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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사 파티의 짐꾼-14화 (14/236)

〈 14화 〉 [신관] 고해와 다짐

“고마워, 아린. 덕분에 편해졌어.”

“……저는 아무 것도 하지 않았어요. 이건 당신 스스로 흘려보낸 말일 뿐이랍니다. 당신의 말은 누구에게도 남지 않았어요. 본인에게도요.”

조금 당혹스러웠지만 큰 문제없이 고해가 마무리되었다.

이 문을 열고 나가는 순간, 나는 모든 걸 잊어야한다.

그것이 사람들의 고민을 듣는 ‘새벽’의 일이니까.

그렇지만 이건 쉽게 잊을 수가 없겠는걸.

여신님께 미리 사죄를 드려야할 것 같다.

그치만 이런 얘기일 줄은 상상도 못했단 말이야!

용사님이 무언가 고민하고 있다는 건 우물을 올라오시기 전부터 알았다.

평소보다 말투도, 동작도, 반응속도도 느렸다.

분명 무언가 고민하고 계신 것이다.

함께 다닌지 그리 오래되지는 않았지만 내가 그런 것도 못 알아볼 리가 없다.

이래 보여도 수행 시절 ‘신부님예보’ 역할까지 맡았던 몸이니까.

사람의 반응을 읽는 건 자신있다.

분명 수로에 들어가시기 전까지는 아무 문제없으셨는데…….

잠깐 오늘 일을 떠올리자 내가 했던 돌발행동이 생각나 갑자기 부끄러워졌다.

으으, 내가 미쳤지.

여신님의 이름까지 들먹이면서 무슨 짓을 한 거람.

얼굴이 화끈거렸지만 다행이 지금 용사님은 내 얼굴을 보지 못한다.

그렇게 분위기를 잡고서도 막상 부끄러워 입술에는 하지 못했다.

보, 볼도 충분히 부끄럽지만!

그래도 마지막에 세리아가 당황하던 그 목소리는 제법 재밌었다.

후후, 갑자기 추월당해서 놀랐지?

“아린?”

내 웃음소리가 들린 것일까 용사님이 의아한 듯 물었다.

아차, 조심하자.

이미지 관리 해야지.

“아무 것도 아니랍니다. 그럼 이제 나갈까요?”

이 정도면 티 안 나지? 그렇지?

용사님이 먼저 나가시길 기다렸다가 뒤이어 나갔다.

“아린…… 고마워.”

용사님은 바닥을 내려다보며 그렇게 말하셨다.

부끄러운 걸까. 고민을 털어놓는 내내 그런 기색이 보이긴 했다.

용사님이 평소보다 더 귀엽, 아니, 처량해 보인다.

어쩔 수 없지. 역시 이럴 땐 내가 안아서 기운을 나눠드려야…….

아니 무슨 생각을 하는 거야.

용사님이 저렇게 고민하고 계신데!

또 이상한 쪽으로 생각이 흘러가버렸다.

정신차리자 정신.

“무슨 말씀이신가요? 저는 아무 것도 기억나지 않는답니다.”

좋아. 완벽한 대답이다.

전부 잊겠다는 아까의 약속을 제대로 지킨다는 어필.

그러면서도 성녀 같은 자애로움과 살짝 웃는 것으로 친근감을 더했다.

이걸로 용사님 마음속의 내 이미지는 의지할 수 있는 장난스럽고 착한 누나 정도가 되었겠지.

분명 앞으로도 많은 고민거리가 생기실 거다.

그 때마다 이렇게 고민을 들어주며 조금씩 내 지분을 확보해가면 결국 이기는 건 나다.

후후, 소꿉친구? 츤데레?

대세를 읽지 못하는 어리석은 판단이다.

용사님에게 필요한 건 그 분을 안아줄 수 있는 연상의 포용력!

동갑이지만 어차피 중요한 건 이미지니까 괜찮다.

……가슴은 상징일 뿐. 누나라고 해서 굳이 클 필요는 없다. 괜찮다.

용사님도 큰 건 안 좋아하셔. 그렇죠?

“그랬지 참. 그래도 고마워.”

멋쩍은 듯 웃는 용사님. 귀엽다.

“자, 그럼 다시 데이트를 하러 가볼까요?”

은근슬쩍 다시 팔짱을 꼈다.

당당한 척 하지만 이런 일에 익숙하지 않은 듯 움찔거리는 게 전부 티 났다.

이런 어리숙한 면도 용사님의 매력이신데, 용사님은 역시 멋지고 늠름한 용사님이 되고 싶으신 걸까.

나로서는 귀여운 용사님이 더 좋지만, 멋져지려고 애쓰는 용사님이 귀여우니 지금은 그걸로 됐다.

미안해요 유니.

용사님과 조금만 더 놀다 들어갈게요.

***

용사님과는 방 앞에서 헤어졌다.

그러자 자연스레 내 눈길이 향하는 곳은 세리아의 방.

두드려볼까.

잠깐 고민했지만 그럴 순 없다.

새벽의 방에서 듣고 본 것은 모두 잊어야 하니까.

“앗, 아린.”

소리를 들은 유니가 방문을 열고 빼꼼 고개를 내밀었다.

“유니. 고마웠어요.”

용사님의 상태는 누가 봐도 이상했다.

당연히 유니도 무언가 있었음을 짐작했지만, 고맙게도 나한테 그 역할을 양보했다.

오늘 용사님과 데이트를 할 수 있었던 건 어디까지나 유니 덕분이다.

“그래도 미안해요. 규율 상 고해 내용을 알려드릴 수는 없어요.”

“그건 어쩔 수 없지. 그보다 에릭 상태는 좀 어때?”

이해한다는 듯 끄덕거리는 유니.

정말 착하고 예쁜 아이다.

내가 남자였으면 용사님 대신 유니를 졸졸 쫓아다니지 않았을까 싶을 정도.

“많이 좋아지신 것 같아요. 그래도 여전히 걱정이 많으신 것 같네요.”

“갑자기 왜 그런 걸까…….”

유니가 안타깝다는 듯 용사님의 방을 바라봤다.

……고해 때문이 아니더라도 쉽사리 꺼낼 수 있는 얘기는 아니었다.

세리아와 그 남자의 관계가 의심된다니.

함부로 말을 할 수 있는 주제가 아니다.

용사님은 거의 확신하고 계신 것 같았지만, 솔직히 나로선 믿기 힘든 얘기였다.

그 세리아가?

말은 안 해도 그녀가 얼마나 용사님을 좋아하는지 우리 모두 알고 있다.

경쟁자가 늘어나는 셈이지만 유니도 응원해줬다. 나는 솔직히 조금 달갑진 않았지만.

그래도 그녀가 얼마나 에릭에게 진심인지는 잘 안다.

세리아가 자발적으로 그와 관계를 맺고 있을 가능성은 한없이 낮았다.

그렇다면 역시 협박이나 강요일까?

그 남자가 세리아를 협박할 만큼 힘이 세다거나 특별한 능력이 있는 것 같지는 않지만, 생각해볼 수 있는 건 이런 경우밖에 없다.

그치만 어지간해서는 협박에 꿈쩍도 안 할 사람이 세리아인데, 도대체 무엇을 빌미로?

……설마 저번처럼 이상한 걸로 자위하다가 걸린 건 아니죠 세리아?

세리아 본인은 잘 숨기고 있다고 생각하겠지만 같이 숙소를 쓰다보면 어쩔 수 없이 눈치 채게 된다.

그녀가 자위를 상당히 많이 한다는 사실을.

심지어 평범하게 하는 것도 아니다.

무언가…… 무언가 이상한 것들을 쓴다.

자세히 떠올렸다가는 불경스러운 짓을 저지르는 것 같아 더는 생각하지 않기로 했다.

그래도 새벽이 되면 조금씩 들린다.

숨을 죽인 채 새어나오는 그녀의 신음이.

그럴 때마다 나와 유니는 서로 어색하게 웃으며 모른 체 하곤 했다.

이 사실을 알게 되면 굉장히 충격을 받을 것 같아 말하지는 않았지만, 설마 이걸 그 남자에게 들켰다거나 그러지는……

아니, 세리아도 숙녀인데 그런 경솔한 짓을 할 리가 없다.

그건 아니겠지.

여전히 한 줄기 불안함이 남아있지만 나는 애써 생각을 떨쳐냈다.

“유니가 용사님을 좀 달래주시겠어요? 저만으로는 부족할 것 같네요.”

“앗! 정말? 고마워!”

유니의 얼굴이 환해진다.

유니가 배려해줬는데, 이정도 기회는 주는게 맞을 것 같다.

애초에 내가 더 이상 용사님을 독점할 명분도 없다.

그러니 굳이 감사 같은 걸 할 필요는 없는데, 유니도 참.

그녀는 조심스레 용사님의 방문을 노크하더니 안으로 들어갔다.

덕분에 복도에 남은 건 나 혼자뿐.

이제 어쩐담.

세리아를 찾아가자니 고해의 원칙을 어기는 것 같고, 그렇다고 방에 들어가 할 일이 있는 것도 아니다.

“…….”

“…….”

자세히 들리지는 않지만 용사님과 유니의 말소리가 문을 넘어 전해진다.

역시 방음이 그리 잘 되는 숙소는 아닌 듯싶다.

그에 비해 조용한 세리아의 방.

자고 있는 걸까.

하면 안 되는 짓인걸 알면서도 문 가까이 귀를 기울여봤다.

적막.

정말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방 안에 있는지 없는지조차 알 수 없을 만큼 조용했다.

하긴 숨소리 같은 게 들릴 리도 없고, 자고 있는 거라면 당연한 일이다.

자위 같은 거라도 하고 있으면 모를까.

아무리 그래도 이런 상황에서 설마 그런 짓을 할…… 할 리가 없다.

확신은 없지만.

정말 그것 때문에 무슨 일이 생긴 건 아닐까?

세리아에게는 조금 미안한 말이지만, 이런 면에서 그녀는 조금 어리숙한 면이 있었다.

안 들킬 거라고 생각하고 나와 유니 옆에서 그런 짓을 했던 시점부터 알고는 있었다.

성욕에 불이 붙으면 자제를 못하는 성격 아닌가.

그렇게 쾌락에 의존하는 건 그다지 좋은 습관이 아니지만, 같은 파티원이자 친구인 그녀에게 고리타분한 설교를 하고 싶지는 않았다.

당장 나부터도 신부님 설교를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리곤 했는데, 종교인도 아닌 그녀는 오죽할까.

이런 종류의 위험에 그대로 노출되어 있는 것이다.

심지어 얼마 전에는 안 좋은 상황도 일어났었다.

최음독.

원인은 불명이지만 갑작스레 최음독에 중독된 것이다.

자위만큼이나 약학에도 능한 그녀의 말이니 틀림없다.

게다가 어째서인지 그녀는 나나 유니보다도 더 민감하게 반응한 것 같았다.

……생각할수록 그럴싸하게 들리는 게 무섭다.

우리야 몰래몰래 해결하긴 했지만, 그녀는 하필 에릭의 착각 때문에 환자대우를 받으며 텐트 안에 곱게 누워있었으니.

나도 못 참은 걸 그녀가 참을 리는 만무했다.

잠깐, 그러고 보니 그 자리에 세리아만 있지는 않았을 텐데?

그 자리에는 분명…….

휙.

내 시선이 옆으로 돌아갔다.

그 남자의 방.

세리아와 단 둘이 있었던 그의 방이다.

평소에는 신경을 안 써서 몰랐지만, 최근 둘이 같이 있었던 적이 많았던 것 같기도 하고…….

어? 설마 진짜로?

반신반의했던 의심이 서서히 확신으로 변하기 시작한다.

그가 그렇게 나쁜 사람일 것 같지는 않았는데.

그러나 여신님은 말하셨다. 모든 사람은 그 내면에 어두운 밤을 지니고 있다고.

밤을 밝게 비추는 것이 우리들의 사명.

만약 그에게도 그런 어둠이 존재한다면…….

‘계도시켜야겠죠.’

서둘러서는 안 된다.

아직은 전부 추측에 지나지 않으니까.

우선은 그 정황을, 정확하게 포착하는 것부터 시작해야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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