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6화
Epilogue. 어느 날
요란한 여름이었다.
두 달을 계획하고 영지를 방문했던 랭커스터는 결국 두 계절이 가도록 스테이턴 령을 떠나지 못했다.
처음에는 지나치게 극진한 대접을 부담스러워 했지만 이내 익숙해졌다. 피오나가 가끔 “화려한 도시가 그립다.”라며 투덜거렸지만, 네가 도시의 화려함을 어떻게 아느냐는 펠릭스의 정론에 말문이 막혔다. 사실 입으로만 투덜거릴 뿐, 피오나는 사람들의 극진한 대접을 누구보다 즐겼다.
일리야는 성의 도서관에 홀딱 반했다. 게다가 안나의 측근들이 구해오는 연애 소설까지 쌓아두고 읽느라 정신이 빠져 지냈다. 펠릭스와 엘릭은 흑곰 기사단장 게리 노스와 죽이 잘 맞아서 졸졸 따라다녔는데, 게리 노스는 그들을 흑곰 기사단원으로 키워야 한다는 꿈에 부풀어 무리하지 않는 선에서 훈련을 시키기도 했다.
몸이 약해졌던 마리아는 맑은 시골 공기를 마시며 건강을 완전히 회복했다. 안나는 그녀에게 아침저녁으로 직접 가꾼 허브티를 타주며 매일 긴 대화를 나누었다.
비록 랭커스터 남작은 한 달 만에 돌아가야 했지만, 앤더슨과 조지는 수도와 영지를 오가며 가족들과의 시간을 즐겼다. 루크는 남자들끼리 술자리를 가졌다가, 가장 먼저 쓰러지고 말았다. 랭커스터 남작과 앤더슨은 아무리 독주를 퍼부어도 멀쩡했고, 조지마저 루크보다 강했다. 조지는 “랭커스터의 사위라면 이 정도는 견뎌야 합니다, 하하!”라고 웃으며 루크를 자극했다. 루크는 조지에게 열등감을 느끼고 일주일 정도는 술독에 빠져 살았다가 나디아에게 혼쭐이 났다.
물론 가장 신이 난 사람은 나디아였다. 일리야와 말을 타고 너른 들판을 달리기도 하고, 밤 늦도록 마리아와 수다를 떨기도 했다. 날씨가 좋은 날에는 테라스에서 차를 마시거나 영지의 명소들을 구경했다. 제이는 훌륭한 가이드였다. 피오나와 펠릭스, 엘릭과 부엌을 점령하고 쿠키를 대량으로 굽기도 했다. 구워낸 쿠키는 성에서 일하는 사람들에게 직접 나누어주었다. 흑곰 기사단이 환호성을 지르며 너무나 좋아해주는 통에 정작 가족들에게 줄 몫이 사라져버린 일도 있었다.
아이들의 웃음소리가 끊이지 않았던 여름.
꿈결처럼 즐거웠던 시간이지만 결국 랭커스터는 삶의 터전으로 돌아가야 했다. 나디아는 일리야와 마리아, 비비안을 붙잡고 그냥 스테이턴 성에서 같이 살면 안 되겠느냐고 졸랐지만 그럴 수 없다는 걸 잘 알고 있었다. 그들이 쌓아온 인생이 모두 라 먼스트로드에 남아있다는 걸 알고 있기에.
“순식간에 조용해졌군요.”
안나가 말했다. 나디아가 대답 대신 고개만 끄덕거렸다. 목소리마저 공허하게 떨어지는 듯이 들리는 것은, 공간을 꽉 채워주었던 사람들의 부재 탓이리라.
“또 초대하면 되지요. 그리 상심하지 마세요.”
“아녜요. 반년이나 머물러 준 것도 많이 늦춰준 것을요. 그동안 손님들을 치르느라 안나도 고생이 많았을 텐데….”
“가족이 무슨 손님이에요.”
“…으으, 안나는 날 울리는 방법을 너무 잘 알아요….”
겨우 가물었던 눈가가 금세 촉촉해졌다. 안나는 웃음을 터뜨리며 나디아의 등을 쓸어주었다.
“오랜만에 성에 아이들 웃음소리가 가득해서 저도 즐거웠답니다. 특히 그렌트가 얼마나 행복해했는지 아세요? 그 사람은 거의 피오나 양을 졸졸 따라다녔어요. 헤벌쭉 벌어진 입을 보셨어야 하는데. 솔직히 잘 아는 사람이 아니었으면 변태로 잡아 가뒀을 겁니다.”
“그렌트가 너그러운 거죠. 피오나를 건방지게 보지 않고 귀엽게 봐 주셨으니까.”
“피오나 님은 귀여우세요. 물론 조숙한 구석이야 있지만 그건 다 또래보다 영리하다는 증거예요.”
“안나도 너그러워 그래요. 언니도 피오나 때문에 얼마나 골치를 앓는다고요. 물론 제겐 더할 나위 없이 귀엽고 얄미운 조카지만….”
피오나가 루크를 도와 가족들과의 사이를 좁혀주었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는 역시 놀라고 말았다. 깜찍하게도 ‘거래’를 빌미로 얼마나 많은 선물들을 받아냈는지도 말이다. 그래 봤자 어린아이 기준이라 크게 비싼 물건은 없었지만, 나디아는 처음으로 조카에게 쓴소리를 했다. 일리야가 아무리 혼쭐을 내도 들은 척하지 않았던 어린아이는 세상에서 가장 만만해 보이는 이모의 꾸지람에는 며칠간 풀이 죽었다.
“영악해선.”
“피오나 양이 살아갈 세계에서는 꼭 필요한 덕목일 겁니다. 지나치지만 않으면 아주 훌륭한 무기가 되어줄 거예요. 일리야 님이 계시는 한 선을 넘을 걱정은 없을 거고요.”
“그야…… 그렇죠.”
일리야는 무른 구석이 있지만, 나디아에게 유독 약할 뿐 사실 꽤 대가 세다.
“내내 아이들이 주변에 있었는데, 갑자기 없어지니까 너무 허전해요.”
“…….”
안나는 말없이 나디아를 빤히 쳐다보았다. 지나치게 간섭하지 않으려고는 하지만, 스테이턴의 후계자 탄생을 누구보다 기다리는 사람 중 하나로서 아무래도 기대감을 지울 수는 없었다. 그렇다면 오늘 밤부터 힘을 내보시는 것은 어떤가요. 직접 낳으시면 더 좋지 않을까요……. 하고 싶은 말이 혓바닥 위를 맴돌았지만 애써 삼켰다.
‘부담을 드리면 안 되지….’
랭커스터가 머무는 동안에도 부부 관계가 활발했다는 건, 짐작은 하고 있었다. 스테이턴 성은 랭커스터 저택보다 훨씬 크고 넓어 부부의 사생활 보호가 아주 잘 되었다. 하지만 아무래도 가족들과 보내는 시간이 많아서, 루크는 만성 욕구불만에 시달리고 있었다. 무엇보다 가족들을 보내고 상심하는 그녀에게 바로 아이 이야기를 꺼내는 것도 좀 껄끄러웠다.
하지만 아주 조금, 루크의 존재를 상기시키는 정도는 괜찮지 않을까.
“아직 아이 하나가 남았잖아요.”
“네?”
나디아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아이라니….
“나디아 님만 따라다니는 커다란 아이요.”
“…아.”
그제야 이해한 나디아가 웃음을 터뜨렸다. 안나가 씩 웃었다.
“나디아 님의 관심에 언제나 목말라 있는 아이니까요.”
“루크가 아이라니, 어울리지 않… 는 것 같았는데 또 그렇지도 않네요!”
가족들과 함께 시간을 보내느라 루크와 보내는 시간이 적었다. 미뤘던 데이트만 하기에도 시간이 모자랐다. 나디아는 안나에게 몸을 기울여 귓속말을 속삭였다.
“구할 수 있을까요?”
“맡겨만 주세요. 제게는 유능한 측근들이 있답니다.”
“든든해요, 안나.”
안나의 얼굴에 비밀스러운 미소가 피어났다.
*
같은 시각, 집무실에서는 작은 회의가 열리고 있었다.
참석 인원은 집사 그렌트 존스, 기사단장 게리 노스, 수석 보좌관 제이드 앨런, 그리고 영주 루크 리처드 스테이턴이었다. 루크는 냉엄한 시선으로 스테이턴 영지의 최측근들을 훑었다. 바싹 얼어붙어 시선을 받아내는 이들의 얼굴도 매우 진지하다. 게리 노스가 마른 목으로 침을 꿀꺽 삼켰다.
“의견을 내 봐.”
“쓸모없는 사람이 하나 끼어있지 않습니까?”
시선이 자연스럽게 게리 노스에게로 쏠렸다. 기사단장으로는 매우 유능하지만 어느 방면에서는 굉장히 쓸모없는 사람이기는 했다. 게리 노스는 제이드 앨런의 저격에 인상을 찌푸리며 투덜거렸다.
“아니 그럼 전 왜 부른 겁니까?”
“돌이라도 하나 더 있으면 나으니까.”
가차없는 대답이 돌아왔다. 게리 노스는 내심 “결혼 전까지는 별로 다를 것도 없었으면서….”라고 생각했다. 애초에 수준이 달랐다면 회의가 열릴 이유도 없었다. 그렌트 존스가 말했다.
“그리 고민하실 것도 없지 않습니까? 언제까지 저희에게 의지하실 겁니까.”
“맞습니다. 슬슬 독립하세요.”
“…나 혼자서는 확신이 안 선단 말이다.”
루크는 솔직히 제 허물을 인정했다.
“부인과 어디서 데이트를 해야 할지, 어떻게 데이트 신청을 해야 할지…. 그걸 저희까지 불러다 회의 안건으로 삼으셔야 합니까?”
“……어떻게 해야 나디아가 기운을 찾을 수 있을까….”
제이드 앨런이 말했다.
“리본이라도 달고 애교를 부려 보시는 건 어떻습니까?”
“……내가?”
살벌한 눈빛이 돌아왔다. 아무리 한심하다 해도 너무 막말을 한 건가. 제이드 앨런이 찔끔 어깨를 움츠렸다.
“…그런 걸로 나디아가 기뻐해줄까?”
“……일단 웃기는 하실 겁니다….”
안 돼, 이 사람은 창피를 모른다. 농담으로 던졌던 의견마저 진지하게 고려하는 꼴을 보니 한계도 없었다. 제이드 앨런이 고개를 저었다. 꼴이 우스울 테니 웃기야 하시겠지. 게다가 나디아는 루크의 부인답게 취향의 폭이 매우 넓었다. 그녀의 눈에는 어쩌면 귀여워 보일지도 모른다.
“너희는 모른다. 요즘 특히 내 입지가 아주 위험해.”
루크가 의자 등받이에 기대며 다리를 꼬았다. 그는 마땅찮게 책상 위에 흩어진 편지 몇 통을 훑었다.
“반년 간 나와 대화한 거보다 저 두 사람과 나눈 편지가 더 많을 거야.”
“아무리 그래도 그 정도는….”
“이 두께를 봐라!”
“질투가 심한 남자를 좋아하는 여자는 없습니다, 각하.”
그렌트 존스가 따끔하게 충고했다. 게다가 부인의 친구 관계에 관여했다가 좋은 결과를 본 부부도 본 적이 없었다.
“하지만 겨우 둘만의 시간이 되었는데도 나디아는 편지나 쓴다고 나를 방치?.”
“너무 끈질긴 남자도 미움 받습니다.”
“끈질긴 게 아니다. 나는 그저 나와도 대화를 나눠달라는 거지….”
구질구질하게 변명을 늘어놓아봤자 질투인 건 변하지 않았다.
나디아가 자주 편지를 주고 받는 건 사실이었다. 한 번 편지를 보낼 때마다 최소 5장에 이르는 긴 편지를 주고 받았다. 상대는 레이나와 셀리아로, 두 사람 모두 겨울 즈음 스테이턴 영지를 방문할 예정을 잡느라 일정을 조율하고 있었다. 나디아는 셀리아에게 편지를 보낼 때에는 마치 연애편지를 보내는 소녀처럼 매우 설레며 기뻐했다. 그때마다 루크가 얼마나 짜증을 냈는지는 나디아만 알 일이다.
‘안 봐도 훤하지만.’
둘 모두 멀리 사는 탓에 한 번 편지가 오갈 때마다 시간이 오래 걸렸다. 보지 못하는 동안 그리움이라도 쌓이는지 날이 갈수록 애틋해지는 게, 루크는 마치 나디아가 바람이라도 피우는 기분이 들었다.
“바라시는 게 부인과의 대화입니까?”
“…대화도 부족했다는 거지.”
“휴가라도 내시겠습니까?”
그렌트 존스가 제안했다. 게리 노스는 이래도 좋고 저래도 좋다는 양 고개만 끄덕거렸다. 연애 한 번 해본 적 없는 남자에게 ‘부인과의 데이트 방법’이란 딴 세상의 이야기나 다름없었다. 제이드 앨런은 그렌트 존스의 의견에 동의하며 일정을 조율하겠다고 적극적으로 맞장구를 쳤다. 필요한 시간적 여유는 만들어줄 테니 데이트 방법 같은 세세한 부분은 이제 제발 알아서 하라는 뜻이었다.
공작 부부의 연애에는 참견해봐야 시간 낭비라는 걸, 누구보다 잘 알고 있으니 말이다. 어차피 진지하게 고민해줘 봤자 자기들끼리 잘 해결해버릴 것이다. 심지어 해결되는 과정에는 루크 본인의 계획은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었다. 결국 나디아가 해결해버릴 텐데.
그러나 루크는 고개를 저었다. 그가 말했다.
“나디아는… 일 안 하는 남자는 안 좋아해….”
제이드 앨런, 그렌트 존스, 게리 노스는 한마음으로 고개를 숙인 공작을 쳐다봤다.
좀 적당히 해라….
*
쾅.
침실 문을 열자마자 닫았다. 루크는 문고리를 잡고 눈을 깜박거렸다.
‘내가 뭘 본 거지.’
꿈인가? 나는 이미 잠을 자고 있나? 아니면 종일 머리를 너무 쓰는 바람에 환각을 보는 건가? 아무리 꿈이라도 이런 파렴치한, 그러니까 염치가 없는, 아니, 솔직히 너무 좋긴 한데, 아냐, 그래도 이건 좀…….
루크는 문이 마치 원수라도 되는 듯 노려보았다. 다시 열어 확인을 해보고 싶은 마음이 반, 제 파렴치한 속내를 들킬까 봐 두려운 마음이 반이었다.
‘아니지. 아니 이건 아니지….’
루크는 엘릭의 해맑은 웃음소리를 떠올렸다. 나디아의 활짝 웃는 얼굴도. 마음이 깨끗해지며 경건해진다. 좋아, 심호흡을 하고 열자. 내 눈이 이상해진 거면 날이 밝는 대로 의사를 찾아가고….
똑똑.
방 안쪽에서 노크 소리가 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