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2화 〉 [용사] 데론 성에서
아린 다음에는 내 차례였다.
살짝 무서워서 눈을 감고 있었는데 어느 샌가 나를 감싸던 물이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도착했습니다.”
눈을 살짝 떠보니 아무 것도 보이지 않았다.
여기가 그 통로인가?
“벽에 손을 대고 걸어가다 보면 우물에 도착할겁니다. 거기서 사다리를 타고 올라가시면 됩니다.”
“이런 게 있을 줄은 정말 상상도 못했네요. 제렌 씨 덕분이에요.”
그가 아니었으면 데론 안으로 들어오지도 못했겠지.
나는 그에게 감사를 표했다.
“별 것 아닙니다. 이렇게라도 도움이 되니 다행이군요.”
제렌 씨는 정말 겸손한 사람이었다.
“그럼 저는 세리아 아가씨를 모셔오겠습니다. 먼저 올라가서 기다려주세요.”
풍덩!
그리고 제렌 씨의 소리가 사라졌다.
슬슬 올라가볼까.
나는 더듬거리며 벽을 찾았다.
턱.
살짝 까끌까끌한 벽에 손이 닿았다.
역시 흙이구나. 여긴 해자와 성을 잇는 땅굴이었다.
빛이 없어 아무 것도 보이지는 않지만 높이도 상당한 것 같다.
누가 대체 무슨 목적으로 이런 걸 만들었을까?
밀수 하나만을 위해 만들었다고 치기에는 너무나도 정교한 굴이었다.
비밀통로라고 했으니 마을 사람들에게 대놓고 물어볼 수도 없겠지.
……영주님께는 뭐라고 변명하지?
세리아와 의논해봐야겠다.
그녀라면 분명 좋은 아이디어를 내줄테니까.
그래도 내 나름대로 변명을 생각해보며 깜깜한 통로를 잠시 걸었다.
잠시 걷다보니 문득 재미난 생각이 들었다.
생각해보면 내가 지금 어디에 있는지는 아무도 모르는 것이다.
설령 내가 여기서 꼼짝 않더라도 제렌 씨와 세리아는 내가 올라간 줄로만 알고 있을 테지.
깜짝 놀래켜주면 반응이 볼만할 것 같다.
어릴 때 몰래 어른들을 놀래켰던 생각이 나 큭큭 웃었다.
유니와 나, 그리고 다른 아이들은 하나 같이 모두 마을의 악동꾸러기들이었다.
그 때의 감정이 내 마음속에는 여전히 남아있었던 모양이다.
몸이 간질간질하다.
이건 누군가를 놀래켜주지 않고서는 진정되지 않을 간지러움이다.
그렇다면 따라줘야지.
나는 자리에 앉아 그들이 올라오기를 기다렸다.
앗. 지금 무슨 소리가 나지 않았나?
희미하지만 분명 무슨 소리가 났다.
귀를 쫑긋 기울이자 멀리서 희미하게 말소리가 들렸다.
“입으로 ……거부 …….”
“……너 ……미쳤 …….”
뭐라고 하는 거지?
중간중간 들린 단어들로는 도무지 무슨 상황인지 알 수가 없었다.
아무튼 금방 올라오겠지.
그렇게 생각하며 잠시 기다리고 있었는데 잠시 기다려도 그들은 올라오려 하지 않았다.
내가 그렇게 높이 올라왔나? 그렇진 않을 텐데.
괜히 내려갔다가는 발소리 때문에 들킬지도 모른다.
그러니 움직이지 않는 것이 좋다.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는다.
올라오고 있다면 발소리가, 대화중이라면 말소리가 들려야 할 텐데.
둘 다 들리지 않는 것은 어째서지?
이쯤 되면 더 이상 가만히 있을 수는 없다.
무슨 일이 생긴 것일지도 모르니 내려갈 수밖에.
그래도 최대한 소리를 내지 않고 움직이자.
나는 살금살금 밑으로 내려갔다.
아무런 소리가 들리지 않는 건 여전했지만, 조금 더 내려가자 드문드문 알 수 없는 소리가 조금씩 들렸다.
……츄읍.
물에 젖은 발소리? 조금 달랐다.
그럼 뭐지?
조금 아래로 내려가 보니 아까보다 더 선명하게 들린다.
츄릅, 츄릅.
발에서 나는 소리는 확실히 아니었다.
그보다는 뭐랄까…… 그래. 무언가를 핥고 있는 듯한 소리 같다.
이런 곳에서? 대체 뭘?
“……읏.”
세리아의 목소리가 작게 새어나왔다.
역시 세리아인가?
대체 이게 지금 무슨 소리지?
탁!
무언가가 부딪히는 소리.
……둔탁한 것에 부딪힌 소리는 아니다.
“흐흐.”
제렌 씨의 웃음소리.
왠지 조금 비열하게 들린다. 내 과민반응일까.
츕.
다시 이상한 소리가 났다.
……이건.
대체 무슨 소리지?
왜 이런 소리가 나지?
이곳에는 아무 것도 없는데,
둘은 대체 여기서 무엇을 하고 있는 것이지?
츄릅츄읍.
“응……? 읍! 윽!”
탁탁!
갑자기 괴로워하는 세리아의 목소리와 무언가 치는 소리가 동시에 들렸다.
뭐지? 무슨 일이지?
자박.
나도 모르게 한 걸음 내딛고 말았다.
그 바람에 낯선 소리가 섞여버렸다.
들었을까?
“콜록! 콜록! 야 이 개… 읍!”
……방금 설마 욕한 건가?
설마 아니겠지.
무슨 말이 나오려다 억지로 가로막힌 것 같은데.
“죄송합니다 아가씨. 너무 힘을 준 모양이군요.”
평소 같은 제렌 씨의 목소리다.
아까 들었던 그 낮은 톤은 대체?
아니, 그보다 힘을 줬다는 건 무슨 말이지?
“콜록! 무슨…….”
“물은 전부 뱉어내셨습니까?”
물?
“말도 없이 갑자기 싸…….”
“제 실수입니다. 설마 해자의 물을 삼켜버리시다니.”
……해자?
세리아가 잠수하면서 물을 삼켜버린 건가?
“갑자기 무슨… 아….”
세리아의 말이 갑자기 작아졌다.
“아, 아니야…… 이건…….”
떨리는 그녀의 목소리.
……왜 그래? 해자의 물을 마신 것 아니었어?
“그럴 땐 억지로라도 물을 빼내야 합니다. 자칫 잘못하다가는 큰일 나거든요. 하지만 제가 안 보여서 그만 너무 세게 눌렀나봅니다. 죄송합니다, 아가씨.”
제렌 씨가 이상할 정도로 친절하게 상황을 설명했다.
“아… 아아….”
“아가씨. 정신 차리세요!”
물을 너무 많이 먹어 위험한 상태에 빠진 세리아를 제렌 씨가 구해준건가?
그의 말을 듣는 한 그런 것 같았다.
……정말로?
“아가씨. 물은 다 뱉어내셨습니까?”
제렌 씨가 집요하게 물었다.
“아…… 으, 응.”
그녀의 목소리는 전에 들은 적 없을 정도로 떨리고 있었다.
익사할 뻔한 공포인가? 아니면……?
“제 잘못이군요. 제가 잠시 길을 헤맨 탓입니다.”
“아, 아니야…… 이건 무, 물을 삼킨 거니까…… 어, 어쩔 수 없는…….”
세리아는 당황하며 말을 늘어놓는 것 같았다.
언제나 논리적이고 똑 부러지던 그녀의 말이라고는 믿기 힘들 정도였다.
“그럼 서두르도록 하죠. 다들 기다릴 겁니다.”
“……으, 응.”
나는 지금이라도 당장 뛰쳐나가서 무슨 일인지 해명하라고 소리치고 싶었지만, 무언가가 나를 계속 막고 있었다.
나는 지금 무엇을 의심하는 거지?
그들이 무슨 짓을 한 거라고?
……그럴 리가 없다.
그래서도 안 된다.
만약 물어봤는데 진짜라면?
그럼…….
저벅저벅.
그들이 조금씩 앞으로 나아가기 시작했다.
이대로면 여기 있었다는 사실이 들키고 만다.
아직 머릿속이 복잡하다.
그래도 우선은 빨리 자리를 떠야할 것 같았다.
나는 혼란스러운 상태 그대로 그들과 멀어져 조금 빠르게 앞질렀다.
“힘이 없으시군요. 조금 부축해드릴까요?”
“너…… 너 때문에…… 아니, 아니야…….”
둘의 대화가 내 뒤에서 계속 나를 잡아끌었지만, 끝내 무시했다.
***
“와아! 아린, 드디어 올라왔어!”
“어머, 용사님 맞죠?”
사다리를 타고 우물을 올라가니 위에서 아린과 유나의 목소리가 들렸다.
둘은 먼저 올라와 있었구나.
이럴 줄 알았으면 나도 미리 올라와있을 걸.
아니면 유니라도 데리고 왔으면 어땠을까.
“…용사님?”
내가 아무 말도 않자 아린이 불안한 듯 다시 불렀다.
“아, 응…. 나 맞아.”
“휴우, 말이 없으셔서 순간 놀랬어요.”
나긋나긋한 아린의 목소리.
그녀의 감촉이 문득 다시 생각났다.
보드랍고 따뜻했던…….
“근데 왜 이렇게 늦었어?”
유니의 목소리.
순간 말문이 막혔다.
“아…… 어쩌다보니.”
“앗! 무서워서 못 올라왔구나? 그치?”
유니가 히히 웃으며 말했다.
아직도 내가 어릴 때 항아리 안에 숨어 있다가 엉엉 울었던 일을 기억하는 것일까.
나는 이제 아이가 아닌데도.
“그, 그런 건 아닌데…… 아무튼 그렇게 됐어.”
“다른 두 분은요? 혹시 만나시진 않았나요?”
아린의 말에 가슴이 철렁했다.
“그, 글쎄? 못…… 봤어.”
“이상하네요. 다들 늦으시는 거 같은데.”
“우리가 착각했나봐.”
아린과 유니는 별 의심을 품지는 않는 것 같았다.
그에 비해 나는…….
“다들 무사히 도착하셨나보군요.”
어떻게 우물 위로 올라왔는지도 모르겠다.
조금 멍한 상태로 있자 어느새 제렌 씨의 목소리가 들렸다.
“앗! 왔다!”
“후후, 안 보이지만 계신 것 맞죠?”
……저 둘을 무슨 얼굴로 봐야하지?
아직 생각이 정리되지 않았다.
“다들 무사히 도착했으니 마법을 풀어도 될 것 같습니다.”
제렌 씨의 목소리가 바로 옆에서 들렸다.
언제 올라온 거지?
“아가씨?”
“……어? 아, 응…….”
우리의 모습이 사라졌던 것처럼 순식간에 우리의 모습이 다시 나타났다.
유니와 아린은 신기하다는 듯 자기 몸을 이리저리 둘러보고 있었다.
세리아는 기운이 없어 보인다.
“아마 평범한 여관에서 방을 구하긴 힘들 것 같습니다. 이런 상황에 여행객이 다닐 리가 없으니까요. 그러니 제가 아는 곳으로 안내하고자 하는데 괜찮으십니까?”
제렌 씨는 오늘따라 굉장히 활동적이었다.
“음…… 그래야겠네.”
“확실히 그렇군요.”
유니와 아린은 고개를 끄덕이며 동의했다.
“용사님은요?”
“어? 응. 나도 그런 거 같아…….”
아린이 묻길래 엉겁결에 대답해버렸다.
“자, 그럼 안내하겠습니다. 따라오시죠.”
제렌 씨가 우리를 재촉했다.
나는 복잡한 심경으로 그의 뒤를 묵묵히 따라갔다.
아린과 유니는 마법이 신기했는지 자기들끼리 재밌게 수다를 떨고 있다.
세리아의 목소리는…… 들리지 않는다.
그렇지만 뒤를 돌아볼 용기는 나지 않았다.
지금은 그녀의 얼굴을 볼 자신이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