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야수라는 공작에게 시집왔는데-145화 (145/150)

145화

루크는 황궁 내부의 진료실로 옮겨졌다. 옮겨지는 과정에서도 자질구레한 실랑이가 있었다. 루크는 고작 피부가 찢어졌을 뿐이라며, 며칠 지나면 자연스럽게 낫는다고 주장했다. 누가 들어도 말이 안 되는 헛소리였다. 나디아와 안나가 다그쳐서 겨우 진료실에 앉았지만 이번에는 또 다른 문제가 기다렸다.

피부가 아니라 살까지 깊게 베인 상처는 꿰매야 하는 상처였다. 루크는 아편을 준비하는 의사에게 “정신을 흐리게 하는 약물을 마시는 취미는 없다.”면서 거부했다. 아편이 마약성 약물은 맞지만 적정량을 쓴다면 통증을 줄이기 위해 감각을 무디게 할 뿐이라고 의사가 설득했으나 루크는 한사코 고개를 저었다. 약초학에 조예가 있는 안나가 설득을 해도 마찬가지였다. 결국 약 없이 버티는 것으로 결론을 보았다.

의사는 숫제 미친 사람을 보듯이 스테이턴 공작을 훑었다. 살을 꿰매는데 약의 도움도 받지 않겠다니 제정신인가…. 만일의 사태에 대비하기 위해 황족의 지정석 옆에 앉아있던 그는 검술대회장에서 일어난 일들의 목격자 중 한 사람이었다. 즉 스테이턴 공작에 대한 경외심 따위는 한 조각도 남아있지 않은 사람 중 하나라는 것이다. 전까지는 그래도 황족 보기를 (길거리에서 발에 채이는)돌 보듯이 하는 사람이라고 해서 궁금해하기도 했었다.

하지만 생살을 꿰매는 손바닥은 들여다보지도 않고 오로지 아내의 눈치만 흘긋흘긋 살피는 남자를 보고 있노라니…….

‘소문이란 믿을 게 못 돼….’

누구인가. 순진한 처녀가 야수 공작에게 잡아 먹혔다고 지껄인 게. 그 반대라면 또 모를까.

나디아는 굳은 표정으로 루크의 치료 과정을 모두 지켜보았다. 검에 베인 상처가 뻐끔 벌어지며 피를 울컥 토해내고, 의사가 지혈제를 뿌리고, 천이 몇 장이나 벌겋게 물드는 동안 그녀는 단 한 순간도 눈을 돌리지 않았다. 표정은 담담했지만 안색은 정작 피를 흘리는 루크보다도 창백했다. 징그러운 장면을 보여주고 싶지 않아서 말려도 보았지만 그녀는 요지부동이었다. 마치 루크의 말은 아예 들리지도 않는 것처럼 무시했다. 생살을 꿰매는 통증보다 나디아가 눈도 떼지 않고 지켜보고 있다는 염려 때문에 안절부절못하고 자꾸 들썩거리자 의사가 성질을 부렸다.

“거 좀 가만히 계십쇼!”

“뭐요?”

“자, 자꾸 움직이시니까….”

살벌하게 노려보는 눈길에 겁을 집어먹은 의사가 꼬리를 내렸다. 루크는 나디아에게 신경을 집중하고 있어서 잘 듣지 못해 되물었을 뿐이지만 보는 사람은 자세한 사정까지는 모른다. 나디아가 조용히 말했다.

“가만히 계세요. 움직이지 말고.”

“…알았소.”

“선생님, 잘 부탁드립니다….”

“예, 예. 부인. 걱정하지 마십시오!”

나디아는 의사에게 상냥하게 웃어주었다. 루크가 인상을 찌푸렸다. 굳이 치료 과정을 보겠다고 버티면서 정작 제 얼굴은 한 번을 봐주지 않았으면서, 의사에게는 웃어주다니 너무 불공평한 처사라 여겨졌기 때문이다. 나디아가 오른손을 꽉 잡아주지 않고 있었다면 진작 불만을 터뜨리고도 남았다. “너무하시는 것 아니오? 내가 가엾지도 않소?”라고 한 마디 정도는 할 수 있지 않았을까?

“아주 꼼짝을 못 하시는군.”

팔짱을 끼고 삐딱하게 서서 지켜보던 레너드가 코웃음을 쳤다. 루크가 그를 올려다보았다. 그의 시선이 나디아가 붙잡아주고 있는 오른손에 박힌 것을 깨달은 루크가 씩 웃으며 말했다.

“부러우십니까?”

“…….”

“부러우시면 전하도 얼른 결혼하십시오.”

“…….”

“전 결혼한 후로 인생의 진정한 행복을….”

“움직이지 마시죠.”

“가만히 있어요, 루크.”

행복을 찾았다는 말을 제대로 끝맺지도 못하고 루크는 “알겠소, 미안하오.”라고 말하며 땀을 뻘뻘 흘렸다. 저게 과연 행복한 사람의 모습인가? 레너드는 부러우면서도 또 순순하게 인정하기는 싫은, 모순되는 감정 속에 고민했다. 헤벌쭉 벌어진 입을 보니 본인은 행복한 것 같은데.

휘둘리고, 평생 하지 않았던 행동을 하고, 당황하고…….

무슨 상황에서건 당당하고 담담하여 흔들리지 않던 남자가 지금은 빈말로라도 멋지다고 할 수가 없는 꼴이었다. 하지만 또 그게 부러운 걸 부정할 수 없는 이 미묘한 기분은 뭘까…. 레너드는 아내를 끈질기게 들여다봐 기어코 눈을 맞추고, 서로를 보다가, 끝내 함께 웃어버리는 부부를 가만히 쳐다보았다. 뭔가 마음이 싱숭생숭해지는 게 참 이상했다.

그때였다.

“대체 무슨 일입니까, 이게! 루크는 어디에 있습니까!”

“루크!”

진료실 문이 벌컥 열리며 랭커스터 남작과 앤더슨이 뛰어 들어왔다. 랭커스터 남작은 축제 기간에도 출근하여 성 내에서 일하고 있었고, 앤더슨은 일리야와 나디아가 걱정되어 아버지의 사무실에서 일을 돕고 있었다. 진료실의 침대를 차지하고 의사의 치료를 받고 있던 루크가 반갑게 손을 들었다.

자신이 걱정되어서 한달음에 달려와 준 두 사람이 고맙고 반가웠기 때문이었지만, 돌아온 것은 경악에 찬 비명이었다.

“악! 움직이지 말게!”

“손, 손! 치료받는 손!”

“아.”

나디아와 잡고 있는 손을 떼지는 못해 다른 쪽을 움직이려다 보니 그만…. 나디아가 뭐라 말할 새도 없이 랭커스터 남작이 질문을 쏟아내기 시작했다.

“이게 어떻게 된 일인가? 자네가 왜 다쳐? 무슨 일로? 검술 대회에서 무슨 일이 일어났기에….”

“진정하십시오. 그리 대단한 상처는….”

“피가 이렇게나 나고 꿰맬 만큼 큰 상처가 어떻게 대단찮아!”

랭커스터 남작이 버럭 소리를 질렀다. 겨우 설득해 존대는 그만두게 되었지만, 그가 자신에게 소리를 높이는 건 처음 보았다. 나디아도 부친의 처음 보는 모습에 깜짝 놀란 눈치였다. 랭커스터 남작은 흥분해서 얼굴까지 벌겋게 달아올랐다. 루크는 우선 그를 진정시키려는 의도로 말했다.

“영광의 상처입니다, 아버님. 황태자 전하를 구하려다 얻은 부상이니까.”

“상처에 영광이 다 뭔가?! 자네가 근위기사야? 아니었잖은가!”

“그… 렇긴 합니다만….”

“왜 부상을 자초해! 자네 몸을 아끼질 않고!”

부부만이 아니라 가족 전체가 황족 취급이 하찮구나……. 레너드는 불쾌하지도 않다는 사실이 신기했다. 앤더슨이 레너드를 알아보고 송구한 듯이 시선을 보냈지만 제 부친의 말을 고치지는 않았다. 앤더슨도 결국 똑같은 생각이라는 것이다.

“죄, 죄송합니다?”

황태자를 구해서?

“죄송해야지, 죄송해야 하고말고. 자네가 잘못되기라도 하면 내 딸은, 눈에 넣어도 안 아플 내 딸은 한순간에 과부 신세가 되지 않겠나. 아직 나이도 젊은데….”

“…전 절대 안 죽을 겁니다. 걱정마십시오, 아버님.”

루크가 힘을 주어 강조했다. 나디아가 흐뭇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거렸다. 랭커스터 남작은 루크와 나디아를 번갈아 보았다. 그러다 나디아와 눈이 마주쳤다. 나디아는 오랜만에 부친을 향해 밝게 웃을 수 있었다. 가슴 속에 아주 작게 남아있던, 대화를 미루는 동안 가라앉아 있던 어떤 응어리가 눈이 녹듯이 사르르 녹아버린 덕분이었다.

“…내 딸 신세도 신세지만, 자네도 우리 가족이 아닌가. 가족이 무탈하고 건강해야만 행복할 수 있는 법이야….”

“……저는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보다시피 튼튼하고….”

“말이 되는 소리를 하게! 자네가 아무리 젊어도 영원하지는 않고, 아무리 강하다고 해도 피와 살로 이루어진 인간인 이상 죽음을 피해갈 수도 없네! 나는 할 수 있는 만큼 걱정할 거고, 염려할 걸세!”

“…….”

랭커스터 남작이 말을 토해내고 다리에 힘이 풀렸는지 주저앉자, 의사가 입으로만 웃으며 말했다.

“이제 치료를 계속해도 되겠습니까?”

“헉, 허억. 네, 네에. 죄송합니다….”

“…아닙니다. 비켜주시죠. 기왕이면 떨어져주시고요….”

뾰족하게 말한 보람도 없이 랭커스터 남작이 화들짝 놀라며 연신 사과하자 의사는 모든 것이 푸시시 식어버린 얼굴로 몇 번째 다시 잡는지 모를 도구를 잡았다. 진작에 끝났어야 할 간단한 처치를 얼마나 붙잡고 있는 건지 모르겠다. 의사는 체념하고서 아주 천천히 어긋난 부분부터 다시 꿰매기 시작했다.

루크는 의사에게 왼손을 내어주고 입을 다물었다. 아내만 보면 헤벌쭉 벌어졌던 입이 다물리자 사람들은 신기한 듯이 그를 바라보았다. 안나는 지금이라도 진통제를 주어야 할지 고민했고, 레너드는 루크가 랭커스터의 발언을 불쾌해하는 거라 여겼다. 제국에서 첫 번째로도 꼽히는 기사를 연약한 사람 마냥 무시했으니까 말이다.

그러나 나디아는 루크의 얼굴을 빤히 들여다보다 문득 웃으며 물었다.

“루크, 행복해요?”

“…….”

“나도 행복해요.”

루크가 잡고있던 나디아의 손등을 들어올려 입술로 가져갔다. 가늘게 떨리는 입술 사이로 벅찬 숨이 흘러나왔다.

“당신을 제대로…… 행복하게 해주고 있는 건지 자신이 없었소.”

“…….”

“당신에게는 가족도 사랑도 행복도, 받기만 하는데…. 돌려주고 있긴 한 건지.”

“아까부터 바보 같은 소리만 하네요, 루크.”

“…….”

“난 당신에게 고백받은 날부터 쭉 당신 덕분에 행복했는데. 당신만 보면 웃게 되잖아요.”

“…….”

“이게 행복이 아니면 뭐란 말이에요?”

누군가의 가족이 된다는 것, 일원으로 인정을 받는다는 것, 너를 끊임없이 염려할 거라는 다정한 말. 무슨 일이든 그를 우선이라 말해주는 사람들, 그만 곁에 있다면 행복할 거라는, 사랑하는 사람……. 그는 나디아의 손으로 제 눈가를 가렸다.

나디아가 키득키득 웃으며 그의 머리를 끌어안아 가려주었다.

-본편 f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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