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3화 〉 [용사] 데론 성에서
우리는 제렌 씨가 안내한 숙소에 도착했다.
어차피 손님도 없다면서 여관 주인은 우리에게 개인실을 써도 좋다고 말했다.
아린과 유니는 그 말에 방방 뛰었지만 나는 기뻐할 수가 없었다.
도대체 둘은 무엇을 했는가?
제렌 씨는 물을 너무 많이 먹은 세리아를 도와줬다고 했지만 여전히 의심은 가시지 않았다.
그가 거짓말을 한 것일까?
그렇다면 그는 내가 옆에 있었다는 걸 눈치 채고 거짓말을 했다는 소리다.
어떻게 그런데도 태연할 수가 있지?
그의 평소와 같은, 아니 평소보다 적극적인 태도가 나를 혼란스럽게 했다.
정말 그의 말대로였기 때문에 태연한 걸까?
거짓말이라면 그렇게 당당할 수는 없을 텐데.
나는 갈팡질팡하며 좀처럼 결론을 내리지 못하고 있었다.
세리아에게 묻고 싶었다.
무슨 일이 있었냐고.
아마 이게 가장 빠르고 정확한 길이겠지.
나는 답을 알고 있으면서도 실행하기를 주저하고 있었다.
대답을 들었을 때 무슨 반응을 보여야할지 모르겠다.
화를 내야할까? 걱정해 줘야할까?
아니면 내 착각이었으니 미안하다고 웃어 넘겨야할까?
제렌 씨에게 묻기에는 더 겁이 난다.
그의 대답을 들으면 나는 어떻게 반응할까?
애초에 그의 말을 믿을 수는 있는가?
……아니, 아직 아무 것도 모른다.
속단하지 말자.
나는 내가 어느 샌가 둘의 관계를 기정사실로 여기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아직 아무런 증거도 없다.
나는 지금 괜한 의심을 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게 스스로에게 타일러보지만 도무지 진정되질 않았다.
애초에 왜 이렇게 신경을 쓰는가?
그녀가 나에게 보내는 호의는 어렴풋이 눈치 채고 있다.
그렇지만 세리아는 나의 연인도 가족도 아니다. 그저 같은 파티원일 뿐.
내가 주제넘게 간섭해도 되는 것일까?
고민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계속 이어진다.
이대로라면 밤새도록 고민만 할 것 같았다.
영주님도 만나야하는데… 사천왕은… 마왕도….
똑똑.
그 때 누군가 문을 두드렸다.
“……응.”
문이 살며시 열렸다.
가장 먼저 보인 것은 긴 금발이었다.
문 틈 사이로 예쁜 머리카락이 모습을 드러내더니 곧 아린의 얼굴이 슬쩍 삐져나왔다.
“용사님, 혹시 바쁘신가요?”
“아니, 괜찮아…….”
바쁘지는 않다.
내 고민은 사실 나의 일이 아니니까.
그렇지만 지금은 혼자 있고 싶다.
다른 누군가를 상대해줄 기력이 오늘은…….
“저랑 잠시 외출하실래요?”
거절하려고 했다.
“미안하지만 지금은…….”
“교회에 잠깐 들리고 싶어요.”
신관으로서 해야 할 일이 있는 것일까.
이런 일이라면 거절할 수 없다.
파티장으로서, 파티원의 요구를 들어주어야 했다.
“알았어. 지금 가자.”
복잡한 생각은 지금은 접어두자.
바깥 공기라도 잠시 쐬면 기분도 좀 풀릴지 모르지.
내가 승낙하자 불안해하던 그녀의 얼굴이 환해졌다.
“자, 그럼 바로 출발하죠 용사님.”
그녀가 내 팔을 덥석 붙잡았다.
“아, 아린?”
“데이트잖아요. 그런데 이정도도 못해줘요?”
그녀가 웃으며 내 팔짱을 꼈다.
그러고는 슥 눈치를 살폈다.
“아니…… 응. 편한 대로 해.”
데이트가 아니지 않나?
나는 혹시 그녀에게 속은 것일지도 모른다.
반쯤 강제로 이끌리다시피 내 방을 나섰다.
계단을 내려가며 나도 모르게 내 맞은편 왼쪽에 있는 방으로 시선이 돌아갔다.
세리아의 방.
지금은 굳게 닫힌 채였다.
그녀는 지금 안에서 무엇을 하고 있을까.
“용사님! 어서요!”
“아, 응….”
애써 시선을 돌렸다.
“앗.”
1층에 내려오자 어째서인지 안절부절 못하는 유니와 마주쳤다.
“아린…… 부탁할게.”
“응! 나한테 맡겨.”
둘은 뜻 모를 대화를 잠시 나누었다.
“그럼 에릭, 이따 봐.”
유니는 그렇게 말하고선 먼저 위로 올라갔다.
왜 1층에 있었던 거지?
의아했지만 아린이 나를 1층에 멍청히 서있도록 내버려두질 않았다.
성 안은 누가 봐도 축 가라앉아 있었다.
평소에 사람들로 북적였을 시장은 모두 문을 닫은 채 조용했고, 골목마다 퀭한 눈을 한 노숙자들이 우리를 무서운 눈으로 바라보았다.
“역시 상황이 많이 안 좋군요.”
아린이 걱정스레 말했다.
“내가 너무 늦은 거야. 하루라도 빨리 사천왕을 물리치고…….”
“그만! 오늘은 더 이상 그 얘기 금지에요.”
그녀가 내 입을 막기 전까지 나는 내가 무슨 얘기를 하고 있는 줄도 몰랐다.
그냥 떠오르는 생각을 그대로 입에 담고 있었다.
또 자책하고 있었구나.
유니와 새벽에 모닥불 앞에서 나눴던 대화가 떠오른다.
미안, 유니. 다짐을 지키지 못했네.
나오던 말이 한 번 막히자 그 뒤로 딱히 할 말이 떠오르지가 않았다.
……평소에는 무슨 대화를 했더라?
기억나질 않는다.
아린도 조용했다.
우리는 그렇게 아무 말 없이 교회까지 걸었다.
“도착했어요.”
아린이 교회 앞에서 팔짱을 풀었다.
그렇게 큰 건물은 아니었다.
크기만으로는 우리가 머무는 숙소와 비슷해 보일 정도다.
그렇지만 건물 중앙에 새겨진 원과 직선을 보건대 교회가 맞으리라.
“역시 그렇게 크지는 않군요…… 들어가죠.”
아린이 나를 끌고 안으로 들어갔다.
끼익.
“계세요?”
아린의 목소리가 울렸다.
2층짜리 건물의 내부는 거대한 홀로 이루어져 있었다. 그 외에는 구석에 작게 문이 몇 개 달려있는 정도.
우리 주위에는 의자들이 가지런하게 정리되어 있었고, 그 앞에 조각된 성인 단트리우스가 보였다.
예배를 드리는 아침이었다면 그 뒤의 창문으로부터 빛이 들어와 환하게 내부를 비추어 줄 텐데, 오후라 그런지 빛은 우리의 앞이 아닌 뒤에서 들어왔다.
“누구십니까?”
조각 옆의 한 방에서 늙은 신부가 나왔다.
길게 자란 흰 머리카락과 다 헤진 옷.
상당히 오랫동안 교회에 몸담은 사람 같았다.
“아침을 알리는 여신님의 종, 아린이 데렌의 주교님을 뵙습니다.”
“자매님이셨군요. 반갑습니다. 아침을 알리는 여신의 종, 세른입니다.”
세른이라 소개한 할아버지가 고개를 숙여 인사했다.
“그런데 자매님과 그 옆의 일행 분은 제가 뵌 적이 없는 분 같군요. 밖에서 오셨습니까?”
인자하게 묻는 주교.
나는 순간 뭐라고 대답해야할지 몰라 당황했다.
“여신님의 보우하심이 있었습니다.”
대충 얼버무리는 아린.
그런다고 넘어갈 리가 있나?
그렇게 생각했는데, 의외로 세른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군요. 그 분의 은총이겠지요. 그러시면 교회에는 무슨 볼일이신지?”
주교가 묻자 아린이 공손하게 손을 모아 부탁했다.
“새벽에 대화를 나누고 싶은데 허락해주실 수 있으십니까?”
“잊을 것이 필요하신 모양이군요. 물론입니다.”
“혹시 제가 대신해도 괜찮을까요?”
“흠…….”
주교가 잠시 고민했다.
나는 이게 대체 무슨 말인지 이해할 수 없었다.
암호인가?
“알겠습니다. 새벽의 망각이 그대와 함께하길.”
주교는 인자한 미소로 그렇게 말했다.
나는 여전히 영문을 모른 채 아린이 시키는 대로 따라갈 뿐이었다.
아린이 나를 안내한 곳은 어느 작은 방이었다.
한 쪽 벽면이 검은 천으로 가려져있고, 그 앞에는 의자만 하나 놓여있는 수상한 방이었다.
무슨 상황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우선 의자에 앉았다.
그러자 천 건너편에서 인기척이 났다.
“지금은 해도 뜨지 않고 이슬도 맺히지 않은 새벽. 아무도 당신의 말을 듣고 있지 않습니다.”
아린의 목소리였다.
그녀는 내 맞은편에서 갑자기 엉뚱한 소리를 했다.
“무슨 소리야?”
“……저는 이곳에 없는 사람이랍니다.”
“응?”
내가 모르는 놀이인가?
상황을 이해하지 못한 내가 고개만 갸웃거리며 의아해하자 맞은편에서 한숨소리가 났다.
“고민을 들어드리겠다는 거예요.”
“고민?”
“네. 여기 오고 나서부터 계속 무언가 고민하고 계셨죠? 저에게 얘기해주실 수는 없으신가요?”
역시 그녀도 눈치 채고 있었나.
최대한 평소처럼 행동하려고 했는데 잘 안 된 모양이다.
“유니도 걱정하고 있었어요. 들은 내용은 아무에게도 발설하지 않을 테니, 들려주실 수 있나요? 도움을 드릴 순 없더라도, 고민을 누군가에게 이야기하는 것만으로도 마음의 짐을 덜어놓을 수 있답니다.”
그녀는 나긋나긋한 목소리로 그렇게 말했다.
다른 파티원들에게 내가 민폐를 끼쳤구나.
괜히 미안해졌다.
그렇지만…… 이걸 얘기할 수 있을까?
뭐라고 얘기해야하지?
“혼잣말이라도 좋아요. 고민을 밖으로 꺼내주세요. 안에 품고만 있어서는 더 괴로워질 뿐이랍니다.”
그녀가 나를 걱정하고 있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나는… 괜찮다.
별 일 아니다.
그저 오해를 하고 있는 것 뿐.
“……모르겠어.”
“무엇을요?”
무엇일까.
고민하면서도 내 입은 저절로 말을 뱉고 있었다.
“…통로 속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