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3화
뜨거운 함성이 쏟아졌으나 정작 주인공 중 하나는 도통 집중을 하지 못했다. 투구 아래 감춰진 단정한 얼굴에 성마른 기색이 스쳐 지나갔다. 루크는 검자루에 얹은 손을 쥐었다 펴기를 반복했다. 언뜻 보면 결승 출전으로 긴장한 것 같겠으나 비뚤게 서서 발을 까딱거리는 행동까지 보면 그저 예의가 없을 뿐이라는 걸 알 수 있었다. 그는 제게 쏟아지는 불만스러운 눈길의 주인을 마주보았다.
‘딱딱하긴.’
결승에 출전한 기사는 레너드가 자랑하는 근위대 소속의 기사였다. 흑곰 기사단의 산악 훈련에도 참여했던 것 같은데, 당연히 루크는 그의 얼굴과 이름을 기억하지 못했다. 눈길에 담긴 짜증이 생생해 직접 창피를 당한 당사자이겠거니, 하는 것이다. 그저 선배에게 악담 조금 들었다고 알지도 못하는 사람을 죽일 듯이 노려보지는 않을 테니까.
‘아, 레너드 새끼, 또.’
루크가 주먹을 쥐었다 폈다. 나는 무슨 부귀영화를 누리겠다고 이러고 있나…….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마누라를 저 멀리 두고 말이다. 나디아에게 꽃을 선물해주고 싶은 마음은 여전하지만, 괜한 짓을 벌이지 않았다면 지금쯤 나디아의 곁에 찰싹 달라붙어서, 그녀의 향기를 만끽하면서, 하얗고 말랑말랑한 손을 손바닥 안에 가두고 만지작거리고 있었을 텐데. 틀림없이 행복하겠지….
투구 안에서 루크는 눈을 가늘게 떴다.
‘지정된 자리가 다른데 왜 자꾸 나디아 옆으로 기어들어오는 거야? 저 뻔뻔한 여우는 왜 또 따라와서. 안나는 저것들을 내쫓지 않고 왜 흐뭇하게 웃고 있어.’
아무리 멀리 떨어져 있어도 나디아의 모습은 눈앞에 있는 듯이 생생하게 볼 수 있었다. 안 보이면 보이게 해서라도 봐야지. 그녀의 주변을 여러 명이 둘러싸고 있었는데, 나디아만 보고 싶은 루크의 눈에는 거슬리는 방해물일 뿐이었다. 우선 뭐가 좋은지 헤벌쭉 웃고 있는 레너드 새끼, 뻔뻔한 셀리아, 나디아와 일단 화해는 했으나 지켜봐야 할 요주의 인물 레이나, 처음에는 그녀를 안 좋게 봤으면서 이제는 감싸고 돌며 오히려 제게서 떼어놓으려 드는 것 같은 브릿 부인, 요즈음 제 편인지 제 적인지 헷갈리는 안나…….
자신을 빼놓고 무엇이 그리도 즐거운지, 그들은 정작 경기장은 보지도 않고 저들끼리 하하호호 이야기꽃을 피우고 있었다. 아무리 시력이 좋아도 환호성을 지르는 군중 속에서 먼 거리의 대화까지 엿들을 수는 없었던 루크는 당장이라도 그녀에게 달려가고 싶어 안달이 나 있었다.
‘얼른 해치워버리고 싶군.’
무슨 대화를 하고 있는지 그나마 큰 레너드의 입 모양을 읽어보려 시도하던 루크의 관심이 맞은편 상대에게 향했다. 그렇지 않아도 기분이 좋지 않은데 적의 어린 시선이 신경을 슬슬 긁고 있어서, 그는 봐주지 않고 칼등으로 적당히 두드려 패서 시합을 끝낼 생각이었다. 창피하든 말든, 결승에 어울리는 시합이든 아니든 무슨 상관인가. 그에게 중요한 것은 승리와, 부상으로 따라올 화관뿐이다.
하지만 결승쯤 되면 싱겁게 끝나버릴 시합이라도 시작하는 데에는 거창한 축하와 준비가 필요한 법이다. 제자리를 떠나 나디아의 곁에 앉아있던 레너드가 손을 들며 일어섰다. 부재중인 부친을 대신해 경기의 시작을 선언하려는 모양이었다. 루크는 그의 얼굴을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었다. 개가 간식을 앞두고 허락을 기다리듯이, 선언이 떨어지면 바로 저 거슬리는 기사의 뒤통수부터 때려줄 생각으로.
레너드를 무섭게 보고 있지 않았다면 알아차리지 못했을 것이다.
레너드가 나디아의 곁으로 옮겨앉지 않았다면, 그들의 대화를 듣지 못해 답답하지 않았다면, 그리고 자신이 없어도 즐거워 보이는 나디아에게 섭섭함을 느끼지 않았다면 레너드를 이토록 열렬하게 쳐다볼 일도 없었다. 그것을 발견했을 때 루크는 생각보다 먼저 달려나가고 있었다.
역시 라 먼스트로드와 스테이턴은 안 맞다.
저주받았다.
*
살이 꿰뚫리는 소리가 났다.
나디아는 얼어붙었다. 이 세상에 존재하는 줄도 몰랐던 끔찍한 소리 직후에는 뜨뜻한 액체가 뒷목과 등을 적셨다.
“꺄아아악!”
“으아아아악!”
“암, 암살이다! 근위대!”
날카로운 비명이 멀리서 들리는 듯했다. 누군가가 나디아를 끌어안아 뒤로 당겼다. 안나와 레이나였다. 안나가 평소와는 달리 냉정한 표정으로 힘주어 그녀를 당겼고, 레이나가 허리를 끌어안았다. 나디아는 저도 모르게 뒤를 돌아보려 했다. 제 뒷목에 떨어진 축축한 액체는 분명….
“안 돼요, 부인. 보지 마세요!”
안나가 서둘러 나디아의 눈을 가렸지만 시야를 완전히 가릴 수는 없었다.
검에 어깨를 꿰뚫린 남자가 끄륵거리며 피가 섞인 거품을 뱉고 있었다. 그리고 남자의 어깨에 꽂힌 검의 주인은.
“전하! 무사하십니까?”
“나, 난 괜찮다. 그보다….”
근위대가 달려와 쓰러진 레너드를 부축해 괴한으로부터 떨어뜨렸다. 셀리아도 근위대 뒤에 몸을 숨긴 후였다. 그에 비해 나디아의 곁에는 안나와 레이나뿐이었지만, 그들의 앞에는 근위대보다 든든한 벽이 있었다. 나디아는 아직도 현실감을 느끼지 못했다. 커다란 등과, 흑곰 기사단의 상징이 새겨진 갑옷.
루크였다.
그야말로 번개 같은 움직임이었다.
결승을 준비하고 있던 기사가 느닷없이 검을 뽑아 황태자를 향해 달려들자, 사람들은 비명도 지르지 못하고 얼어붙었다. 흑곰 기사단이 황태자를 살해하려 한다고 오해한 사람도 분명 많을 것이다. 레너드 또한 저 새끼가 열받아서 드디어 미친 거냐고 생각하고 말았으니, 오해한 사람을 탓할 수는 없었다.
검은 레너드를 그대로 지나쳐, 그의 뒤에서 검을 들고 있던 남자의 어깨를 꿰뚫었다.
한 방에 죽일 수 있었다면 좋았겠으나 멀리서 달려와 그가 낌새를 알아차리기 전까지는 생각보다 긴 시간이 걸리고 말았다. 겨우 놓치지 않을 수는 있었지만 루크도 아무런 상처 없이 막아내기란 불가능했다. 레너드를 등 뒤에서 찌르려 했던 남자의 검은 루크의 목을 향해 있었고, 루크는 맨손으로 검날을 잡아 막은 상태였다.
서걱거리며 살이 잘리는 소리, 그리고 뜨뜻한 피가 손목을 타고 흘렀다.
나디아, 레너드와 셀리아, 안나, 레이나까지 제게서 멀어졌다는 사실을 확인한 루크가 상대의 검을 놓아주었다. 남자가 도망을 치기 위해 어깨를 뒤틀며 몸을 뒤로 빼냈다. 루크는 그가 움직이는 걸 방해하진 않았다. 검자루에서 손을 놓아서 그가 뒤로 물러나게 해 주고는, 멀쩡한 손은 주먹을 쥐었다.
그리고 그대로 남자의 얼굴에, 퍽, 꽂아넣었다.
“악!”
“꺄악….”
루크는 처음부터 남자에게 검을 쓸 생각은 없었다. 어깨를 꿰뚫은 것은 거리 때문에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일단은 도망치지 못하게 막는 것이 중요했으므로.
‘나디아… 놀랐겠지. 역시 검을 써서는 안 됐는데.’
나디아가 안전하다는 것은 그녀의 호흡 소리를 듣고 확신했다. 조금 빠르지만 다친 곳은 없었다. 신음 소리도 들리지 않았으니까 말이다.
나디아는 겁이 많다. 날붙이를 보면 저도 모르게 어깨를 움츠리고 만다. 그녀는 사람을 상처입힐 수 있는 무기는 전부 무섭다고 했다. 전신이 흉기라는 평을 듣는 루크는, 그렇기 때문에 그녀 앞에서는 위협적인 느낌을 주지 않으려고 언제나 조심하고 있었다. 그러고 있었는데 어떻게 나디아의 코앞에서 사람 목을 자르는 장면을 보여줄 수 있겠는가!
무거운 주먹이 내리꽂힌 남자의 얼굴이 뼈째로 부서졌다. 광대뼈가 부서지고 코뼈가 가라앉았다. 두뇌에 직격으로 전달된 충격으로 균형감각을 잃고 쓰러졌다. 암살자다운 근성으로 다시 일어나면 한 대 더 때려주려고 준비하고 있었던 루크는 기절한 남자를 확인하고 레너드에게 눈짓했다.
“고, 공적을 세웠군. 카넬로 알바즈 경.”
레너드는 이 상황에도 말 한 마디 하지 않는 루크가 대단한지, 한심한지 판단할 수가 없었다.
“덕분에 목숨을 구했네….”
아니지, 루크 리처드 스테이턴은 원래 대단과 한심 사이에 존재하는 놈이었다.
“그, 손은 괜찮은가?”
“…….”
레너드가 어깨를 흠칫 떨었다. 투구 사이로 살벌하게 노려보는 눈빛이 선명했다. 레너드는 억울했다. 대답이 없으니 달리 할 수 있는 말이 없었고, 진심으로 걱정이 되기도 해 물어본 것이다. 그게 원수 보듯이 노려볼 일인가?
암살 위협에 시달리는 일이야 일상에 가까웠지만, 이처럼 직접적으로 노려지는 경우는 많지 않았다. 제아무리 뻔뻔한 레너드라고 해도 이번만큼은 진심으로 루크에게 감사하고 있었다. 라 트에빌레는 황궁 내에서 이루어지는 행사이다 보니 방심을 하고 있었던 게 사실이다. 호위가 물 샐 틈 없이 달라붙어 있는 지정석에 앉아 있었더라면 이런 기습은 이루어질 리 없었을 것이다…….
루크는 등 뒤에 있을 나디아를 의식하며, 암살자의 검을 쥐었던 왼손 대신 멀쩡한 오른손을 펼쳐 보였다.
그래도 당장은 정체를 숨기고 있어서 나디아가 걱정할 일은 없다는 게 다행이었다. 자신이 코앞에서 다치면 나디아가 얼마나 걱정하겠나, 얼마나 놀랐겠나…….
‘다치지 말라고 했는데. 혼나겠지.’
어차피 암살자가 흘린 피 때문에 핏자국이 흩어져 있었으니, 말만 안 하면 은근슬쩍 멀쩡하다 속일 수 있을 것 같았다. 나중에 나디아가 걱정을 하겠지만, 지금은 코앞에 다가온 우승이 먼저였다.
종이에 긁힌 상처라고 가볍게 붕대만 감고 지내면 어떻게든 속일 수 있지도 않을까…….
“멀쩡하다고?”
“…….”
“괜찮다고, 하하….”
“…….”
시합이나 속행해라. 루크가 눈빛으로 레너드를 압박했다. 피가 흐르는 왼손을 주먹을 쥐고 내렸다. 레너드조차 헷갈리는 듯 고개를 갸웃거렸다. 어쨌든 본인이 괜찮다고 하지 않나. 그렇다면 그런 거겠지…. 본인이 아픈 것은 거스러미가 뜯긴 상처조차 참지 못하는 레너드가 입을 열었다.
“주변을 정리해라! 너무 소란을 피우지 않도록. 시합은 속행?.”
“잠깐만요.”
나디아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