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6화 〉 [짐꾼] 함정 속으로
도플갱어가 목적지까지 크게 빙 돌아가는 동안, 나는 지름길로 먼저 약속장소까지 도착했다.
이 녀석이 준 지도 근처의 어느 건물.
그 놈이 그 놈이라 구분이 안 가니까 작게 동그라미를 쳐뒀다.
시킨 대로만 잘 했다면 아마 문이 열려있을 것이다.
끼익.
좋아. 열려있군.
마법은 잘 걸었으려나? 아쉽지만 딱히 마법적 재능이 있는 것은 아니라서 거기까진 알아볼 수 없다.
그런데 왠지 공기 중에 낯선 감각이 느껴진다.
대체 뭐지?
지금껏 한 번도 느껴보지 못한 감각이다.
육감… 이랑은 조금 다른데.
이 놈 사실 날 속이고 이상한 짓 한 거 아냐?
그럴 지능이 있는 녀석처럼 보이지는 않았지만, 낯선 감각이 왠지 불안했다.
무엇인지는 몰라도 그다지 기분 좋은 느낌은 아니다.
에이씨, 모르겠다.
어차피 여기까지 왔으면 물릴 수도 없지.
바닥에 널브러진 밧줄을 집자, 밧줄이 제멋대로 움직여 나를 꽁꽁 묶었다.
으윽, 너무 세게 조이는데!
안 아프게 해달라니까….
도플갱어한테 시켰던 명령은 총 3가지.
하나는 세리아를 여기까지 유인할 것.
다른 하나는 내가 피해자인 것처럼 적당히 잘 꾸며둘 것.
마지막은 세리아가 안에 들어오면 문을 잠그고 안개를 사용할 것.
밧줄로 묶여있어야 의심을 덜 살 것 같아 안 아프게 해달라고 했는데, 보나마나 강도를 어떻게 조절해야할지 몰랐던 게 분명했다.
이 놈 문은 제대로 잠글 수 있는 거 맞지?
평범하게 잠가봤자 세리아가 마법으로 박살내면 그만이니, 이쪽도 마법적인 조치가 필요했다.
마법으로 그녀를 이기지는 못하겠지만, 적어도 잠시간 시간은 벌어줄 그 정도 마법이.
자, 남은 건 기다리는 것뿐.
만약 실패하면?
그럼 그 땐 불쌍한 피해자인 척 해야지.
가만히 앉아 기다리기만 하니까 영 불안하네.
역시 주도적으로 나서지 않으면 안심이 안 된다.
잘 하겠지?
제발 잘하자.
초조하게 기다리다보니 밖이 소란스러웠다.
“…춰! …거기 서라고!”
작아서 잘 모르겠지만 아마 세리아겠지.
좀 걱정했는데 성공했구나.
“누, 누구 있습니까? 도와주십쇼!”
나는 밖을 향해 소리 질렀다.
“사람? 지, 지금은 바쁜데?”
그녀가 당황하며 대답했다.
“제발 도와주십쇼! 갇혔습니다!”
“미안한데 지금 좀 바쁘거든! 다른 사람 찾아봐!”
“제, 제발! 마족에게 잡혔습니다!”
“……마족?”
당장이라도 뛰어갈 거 같던 그녀가 말을 잠시 멈췄다.
“마, 마족이 절 가뒀습니다!”
“…….”
갈등하는지 잠시 그녀가 말이 없었다.
“앗! 도망갔잖아!”
잠시 우물쭈물하는 사이 도플갱어가 도망친 모양.
지금까지 잡힌 적 없다는 사실을 생각해볼 때 의외로 도망치는 능력 하나는 좋은가보다.
“크읏….”
그녀가 분한 듯 발을 동동 구르는 소리가 났다.
그래, 놓쳤으니 이제 문이나 열어줘.
그리고 나의 먹이가 되어라.
“하아… 기다려봐. 곧 열어줄 테니.”
이미 도플갱어는 놓쳤다.
그럼 마족에게 납치당했다는 피해자라도 확보해야지.
“마법이…? 하긴, 갇혔다고 그랬지.”
문밖에서 그녀가 주문을 외우는 소리가 들렸다.
쩌적.
무언가에 금이 가고, 부서지는 소리가 들렸다.
“마법은 풀었으니 이제 열릴 거야.”
“저… 지금 묶여있습니다.”
“하아… 알았어.”
내 말에 한숨을 쉰 세리아는 조심스레 문을 열었다.
“응?”
그녀가 내 얼굴을 보고 당황했다.
“네가 왜 여기에 있어?”
“…잡혔으니까?”
그녀가 기가 막힌다는 듯 나를 내려다봤다.
“뭐하다가 이 지경이 됐어?”
그 정도 답변은 준비해뒀지.
나는 그녀들을 감옥에서 꺼내주는 과정에서 도플갱어에 대해 알았다.
정의감에 넘치는 사나이인 이 제렌은 마물이 감히 도시에서 설치는 지금 상황을 도저히 좌시할 수가 없었다.
“…정의?”
그녀가 말도 안 된다는 소리를 들었다는 듯 코웃음 쳤다.
이 시발년이, 감히 날 비웃어?
아무튼 나는 도플갱어에 대해 조사하면서 그들의 꼬리를 잡았지만, 함정에 걸려 이렇게 묶인 신세가 되어버렸다.
대충 이런 스토리였다.
“그래? 뭐 알아낸 거 있어?”
가장 먼저 물어보는 게 그거라니.
당연히 나를 풀어주는 게 먼저 아냐?
하여간 인성에 문제 있는 년이다.
“일단 좀 풀어주지?”
“…그대로 묶여있는 것도 좋아 보이는데?”
그녀는 이 때다 싶었는지 건방지게도 내 머리 위로 기어오르려 했다.
지금은 자기가 더 우위에 섰다고 생각하겠지.
하지만 현실은 정반대. 결국 내 손바닥 안에서 놀고 있는 꼴이다.
그 사실도 눈치 못 챈 그녀가 우스워 비웃음이 세어 나올 뻔했지만, 입술을 꽉 깨물어 겨우 참았다.
안 되지.
여기까지 와서 일을 망칠 순 없잖아.
“…빨리 풀어.”
“풀어주세요라고 해보는 건 어때?”
내가 분해한다고 생각했는지 그녀가 키득거렸다.
전에 존댓말 시킨 것에 대한 복수인가?
귀여운 년.
나는 뒤로 묶인 손으로 벽을 톡톡 두드리며 신호했다.
문을 닫고 슬슬 시작하라는 신호.
쾅!
도플갱어가 내 신호를 알아듣고 잽싸게 문을 잠갔다.
“어?”
세리아가 당황하면서 뒤를 돌아봤다.
푸쉬익!
그리고 동시에 건물 천장에서 분홍색 안개가 새어나오기 시작했다.
“이, 이게 무슨….”
그녀가 당황하며 문을 열려고 했다.
당연히 열릴 리가 없지.
“마법? 이 정도로 막을 수 있을 것 같아?”
그녀가 스태프를 들어 올리며 주문을 외웠다.
그러나 그녀의 주문은 도중에 끊어지고 말았다.
“주문이… 왜?”
마력이 모이다가 부자연스럽게 끊긴다.
마력을 품은 안개가 마법시전을 방해하기 때문이다.
잠만, 내가 이걸 왜 이해하고 있지?
왠지 자연스럽게 마력의 흐름이 보인다.
슬쩍 등을 바라보니 장미문양에서 미약하게 빛이 새어나오고 있었다.
이 마력의 흐름을 읽는 눈까지도 그녀의 기술로 취급하는 건가?
하긴 마법도 훔쳐 쓰는데 이것도 못 할 이유가 없지.
내가 그녀의 눈으로 읽었다는 건, 그녀도 상황을 이해했단 뜻이다.
“큭… 말도 안 돼!”
여전히 납득하질 못했는지 몇 번이고 마법을 시도하는 세리아.
허나 번번이 실패한다.
전부 천장에서 새어나오는 안개 탓이다.
안개를 그치게 하려면? 천장에 매달린 저 장치를 부수거나 마법으로 정화해야지.
그러나 안개 때문에 마법시전이 불가능한 상황에서 마법으로 정화한다는 건 어불성설.
그럼 남은 건? 물리적으로 박살내는 수밖에 없다.
휙!
그녀가 자기 스승에게서 받았다는 소중한 스태프를 천장으로 집어던졌다.
천장에 닿기도 전에 떨어지네.
마법사라 힘이 약할 거라고는 생각했지만 이정도일 줄이야.
“크읏… 왜 안 닿는 거야!”
스태프 말곤 집어던질 것도 없다.
여긴 정말 빈 창고처럼 아무 것도 없으니까.
그녀가 대신 던질만한 걸 찾다가 나와 눈이 마주쳤다.
“…아.”
그런데 그녀의 반응이 이상하다.
갑자기 나를 보더니 얼굴을 붉히고 시선을 바로 돌려버린다.
안개의 효과가 슬슬 돌기 시작하는 것이다.
마족의 최첨단 기술로 만들어 냈다는데, 솔직히 거기에는 관심 없고 감정을 고양시킨다는 점이 중요했다.
그 놈은 부랑아들의 분노와 흥분 같은 감정을 자극시킬 것이라 그랬는데, 그럼 다른 쪽으로도 사람을 흥분시킬 수 있는 것 아닌가?
내 질문에 그 녀석은 그런 생각을 해본 적은 없지만 가능할 거라고 대답했다.
양이 매우 한정적이라 쓰고 싶지 않다는 걸 간신히 설득해 성적 흥분제로 개조하는데 성공했다. 물론 그 상관이란 놈을 들먹인 것도 많이 효과적이었다.
뭐 덕분에 녀석의 계획은 삐걱대기 시작했지만, 마족의 사악한 계획을 방해한 것이니 정의는 나한테 있다고 할 수 있으리라.
세리아가 발정나는 건 그냥 일종의 덤이다.
후우, 시발년 존나 따먹고 싶네.
“흐윽… 왜 갑자기….”
갑작스럽게 흥분한 자신이 당황스러웠는지 그녀가 머뭇거렸다.
당장이라도 머리채를 잡고 박아버리고 싶었다.
…당연한 얘기지만 나도 안개의 효과를 받는다.
“답 없으면 일단 나부터 좀 풀어주지?”
일단 묶여있으면 아무 것도 못하잖아.
이미 발기해버렸는데 이대로 아무것도 안하고 있자니 돌아버릴 것 같다.
내가 입을 열자 그녀가 눈동자만 굴려 나를 바라봤다가 고개를 홱 돌렸다.
“…호, 혼자서도 할 수 있어.”
“못하는 거 같은데?”
“흐읏… 마, 말 걸지 마….”
후우, 후우.
슬슬 못 참을 거 같은데.
“빨리 풀어!”
존나 꼴린 상탠데 아무 것도 못하고 묶여있으니 답답해서 소리를 꽥 질렀다.
“하아… 하아….”
세리아는 벌써 벌게진 얼굴로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내 말 안 들려? 풀라고 이거!”
“하악… 학… 아, 알았어….”
효과 좋네.
너무 좋아서 지금 돌아버릴 것 같다.
빨리, 빨리 싸버리고 싶다!
“윽… 가, 가만히 있어봐….”
그녀가 다가와 어설픈 손놀림으로 밧줄을 조금씩 풀었다.
그렇게 복잡하게 묶여있지는 않았지만, 흥분 탓인지 그녀의 손이 자꾸만 미끌어졌다.
자꾸 밧줄이 아니라 내 몸에 닿는 것도 그래서겠지?
“흐윽… 왜, 왜 세우고 있는 거야 변태새끼….”
“그러는 너도… 질질 싸고 있는 거 안 보이냐?”
사실 보이지는 않지만.
허벅지를 배배꼬는 거 보면 뻔하지 뭐.
덕분에 그녀는 지금 엉덩이를 바깥쪽으로 쭉 빼낸 채 상체만 숙여 내 밧줄을 풀고 있는 중이었다.
손이 더듬거리며 밧줄과 나를 막 만지는 동안, 그녀의 다리도 서로 마찰하며 열을 내고 있었다.
“흐윽… 흐으… 가, 가만히 있어!”
“움직이는 건… 너거든.”
알다시피 나는 묶여서 움직이지 못하고 있다.
혼자 달달 떨고 있는 건 세리아 본인이다.
투둑.
마침내 밧줄이 풀려 바닥으로 떨어졌다.
“흐으… 흐윽….”
그녀는 밧줄을 전부 풀었음에도 나한테서 멀어지려고 하지 않았다.
“스읍… 흐읍… 내, 냄새나….”
“뭐, 냄새?”
이 상황에서 그런 말을 해야겠냐?
“…수, 수컷의… 냄새…♡”
그녀의 눈은 반쯤, 아니 거의 확실히 풀려있었다.
“아, 안돼… 나는 에릭을… 에릭이 있어….”
그녀는 흥분으로 맛이 간 상태에서도 용사를 떠올리며 애써 나를 밀쳤다.
하나도 힘이 들어가지 않은 상태였지만.
그녀는 슬금슬금 뒷걸음쳤다.
이대로 계속 붙어있다간 스스로를 자제하지 못할 것이라 생각했으리라.
그러나 이대로 물러나봤자 갈 곳도 없다.
그녀가 한 걸음씩 뒤로 물러설 때마다, 나도 한 걸음씩 앞으로 다가갔다.
“오, 옷 벗지마…! 주, 죽일 거야!”
내가 상의를 벗으며 다가오자 그녀가 바들바들 떨면서 스태프를 내밀었다.
그렇게 힘 빠진 채로 들어봐야 뭘 할 수 있겠나?
탁.
내가 그녀의 손을 치자 스태프가 손에서 벗어나 저 멀리 떨어졌다.
“흐윽….”
세리아가 겁에 질린 표정으로 뒷걸음질 쳤다.
하지만 이미 그녀는 문앞까지 내몰린 상태였다.
“자, 잠깐만… 말로 하자….”
다리에 힘이 풀렸는지 털썩 주저앉은 그녀가 나를 올려다보며 부탁했다.
물론 난 대답하지 않았다.
“이, 입으로… 아니, 가슴이랑 같이 해줄 테니까….”
그녀도 직감했으리라.
여기서 내가 그치지 않을 것이라는 것을.
“나, 나는… 흐윽… 에, 에릭한테….”
그녀의 손이 더듬더듬 스태프 쪽으로 향한다.
아직도 반항할 정신이 남아 있었나?
꽈악!
나는 그녀의 손을 짓밟았다.
“아악! 아, 아파!”
그녀는 고통에 얼굴을 찡그리며 비명을 질렀다.
약하다.
고작 이것밖에 안 되는 년이었나?
함부로 올려다볼 수도 없는 고귀한 존재. 마법사.
그렇지만 한 꺼풀 벗기면 그녀도 결국 마법사 이전에 암컷이었다.
그러고보면 처음도 최음독이었지.
발정난 그녀가 내 앞에서 공개자위를 한 것이 시작이었다.
그리고 결국 그 끝도 최음효과를 지닌 안개였다.
이제 발정난 그녀는 나에게 소중하게 지켜온 처음을 바칠 것이다.
쿵쿵!
누군가가 문을 거세게 두드렸다.
“세리아! 혹시 거기 있어?”
용사군.
제 때 도착했다.
“히잇…!”
그녀가 에릭의 존재를 눈치 채고 정신을 차렸다.
걱정할 것 없다.
어차피 안은 보이지 않으니까.
용사도 그녀가 여기 있는 것을 확신하고 두드린 게 아니다.
이 수많은 건물들 중 어딘가에 세리아가 있을지도 모른다고만 생각하고 있겠지.
즉, 이쪽에서 먼저 말을 걸지 않는 한 쉽게 눈치 챌 수 없다.
좋아.
이제 승부를 해보자, 용사.
네가 세리아를 찾아내는 것이 먼저일지, 아니면 내가 그녀의 처녀막을 찢는 것이 먼저일지.
“에, 에리…… 흐읍!”
소리를 지르려던 세리아를, 나는 내 입으로 거세게 틀어막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