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야수라는 공작에게 시집왔는데-150화 (완결) (150/150)

150화

루크에게는 오랫동안 고민해 온 문제가 있었다.

사랑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어째서 반드시 욕망을 동반하고 마는가? 욕망이 따라오지 않는 사랑이야말로 완전무결하지 않은가? 나디아를 차마 건드리지 못하고 그녀의 옆에서 인고의 시간을 보낼 때부터 그 고민은 시작되었다. 나디아를 만나기 전까지는 평생 써본 적도 없던, 아침에나 좀 힘이 들어가고 말았던 기관이 왜 주제를 모르고 나대게 된 것인지….

그리고 끝내 그녀를 생명의 위기까지 내몰고 말았던 주범이 바로 아랫도리였다. 제 딸이지만 천사의 현신 같은 발렌티나의 탄생에도 일정 부분 일조는 했지만, 사실 딸의 탄생에 기여한 건 단 한 번의 활약뿐이었다. 대부분은 쓸모없는 기관이 지나치게 존재감을 가진 것이 아닌지…….

루크는 나디아가 행복하길 바랐다. 그녀가 자신을 더 좋아해주길, 사랑해주길 바랐다. 그녀가 웃어줄 때 세상을 다 가진 듯이 행복했고, 울면 세상이 무너진 듯이 절망적이었다. 결국 나디아를 중심으로 세상이 돌아가게 되었는데, 고작 신체 기관 하나에 휘둘려 그녀를 괴롭게 만드는 것이 말이 되는가.

‘말이 안 되지….’

나디아는 키스를 좋아했다. 가볍게 입술을 비비는 입맞춤, 가슴 안쪽이 따뜻해지는 포옹, 손을 잡고 걷는 산책을 사랑했다. 루크 또한 그것만으로도 충만한 행복을 느낄 수 있었다. 자꾸 솟아오르는 아랫도리만 아니면 말이다. 이 기관만 빼면, 루크 또한 그것만으로 충분히 만족할 수 있었다.

“아이를 또 낳아야 할 필요는 없잖아? 발렌티나에게 모든 걸 물려주면 되니까.”

“발렌티나 님은 완결무결한 분이시니까요.”

안나와 그렌트가 고개를 끄덕거렸다. 제이도 고개를 끄덕이려다 흠칫 놀라며 목에 힘을 주었다. 그는 아직도 중립적이고 객관적인 입장을 고수하려고 노력하고 있었다.

발렌티나가 태어난 지 어느덧 10여 개월.

스테이턴 성은 발렌티나를 중심으로 완전히 똘똘 뭉쳤다. 발렌티나는 스테이턴답게 성장이 빠르고 무척 건강했다. 벌써 걷기 시작한 아이를 보고 안나와 그렌트는 천재라고 입이 마르게 칭송하기 바빴다. 루크도 제 딸이 귀엽고 사랑스럽고 완벽하게 보였지만, 이따금 안나와 그렌트가 아기를 보는 눈빛을 볼 때면 왠지 졌다는 생각을 하게 됐다.

눈에서 꿀이 아니라 온세상 단물이 다 흘러나오는 것 같은 눈빛이라서.

딸이 작위를 물려받는 경우는 제국 역사상 단 한 번도 없었다. 재산은 공평하게 반으로 나누지만, 작위만은 아들에게 물려주는 것이 제국의 관례였다. 그러나 타국의 경우, 재능이 출중한 딸에게 작위를 물려주는 경우가 있기도 하다고 들었다. 사례를 찾아본다면 아주 없지는 않을 것이다.

‘정 뭣하면 공국 독립해버리고 공왕 자리를 주면 되지.’

제국의 귀족으로 남으라는 선대의 유지가 있긴 해지만, 눈에 넣어도 안 아플 증손녀를 위해서라면 선대도 그깟 유지 따위는 단번에 내다버리라고 하실 것이다. 공국 안에서 초대 공왕이 누가 되든, 딸에게 물려주든 아들에게 물려주든 그게 다 무슨 상관이람. 제국의 법이 허락하지 않는다면 그깟 자리 박차고 나오면 그만이었다.

‘그러면 레너드 자식 얼굴도 안 볼 수 있고….’

생각해볼수록 좋은 점뿐이다. 루크는 먼 미래의 일까지 상상해가며 아랫도리의 쓸모를 고민했다.

오래 전부터 시작된 고민이기는 하지만 결론이 이처럼 극단으로 치달은 것은 아주 최근이었다. 그는 여전히 나디아를 보면, 나디아의 향기를 맡으면, 아니 그녀의 존재만 인지해도 반사신경처럼 그곳으로 피가 쏠렸다. 아기를 안고 어르는 그녀의 둥근 이마가 사랑스럽고, 찡긋거리는 콧잔등이 예쁘고, 더욱 부드럽고 풍만해진 하얀 가슴은 죽을 것처럼 황홀했다.

하지만 나디아를 만지지 못한지 어언 1년이 훌쩍 넘었다…….

아기를 낳은 산모는 몸이 무척 쇠약해진다. 10개월 동안 아기를 품고 키우며 영양분을 빼앗기고, 자신의 살과 뼈를 나누어주는 과정이니 당연히 정상일 리 없었다. 무사히 출산을 한다고 해도, 젖을 먹이고 키우려면 또다시 무리하게 되는 것이다. 나디아는 젖을 나눠줄 유모를 구했지만 될 수 있는 한 직접 아기를 돌보려고 했다. 도와줄 사람이 많아서 부릴 수 있는 욕심이라 해도 좋다고, 행복하다고 말이다…….

출산 과정에서 다친 몸이 회복된다고 해도 그 쇠약해진 부분까지 채워지려면 얼마나 더 걸릴지 알 수가 없다. 게다가 아기를 돌보는 중에는, 아기 중심이 되어서 치근덕거리는 남편이 아주 성가시고 귀찮아진다고……. 루크는 출산 직후 아내에게 들이댔다가 무섭게 혼쭐이 난 기사단원의 경험담을 곱씹었다.

‘제가 만지는 게 소름이 끼친다더라고요….’

‘소름까지…?!’

‘네, 그리고 제 손등을 철썩 때리는데, 어우. 서러워서….’

나디아에게 소름이 끼치게 할 수는 없지……. 그리고 그녀에게 손등을 맞는다거나 싸늘한 시선을 받는 등의 거절을 당하면, 부서진 멘탈을 회복할 자신이 없었다. 세상에서 가장 쓸모없는 사람이 된 것만 같을 테니까 말이다.

휘둘릴 바에는 먼저 잘라내는 것이 낫지 않은가.

제이를 비롯한 측근들은 이제 루크의 고민 상담에는 응해주지도 않았다. 안나와 그렌트는 루크가 한 마디 꺼내려고 하면 “바빠서요.”라면서 자리를 떠버렸고, 제이는 성의없이 “이따 들어드리겠습니다.”하고 넘겨 버렸다. 게리 노스의 의견은 들어봤자 소용이 없다. 그에게 상담을 청할 바에는 베개를 세워놓고 토로하는 편이 낫다는 걸 깨달았다.

발렌티나의 탄생 한 달 전부터 루크는 유부남 기사단원을 모아놓고 진지한 고민을 토로했다.

루크의 고민을 듣고 난 후, 유부남 기사들의 표정은 매우 오묘해졌다. 무슨 말을 하고 싶지만 차마 할 수 없는, 답답한 표정이었다.

오랫동안 부인을 만지지 못한 욕구불만과 너무 아름답고 성스러운 부인과 아이를 향한 경이로움이 뒤섞여 이상한 결론으로 이어진 듯했다. 저 사고의 흐름을 이해하지 못하는 건 아니었다. 그들도 한때 다 겪어본 흐름이었다. 부인에게 욕정하는 자신이 세상에서 가장 더러운 쓰레기처럼 느껴지던 그 시절….

하지만 그건 다 한때였다. 가장 나이가 많은 기사가 떨떠름하게 뺨을 긁으며 조언했다.

“그 부분은, 부인의 허락을 구하고 실행하시는 게 어떻습니까?”

“맞습니다. 부부는 하나이지 않습니까? 아무리 사소한 고민이라도 나누어야 하는 법입니다.”

루크가 마른세수를 했다.

“이렇게 더러운 나라도…?”

“부인의 생각은 또 다를지 누가 압니까. 우선 허락을 구하고 나서 생각해보시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웬만하면 부인께서 허락해주실 일은 없겠지만요. 그들은 흐뭇하게 웃었다.

스테이턴 공작은 본래도 영주민들에게는 친근한 영주이자 귀족이었으나, 결혼 후에는 한 층 인간적으로 가까워진 기분이 들었다. 그는 부인에 관한 일이라면 아무리 사소한 것이라도 진심으로 염려하고, 자주 풀이 죽었다. 너무 사소한 것에도 얽매여서 이따금 “이런 사람이 영주라도 괜찮은 것인가?”하는 걱정이 들 때도 있지만, 가족 외의 일에서는 아주 칼같고 유능한 사람이었다. 무엇보다 상대가 되지 않을 만큼 강하고 말이다.

*

그리고 그렇게, 루크의 오랜 고민을 전달받은 나디아는 눈을 깜박거렸다. 농담인가?

하지만 고민을 토로하는 루크가 너무나 진지하고, 또…… 상처를 받은 기색이라 웃지도 못했다. 그가 진지하지 않았다면 농담 참 재미있다며 웃었을 것이다.

나디아는 풀이 죽은 남편이 마치 꼬리를 축 늘어뜨린 강아지처럼 보였다. 그리고 최근? 이라기에는 조금 오래된 과거를 돌이켜보았다. 그간 확실히 그녀는 부인보다는 어머니의 역할에 푹 빠져 있었다. 발렌티나는 제가 낳았지만 너무 사랑스럽고, 완벽하고, 예쁘고, 귀엽고, 영특하고…… 어쨌든 완벽해서 홀리지 않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하지만 그동안 루크는 방치되어 있었다.

루크는 영지의 일을 돌보느라 바빴고, 아무래도 검을 가까이 하는 시간이 긴 탓에 욕심처럼 아기를 오랫동안 가까이 두지도 못했다. 나디아는 대부분 아기방에서 함께 잠들었고, 그동안 루크는 혼자….

부부는 꼭 끌어안고 자야 한다고 했던 것은 자신인데.

게다가 아주 가끔 그와 함께 잘 때에도, 피곤하다는 이유로 그를 꼭 끌어안고 잠만……. 나디아는 그에게 무척 미안해졌다. 혈기왕성한 사람이 제가 끌어안고 잔다고 함께 잠이 들 수 있었을 리가 없었다. 분명 그는 뜬눈으로 밤을 지새웠겠지…. 자신이 자는 동안 그가 혼자 무엇을 했을지는 굳이 묻지 않겠지만, 이제는 대강 짐작할 수 있었다.

‘정말 바보라니까….’

자신에 관한 한 그는 순수하기까지 한 사람이니, 그런 자신을 용서할 수 없었던 게 틀림없었다.

“당신이 허락만 해준다면 당장 의사를 알아보겠소….”

“안 돼요,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는 거예요.”

딴 생각에 빠져 있다가는 긍정하는 줄 알고 당장 의사에게 튀어갈 기세였다. 나디아는 엄한 목소리로 루크의 팔을 붙잡았다. 루크가 가련하게도 크게 몸을 움찔거렸다.

‘……낮에 이렇게 닿은 적도 1년이 넘었나……?’

임신 기간에도 감정 기복이 커서 거의 그를 보지 못하다시피 했으니까, 어쩌면 나디아가 인지한 것보다 생이별한 기간이 긴 걸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이제는 몸도 거의 회복이 되었다. 나디아는 자신을 위해 고민을 거듭하다 이상한 결론에 다다른 사랑스러운 남자의 허리를 꼭 끌어안았다.

이 남자는 날 상처입히지 않아, 언제나 날 먼저 생각해줘.

“이건 내 거예요.”

“그야 난 당신 거고….”

“털 끝 하나라도 상하는 건 용서 못해요.”

“…….”

“그리고 이건 오늘부터 내가 다시 쓸 거니까.”

루크가 입을 크게 벌렸다가, 다시 닫았다가, 커다란 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당신, 정말, 많이….”

“네?”

“……멋있다고…….”

그의 귓바퀴가 새빨갛게 달아올라 있었다.

-'야수라는 공작에게 시집왔는데' 완결.

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