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8화 〉 [용사] 둘의 관계
아린에게 고민을 털어놓고 조금은 편해진 마음으로 숙소에 돌아왔다.
여전히 신경이 쓰이는 건 어쩔 수 없었지만, 그래도 아까보다는 더 편한 마음으로 있을 수 있었다.
그래. 우선 그 일은…… 너무 신경 쓰지 말자.
두 눈으로 본 것도 아니지 않은가. 분명 오해일 것이다.
그냥 오해라고 치부하고 넘기기에는 너무나도 선명한 소리였지만, 두 눈으로 보기 전까지는 그렇게 믿기로 했다.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세리아를 도무지 대할 수가 없었다.
나는 숙소에 돌아오자마자 쓰러지듯 잠들었고, 결국 영주를 만나러 가는 건 다음날이 되었다.
***
영주는 현재 자기 저택이 아닌 전선에 있었다.
생각보다 전황이 불리해 도저히 저택 안에 앉아있을 수 없는 모양이었다.
그 덕분에 우리도 별 다른 절차 없이 영주와 대면할 수 있었다.
“용사라…….”
“네, 그렇습니다.”
영주는 내가 보여준 용사의 징표를 만지작거렸다.
여신님이 하사하신 이 세계에서 유일한 보물이다.
재료부터가 지상에서는 구할 수 없는 광물로 만들었다고 들었다.
그 안에 담긴 신성력도 어마어마해, 신관이 아닌 일반인조차도 왠지 모를 성스러움을 느낄 정도였다.
영주 또한 보통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신성력을 감지하는 힘은 없는 것 같았지만 그래도 이 보물에서 느껴지는 기운을 미약하게나마 느낀 것 같았다.
“틀림없습니다. 여신님의 징표입니다.”
옆에 서있던 젊은 신관이 그에게 일러주었다.
“그래. 확실한 것 같군. 의심해서 미안했네, 용사여.”
“아닙니다.”
그가 다시 내게 징표를 돌려주었다.
나는 고개를 숙인 채 다시 그것을 받았다.
나는 용사지만, 그것이 내 계급을 높여주는 것은 아니었다.
영주는 물론 심지어 왕조차도 여신의 대리인인 나에게 경의를 표하기는 하지만 용사라는 직위는 세속을 초월한 자리, 즉 이 지상의 신분과는 무관한 또 하나의 신분에 불과했다.
잘 이해는 안 되지만 교회 쪽 사람들이 그렇게 알려주었다.
중요한 건 나는 여전히 평민이라는 점이다.
용사이지만, 동시에 평민이었다.
그래서 나는 지금 영주 앞에 고개를 숙이고 있는 것이었다.
마법사인 세리아나 제법 지위가 높은 고위신관 아린 정도라면 어느 정도 격이 맞먹을지도 모르지만, 나나 유니는 다소 특별한 능력이 있더라도 어디까지나 평민에 지나지 않았다.
우리끼리는 딱히 그런 걸로 사람을 구분하지 않지만 이런 공적인 자리에서는 어쩔 수 없었다.
파티원들마다 각자 귀족에게 취해야 할 예절이 달라 어색한 상황이 종종 나오곤 했으므로, 이럴 때는 보통 나 혼자만 귀족이나 왕을 알현했다.
필요한 얘기는 이미 세리아가 사전에 전달해뒀기에 큰 문제는 없다.
“그래. 어디서 이야기가 샜는지는 모르겠지만, 그대들이 의심하는대로 사천왕 중 한 놈이 현재 이곳에 있네.”
역시……!
저 정도 대군은 쉽사리 모을 수 있는 병력이 아니다.
데론 성이 예상 외로 고전하는 것도 그런 사정이겠지.
“덕분에 우리 성은 현재 완전히 포위당한 상태네. 어떻게 들어왔는지는 모르겠지만…….”
영주가 말을 흐렸다.
고개를 숙인 내 머리 위로 그의 시선이 쏟아지는 것만 같았다.
괜찮다. 세리아가 알아서 설명했다고 말해줬다.
아무리 말이 안 되는 상황이라도 마법이라고 말하면 대충 다들 넘어간다.
같은 마법사가 아닌 이상 맞는 말인지 알 수가 없으니까.
물론 마법으로 들어왔다고 해도 딱히 틀린 말은 아니지만, 그래도 조금 찝찝한 기분이 들었다.
“그래. 마법이라니 더 의심하지는 않겠네. 나로서는 이해할 수 없는 힘이니까.”
마법사가 아닌 인간은 결국 마법에 무지하다는 점에서 똑같았다. 평민이든 귀족이든.
“그렇지만 솔직히 말해서 자네들의 계획은 너무 허술해. 그 마법의 위력이 어느 정도인지는 모르겠지만 정말 그것만으로 사천왕을 죽일 수 있는 건가?”
몸을 투명하게 만들어서 사천왕이 있는 곳까지 잠입. 그리고 기습으로 사천왕의 숨통을 끊는 계획이었다.
내가 봐도 잘 될지 불안한 계획이지만 세리아는 실수만 하지 않는다면 문제없다고 단언했다.
나는 세리아를 믿는다.
“그렇습니다. 저희 파티의 마법사는 분명히 가능할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저는 그녀의 판단을 믿…… 습니다.”
세리아는…… 언제나 정확하고 옳은 판단만을 내리니까.
분명 이번에도 그럴 것이다.
분명…….
“애초에 사천왕이 정확히 어디 있는지는 아는가?”
“그게…….”
솔직히 모른다.
여신님이 도와주시지 않을까?
내가 아무 말 못하자 그가 한숨을 푹 내쉬었다.
어쩐지 바보가 된 기분이라 부끄러워졌다.
영주는 잠시 고민에 잠긴 것 같아보였다.
우리들을 믿을지 말지를 고민하고 있는 것일까.
용사라지만 우리들은 아직 미숙하고 어렸다.
솔직히 나라도 쉽게 맡기지는 못할 것 같았다.
“어차피 이제 우리들도 길게 버틸 수는 없네. 길어봐야 사흘 내지 나흘 정도일까.”
영주는 그렇게 말하고선 하인에게 무언가를 가져오라고 시켰다.
꽤 무거운 것인지 그 하인은 낑낑거리며 그것을 옮겼다.
“고개를 들게.”
내가 고개를 들자 나와 영주 사이에는 책상이 하나 놓여있었고, 그 위에는 간략한 성 주위의 지도가 그려져 있었다.
그 위에 있는 모형들은 양 측의 군대일까?
형세를 보니 그런 것 같았다.
“이틀 뒤에 우리는 총공격을 단행할 예정이네. 솔직히 승률은 높지 않아. 우리 모두 전사할 각오로 임할 계획이지.”
각오를 다진 그의 말을 듣자 나도 긴장감에 주먹을 꾹 쥐었다.
역시 전황이 좋아보이지는 않았지만, 실제로는 그보다 더 안 좋았던 것이다.
이틀 뒤에 있을 총공격. 사실상 마지막 발악에 가까운 저항이었다.
“우리가 파악하기로 적의 총사령관, 사천왕은 아마 이 곳에 있을 것으로 추정되네.”
영주는 지휘봉 같은 기다란 막대기로 한 지점을 가리켰다.
본대와 어느 정도 거리가 있으면서도 전선에서 너무 떨어져있지 않은, 적당한 지점이었다.
“지원은 없네. 우리는 우리대로 작전을 진행할 거야. 그 틈을 이용하려면 알아서 하도록.”
세리아는 지휘관이 죽으면 여러 종족이 모인 마왕군 특성상 쉽게 분열할 것이라고 예측했다. 그러나 영주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 것 같았다.
아니면 우리가 성공할 것이라고 믿고 있지 않거나.
“여신님이 직접 지명하셨다지만 나는 여전히 의문이야. 그런 연약한 몸으로 대체 어떻게 그 강대한 마왕과 맞서겠다는 것이지?”
마음에 안 든다는 듯 나를 내려다보는 영주의 눈빛.
나는 할 말이 없었다.
당장 나조차도 의문이었다.
나에게 무슨 힘이 있다고?
“……후. 여신님의 뜻을 인간이 어찌 감히 알겠는가.”
나를 잠시 노려보던 영주는 눈을 감았다.
“할 얘기는 이상이다. 성문지기에게는 얘기를 해둘터이니 자네끼리 잘 해보게.”
도와줄 의지는 전혀 없어 보였지만, 적어도 쫓아내지 않은 것만으로도 다행이라 해야할까.
나는 인사를 하고 밖으로 나왔다.
“어떻게 되셨나요 용사님?”
“에릭, 잘 됐어?”
아린과 유니가 천막 앞에서 기다리다가 쪼르르 달려와 물었다.
흘깃 옆을 바라보니 세리아는 조금 거리를 둔 채 나와 시선을 마주치지 않았다.
제렌은……. 옆에 없는 것 같다.
“잘… 모르겠어. 반대는 하지 않았지만 도움도 주지 않겠다고 하셨거든.”
다소 어색하지만 세리아의 도움을 구할 수밖에 없다.
여기서 제대로 된 작전을 짤 수 있는 건 세리아밖에 없으니까.
“……그거면 됐어. 어차피 많은 인원이 필요한 일도 아니니까.”
세리아가 다가와 말했다.
여전히 고개는 돌린 채였다.
“양동작전은?”
그녀가 잠시 심호흡을 하더니 고개를 들고 나를 마주봤다.
눈이 마주치자 잠시 흔들리기는 했지만 평소처럼 당당한 모습을 보이려고 노력하고 있었다.
그래, 무슨 일이 있더라도 세리아에게는 이렇게 당당한 모습이 어울렸다.
“……우리 작전과는 상관없이 이틀 뒤에 총공격이 있을 거래. 그 때 알아서 움직이라던데.”
“그거면 충분해.”
세리아는 그 말을 듣고 고개를 끄덕였다.
“사람은 많아봐야 별 도움이 안 될 거야. 너무 많으면 나도 마법을 쓰기가 힘드니까. 우리 넷이면 충분해.”
그녀는 나와 아린, 유니를 차례로 돌아보았다.
잠시 그녀의 시선이 그 뒤를 향했지만, 곧 다시 돌아왔다.
“우리끼리 부딪히기라도 하면 곤란하니까, 사천왕의 천막에는 에릭 혼자 들어가 줘.”
나 혼자?
과연 할 수 있을까?
“……에릭, 이건 정말 중요한 작전이야. 절대 망설여서는 안 돼. 못하겠다면 내가 할게.”
그녀는 굳은 얼굴로 그렇게 말했다.
아무리 사천왕이라 해도 무방비한 상태의 적을, 내가 죽일 수 있을까?
약한 몬스터들의 뒤처리도 제대로 못하는 한심한 내가, 사천왕을…….
덥석.
무언가가 내 손을 잡길래 돌아봤더니 유니였다.
“할 수 있어, 에릭.”
아린이 슬쩍 반대쪽 손을 잡았다.
“용사님은 약하지 않아요. 너무 다정한 것뿐이죠.”
“유니, 아린…….”
세리아도 나에게 성큼성큼 다가왔다.
“나, 나도…… 네가 할 수 있을 거라고 판단했기 때문에 이런 계획을 세운 거야.”
부끄러운지 시선을 마주치질 못한다.
그래도 나를 위로해주려는 마음만큼은 제대로 전해졌다.
툭.
그녀가 주먹을 가볍게 쥐고선 내 가슴을 살짝 쳤다.
“그러니까 보여줘. 용사의 힘을.”
모두가 나를 믿고 있다.
나를 믿지 못하는 건 나밖에 없다.
……그래. 할 수 있다.
나는 믿을 수 없지만, 내 동료들은 믿을 수 있다.
그들이 나를 믿어주니까 나도 나를 믿을 수 있는 것이다.
“알았어.”
나는 굳게 다짐했다.
남은 이틀 동안 우리는 각자 자유시간을 갖기로 했다.
사실 도시가 거의 마비된 것과 다름없어서 할 수 있는 건 별로 없었지만, 이번 임무는 상대가 사천왕인 만큼 너무 위험했기 때문에 긴장을 풀어둘 필요가 있었다.
유니는 정령과 더 교감을 하겠다며 도시 곳곳을 돌아다녔다.
조금 걱정도 되지만 나는 그녀의 정령들을 믿었다.
아린은 교회에 갔다 왔다.
무사히 임무를 마칠 수 있게 기도를 올리고 왔다고 그녀가 말해주었다.
세리아는, 주로 방에만 있는 것 같다.
마법연구를 할 때면 자주 있는 일이라 딱히 이상하지는 않았다.
제렌… 아니, 제렌 씨는… 보이지 않았다.
자기 방에 있는 걸까? 마주치질 않아서 모르겠다.
지금 만나봤자 어색할뿐더러 문을 두드려서 말을 걸기도 조금 거부감이 들었기에, 나는 애써 그의 존재를 기억에서 지웠다.
나는 주로 단련으로 시간을 보냈다.
이 숙소에는 뒤뜰이 있어 그곳에서 하루 종일 검을 휘두르고 쉬고 다시 휘둘렀다.
나에게 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그것뿐이었다.
그렇게 첫 날을 보내고 잠에 들려던 찰나, 누군가가 문을 두드렸다.
“들어오세요.”
문을 열고 들어온 건 세리아였다.
그녀는 로브와 스태프를 방에 두고 왔는지 민소매 차림으로 쭈뼛거리며 들어왔다.
“…세리아?”
“에, 에릭…….”
그녀는 부끄러운 듯 계속 우물쭈물거렸다.
“무슨 일이야?”
“내, 내일… 뭐해…?”
내일?
내일도 단련을 해야겠지.
하루 만에 강해질 수는 없겠지만,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할 생각이었다.
그렇게 얘기하자 세리아는 용기를 내 나에게 말했다.
“내, 내일…. 나랑 같이 나갔다오지 않을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