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9화
한 달 뒤, 스테이턴 영지에는 경사가 생겼다.
스테이턴 부인의 임신 소식이 전해진 것이다. 오랫동안 스테이턴 공작의 후계자를 바라왔던 영지민들은 한마음으로 기뻐했다. 현 공작의 부모가 라 먼스트로드에서 사고를 당한 후로 그들은 영지를 최우선으로 생각해주는 영주의 행복을 함께 바랐으므로.
공작은 마치 구름 위를 걷는 사람처럼 얼이 빠져 지낸다는 소문이었다. 그는 공작부인이 행여 잘못될까 전전긍긍하면서 그녀가 스스로 한 걸음도 걷지 못하게 하려는 양 감싸고 돌았다. 부인에게 푹 빠졌다는 이야기야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었지만, 이쯤 되니 영지민들도 좀 심한 게 아닌가 염려하는 수준이 됐다. 저러면 부인이 답답하다고 싫어하실 텐데 말이다.
몰브티 왕국의 왕비에게서 근사한 선물이 도착했다. 대부분이 부인을 위한 선물과 곧 태어날 아기를 위한 용품이었지만, 용도를 알 수 없는 향유들도 20병이나 도착했다. 루크는 “쓰지도 못할 걸 왜 보낸 거냐. 약 올리냐.”고 투덜거렸지만, 의외로 오일은 임신 기간 내내 아주 유용하게 쓰였다. 그는 매일 각종 오일로 나디아의 몸을 정성스럽게 마사지해주었다.
나디아의 모친이 그랬듯이, 또 일리야가 그랬듯이 그녀는 입덧은 심한 편이 아니었다. 오히려 입맛이 돋아서 평소보다 많이 먹었다. 루크는 물론이오, 안나와 그렌트까지 나서서 그녀가 먹고 싶다는 음식들을 앞다투어 준비해주었다.
특히 안나는 루크 못지않게 유난을 떨었다. 그녀는 임신 초기에는 루크의 접근마저 해악으로 분류해 그를 격리시켰다. 임신 초기에는 여러모로 조심해야 한다는 이유로 말이다. 그게 아니라도 손대는 일이 없다고 분통을 터뜨려도 안나는 듣지 않았다.
입덧이 없는 대신 나디아는 감정 조절을 어려워했다. 바람만 불어도 울거나, 아주 사소한 것에도 웃었다. 부풀어가는 가슴과 배가 못났다고 울기도 했다. 몸 속에서 생명이 자라난다는 것은 경이롭기도 했지만 그만큼 두려운 것이기도 했다. 모두 처음 겪는 일이기 때문이다. 일리야가 피오나를 임신했을 때도 그랬다.
나디아가 잘못될까 봐 두려워했던 루크는 그녀가 차차 안정기에 접어들자 유명한 산파를 섭외하기 시작했다. 출산 과정에 있어 그 어떤 불안 요소도 있어서는 안 되기 때문이었다. 필요하다면 국외 인사도 기꺼이 모셔올 기세로 알아보았지만, 나디아는 낯선 사람은 싫다고, 안나만 있으면 된다고 울며 애원했다.
“그리고 절대 루크는 보면 안 돼요.”
“뭐?! 어째서!”
“남편이 출산 장면을 보고서 부인을 여자로 못 느끼는 경우도 많다고 그랬단 말이에요….”
“누가 그런 망발을…?”
“…하여간 안 돼요.”
출산 장면을 전부 볼 각오는 그에게도 없었지만, 아예 금지를 당하는 것은 또 이야기가 달랐다. 누군가, 그딴 쓸데없는 정보를 나디아에게 전해준 게. 보나마나 셀리아나 레이나, 둘 중 하나였다. 매번 질리지도 않고 긴 편지를 주고받는 두 친구는 아주 가끔 도움이 될 때도 있었지만 대부분은 루크에게는 해악에 가까운 존재였다.
임신 이후로는, 비슷한 시기에 임신한 레이나에게 의존하는 경향이 높아져서 나디아 안에서의 순위가 밀려난 기분마저 들었다. 내가 남편인데, 내가 제일 가까이에 있는데…!
“안 그래도 배가 이렇게 커져서는, 부어서 못생겨지기나 하고….”
“무슨 소리요, 대체. 당신은 더 아름다워지기만 했는데. 만지지도 못하는 게 미쳐버릴 만큼….”
“……바람피우면, 안 돼요….”
무슨 상상을 한 건지 나디아가 훌쩍거리며 울기 시작했다. 루크는 무릎을 꿇고 애원했다.
“당신 외에는 성욕을 느껴본 적도 없소, 나디아. 진짜요. 당신밖에 없어.”
“하지만, 이렇게, 못생….”
“아니라니까. 한 번만 더 그러면 화낼 거요.”
“흑, 흐윽, 화, 화낸, 화낸대…. 으헝….”
무슨 말을 해도 감정기복이 커서 결국은 울음으로 끝이 났다. 어쩌면 임신 초기 루크를 쫓아냈던 안나의 선택이 옳았던 것이다. 안나와 그렌트는 공작을 발로 걷어차 쫓아내고는 부인을 안심시켰다. 만약 루크가 딴마음을 먹는다면 직접 그곳을 잘라주겠다느니, 아기님에게 해가 된다면 공작이라도 쫓아내 주겠다느니….
무례는 당연하고, 하극상마저 태연하게 입에 올리는 측근들을 보면서도 루크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들이 무슨 말을 하든 우는 나디아를 달랠 수만 있다면 기꺼웠다. 그로서는 무슨 말을 해도 나디아를 울리기만 하는 것 같아서…….
임신 기간 10개월은 루크에게 고행의 시간이었다.
종잡을 수 없는 감정의 기복을 따라가기도 벅차고, 힘겨워하는 나디아를 보면 이게 다 제 욕심 탓이었다는 자괴감 때문에 가슴이 아팠다. 역시 이놈의 아랫도리가 모든 불행의 원인이었다. 이것만 아니었다면 나디아를 조금 더 평화롭게 사랑해줄 수 있었을 거라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었다. 정작 나디아는 평온해지면 그에게 사과하기 바빴지만, 그마저도 포함해서 괴로웠다.
그러나 긴 고행의 시간도 드디어 끝이 났다.
“진정하십시오, 각하.”
“아직인가? 아직이냐고.”
“기다리십시오. 재촉한다고 아기님이 일찍 태어나주시지도 않는데….”
태연하게 말하는 제이의 평온한 얼굴을 루크는 마치 원수라도 되는 양 사납게 노려보았다. 초조한 그의 마음도 모르고 지껄이는 게 아주 얄밉기 짝이 없었다. 진실만 말하는 혓바닥에 눈치가 생긴 줄 알았더니 그렇지도 않았다. 제 머릿속을 들여다보았다면 저런 말은 꺼내지도 못했을 텐데…….
‘출산 중 사망하는 여인이 얼마나 많다고 했지….’
벽을 뚫고 나디아의 날카로운 비명이 들릴 때마다 수명이 10년씩 뭉텅뭉텅 깎이는 기분이었다. 머릿속에는 온갖 불행한 경우가 떠올랐다 가라앉길 반복했다. 출산하다 목숨을 잃은 산모, 무사히 아이를 낳았으나 몸이 약해지거나 불편해진 산모…. 그는 초조함을 이기지 못하고 벌떡 일어났다.
제이는 산실 앞을 빠르게 왔다갔다하는 공작을 빤히 바라보았다. 제 새끼가 세상에 나오기 직전인데도 그는 오로지 부인만을 걱정했다. 스테이턴의 핏줄이라면 출산 중 잘못될 리가 없다는 기이한 확신 탓인지, 자신에 비하면 부인이 새끼 양처럼 연약해 보이기 때문인지(그와 비하면 제이마저도 망아지처럼 연약해 보였다)….
‘부인도 연약하지는 않으신데.’
출산이 워낙 큰일이니 걱정이 되는 것은 이해가 되지만, 안나를 비롯해 그렌트까지 마치 부인이 톡 건드리면 부서질 설탕 공예품처럼 다루는 것은 과보호가 아닌가, 하고 제이는 나름 냉철하게 분석했다. 모두가 휩쓸리는 때일수록 냉정을 유지하는 사람이 한 사람쯤은 필요하며, 그것이 바로 자신이라는 사실에 자부심을 가졌다.
스테이턴 성의 모든 사람이 아기님과 부인에게 홀딱 반해서 이성을 잃고 과보호에 휩쓸린다고 해도 자신만은 절대, 냉정을 잃지 않고 객관적인 조언으로 진정한 충성을 바치겠다는 다짐.
으애앵!
가물어가는 비명 사이로 연약한 울음소리가 터졌다. 루크가 문고리를 잡고 무릎을 꿇고 문에 귀를 가져다 대었다. 안나가 문을 열고 아드님인지 따님인지 알려줄 줄 알았지만, 환호와 눈물이 터진 산실의 문이 열리는 일은 없었다.
가련하게도 문에 귀를 바싹 대고 초조하게 기다리는 남편이자 영주의 존재는 완전히 잊힌 것이다.
*
공작 부부의 첫 아이, 외동딸 발렌티나의 탄생일에는 축제가 열렸다.
성 인근 주민들은 일주일간 먹고 마시며 공녀 발렌티나의 탄생을 축하했다. 라 먼스트로드에서는 부인의 친정 식구들이 방문했고, 또 한 번 각지에서 선물이 쏟아졌다. 이번에는 몰브티 왕비만이 아니라 제국의 황태자에게서도 친서와 선물이 도착했다. 아기는 건강했고, 다행히 산모도 마찬가지였다.
루크는 딸의 탄생 이후로 매일 오전 일정을 따로 조정했다. 딸을 감상하는 시간을 1시간씩 집어넣은 것이다. 나디아가 쉬고 있으면 그가 아기 곁에 꼭 달라붙었다.
“아기님과 거리 1미터를 유지해주십시오, 각하.”
“내가 더러워?”
“갑자기 커다랗고 험악한 게 보이면 아기님이 놀라실지 모르니까요.”
안나는 말이 더 심해졌다. 루크는 매우 서러웠지만, 그녀의 말에도 일리가 있는 것 같아서 일정 거리 이상으로는 접근하지 않으려고 했다. 다행히 그는 시력이 좋아서 멀리서도 아기를 자세하게 볼 수 있었다.
아기는 감히 단언컨대 세상에서 가장 완벽한 존재였다.
아직 태어난 지 한 달 남짓한데도 눈, 코, 입, 이마, 뺨, 팔, 다리, 비율, 머리칼, 눈동자 그 어디 하나 완벽하지 않은 구석이 없었다. 눈에 넣어도 안 아플 거라는 건 과장이 아니라 진실이었다. 아프기는커녕 눈알을 빼서라도 아기가 편안하게 들어갈 수 있게 할 수 있을 것 같았으니까….
“방금 기침한 거 아닌가? 추운가 본데?”
“숨만 쉬셨는데요.”
“코를 찡긋거렸는데?! 공기가 안 좋은 거 아닌가?!”
“숨만 쉬셨다니까요. 성가시게 구실 거면 나가십쇼.”
“……미안하다….”
볼 때마다 가슴이 벅차오르고 행복감에 젖었다. 이 연약한 존재를 지켜주기 위해서라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답고 어여쁜 것만 건네주기 위해서라면 그는 무엇이든 할 수 있을 것만 같았다. 이 세상은 나디아와 스테이턴 영지를 빼면, 그다지 대단하거나 아름답다고 생각하지 않았는데? 제가 죽고 나서도 살아가야 할 아기를 위해, 그는 세상이 조금 더 따뜻하고 아름다워졌으면 좋겠다고 바랐다.
평화를 바라는 마음.
언젠가 제 손으로 지켜줄 수 없을 존재를 위해 어떤 전능한 존재에게 부탁하고 싶었다.
“또 그러고 있어요, 루크?”
“…나디아….”
아기 침대에 멀찍이 서서 감동에 젖은 루크의 등을 나디아가 끌어안았다. 안나와 친정 식구들의 정성스러운 돌봄으로 나디아는 빠르게 컨디션을 회복했다. 들쭉날쭉했던 감정 기복도 많이 잦아들었다. 그녀는 자신을 돌아보는 루크를 올려다보고는 웃음을 터뜨렸다.
“눈물이 많아지지 않았어요, 당신?”
“……우리 애가 너무 예뻐서.”
“울보가 다 됐네.”
“고맙소, 나디아…….”
무사해줘서 고맙고, 건강해줘서 고맙고, 태어나줘서 고맙고….
세상은 감사할 일로 가득했다.
단 한 가지 인내해야 할 고통만 빼면 그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