걸!”

아린의 연극식 말투에 맞춰 유니도 과장된 몸짓으로 세리아에게 위협을 가했다.

물론 무섭지는 않고 귀여울 뿐이었다.

“저기, 무슨 얘기야?”

상황을 따라갈 수가 없어 눈만 깜빡이던 내가 슬쩍 끼었다.

“여자들의 재판이에요!”

“맞아! 에릭은 끼면 안 돼!”

혹시 내가 모르는 무슨 놀이인가?

세리아가 말해주지 않을까 싶어 그녀에게 시선을 슬쩍 옮겼더니, 그녀는 복잡한 표정으로 둘을 바라보고 있었다.

화를 내는 건 아닌 것 같고, 미안해하는 건가?

아니, 고마워하는 것 같기도 하고… 뭐지? 잘 모르겠다.

상황을 더욱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럼, 용사님! 저희는 먼저 들어가볼게요! 내일 아침에 뵈어요!”

“잘자 에릭!”

그녀들은 마치 근위병들이 침입자를 쫓아내듯 세리아의 양 팔을 각자 붙들더니 그녀들의 방으로 끌고 갔다.

세리아는 반항하지 않고 그녀들에게 질질 끌려가면서도, 아무 말 없이 나를 바라보았다.

무언가 할 말을 꾹 참고 있는 듯, 고개는 반쯤 숙인 채였다.

탁!

그녀들의 방문이 닫힌 뒤에야 고요함이 돌아왔다.

대체, 뭐였지.

워낙에 정신없이 지나가서 무슨 상황인지 이해가 잘 안 갔다.

그래도 확실한 건 세리아가 나에게 키스를 했다는 것.

그것도 어쭙잖은 입술끼리의 접촉이 아닌, 남자와 여자의 욕정적인 키스였다.

지금까지 은은하게만 호감을 드러내던 그녀에게, 무슨 심경의 변화가 생긴 것일까.

곧장 떠오른 건 죽어버린 도플갱어 앞에서 부자연스럽게 딱 달라붙어있던 둘의 모습이었다.

……그건 잊자.

나는 고개를 저어 상념을 치워버리고 내 방으로 돌아왔다.

조금 좁지만 이정도면 혼자 자기에 불편함이 없다.

옷을 갈아입고 가만히 침대 위에 눕자, 그녀들의 방이 가까운 탓인지 말소리가 드문드문 들려왔다.

어째 좀 흥분된 목소린데, 다들 도를 지나친 장난 같은 걸 치고 있는 건 아니겠지?

뭐… 그녀들이라면 잘 하겠지….

나는 흘러내리는 눈꺼풀에 저항하지 않고, 그대로 스르르 눈을 감았다.

***

끼이익.

얕은 잠에 빠져있던 나는 문이 열리는 소리에 반사적으로 정신을 차렸다.

도둑인가?

마족이 보낸 암살자?

내가 칼을 어디에 뒀더라.

나는 들키지 않게 한 쪽 눈만 슬쩍 들어올렸다.

어렴풋이 비치는 건 사람의 형태. 그럼 마족은 아닌 건가.

도둑이라면 살짝 겁만 줘도 쫓아낼 수 있겠지.

나는 번개처럼 몸을 일으켜 침대 옆에 세워둔 검을 집… 으려다가 손을 내렸다.

날 찾아온 건 도둑도 암살자도 아닌, 내가 잘 아는 인물이었다.

“세리아?”

이 밤중에 무슨 일로?

어둑어둑해서 잘 보이지는 않지만, 향기와 체형이 딱 그녀였다.

설마 도플갱어라던가 그러지는 않겠지?

그 마족은 죽었으니 당연히 아니겠지만, 순간 그런 생각이 먼저 들었을 정도로 뜬금없는 등장이었다.

“…미안해, 에릭.”

그녀는 차분한 목소리로 말했다.

“아, 아냐. 급한 일이라도 생긴 거야?”

정확한 시간은 몰라도 아직 해가 뜨려면 한참 남은 시간이라는 것쯤은 공기로도 느낄 수 있다.

평소라면 나와 그녀 둘 다 자고 있을 시간이다.

“나를 욕해도, 손가락질해도 좋아.”

그녀는 그렇게 말하며 걸치고 있던 로브를 벗었다.

차마 밖에서는 입고 다니지 못할 얇고 하늘하늘한 잠옷이 차가운 새벽공기와 맞닿았다.

“왜, 왜 그래?”

내 물음에도 그녀는 대답을 하지 않은 채, 가장 위쪽의 단추부터 하나씩 풀기 시작했다.

“세리아!”

이런 상황에서도 눈치를 못 챌 바보는 아니다.

그렇지만 지금 상황은 명백히 이상했다.

“왜 그러는 거야 갑자기!”

그녀답지 않다.

내가 아는 세리아라는 마법사는, 이렇게 충동적으로 일을 저지르는 인물이 아니다.

명백한 이상사태였다.

“부탁이야. 아무 것도 묻지 말아줘.”

그녀는 웅얼거리며 단추를 다 끄른 상의를 그대로 침대 위에 걸쳐두었다.

어둠 속에 반쯤 숨어있지만, 그녀의 맨살이 고스란히 내 시야에 들어온다.

그녀는 망설임 없이 입고 있던 치마도 밑으로 내려버렸다.

“으, 으앗, 세리아! 그만둬!”

나는 왠지 그 모습을 직시하면 안 될 것 같아 고개를 돌리며 눈을 질끈 감았다.

끼이익.

그녀가 침대 위로 올라왔는지 침대다리가 비명을 질렀다.

설마 부서지지는 않겠지. 그렇게까지 낡진 않았을 것이다.

“나를 봐줘.”

다른 생각을 하며 도피하려는 나를 그녀가 불러 세웠다.

“나를… 외면하지 말아줘.”

세리아답지 않은, 약한 소리였다.

그 말에 용기를 내 시선을 앞으로 돌렸다.

아까보다 가까워서일까, 그녀의 나신은 조금 전보다 선명했다.

목부터 허리, 골반을 지나 무릎까지.

과한 굴곡이나 밋밋한 직선 하나 없이 매끄러운 곡선형의 몸이었다.

그리고 봉긋한 가슴 중앙의 두 귀여운 점과, 가지런히 모인 하복부의 잔털…….

그녀는 속옷을 입고 있지 않았다.

“세, 세리아….”

“여기까지 와서, 돌아가라고는 하지 말아줘.”

그녀는 부끄러움에 가슴을 가리려다 잠시 멈칫하더니 팔을 내렸다.

그녀의 손이 부드럽게 내 손등을 쓰다듬었다.

“이런 걸 바라지는 않았는데…….”

자조적인 웃음.

세리아는 자신이 그녀답지 않은 짓을 하고 있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알고 있다면 왜….

아마, 이유는 하나겠지.

내 머릿속에서는 다시 불길한 퍼즐이 완성되려고 하고 있었다.

그녀는 내 손을 잡고선 들어올리더니, 자신의 가슴으로 끌어당겼다.

몰캉.

너무 크지 않은, 그러나 한 손에 다 잡히지는 않는 가슴이 내 손바닥과 맞닿아 있었다.

그녀의 유두도 내 손바닥 가운데에서 느껴진다.

살면서 처음 만져보는 여성의 가슴.

나는 거울을 보지 않아도 내 얼굴이 어떤지 알 수 있을 것만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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