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7화 〉 [용사] 문 너머
“제길!”
나도 모르게 욕이 나와 버렸다.
혹시 아린이나 유니가 들었을까 슬쩍 고개를 돌려 살폈지만 거리가 제법 떨어져있어 그런지 듣지 못한 것 같았다.
다행이다.
아니, 다행이라고는 할 수 없다.
세리아의 행방을 찾지 못했으니까.
남아있는 그녀의 외투를 봤을 때, 아마 그 일은 갑작스럽게 발생했을 것이다.
상대는 우선 세리아가 혼자 남는 시간을 노렸다.
아린이 자리에 있었기 때문에 일부러 그녀가 자리를 비우게도 만들었고.
교회 쪽 사람으로 위장이 가능하다면 아마도 상대는 도플갱어.
도플갱어가 세리아를 납치한 것이다.
그리고 도플갱어는 지금 우리를 유인하고 있다.
세리아를 돌려받고 싶으면 이곳으로 찾아오라고.
외투와 같이 놓여있던 지도가 그 증거다.
그녀가 스스로 지도를 두고 도플갱어를 쫓아갔을 리는 없다.
도플갱어가 의도적으로 두고 갔다고 보는 편이 맞을 것이다.
분명 함정이 기다리고 있겠지.
그러나 세리아를 버릴 수는 없다.
나뿐만이 아니라, 유니와 아린도 마찬가지였다.
설령 그 어떤 함정이 기다리고 있다 하더라도, 우리는 세리아를 포기할 수 없었다.
문득 나 혼자 달리는 느낌이 들어 뒤를 돌아보니 유니와 아린이 내 속도를 따라오지 못하고 있었다.
“하아… 하아… 용사님, 먼저 가세요!”
“금방 따라갈게…!”
그녀들이 나보다 체력이 낮다는 사실을 잠시 잊고 있었다.
두고 가야하는가?
나 혼자 가는 것보다는 같이 가는 게 더 안전할 것이다.
그렇지만 우리가 늦어지면 늦어질수록 세리아가 위험해진다.
그녀에게 무슨 일이 일어날지…….
내가 결정을 내리지 못하고 주춤거리자 둘이 어서 가라며 나를 재촉했다.
“괜찮아, 에릭! 먼저가!”
“방해만 돼서 죄송해요, 용사님. 금방… 금방 따라갈게요.”
나에게는 여신님이 내려주신 힘이 있다.
여차할 땐 그녀들의 힘을 빌릴 수도 있으니, 나 혼자 가도 괜찮으리라.
나는 결심을 굳히고 그녀들에게 지도를 대신 건네줬다.
“요, 용사님… 먼저 가서 세리아를 찾아주세요!”
“아니야. 너희들이 길을 잃을지도 모르잖아. 이걸 보고 찾아와. 나는 다 외웠으니까.”
중요한 건 셋이 무사히 합류해야한다는 것이다.
만약 세리아를 구하더라도, 길을 잃은 둘이 적에게 당한다면 의미가 없다.
길은… 조금 불안하지만 일단은 대충 기억했다.
근처에 도착하면 금방 알아볼 수 있겠지.
사악한 마기가 풀풀 나는 곳일 테니까.
“알았어. 에릭, 반드시 세리아를 구해줘.”
유니가 지도를 받았다.
그녀는 내 눈을 바라보며 세리아를 향한 걱정을 나에게 맡겼다.
“응.”
반드시 구해야한다.
너무 늦기 전에.
내 기억에 의하면 분명 이 즈음인데.
나는 주변을 둘러보며 수상한 건물을 찾았다.
전부 똑같잖아.
구분이 안 간다.
애초에 정말 여기가 맞는가?
여긴 너무… 너무 평온했다.
그냥 평범한 거리다.
사악한 마족들이 무리지어 민가를 습격한다거나, 딱 봐도 수상한 건물이 들어서있다거나 하지도 않았다.
거리에 사람이 없기는 하지만, 해가 질 무렵이라는 점을 생각해보면 그리 이상하지 않다.
다들 이미 집에 있겠지. 굳이 이런 시간에 밖을 돌아다닐 사람은 별로 없다.
주변에 물어볼 수도 없는 건가.
아니, 지금은 수단방법을 가릴 때가 아니다.
쾅쾅!
나는 아무 문이나 두드리며 세리아의 행방을 물었다.
“누구를 찾는다고? 음, 본 적 없는데….”
“아, 누가 막 소리 지르며 뛰어다니긴 하던데….”
“글쎄, 어디로 갔는지는 잘….”
집집마다 묻고 다녔지만 다들 그녀가 어디에 있는지 정확하게는 알지 못했다.
다만 그녀가 도플갱어를 쫓아다녔다는 것만큼은 알 수 있었다.
납치가 아니었나.
그럼 유인인가.
어느 쪽이든 그녀가 위험하다는 사실은 달라지지 않는다.
제길, 어디 있는 거야 세리아…!
그들이 알려준 방향으로 계속 뛰었다.
슬슬 지도대로 가고 있는 것인지도 헷갈린다.
그렇지만 그들이 말해준 방향이 더 정확하겠지.
뛰다보니 점점 주인 없는 집들이 늘어났다.
혹시 이 주인 없는 집들 중 어딘가에 그녀가 있는 것은 아닐까?
나는 잠시 발걸음을 멈췄다.
이대로 가도 딱히 특별한 건 없다.
그저 비슷한 건물들이 더 늘어서있을 뿐.
만약 도플갱어가 여기로 그녀를 유인했자면, 이 앞에도 딱히 특별한 건축물 같은 건 없으니 분명 여기 있는 건물들 중 어딘가가 목표였을 것이다.
그렇다면 슬슬 빈집들도 그냥 지나칠 수가 없다.
똑똑.
“세리아! 혹시 거기 있어?”
대답은 없다.
그냥 빈 집일 뿐.
문은 잠겨있지 않았다.
빈 집에는 쓰레기들만 굴러다녔다. 특별할 건 아무 것도 없다.
여긴 아니야.
다음.
똑똑.
“세리아!”
마찬가지로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여기도 빈 집이다.
철컥.
하지만 문은 잠겨있었다.
혹시 여기에?
쿵쿵!
“세리아! 세리아!”
혹시 몰라 귀를 문에 가져다댔지만, 안에서는 아무런 소리도 나지 않았다.
여기도 아닌 걸까.
창문 같은 거라도 있으면 좋을 텐데, 안을 들여다볼 수가 없다.
…문을 부숴볼까.
어쩌면 여기 갇혀있다거나 그런 걸 수도 있잖아.
나는 칼자루를 꾹 쥐었다.
안 된다.
여기에 그녀가 있으리라는 보장은 없다.
여기에는 이렇게 문 잠긴 집이 한둘이 아니다.
모든 빈집을 박살내기라도 하겠다는 건가?
…다른 집을 찾아보자.
쿵쿵!
“세리아! 혹시 거기 있어?”
아무도 없… 나?
“…잇!”
무슨 소리가 났다!
혹시 잘못 들은 건 아니겠지?
“에… 흐읍!”
분명 사람의 목소리다!
작아서 잘 구분은 가지 않지만, 분명 사람의 목소리다.
쿵쿵!
“누구 계시면 잠시 문 좀 열어주세요!”
사람 목소리가 나는 걸 보면 평범한 민가인가?
“…읍, 흐읍…. 츄읍….”
이상한 소리가 난다.
어디서, 들어본 것 같은, 그런 소린데…….
“그, 그만… 츄릅, 츄읍….”
…윽!
당황해서 후다닥 거리를 벌렸다.
왜 내 말에 반응을 안 하나 했더니, 다른 일로 바쁜 모양이었다.
“…크흠.”
나는 괜히 부끄러워 헛기침을 하며 자리를 떴다.
문 앞에서 그런 짓을 하고 있다니…… 나로서는 상상도 못할 일이다.
다른 곳을 찾아보자.
똑똑.
“…….”
아까처럼 중요한 순간을 방해할까봐 얌전히 노크만 했다.
아무도 없나?
여긴 사람이 사는 곳과 아닌 곳이 구분이 잘 안 된다.
제길, 이래서야 세리아를 어떻게 찾지?
“에릭!”
“용사님!”
익숙한 목소리가 내 등뒤로 들렸다.
“아린! 유니!”
다행이다. 나도 그녀들도 길을 잃진 않은 모양이다.
“세리아는 찾으셨나요?”
“아니 아직…. 그렇지만 여기 어딘가에 있을 것 같아.”
내가 대충 상황을 설명하자 그녀들도 금방 이해했다.
“그렇군요…. 그럼 셋이서 나눠서 찾아볼까요? 이 많은 집을 전부 둘러보긴 힘들 것 같네요.”
아린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래. 다 같이 찾는 것보단 나눠서 찾는게 더 빠르겠지.
“하지만 너무 무리하지는 마. 무슨 일 있으면 바로 부르고.”
“후후, 걱정해주시는 건가요? 고마워요, 용사님.”
“아앗! 아린, 너무 달라붙지 마!”
은근슬쩍 나에게 다가오는 아린을 유니가 꽉 붙잡았다.
“쳇. 알았어요, 유니. 그럼 일단 이 집부터 조사해볼까요?”
아린은 그러면서 자기 오른편의 집의 문을 두드리려 했다.
저 집은…….
“자, 잠깐만, 아린!”
“네?”
“거, 거긴… 아까 내가 했어.”
저 집에는 사람들이 살고 있다. 아까 확인했지.
…좀 부끄러운 짓을 하고 있었지.
“그래요? 그럼 전 저 쪽을 돌아볼게요. 유니는 어떻게 하실래요?”
“나? 나는 음… 건너편을 볼게!”
아린은 내 반대쪽으로, 유니는 내 건너편을 찾기로 했다.
“…….”
아린 때문에 잠시 잊고 있던 저 집이 다시 신경 쓰이기 시작했다.
여자의 교성.
설마 세리아가 그러고 있을 리는 없으니, 이 도시에 사는 주민이겠지.
…안 된다. 몰래 듣는 건 나쁜 짓이다.
그래도 조금… 아주 조금 호기심이 들었다.
평소에도 미인 셋이랑 같이 다니는 나다. 심지어 셋 다 나에게 어느 정도 호감도 있다.
나도 남자인 만큼 당연히 이런저런 생각이 들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렇지만 나는 참아야했다.
다른 누군가에게 상처를 주고 싶지도 않고, 우리에겐 마왕 토벌이 더 시급한 문제니까.
그래도 잠깐은, 아주 잠깐은 내 호기심을 채워도 괜찮지 않을까.
그래. 혹시 모르잖아.
알고 보니 사실 세리아였다든가…… 아니, 무슨 소리하는 거야. 절대 그럴 일 없다.
차라리 궁금해서 듣고 싶은 거라고 인정을 하고 말지, 그녀라고 상상하는 것 자체가 죄악이다.
“에릭? 거기 아까 확인했다고 하지 않았어?”
등 뒤로 의아해하는 유니의 목소리가 들린다.
“새, 생각해보니까 제대로 확인을 못 한 거 같아서… 다, 다시 한 번….”
“그래? 알았어!”
유니는 그러면서 정령을 불러 집 내부를 확인했다.
그렇구나. 정령술이면 그런 것도 가능하구나.
그렇다면 나도 할 수 있을 터.
남의 집을 몰래 확인한다는 것에 조금 거부감도 있었지만, 이건 비상사태잖아?
그러니까… 아마 괜찮을 것이다….
절대 호기심 때문이 아니다….
나는 유니에게 사과하며 그녀의 정령술을 빌렸다.
바닥에서 상반신만 모습을 드러낸 꼬마아이.
흙의 정령이다.
말은 할 수 없지만 내 말을 알아들을 수는 있다.
“안의 모습을 보여줘.”
그는 고개를 끄덕이더니 다시 밑으로 가라앉았다.
그리고 내 눈에, 약간의 노이즈가 일기 시작했다.
이건 정말 말로 표현하기 힘든 감각이다.
마치 눈이 하나 더 달린 듯한 느낌.
인간의 시각과는 전혀 다르다.
정령들의 눈은 우리 인간의 눈처럼 사물을 선명하게 구분하지 않는다.
조금 뭉개져 있다고 해야 할까, 어떤 존재가 무엇을 하는지는 알 수 있지만 그것이 누구인지는 알 수 없는, 그런 다소 애매모호한 느낌의 감각이다.
아, 보이기 시작했다.
정령과 내 시야가 이어진 것이다.
생각해보니 소리까지는 들려달라고 하지 않았네.
뭐, 문 너머로도 조금씩 들리니까 괜찮겠지.
잠깐만, 아주 잠깐만 확인하고 바로 이동하자…….
“츄읍, 츄읍…… 쮸읍, 쯉쯉.”
그리고 그 건물 안에서, 나는 두 남녀가 혀를 섞어가며 열정적으로 키스하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