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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사 파티의 짐꾼-25화 (25/236)

〈 25화 〉 [용사] 얻는 것과 잃는 것

“이, 이건… 이건, 그….”

그런 뜻으로 한 소리가 아니야!

오해하지 말아줘!

마음속과는 달리, 내 입에서는 그저 말이 되다 만 것들만이 흘러나올 뿐이었다.

왜? 왜 입 밖으로 꺼낼 수가 없지?

“세, 세리아….”

세리아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은 채 그저 흔들리는 눈동자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입이 뻐끔거리며 무언가를 말하려 하지만, 아무런 말도 나오지 않았다.

“아, 아린….”

아린에게 도움을 요청하는 간절한 눈빛을 보냈다.

한심하지만 나 혼자서는 이 상황을 수습할 수 없을 것 같았다.

그녀도 잠시 어쩔 줄 모르며 고민하다 간신히 말을 꺼냈다.

“세리아, 용사님은 그런 의도로 얘기를 한 게 아니에요. 아시잖아요.”

“…….”

세리아가 그녀의 스태프를 꾹 쥐었다.

아무런 위로가 되지 못한 것 같다.

“이런, 타이밍이 안 좋았군요.”

그가 감정 없는 목소리로 태평하게 말했다.

이게… 이게 누구 때문에 이렇게 됐는데…!

“당신…!”

“아앗, 또 내가 꼴찌야?”

제길, 또!

반대편에서 유니가 날개 달린 작은 정령을 데리고 나타났다.

그녀에겐 아무 잘못이 없는 걸 알면서도, 무심코 화를 낼 뻔했다.

“다들 왜 그래? 무슨 일 있어?”

유니가 이 어색한 분위기에 눈을 깜빡이며 물었다.

내가 대답을 못하고 잠시 망설이고 있자, 세리아가 로브 자락을 꾹 쥔 채 동굴 앞까지 걸어갔다.

“…아무 일도 없었어.”

힘없는 목소리였다.

화가 난 걸까? 아니면 실망한 걸까?

어느 쪽이든 빨리 사과를 해야 했다.

“세, 세리아, 미안해….”

“뭐가?”

세리아뿐만 아니라 다른 이들 모두가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말해야한다. 아무 관계도 아니라고 대답해서 미안하다고.

그렇지만, 그건 결국 특별한 관계를 원한다는 것과 마찬가지 말 아닌가?

순간 아린과 유니가 마음에 걸렸다.

그리고 잠시 그녀들을 생각하느라, 대답이 늦었다.

어느 쪽이든 빨리 대답했어야하는데, 내 늦은 판단이 상황을 더욱 악화시키고 말았다.

“…그렇구나.”

“아, 아니야! 난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어!”

내가 다급히 덧붙였지만 이미 그녀는 내게 등을 돌린 후였다.

상황이 안 좋게 흘러간다!

“어… 어?”

유니가 갸우뚱한다.

살짝 보니 아린이 눈치껏 끼어들지 않도록 막아주고 있는 것 같다.

그나마 다행인걸까.

빨리 세리아를 달래야…….

“전 여기서 기다리고 있을 테니 다녀오시죠.”

이번에는 눈치 없게 그가 훼방을 놓았다.

방해하지 말라고!

왜 이렇게 눈치 없이…….

잠깐. 혹시 일부러인가?

나를 방해하려고?

상황이 나에게 안 좋게 흘러가니까, 나를 방해하려고 이렇게 초를 치는 것일지도 몰랐다.

아니, 어쩌면 이 상황 자체가 그가 유도한 것일지도 몰랐다.

정말로?

만약 그렇다면 왜 이렇게까지?

그에게 원한을 산 기억도, 그를 나쁘게 대한 적도 없다.

이렇게 나를 괴롭힐 이유가 없을 텐데……!

아니, 없지는 않다.

세리아…… 혹시 세리아 때문인가?

그러고 보니 집요하게 나와 세리아 관계를 캐물었었지.

세리아를 넘보는 건가? 절대 그녀를 넘겨줄 수는…….

“들어가자.”

세리아의 목소리가 내 정신을 일깨웠다.

아차.

빨리 사과해야하는데.

“세, 세리….”

“나 먼저 갈게.”

세리아는 내 말을 듣지도 않고 먼저 동굴 속으로 들어가 버렸다.

“용사님. 사과는 조금 이따가 하시는 게 좋을 거 같아요.”

아린이 소곤거리며 조언했다.

지금이 아니면 하기가 더 어려워지는데….

그러나 이미 그녀는 들어가 버렸다.

“응… 왠지 무슨 일인지 알 거 같은데… 나도 도와줄게! 우선은 세리아를 쫓자!”

유니가 힘찬 목소리로 날 응원해주었다.

그래, 안이 어떤 곳인지도 모르는데 세리아 혼자 보낼 수는 없다.

“다들 고마워… 빨리 쫓아가자!”

우선 동굴에서 빠져나오면 제대로 사과하자.

우리는 세리아를 쫓아 동굴로 들어갔다.

이상하다.

분명 그녀 뒤를 쫓아 바로 들어왔을 텐데. 아무리 쫓아도 세리아가 보이질 않는다.

“세리아!”

어두워서 한치 앞도 보이지 않는다.

잠만, 왜 어둡지?

“아린? 유니?”

그녀들이 분명 신성력과 정령으로 빛을 내고 있었는데, 어느 샌가 그녀들도 보이질 않았다.

다들 어디 갔지?

“아무도 없어?”

아무런 소리도 돌아오지 않았다.

갑자기 사라진 건가? 그럴 리가 없다.

그러고 보니 여기는 시련의 동굴이라고 그랬지.

그렇다면 이건 아마도…….

저벅.

발걸음 소리에 고개를 돌리니 어두운 동굴 속에서도 빛이 나는 곳이 있었다.

그리고 그곳에 세리아가 있었다.

“세리아!”

그녀를 불렀지만 듣지 못했는지 돌아보질 않았다.

“세리아! 여기야!”

그녀를 쫓았지만 아무리 뛰어도 그녀와 가까워지질 않았다.

“세리아! 내 말을 들어줘!”

그녀는 이쪽을 볼 것처럼 고개를 살짝 돌리더니, 나와 눈도 마주치지 않고 어디론가 걸어갔다.

왜 가까워지질 않지?

내 말을 일부러 무시하는 건가?

툭.

제자리에서 뛰는 것 마냥 점점 세리아에게서 멀어지는 나에게 누군가 다가와 부딪혔다.

“누구… 아린?”

평소처럼 신관복을 입은 아린이 제자리에 서있었다.

“아린! 방금 세리아를 봤는데 뭔가 이상해!”

“…….”

“아린?”

반응이 없어 다시 보니 그녀 또한 무언가 이상했다.

분명 아린이 맞는데…… 어딘가 위화감이 든다.

대체 무엇 때문에?

그녀의 시선이 내가 아닌 더 높은 곳을 향해 있어서?

그녀의 얼굴에서 아무런 표정도 느껴지지 않아서?

아니… 그런 것도 있지만, 뭔가 더 직접적인 차이가 있는 것 같다.

설마 지금…… 신관복 밑에 아무 것도 안 입은 건가?

“아린…?”

조심스레 다시 불러보았지만 여전히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말없이 서있던 그녀는 세리아처럼 어디론가 향하기 시작했다.

“아린! 어디 가는 거야!”

그녀를 따라가려고 했지만, 마찬가지로 제자리걸음만 하고 있는 듯 그녀와 나의 거리가 점점 멀어졌다.

“둘 다 어디로 가는 거야!”

애타게 불러보지만 이미 둘의 모습은 사라진 뒤였다.

“만나러 가는 거야.”

이 목소리는….

“유니!”

너무나도 다행스럽게, 유니는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유니, 다들 뭔가 이상해. 내 말이 안 들리는 것처럼 행동하고 있어. 아니, 그리고 나도 뭔가 이상해. 아무리 뛰어도 움직이고 있는 것 같지가 않아.”

“진정해, 에릭.”

그녀가 팔을 뒤로 둘러 깍지를 낀 채 나에게 말했다.

유니도 나를 무시할 줄 알았는데, 제대로 된 대답이 돌아오자 비로소 마음이 안정을 되찾았다.

“그, 그렇지…….”

“우선 에릭. 아무리 뛰어도 제자리걸음인 건, 네가 정말 제자리에서만 뛰고 있어서 그래.”

뭐?

가만히 내 다리를 내려다보자, 정말 그런 것 같은 느낌이 들기 시작했다.

저벅.

이를 의식하고 발걸음을 떼자 그제서야 내가 앞으로 한 발짝 내딛었음을 알 수 있었다.

“정말이네….”

“그리고 네 말에 반응하지 않는 건, 다들 네 말을 들을 필요가 없기 때문이야.”

“……무슨 소리야?”

유니……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네 말을 들어줄 시간이 없어. 우린 바쁘거든.”

“바쁘다니 무슨…… 아니, 그보다 우리라니……?”

내가 묻자 그녀의 입가에 웃음이 걸렸다.

평소처럼 밝고 기운찬 미소가 아닌, 차갑고 냉혹한 조소였다.

“나도 이만 가봐야 해. 기다리고 계시거든.”

“누가……?”

그러나 그녀는 더 이상 내 말에 대답해주지 않았다.

유니는 나도 모르게 소매를 붙잡은 내 손을 놓고, 그녀들과 동일한 방향으로 걸어가기 시작했다.

“어디 가는 거야? 기다려!”

아.

이제는 쫓아갈 수 있다.

“유니! 어디 가는 거야? 그리고 누, 누가 기다린다는 거야!”

그녀를 붙잡고 계속 물었지만, 그녀도 세리아와 아린처럼 내 말을 더 이상 들은체하지 않았다.

왜 그러는 거야? 그러지마.

나를 무시하지 말아줘.

제발 대답해줘!

“윽!”

갑자기 동굴이 환하게 빛나더니 주변의 모든 것이 바뀌었다.

방금 전까지 내가 동굴에 있었다면, 지금은 인공적인 구조물 안이었다.

동굴만큼이나 넓은 공간이지만, 사방에 불을 밝히는 양초가 벽, 천장 할 것 없이 수없이 걸려있었다. 음산하기도 하지만, 무엇보다 돌로 된 벽과 사방으로 둘러싼 촛불들이 위압적으로 느껴졌다.

발에 밟히는 이 폭신한 감촉은 카펫이다. 저 멀리 이어져있는, 매우 긴 카펫.

“아핫♥”

카펫 저편을 바라보며 환희에 찬 미소를 짓는 유니.

오랜 세월 그녀와 함께 했지만, 단 한 번도 본 적 없는… 사랑에 빠진 이의 얼굴이었다.

사랑…? 아니, 이건 사랑이 아니다.

이건…… 복종이다.

자신의 주인에게 보내는… 복종과 예속의 증거.

불안밖에 남지 않은 시선을 앞으로 돌리니, 그곳에는 거대한 옥좌가 있었다.

옥좌 양 옆에 그녀들이 있다.

아양을 떨 듯 가슴을 내밀고, 얼굴을 목과 가슴에 파묻은 채, 자신을 더듬는 손길에 기분 좋게 신음하는, 그녀들이.

그리고 유니도 그곳으로 향한다.

이 공간에서 가장 화려한 옥좌로.

그리고 그 옥좌에 앉아있는 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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