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7화 〉 [용사] 얻는 것과 잃는 것
“허억!”
번개라도 맞은 사람처럼 나는 몸을 부르르 떨었다.
바, 방금 무슨 일이 있었던 거지?
세계가 마치 거울처럼 깨졌다.
궁전같이 웅장하던 그 공간은 산산조각나고, 대신 축축하고 어두운 동굴이 드러났다.
우리가 들어왔던 그 동굴이었다.
궁전과 그녀들은 온데간데없고, 있는 것은 사람만한 크기의 상자뿐.
조금 전의 광경은 무엇 하나 남아있지 않았다.
마치 꿈처럼.
갑작스런 변화에 당황했으나, 상자 위에 적힌 글귀를 읽고 나서야 상황을 이해할 수 있었다.
시련.
그래, 이건 전부 시련이었다.
이름부터 시련의 동굴이었으니 무언가 있으리라고 짐작은 했지만, 설마 이런 것이었을 줄이야.
상상도 못했던 방식이었다.
대체 왜 이런 끔찍한 광경을 나한테 보여준 것이지?
내가 그런 미래를 우려하고 있다는 것일까?
기분이 나빴다.
그렇다면 결국 내가 내 동료들을 그런 천박한 사람으로 의심하고 있다는 게 아닌가.
그리고 하필 그녀들 사이에 있는 게 그 짐꾼이라니?
내가 그에게 질투라도 하는 것 같아 굉장히 불쾌했다.
제길…….
도무지 진정되질 않는다.
감정을 어떻게든 갈무리해보려고 했지만, 노력이 무색하게 내 얼굴은 이미 일그러진 뒤였다.
나 말고 다른 누군가가 있었으면 기겁을 했겠지.
그러고 보니 왜 나밖에 없지?
나는 분명 아린과 유니랑 같이 들어왔다.
심지어 세리아는 우리보다 먼저 들어왔는데, 지금 여기에는 나 빼고 아무도 없었다.
내가 제일 먼저 시련을 통과한 건가?
……아니. 그건 빈말로도 통과라고 할 수 없었다.
‘내 노예들과의 달콤한 시간을 방해하지마라, 무능한 것.’
그가 마지막으로 했던 말이 내 머릿속을 맴돌았다.
제길, 제길, 제길!
누가 노예야!
누가 무능이야!
내 마음속에 이딴 풍경이 있다는 말인가?
인정할 수 없다!
절대 그럴 리가 없어!
나는 분을 이기지 못하고 내 검을 집어던졌다.
쨍그랑!
바닥과 부딪힌 검이 소리를 지르자, 그제야 정신이 조금 돌아왔다.
……애꿎은 칼한테 화풀이를 해도 소용없지.
쭈그려 앉아 칼을 다시 집어들었다.
“하아… 하아… 요, 용사님?”
그러자 내 뒤에서 아린의 목소리가 들렸다.
“아린?”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인지 숨을 가쁘게 몰아쉬는 아린이 내 뒤에 있었다.
방금 전까지 아무도 없었는데?
“무사하셨군요! 다, 다행이에요… 흐윽….”
그녀는 나를 보더니 갑자기 내 품에 와락 안겼다.
“무, 무슨 일이야?”
“저, 저는 용사님이 죽으신 줄만 알고…….”
내 등에 올린 그녀의 손이 떨리고 있었다.
그녀도 환상 속에서 불길한 모습을 본 것일까?
나는 뭐라 묻기 전에 우선 불안해하는 그녀를 달래줘야만 했다.
“화, 환상이었군요….”
그녀는 부끄러움에 손으로 자기 얼굴을 가렸다.
“대체 뭘 봤던 거야?”
내가 조심스레 묻자 그녀는 다시 생각하고 싶지 않다며 몸을 떨었다.
겨우 달래며 들은 바에 따르면 아린은 마왕을 만났다고 한다.
갑작스레 등장한 마왕에 우리 모두 준비도 제대로 하지 못한 채 그와 맞서 싸우게 되었는데, 마왕이 너무나도 강력해서 도저히 상대할 수가 없었다고 했다.
아린의 축복도, 유니의 정령술도 아무런 효과가 없었는데 세리아는 어째서인지 마법을 쓰지 않았다고 했다.
“세리아가…?”
“네. 제 뒤에 있었으니 왜 그랬는지는 잘 모르겠어요. 그래도 환상이니까 다행이에요.”
그 때문에 마왕이 근처에 접근하는 것을 막지 못했고, 내가 희생하면서 나머지 동료들을 도망치게 했다고 아린은 말했다.
“저, 저는… 무서워서… 도망치는 것밖에 할 수 없었어요…. 이러고도 신관이라니… 죄송해요 용사님.”
그 마왕이라는 자가 어땠는지는 모르지만, 어차피 전부 환상 아닌가.
나한테 미안해 할 필요는 없었다.
내가 아린을 위로해주자 그녀는 다시 내 품에 안겼다.
“…고마워요 용사님. 조금만 더 이러고 있어도 될까요?”
“으, 응….”
그녀는 유니가 나타날 때까지 계속 내 품에 안겨있었다.
“응? …아아앗! 아린! 혼자 뭐하는 거야!”
유니는 갑작스런 변화에 어리둥절해하다가 나와 아린을 보고 소리질렀다.
“앗! 유, 유니! 어느새….”
“치사해! 분명 우리랑 약속했으면서!”
“이, 이건, 그게 아니라….”
무슨 말인지 잘 알 수는 없었지만 아무튼 아린처럼 상태가 안 좋아보이진 않았다.
유니의 얘기도 아린과 비슷했다.
강력한 마왕을 만났고, 우리 모두 그와 맞섰지만 이기지 못했다.
아린의 이야기와 다른 점은, 내가 희생하지도 않았고 세리아도 마법을 쓰면서 적극적으로 싸웠다는 것 정도였다.
“내용에 조금 차이가 있네요… 용사님은 어떠셨나요?”
“혹시 에릭, 이기거나 하진 않았어?”
이기기는커녕 그녀들과는 전혀 다른 모습을 보고 왔는데…….
그녀들이 양옆에서 내 팔을 붙잡고 대답을 재촉했다.
왠지 익숙한 구도였다.
옥좌에 앉아있던…… 그의 옆에도 세리아와 아린이 이렇게 붙어있었는데.
제길, 무슨 생각을 하는 거야.
전부 환상이다. 신경 쓰지 말자.
“용사님?”
“아, 응…. 나도 비슷했어. 갑자기 마왕이 나타나서….”
차마 그대로 말할 수가 없어 적당히 그녀들의 얘기와 비슷한 말을 꾸며냈다.
거짓말을 하고 있다 생각하니 양심이 쿡쿡 찔렸지만 도무지 내가 봤던 모습을 말로 꺼낼 자신이 없었다.
그렇게 세리아까지 도착하고, 우리는 선대용사가 남긴 장비들을 얻게 되었다.
세리아는 아린보다 더한 꼴을 겪었는지, 한동안 제대로 말도 하지 못했다.
그녀를 보니 다시 환상 속의 모습이 스멀스멀 기어 올라왔지만, 애써 눌러 담았다.
“…이제 돌아가자.”
우리들은 그렇게 다시 동굴 밖으로 나왔다.
우리들은 이제 더 강해질 것이다.
더 좋은 장비와 시련을 통해 우리는 강해졌다.
아니, 나는 장비를 빼면 아무것도 달라지지 않았지만…….
그래도 그녀들은 환상 속 마왕과 싸우면서 무언가 느끼는 바가 있는 듯 했다.
이걸로 우리 파티가 더 강해진다면, 당연히 기뻐해야겠지.
그러나 나는 지금 기쁘지 않았다.
물론 그 남자 때문이다.
동굴 밖으로 나서자마자 나는 그 남자와 다시 마주쳤다.
짐꾼.
단지 그것뿐인 남자.
그러나 내 환상 속에서는 마치 내가 짐꾼이고, 그가 용사인 것처럼 느껴졌다.
이런 게 내 마음 속 불안이라면, 나는 정말 그런 상황을 걱정하고 있다는 말인가?
말도 안 되는 소리다.
나는 여신님께 선택받은 하나뿐인 용사.
짐을 들 체력만 있다면 누구나 할 수 있는 그런 어중이떠중이 짐꾼과는 다르다.
왠지 스스로에게 변명을 하고 있는 것 같아 더욱 불쾌해졌다.
그래. 너무 신경쓰지 말자.
환상은 환상일 뿐, 현실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
현실에 집중하자.
나는 훌륭한 장비를 얻었다.
더 날카로운 검. 더 단단한 갑옷.
마법적인 조치가 가해졌는지 오래된 장비들임에도 불구하고 새것 같았다.
특히 검이 예사롭지 않았는데, 그저 손에 쥐기만 하더라도 얼마나 강력한 검인지 알 수 있었다.
고블린 쯤은 그들이 들고 있는 곤봉 째로 베어버릴 수 있지 않을까 싶을 정도.
이런 좋은 무기를 얻었으니 당연히 기뻐해야 할 것이다.
실제로 아린과 유니는 장비들을 보고 얼굴에 미소가 한가득이지 않았던가.
아린…… 유니…….
잊고 싶어도 다시금 떠오른다.
왜 그런 표정을 짓고 있지?
왜 나를 바라보지 않지?
대체 왜?
그가 뭐라고?
새 검을 쥔 내 손에 힘이 들어갔다.
“에, 에릭….”
옆에서 유니가 떨리는 목소리로 불렀다.
그녀의 얼굴을 보니 그녀의 마지막 말이 생생하게 떠오른다.
‘지금까지 고마웠어. 덕분에 이렇게 주인님과 만났으니까.’
제길! 제길! 제길!
“……왜?”
애써 평정을 가다듬고 말했다.
내 정신적 동요를 들키고 싶지 않았다.
“스, 슬슬 칼 좀 집어넣어주지 않을래? 그러고 있으니 조금 무서워….”
그러고 보니 아까 전부터 칼을 빼든 상태였다.
동굴을 나온 뒤로 계속 이러고 있었지.
밖에서 그를 봤을 때 나는 칼을 내리치지 않도록 애를 써야했다.
그런 내 살벌한 감정이 그녀에게도 느껴진 모양이었다.
“으, 응…. 미안….”
나는 칼을 검집에 넣었다.
정신을 가다듬자.
내가 본 건 전부 환상.
사실이 아니다.
그를 베어서는 안 된다.
그는 아무런 잘못도 없으니까.
……정말로 없는가?
그렇다면 내가 수로에서 들었던 그건 대체 뭐였지?
최근 왠지 가까워진 듯 한 둘 사이에는 대체 무슨 일이 있었지?
분명 무언가 있다는 느낌은 들었지만, 내 추측을 입증할 증거가 아무 것도 없다.
아직 그가 한 짓이 밝혀지지 않았다. 아직은 때가 아니다.
그러니 증거가 나올 때까지 기다리자.
그 때가 되면…….
제길, 안 좋은 생각만 하니까 미쳐버릴 것 같다.
애써 진정하고 동료들의 상태를 살폈다.
유니는 새로 얻은 목걸이를 목에 걸고 이리저리 살피고 있었다.
잘은 모르겠지만 정령들과의 교감력이 좋아졌다고 하니, 분명 좋은 거겠지.
환상이 보여줬던 그 섬뜩한 말과 음탕한 표정은 조금도 찾아볼 수 없다.
그래. 그건 결코 현실이 아니다.
그렇다면 아린은?
그녀는 손에 새로운 신관복을 들고 있었다.
아직 숙소에 도착한 것이 아니라서 갈아입지는 않았지만, 지금 그녀가 입고 있는 것과 크게 다르지 않은 복장이었다.
아린의 말에 따르면 최고위급의 신관이 축복을 건 옷이라고 한다.
심지어 지금은 유실된 축복이기에 그녀도 재현할 수 없다고 했다.
무슨 축복인지는 직접 확인하지 않으면 모른다고 했지만, 아무튼 저번 대 용사 파티의 신관이 입었던 옷이니 분명 좋을 것이다.
그녀는 조금 전부터 계속 뒤를 흘긋 살피는 중이었다.
뒤에는 세리아와 제렌이 있다.
왜 자꾸 고개를 돌리는 거지?
역시 그 남자가 있으니까?
아린이 나를 내려다보며 했던 그 말은, 내 가슴을 손으로 움켜쥔 듯 고통스러웠다.
‘당신 같은 무능아는 저희 파티에 필요 없어요. 여신은 당신이 아닌 주인님을 선택했답니다.’
아니야. 말도 안 되는 소리다.
여신님이 그럴 리 없다.
이건 그저 스스로의 힘을 믿지 못하는 내 불안감이 만들어낸 것일 뿐.
나는 누가 뭐래도 여신님이 직접 선택한 용사다.
자꾸만 떠오르는 불안한 생각들을 애써 무시하며 시선을 더 뒤로 돌렸다.
세리아는 환상을 본 뒤로 계속 저기압이었다.
무슨 일이 있었는지도 제대로 말해주지 않고, 그저 고개를 숙이고만 있었다.
그녀는 굉장히 좋아 보이는 스태프를 얻었지만, 여전히 기존에 쓰던 스태프를 손에 들고 있었다. 새 스태프는 등에 묶어둔 채였다.
평소와는 다른 침울한 모습.
아니지. 요즘에는 왠지 이렇게 기분 나빠 보일 때가 많았던 것 같다.
전부 그 남자 탓일까.
그랬던 것치고는 그 때 그녀는 무척이나…….
‘아직도 있었어? 방해하지 말고 사라져줄래?’
……아냐. 그녀는 그런 말을 하지 않는다.
아무리 내 마음 속이라도 그런 상상을 하진 않을 거다.
그래. 분명 환상이 잘못된 거다.
내 마음속 불안 같은 게 아니라, 분명 무언가 잘못된 것이다.
그래.
그 남자가 손을 뻗어 세리아의 가슴을 움켜쥐려고 하는 것도 전부 환상……
아니, 이건 환상이 아니다!
“무슨 짓이야!”
내가 버럭 소리를 질렀다.
그러자 제렌은 그녀 앞을 가로막던 나뭇가지를 치우면서 의아한 표정으로 돌아봤다.
“왜 그래, 에릭?”
유니가 조금 겁에 질린 채 물었다.
내, 내 착각이었나?
그는 그냥 세리아가 나뭇가지에 부딪힐까봐 치워준 것뿐이었다.
“아… 고마워.”
세리아는 내 고함소리도 못 들었는지 멍하니 걷다가 뒤늦게 그가 도와준 걸 눈치 채고 작게 감사인사를 했다.
나는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머뭇거렸다.
“왜 그러십니까?”
그는 정말 아무 것도 모른다는 듯한 표정이었다.
내, 내가 무슨 짓을….
계속 그 환상에 대해서만 생각하다보니 괜히 이상한 쪽으로 상상해버린걸까?
지금 상황은 누가 봐도 내 잘못이었다.
“아, 아니야…… 잠깐 착각했나봐. 미안…….”
나는 힘없이 고개를 돌렸다.
그런 내 모습을, 아린이 말없이 바라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