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4화
습관적인 반응으로 루크는 딱딱하게 얼어붙었다. 나디아의 목소리에 반응하여 돌아서려는 몸을 돌려세우느라 얼어붙은 것이다. 그가 거칠게 숨을 들이켰다. 졸지에 루크를 마주보고 있던 레너드만 겁을 먹었다. 두꺼운 갑옷 아래로도 팽팽하게 부풀어 씨근덕거리는 흉근의 움직임이 보였기 때문이다.
최근 자주 루크의 화풀이 대상이 되었던 레너드는 이것이 피해망상이라는 걸 알면서도 저 피투성이 주먹으로 자신을 공격할까 봐 잔뜩 긴장했다. 네가 쓸데없이 존재하는 바람에 내가 귀찮게 되었으니 역시 맞아라, 라면서 덤벼들까 봐. 그리고 겸허히 인정하건대 루크가 이 거리에서 마음 먹고 공격했을 때 살아남을 자신은 없었다.
“스테이턴 부인, 부인께서 보시기에 적절한 광경이 아니니 정리가 될 때까지 물러나 계시오.”
“전하, 저는 제 기사의 안위가 궁금할 뿐입니다.”
난감해 보이는 루크를 위해 레너드는 눈치껏 나디아를 제지하려 했다. 그러나 나디아는 조금도 물러날 기색이 없었다. 흰 얼굴은 담담했고, 어조는 평이했으나 녹색 눈동자는 전에 없이 차갑게 가라앉아 레너드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제 요구는 타당하며, 말려도 듣지 않겠다는 주장으로 가득했다. 대화를 나눌 때에도 잠시 눈을 맞추었다가 수줍게 시선을 내리고는 했던 사람이 말이다.
레너드가 슬쩍 루크에게 눈짓했다. 나디아는 당연한 요구를 하고 있었다. 루크가 가장한 카넬로 알바즈는 흑곰 기사단원이었고, 흑곰 기사단은 스테이턴 가문의 기사단이다. 스테이턴 공작부인으로서 공훈을 세우고 부상을 입은 기사의 안위를 걱정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이었다. 그것을 막을 명분이 없었다.
“…알바즈 경.”
“…….”
어쩌지. 루크는 마른 입술을 핥았다.
‘나디아가 걱정을 안 해줄 리가 없지.’
길에 쓰러진 부랑자마저 걱정해주는 인품의 소유자가 아닌가. 하물며 스테이턴의 기사단이다. 눈앞에서 피가 튀는 부상까지 당했다면 아무 말 없이 넘어갈 리가 없는 것이다. 루크는 제 부인의 인품에 다시 한 번 반하는 한편, 등 뒤로는 식은땀을 줄줄 흘렸다. 나디아가 바라보고 있는 뒤통수가 따가웠다.
결국 루크는 아주 천천히 뒤를 돌았다. 나디아가 마치 잘했다는 듯이 싱긋 웃었다. 무심코 경계를 풀고 웃어버릴 뻔한 루크가 급하게 정신을 다잡았다.
‘아직 들켜서는 안 되지.’
화관을 선물해 놀라게 해주고 싶다. 계획 성공을 코앞에 두고 있으니 조금만 더 참으면 된다. 실패해버리면 그간 나디아에게 늘어놓은 거짓말이 다 소용없는 짓이 된다.
“알바즈 경, 손을.”
루크는 당당하게 오른손을 내밀었다.
“아뇨, 왼손을 주세요.”
“…….”
“어서.”
아직 상처에서는 피가 흐르고 있었다. 제아무리 튼튼한 몸뚱이라도 순식간에 지혈이 될 수는 없다. 갈라진 상처는 그녀가 보기에 지나치게 징그러울 텐데. 루크가 고민하는 동안 나디아는 투구 안에 숨은 얼굴이 보이기라도 하는 듯 그를 똑바로 쳐다보았다. 옅은 미소로, 손을 내밀었다.
평소와 다른 이상을 느낀 것은 그 부분이었다. 루크는 새삼스럽게 주변을 확인했다.
바닥에는 암살자가 흘린 피가 흥건했다. 루크의 주먹에 맞아 얼굴이 깨진 그를 근위대가 끌어내 수습하고 있다. 사람들은 흉흉한 사고를 피해 물러났고, 레너드와 셀리아, 안나와 레이나는 어딘지 긴장한 채로 그들을 지켜보고 있었다. 어째서지. 왜 저렇게, 금방이라도 터질 무언가를 보는 것처럼……. 루크는 투구 사이의 좁은 시야가 답답해졌다.
암살자는 쓰러져 질질 끌려가고 있었으니 위험 요소는 더 이상 없다. 좀 피가 흐르기는 했어도 아무도 큰 부상을 입지 않고 무사하다. 무엇보다 황태자가 무사하니까 박수를 쳐도 모자랄 상황일 텐데.
긴장, 아니…… 겁을 먹은 듯한 이유는.
“무시하겠다는 건가요?”
“……!”
무심코 “아니오!”라고 변명할 뻔한 루크가 입술을 깨물고 힘껏 고개를 도리질쳤다. 말을 못한다는 건 이다지도 답답한 일이었다.
“이리 내요!”
“읏!”
불쑥 다가온 손이 루크의 왼손을 홱 잡아당겼다. 평소라면 당연히 기쁘게 끌려갔겠으나 당황한 루크가 저도 모르게 버티고 말았다.
“이익….”
힘껏 당겨도 따라오기는커녕 꿈쩍도 하지 않자 나디아가 이를 악물었다. 뻣뻣하게 굳어있던 루크가 그제야 힘을 풀었으나 나디아가 그의 손을 꽉 쥐어버리는 게 조금 더 빨랐다.
“큭?!”
제아무리 괴물 같은 체력을 자랑하는 루크라고 해도 검에 베여 뻐끔 벌어진 상처를 압박당하면 고통스럽다. 피와 살로 이루어진 인간이라면 당연한 일이었다. 저도 모르게 신음을 흘린 루크는 도리어 저가 놀라 나디아를 쳐다보았다. 누가 보면 상처를 무자비하게 쥐어잡은 사람이 그인 줄 알 것이다. 루크는 자신을 아프게 해 그녀가 죄책감을 느끼고 미안해할까 봐 걱정했지만, 이상하게도 나디아는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아프죠? 이런데도 치료도 안 하시겠다고요?”
“…….”
“계속 입 다물고 있을 거예요?”
나디아가 짧은 숨을 들이켰다. 치켜올라간 눈꼬리가 붉게 물들었다. 역시 우는 건가? 울린 건가? 루크는 패닉에 빠졌다. 나디아의 눈물은 그를 숨막히게 만들었다. 세상에 다시 없는 멍청이가 된 것처럼 입술을 연신 벙싯거렸지만 어떤 말도 할 수가 없었다.
상처를 쥐었던 나디아의 손바닥이 피로 흥건했다. 보드라운 손을 감싼 흰 레이스 장갑도 붉게 물들어 엉망진창이었다. 루크는 서둘러 품을 뒤졌다. 안나가 챙겨주었던 손수건이 어딘가에 있을 텐데. 갑자기 제 몸을 뒤적거리기 시작한 그를 나디아가 이상하게 쳐다보았으나 그는 기다려달라는 말도 할 수 없었다. 겨우 찾아낸 손수건을 그녀에게 내밀자 나디아가 눈을 크게 떴다.
그리고 무언가 꾹 참듯이 손수건을 붙잡고 어깨를 들썩거렸다.
‘아, 손수건에도 피가….’
왼손은 베인 상처로 피투성이가 되었고, 오른손은 암살자의 안면이 깨지며 피가 튀었다. 그 손으로 손수건을 뒤져 내밀었으니 물건이라고 깨끗할 리가 없었다. 또 실수했다. 루크는 주저앉고 싶은 기분이었다.
왜 나디아 앞에만 서면 바보가 되는지 모를 일이다.
다른 일에는 조금 더 똑똑한 처신을 해왔다. 세상이 뭐라 그를 평가하든 스테이턴 공작으로서의 업적에는 이견을 말할 수 없을 정도로 잘해왔다고 자부한다. 귀족으로서, 영주로서, 기사로서 그는 한 사람 몫 이상을 해내는 사람이었다. 그런데 어째서 나디아 앞에서는, 그가 남자로 존재하고 싶은 유일한 사람 앞에서는 이토록 멍청해지고 마는가.
“지금 손수건을 왜 줘요….”
목소리가 꽉 잠겨 안쓰러웠다. 루크는 이대로 그녀 앞에 무릎이라도 꿇고 싶은 심정이었다.
“내 손에 피 좀 묻으면 어때서….”
“…….”
“약속했잖아요….”
나디아가 고개를 뚝 떨어뜨렸다. 루크가 두 손을 들었다가 다시 내렸다. 달래주고 싶은데, 자신은 지금 루크 리처드 스테이턴으로서 그녀 앞에 서 있는 것이 아니니 그러지 못하는 것이다. 고개를 숙이고 어깨를 떠는, 우는 게 분명한 그녀를 앞에 두고도 아무것도 할 수가 없다니.
하지만 나디아는 울고 있지 않았다. 그녀가 고개를 번쩍 들고 외쳤다.
“어디서든 자기 목숨이 먼저고, 자신의 안전을 먼저 생각하겠다고 약속했잖아요!”
“…으응?”
“약속도 안 지키고! 내가 다치지 말랬죠! 다치지만 말랬잖아요!”
“으응? 응?”
나디아는 아예 손바닥으로 루크의 갑옷 위를 찰싹찰싹 때리며 따지기 시작했다. 철썩 소리는 났지만 갑옷이었으므로 루크에게는 당연히 타격이 없다. 그러나 루크는 그녀의 손이 망치라도 되는 듯이 점점 아래로 주저앉았다. 다 들킨 건가? 대체 언제부터?
“루크가 멀리서 달려와 막지 않았어도 됐잖아요! 여기 기사님이 이렇게 많은데…!”
황태자를 왜 지켰느냐고 탓하는 듯한 발언이었다. 루크가 멀리서 발견하고 달려와 막지 않았다면, 목숨은 구했을지 몰라도 부상은 피할 수 없었을 레너드가 허, 하고 헛웃음을 흘렸다.
“미, 미안하오. 당신도 위험해질 것 같아서 나도 모르게….”
심지어 황태자를 구하려고 달려온 것도 아니었다. 이 부부는 쌍으로 황족을 어떻게 취급하는 거지….
“그러다 당신이 다치면 다 무슨 소용이에요! 게다가 피를 철철 흘리면서 태연한 척 시합이나 하려고 하고!”
“그… 그건 정말 괜찮아서.”
“괜찮다고?!”
나디아의 녹색 눈동자에 불꽃이 튀었다. 루크는 제가 말실수를 했다는 걸 깨달았다. 나디아는 그의 왼손을 잡아서 힘껏 쥐었다. 악 소리가 절로 나올 만큼 세게 상처를 압박했다. 그 소리를 듣고 나디아는 이성을 잃었다. 그녀는 손바닥으로 그의 투구를 철썩철썩 때리며 말했다.
“안 괜찮잖아! 안 괜찮은데 왜 자꾸 괜찮다고 해요!”
“미, 미안….”
“당장 이딴 투구 벗어버리고 치료나 받으러 가요. 빨리!”
“알았소, 알았으니까 그만 때려요. 당신 손이 아플 거요!”
“피 철철 흘리는 사람한테 걱정 듣고 싶지 않거든요?!”
루크가 투구를 벗었다. 땀에 젖은 얼굴을 확인한 나디아는 결국 울컥거리는 감정을 참지 못하고 왈칵 울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이거 봐, 엄청 창백해, 흐어엉!”
“나디아, 울지 마시오. 이건 그냥 더워서?.”
“거짓말까지 해….”
루크는 통곡하는 그녀 앞에 무릎을 꿇었다.
“미안하오, 내가 다 잘못했소!”
“대체 이런 짓은 왜 해 가지고, 허엉, 검술 대회에서 우승을 노리는 줄 알고 응원하고 있었는데, 흐엉….”
“…당신한테 화관을 주고 싶어서….”
“필요 없어요!”
매몰찬 거절에는 아무리 루크라도 충격이 컸다. 제가 주는 것이라면 무엇이라도 좋다고 해주었던 나디아가 아닌가. 비록 과정에서 어쩔 수 없이 거짓말을 하기는 했지만 기뻐해줄 거라고 생각했다. 사실 나디아는 화관을 싫어했던 것일까. 아니면 꽃 선물은 싫었던 걸까. 아예 첫 단추부터 잘못 끼운 셈….
“난 루크만 안 다치고 내 곁에 있어주면 돼….”
나디아가 팔을 벌려 루크의 목을 끌어안았다. 루크는 눈을 깜박거렸다. 제 목을 끌어안은 따뜻하고 부드러운 몸이 뜨거웠다. 흐끅거리며 토하는 울음이 피부를 통해 전달되었다.
“바보, 걱정했잖아…. 얼마나 놀랐, 놀랐는데….”
“미안….”
루크가 조심스럽게 손을 그녀의 등에 얹었다. 그리고 아주 천천히 토닥거렸다.
손가락 끝에서 느껴지는 얇은 뼈와 체온, 그리고 빠르게 뛰는 심장 소리.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무언가가 저릿하게 퍼져나갔다. 다른 건 다 필요없고, 자신이 다치지 않고, 곁에 있어주기만 하면 된다고. 나디아의 울음이 잦아들길 바라며 그녀의 등을 쓸어주기만 하던 그가 그녀를 끌어안았다.
그거라면 자신이 있다고, 당신이 죽기 전까지는 절대 죽지 않겠다고. 나도 당신만 있으면 된다고…. 말하고 싶었는데 어쩐지 목이 꽉 막혀서 아무 말도 나오지가 않았다.
이게 행복인가.
가슴이 벅차서 눈물이 나올 것 같은 이 감정이 행복이란 것일까….
고개를 숙이고 있다가는 꼴사납게 울고 말 것 같아서 루크는 고개를 들었다.
“…….”
레너드와 셀리아, 레이나와 안나, 브릿 부인이 형용하기 힘든 표정으로 그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가 그들의 뒤를 보았다. 똑같은 표정을 한 사람들이 그들을 지켜보고 있었다.
“…….”
루크는 수치심을 배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