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5화 〉 [짐꾼] 함정 속으로
옷을 벗다 말고 고개를 돌려 등에 난 반점을 바라보았다.
아니, 이젠 반점이 아니지.
한 눈에 알아볼 수 있을 만큼 커진 검은 장미.
딱히 문신 같은 걸 한 적도 없는데 어느새 부턴가 내 몸에 새겨져 있었다.
지금의 나는 이것이 무엇인지 안다.
장미의 문양이 새겨진 자들의 능력을 훔치는 힘.
용사의 것과는 아마도 같으면서도 다른 능력일 것이다.
정확하게 본 적이 없으니 확신을 내릴 수는 없지만.
아무튼 존나게 매우 대단한 힘이라는 뜻이다.
그리고 나는 지금 그 존나게 매우 대단한 힘을 가지고 이 도시에서 제일 값싼 숙소에 묵고 있었다.
“시발….”
벌레가 또 바닥을 기어다니길래 밟아 죽였다.
벌써 몇 마리짼지 모르겠네.
대단한 힘을 가지고 있으면 뭐하는가? 돈이 없는데.
차라리 돈을 훔치는 힘이었다면 더 좋았을 걸.
그 빌어먹을 뇌물로 돈을 너무 많이 써버려서 지출을 줄여야했다.
내가 미쳤지…….
왜 그딴 걸로 돈을 써버려서.
지갑을 거꾸로 뒤집자 동전 몇 개가 바닥에 떨어졌다.
여섯 개인가. 이게 지금의 내 전 재산이다.
이게 다 떨어지면? 그 땐 포기하고 딴 일 찾아보던가 쫄쫄 굶던가 해야 한다.
굶는 건 몰라도 다른 일을 찾아볼 순 없다.
세리아 이년을 여기까지 교육시켜뒀는데 포기하고 딴 일 찾아보라고?
절대 안 되지.
그년을 고분고분하게 만들 때까지 멈출 수 없다.
도중에 딴 놈이 가로채는 꼴은 죽어도 못 보지.
저 쪽에서 사양하더라도 억지로 따라가 줄 생각이다.
문득 지갑에서 같이 삐져나온 종잇조각이 보였다.
그 때 그 이상한 놈한테서 받은 지도다.
받았을 때는 속옷에 보관해뒀지만 영 느낌이 불편해서 나중에 지갑으로 옮겼다.
뭐랬더라. 달이 가득 차는 날에 오랬던가?
아마 보름달이 뜨는 날을 얘기하는 거겠지만, 내가 보기에 한 열흘쯤 남았다.
그때까지 기다리라고? 미쳤어?
잠시 지도를 만지작거리던 나는 마음을 정했다.
그래. 뭐하는 곳인지 몰래 살펴나 보자.
어차피 별 달리 할 일도 없잖아.
막상 근처까지 와보니 그놈이 준 지도가 너무 애매하게 그려져 있어서 구분이 잘 가지 않았다.
이 건물이 저 건물 같고, 또 왜 이렇게 빽빽하게들 지어뒀는지.
하나같이 나보다 나이가 많아 보이는 낡은 집들이었다.
드문드문 빈 집도 보이지만, 대부분 사람이 사는 곳이었다.
거짓말 안 보태고 내가 묵던 숙소보다 못한 것 같다.
굳이 이런 곳에 살고 싶나 하는 생각도 들지만, 뭐 돈 없는 놈들이니 이러고 살겠지.
참으로 비루한 인생이었지만 생각해보면 나도 그들과 다를 게 없다.
아니, 나는 집도 없으니 어쩌면 나보다 잘 사는 놈들이라고 할 수 있겠다.
그런데 이런 곳에 대체 뭐가 있다고?
그 놈은 나에게 무슨 힘을 주겠느니 복수할 기회를 주겠다니 뭐 이딴 소리를 했지만, 이곳은 아무리 봐도 그런 힘의 편린조차 느껴지지 않는 빈민촌이었다.
혹시 몰라 빈집들도 한 번씩 살펴봤는데 딱히 수상한 곳은 없었다.
애초에 잠긴 곳이 태반이라 제대로 확인도 못했지만.
이새끼 나한테 제대로 지도 준 거 맞아?
참으로 합리적인 의심이 들기 시작할 때였다.
“아직… 때가 되지 않았다….”
내 등 뒤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아이씨 깜짝이야. 언제 또 나타났대?”
아니나 다를까 나한테 지도를 준 그 때 그 놈이었다.
아니지, 조금 다른 거 같기도 한데.
잠깐 유심히 살펴봤지만 내가 그런 남정네 새끼 얼굴을 제대로 기억하고 다니는 것도 아니고, 차이를 구분할 수는 없었다.
그래도 어쨌든 느낌상으로는 분명 그 때 그 놈이 맞았다.
“듣지 못했는가? 달이 차는 날에 다시 오라고 했다….”
“아니 달이고 나발이고 그냥 지나가던 건데?”
아무래도 이놈은 좀 대가리가 부족한 것 같다.
이거 뭐 들키면 안 되는 그런 거 아냐?
내가 생각하기에 이렇게 함부로 말 걸어서 좋을 건 없어 보이는데.
“…….”
그 놈은 거기까진 미처 생각 못했는지 갑자기 조용해졌다.
아무래도 멍청한 새끼가 맞는 것 같다.
그럼 더 좋지.
잘 속을 거 같은데 이것저것 물어보자.
“야, 근데 보름달에 불러서 뭐하려고?”
“…그건 말할 수 없다.”
“그것도 모르면 내가 뭘 믿고 찾아가겠냐?”
“음….”
고민하는 건가?
아니, 그럴 거면 왜 말 못한다고 그랬냐?
“야 나한테만 알려줘. 어디 소문 안 낼 테니까.”
“…안 된다. 말하지 말라고… 그랬다.”
얼씨구.
누가 그랬냐고 물어보면 대답해주지 않을까?
그런 생각이 들만큼 멍청한 대답이었다.
“누가 그랬는데?”
“…말할 수 없다.”
“사실 내가 너 일 잘하나 감시하려고 파견 나왔거든. 이렇게 비협조적이면 곤란해.”
“루, 루엘라 님이 날 의심할 리가 없다!”
뭐 누구?
누군진 몰라도 이 놈 상관인 것 같다.
그럼 또 바로 써먹어줘야지.
“그건 네가 정할게 아니라 루엘라님이 정하시는 거지. 그래 알았어. 대답 거부했다고 전해드릴게.”
“자, 잠깐 기다려라…!”
루엘라가 누군지도 모르고 저 놈이 뭐하는지도 모르지만 아무튼 다급해진 녀석이 먼저 꼬리를 말았다.
세상에 이렇게 지능 딸리는 새끼는 처음 봤다.
“그래. 하나씩 말해봐.”
“네, 네 녀석, 어떻게 인간 모습을 하고 있지?”
“응?”
…응?
“도, 도플갱어를 하나 더 만들었단 말인가! 나를 못 믿어서! 그럴 순 없다!”
난 아무 말도 안했는데 갑자기 혼자 열불을 내기 시작하는 남자.
굉장히 위험한 소리를 들은 기분이 들었다.
방금 인간 모습이라 그랬지?
…이 새끼 마물이야?
이런 시발, 내가 마물새끼랑 대화를 하고 있었다니!
사람 같아서 눈치 못 챘는데!
“…왜 말이 없나.”
그가 여전히 씩씩거리면서 나를 바라봤다.
아니, 뭐라고 대답해야할지 갑자기 곤란해졌는데.
생각이 정리가 안 된다.
마물… 마물이 왜 인간 모습을 하고 있지?
그러고보니 병사 놈들이 도플갱어 얘기를 했었지.
아하. 이놈이구나.
그럼 얘만 잡아가면 나도 한몫 잡을 수 있단 건가?
그렇다는 건 아마 용사 일행이 노리는 것도 얘일터.
아니, 이렇게 띨빵한 놈을 아직도 못 잡았단 말이야?
이해가 안 되는군.
이 놈 지능 상태를 보아하니 적당히 구슬려서 영주 앞으로 데려가는 건 일도 아닐 것 같았다.
그럼 용사도 할 일 없어졌으니 다시 출발하겠지.
나쁘지 않다.
“…나는 도플갱어가 아니다. 루엘라님이 너를 의심하는게 아니니 화 풀도록.”
“그, 그렇지…. 그 분이 그러실 리가 없다….”
대충 답해주자 그 놈의 말투가 눈에 띄게 밝아졌다.
도플갱어라.
그 사실을 알고 보니 확실히 어색함이 느껴졌다.
멍청한 것도 관련이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무엇보다 이 녀석은 얼굴이 어색했다.
그의 얼굴에는 표정이 거의 없다.
이따금씩 짓는 표정도 상황에 맞지 않거나 인위적인 것뿐이다.
모르고 봤으면 그냥 이상한 사람이구나 싶었겠지만, 인간이 아니라는 생각을 하고 보니 확실히 의심스러운 부분이었다.
“아직 기뻐하기엔 이르다. 루엘라님은 일이 어떻게 진행되고 있는지 알고 싶어하신다.”
“아, 아직 시간이 남지 않았습니까?”
“지금 토다는 건가?”
“아닙니다!”
그는 이게 거짓말일 가능성을 의심도 하지 않는지, 순순히 자기가 아는 내용을 죄다 털어놓았다.
이야기를 전부 들은 난 생각했다.
좃됐구나!
뭐 시발 인간 도시를 전복? 대침공의 첫 단추라고?
중간에 당황하는 티를 냈지만 워낙 빡대가리라 그런지 적당히 속아 넘겼다.
아무튼 그의 말은 이러했다.
이놈은 고대기술을 복원해 만들어진 도플갱어로, 전쟁 없이도 인간들의 도시를 함락시키는 혁명적인 계획의 선봉장으로서 이곳에 왔다고 한다. 그가 맡은 임무는 같은 종족 내에 분열과 갈등을 조장시켜, 적을 이용해 적을 제압하는 놀라운 계획을 이 도시에서 실현시키는 것.
이를 위해, 사회에 불만이 많은 자들을 모아 감정을 고양시키는 마법의 안개를 사용해 그들을 두려움 모르는 전사로 만들 것이라고 했다.
그러니까 결국 한 줄로 요약하면 마법으로 인간들끼리 치고 박고 싸우게 하는 동안 자기들이 도시를 꿀꺽하겠다는 심보였다.
뭐 하러 이렇게 쓸데없이 말을 늘리는지, 내 생각에는 자기가 들었던 내용을 기억하는 부분만 열심히 되풀이하는 것 같았다.
아무튼 좀 멍청한 놈이 하는 말이라 웃기게 들리기는 하지만, 굉장히 위험한 계획이었다.
여기에 더 얽히면 분명 나도 곱게 빠져나가진 못하겠지.
그러나 얘기를 듣다보니 기회라는 생각도 들었다.
이걸 빌미로 용사 일행을 유인할 수 있는 거 아닌가?
아니지, 다 유인할 필요도 없다.
세리아.
그년 하나만 데려와도 좋다.
그럼 나머지도 알아서 딸려오겠지.
“흠….”
“무슨 일 있으십니까?”
주변을 둘러보았다.
빽빽한 건물.
쉽게 내부를 들여다볼 수도 없다.
그래, 그렇단 말이지.
그의 얘기를 듣다보니 계획이 하나 떠올랐다.
물론 안전하게 이 녀석을 갖다 바치는 방법도 있다.
그럼 내 공적이니 이것저것 보상도 받고, 용사도 날 쉽게 내치지 못하겠지.
상식적으로 생각하면 이쪽이 훨씬 좋은 방법이다.
그렇지만, 한 번 도박수를 던진다면…
어쩌면 이 시발년을 드디어 맛볼 기회일지도 모른다.
지금까지는 워낙 가드가 완강해서 엄두를 못 내고 있는 상황이었는데, 잘만하면 상황을 바꿀 수도 있을 것 같다.
확실한 보상과 안전한 길. 불확실한 보상과 위험한 길.
이미 내 대답은 정해져있다.
“한 가지 부탁이 있는데 말이야…….”
그리고 나는 용사 일행의 숙소 앞에 있었다.
살짝 내부를 바라보니 안에는 세리아밖에 없다.
좋아. 예상대로 됐군.
용사 쪽이 먼저 와있으면 계획을 고치기로 했지만, 다행이 세리아와 아린 쪽이 먼저 도착해 있던 모양이다.
먼저 도착해서 용사를 기다리는 중이겠지.
그러나 아린은 없다.
교회에서 급한 연락이 들어왔으니까.
물론 거짓말이다.
도플갱어를 변장시켜서 연락이 들어왔다는 거짓말을 시켰다.
우선 전달만 하고 돌아오라고 했는데, 아린이 없는 걸 보면 다행이 속아 넘긴 모양이다.
금방 눈치 채고 돌아오겠지. 그래도 잠깐이면 된다.
“돌아왔습니다.”
용사의 모습을 한 그가 내 앞에 나타났다.
좋아. 겉모습은 완벽하다.
“마법도 다 걸어뒀겠지?”
“확실합니다.”
장소 문제도 해결됐다.
그럼 이제 본격적으로 이년을 낚을 차례군.
“아까 말한대로만 해라. 쓸데없이 말을 너무 많이하지는 마.”
“…이게 정말 루엘라님의 도움이 되는 겁니까?”
갑자기 지능이 올랐는지 이 멍청한 놈이 제법 예리한 질문을 했다.
“너는 모르겠지만 저들은 용사 일행이다. 그들을 함정에 가두는 게 어찌 루엘라님에게 폐가 된다고 생각하는가?”
“요… 용사! 한스님을 쓰러뜨린 그 놈들입니까!”
그가 격분하며 지금이라도 뛰쳐나갈 듯 부들거렸다.
용사 모습으로 그런 말 하니까 좀 어색하네.
“그래. 잘만하면 용사의 파티원 하나를 처리할 수 있다. 루엘라님도 좋아하시겠지.”
“과연! 그런데 이왕 할거면 용사를 죽이는게 좋지 않습니까?”
…이 새끼 갑자기 왜 머리가 좋아졌지?
“용사는 눈치가 빨라서 힘들다. 다 계획이 있어서 그런 것이니 토 달지 말도록.”
“그, 그렇군요. 알겠습니다.”
도플갱어는 잘 모르겠지만 아무튼 알겠다는 식으로 대답했다.
“말한대로만 하면 된다. 그 건물까지 확실하게 데려오도록.”
“알겠습니다. 맡겨주십시오! 루엘라님을 위해!”
그래그래. 루엘란지 뭔지 모르겠지만 열심히 해봐라.
용사 모습의 도플갱어는 벌떡 일어나더니 성큼성큼 숙소 안으로 들어섰다.
시발… 제일 살떨리는 순간이다.
저 빡대가리가 잘 할 수 있을까?
혹시 잘 안 될 경우를 대비해서 입단속은 시켰지만, 워낙에 멍청한 놈이라 그리 믿음이 가진 않는다.
그래. 내가 뭐 언제는 뒷일 생각하고 움직였나.
안 되면 그냥 죽지 뭐.
“에릭? 유니는 어디가고 왜 혼자와?”
세리아가 그를 보고 의아한 듯 물었다.
“…찾았다.”
“찾았다니? 뭘? …설마 도플갱어?”
“그래.”
“진짜? 어딨는데?”
그녀가 반가운 소식에 벌떡 일어났다.
아직 용사의 모습에서 큰 위화감은 느끼지 못한 것 같다.
아니, 느꼈겠지만 그가 갖고 온 소식이 더 충격적이라 잠시 접어뒀겠지.
“지금 가야한다.”
“잠깐만, 아린이 교회에 급한 볼일이 있다며 떠났어. 곧 올 테니 잠시만 기다리자.”
“…지금 가야한다.”
그녀의 눈이 순간 가늘어졌다.
시발, 눈치 챈 건가?
“에릭. 유니는 어디 있어?”
“……지금 가야한다.”
잡혔다고! 잡혔다고 말하랬잖아!
이 머저리 같은 놈. 결국 까먹었구나.
유니가 잡혔으니 빨리 우리 둘이서라도 먼저 구하러 가야한다고 유인하려던 내 시나리오는 완벽하게 무너져버렸다.
이 쉬운 것도 못해?
“……알았어. 준비할 테니 잠시만 기다려.”
그녀는 그렇게 말하며 슬쩍 스태프를 쥐었다.
저년 저거, 저렇게 말하고 공격할 셈이다!
역시 남을 쓰는 작전 따위는 믿을게 못 된다.
앞으로는 철저하게 나 혼자만 행동하는 작전을 짜야지.
괜찮아, 그래도 이쯤은 예상했다.
이렇게 된 이상 두 번째 계획으로 가는 수밖에.
나는 창문을 향해 돌멩이를 세게 집어던졌다.
쨍그랑!
“뭐, 뭐야!”
“알겠습니다!”
도망치라는 신호다.
다행이다. 이건 안 까먹었군.
이 멍청이는 대답할 필요가 없는 말까지 하고선 잽싸게 도망쳤다.
“역시! 거기서!”
그녀는 잠시 돌멩이가 날아온 방향과 도망치는 그를 보며 잠시 갈등했지만, 도플갱어 쪽을 우선하기로 한 모양이었다.
떠나는 와중에도 자기 흔적은 남겨야겠다고 생각했는지, 외투는 두고 간 채였다.
“후우…….”
잘 도망칠 수 있을까.
왠지 이렇게 될 거 같아서 만약 도망칠 일이 생기면 미리 건물로 오라고 언질을 줬다.
과연 저 놈이 유인 같은 어려운 작전을 제대로 해낼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잘 모르겠으면 그냥 약속지점까지 냅다 뛰기만 해도 된다고 말해줬다.
도중에 잡히지만 않는다면 괜찮겠지.
잡히지만 않는다면…….
그래도 시가지니까 저 미친년도 마법을 뻥뻥 쓰진 못하겠지.
슬슬 나도 자리를 떠야할 시간이다.
불쌍한 피해자 행세를 하러 가볼까.
약속지점으로 미리 이동하기 전에, 문득 재밌는 생각이 들었다.
나 혼자만 즐기기는 아쉽잖아.
관객도 좀 초대해보자고.
난 아린이나 용사가 찾아올 수 있게 세리아의 외투 위에 도플갱어에게서 받은 지도를 살며시 올려두었다.
세리아.
오늘 끝장을 보자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