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2화
축제의 마지막 날은 한 해의 마지막 날이기도 하다. 경기장을 둘러싼 사람들의 얼굴에도 숨길 수 없는 흥분과 기대감이 어려 있었다. 이제는 퍽 익숙해진 지정석에 앉은 나디아는 설레는 마음을 숨기지 못하고 흙먼지 냄새가 나는 공기를 들이켰다.
시작과 끝은 언제나 설레는 법이다.
“역시 나는 이만 돌아가는 게 좋지 않을까, 나디아.”
“왜? 네가 뭘 잘못해서?”
안절부절못하는 레이나의 손을 꽉 잡았다. 아무것도 잘못하지 않은 레이나가 죄인처럼 브릿 저택에 숨는 건 부당한 일이었다. 나디아가 고집을 부리며 얼굴을 굳히자 레이나는 마지못해 자리에 앉았다. 심기가 약한 것 같으면서도 타인의 부당한 일에는 쓸데없이 열을 올리는 건 어린 시절부터 변하지 않은 점이었다. 이럴 때는 말도 통하지 않을 뿐더러 고집을 꺾기는 불가능했다.
자신이 부당한 일을 당할 때는 아무렇지 않게 흘려버리면서 말이다. 게다가 제 처지와 별개로도 레이나는 이 자리가 무척 부담스러웠다. 멀리서 볼 때는 마냥 화려해보이고, 이따금 부럽기도 했던 장소였다. 특별히 마련된 지정석, 그곳에 앉은 사람들이 나누는 대화나 차림새 따위는 다음날 사람들의 화젯거리가 된다. 이곳에는 동경하던 브릿 부인도 있었고, 가까운 자리에는 셀리아 황녀와 레너드 황태자도 앉아 있었다.
레이나는 자신이 대범한 편이었다고 생각했는데 이제 보니 아니었다. 새삼 나디아가 대단해 보였다. 제 편이 확실히 있었다고는 해도, 갑작스러운 환경의 변화에 나디아는 잘 적응한 것이다. 나 같으면 무섭고 부담스러워서 입 한 번 떼기도 힘들었을 거야. 이대로 도망가면 마음도 편하고 좋을 것 같은데….
가만히 듣고 있던 브릿 부인이 거들었다.
“앉으렴, 레이나.”
“…네. 하지만 제가 잘못을 저질러서 숨어야한다는 뜻은 아니었어요. 새삼스럽게 수군거리는 소리 따위를 신경쓰는 것도 아니고요. 전 단지 귀찮은 일이….”
그때였다. 사람들을 헤치고 뾰족한 목소리가 터졌다.
“나디아!”
익숙한 목소리에 레이나가 눈을 질끈 감았다. 그녀는 작게 “귀찮은 일이 생길 거라고 했잖아.”라고 속닥거렸다. ‘나디아’가 젊은 스테이턴 공작 부인의 이름이라는 사실은 이 자리에 있는 모두가 알고 있었다. 나디아는 레이나의 손을 붙잡은 채로 목소리가 터져 나온 방향을 보았다.
“오, 나디아! 드디어 만났구나!”
“……아주머니….”
사람들을 밀어내고 잰걸음으로 다가온 사람은 제임스와 레이나의 모친, 밀리언 자작 부인이었다. 그녀는 붉게 상기된 뺨으로 호들갑스럽게 나디아와의 친분을 과시했다. 그리고 자신을 막아 세우려는 사람들에게 눈짓했다. 이것 보라고, 분명히 공작 부인과 친분이 있지 않느냐는 어필이었다. 나디아가 고개를 끄덕이자 그녀를 막아 세우려던 사람들이 난처한 얼굴로 물러났다.
밀리언 자작 부인은 분명히 레이나를 보았다. 그러나 그녀는 제 딸에게는 눈길 한 번 주지 않고 나디아만을 열렬하게 바라보았다. 나디아의 눈썹이 작게 꿈틀거렸다. 그것을 눈치챈 사람은 브릿 부인뿐이었다.
“얼마나 만나고 싶었는지 아니? 네 어머니도 참 모질지, 내가 그렇게 부탁했는데도….”
“무슨 일인가요, 곧 결승전이 시작되니 용건만 간단하게 말씀해주시겠어요?”
나디아는 턱을 치켜들고 눈을 내리깔았다. 평상시의 어설픈 흉내가 아니었다. 레이나는 나디아가 이리도 차가운 목소리를 낼 수 있는지 처음 알았다. 브릿 부인 또한 놀란 눈으로 나디아를 보았다.
밀리언 자작부인은 당황스러운 듯 속눈썹을 팔랑거리며 과장되게 눈을 깜박거렸다. 레이나는 그것에 제 모친이 화가 났을 때 나오는 습관이라는 걸 알았다. 운 좋게 공작과 결혼하더니 올챙이 시절을 잊고 기고만장해졌다고 여기는 게 뻔히 보였다. 그럴 때가 아닐 때인데도 말이다. 비록 아직 독방에 갇혀있을 뿐이지만 그녀의 아들이 눈앞에 있는 사람에게 저지른 짓은 최소 상해 시도였다.
루크가 꼴사납게 얼굴부터 넘어져가며 발목을 붙잡지 않았다면 제임스는 나디아를, 혹은 나디아 앞을 가로막은 레이나를 찔렀을 것이다. 나디아가 뒤로 넘어갔을 때 레이나가 붙잡지 못했다면, 제임스를 막느라 늦어버린 루크가 그들을 끌어올리지 못했다면 나디아는 발코니에서 떨어져 죽을 수도 있었다.
“나디아, 알잖니….”
밀리언 부인도 곧 제 처지를 상기한 듯했다. 물론 반성과 죄책감이 아니었다. 어차피 마음이 약한 아이니 지금은 괘씸해도 살살 구슬려 제 아들을 구해내는 게 우선이라 여긴 것이다.
“우리 제임스가 그런 짓을 벌일 애가 아닌 거 알잖니. 뭔가의 착오이고 사고였을 거야, 응?”
“…….”
“그 애와 연락도 할 수가 없어. 어딘지도 모를 곳에 갇혀서 먹기는 잘 먹는지, 잠은 편히 자는지 알 수가 없어. 나디아, 제발 한 번만 지금까지의 정을 봐서….”
브릿 부인이 쯧, 크게 혀를 찼다.
‘하필 이럴 때에 안나도, 루크도 없지.’
셀리아와 레너드가 끼어들 타이밍을 보려는 듯이 그들을 주시하고 있는 것이 보였다. 결승전을 보기 위해 몰려든 사람들의 눈과 귀가 경기장이 아니라 그들을 향했다. 나설 만한 사람이 자신밖에 없는 것 같아, 브릿 부인이 입술을 열었을 때였다. 나디아가 말했다.
“제임스에게 아무런 잘못이 없다면 무죄 판결을 받을 거예요.”
“말이 되는 소리를 하렴! 다 알면서 왜 이래. 네 남편이, 화가 난 스테이턴 공작이 그 애를 가만히 놔두지 않을 거야! 그 애는 잘못한 게 아니야, 단지 실수한 것뿐이란다!”
“판단은 판사의 몫이죠.”
“넌 하나도 다치지 않았잖아!”
밀리언 부인이 발악하듯 소리를 질렀다. 나디아가 고개를 기울여 비딱한 시선으로 밀리언 부인을 쳐다보았다. 브릿 부인은 나디아의 저 표정이 익숙하다고 생각했다. 어디서 봤더라, 어디서….
“그럼 제가 피투성이가 되거나, 발코니에서 떨어져 죽었어야 죄가 된다는 말씀이세요?”
“…내가 언제 그렇게까지 얘기했니. 난 그저….”
“아주머니께서 말씀하시는 대로 제임스가 무죄라면 아무런 문제 없이 풀려날 거예요. 제 남편은 죄 없는 사람을 해코지할 만큼 악질이 아니에요.”
“내가 다 들었어! 모를 줄 알아? 가만히 있는 그 애를 무자비하게 걷어찬 건 스테이턴 공작이었다고 말이야!”
“……정말 제임스가 가만히만 있었나요?”
“그럼 그 애가 파티장에서 뭘 할 수 있었단 말이니!”
“제가 들은 얘기와는 다르네요.”
나디아는 비식 웃으며 어깨를 으쓱거렸다. 비아냥거리려는 의도인지 아닌지는 모르나 밀리언 부인을 배려하거나 존중하지 않는 태도인 것은 분명했다. 레이나는 이쯤 되니 모친을 꺼리던 것도 잊고 입을 떡 벌렸다. 나디아가 이렇게 말을 잘 했던가? 브릿 부인은 소소한 감동까지 느끼고 있었다.
눈도 똑바로 쳐다보지 못하고 말을 더듬던 애가 이렇게 성장하다니…….
“셀리아 전하께서 말씀하시길, 제게 오려는 루크를 막아선 건 제임스였어요. 세 번이나 정중하게 비켜달라 요청을 했는데도 무시하고 몸으로 막아섰다고 했죠. 오, 물론 제 남편이 가녀린 제임스에 비해 건장하고 튼튼한 사람이라, 살짝 부딪친 것만으로 날아가버린 건 불의의 사고에 가깝겠죠.”
발로 걷어찼다는 얘기도 틀림없이 들었으면서 나디아는 능청스럽게 넘겼다. 브릿 부인은 저도 모르게 바람 빠지는 소리를 내며 웃었다. 웃음을 참지 못한 것은 그들의 대화를 지켜보던 몇몇 사람들도 마찬가지였는지 누군가는 어깨를 들썩이며 웃었다. 레이나도 입꼬리를 실룩거렸다. 홍당무처럼 얼굴이 붉게 달아오른 모친의 꼴은 불쌍했지만, 동정심을 빼고 보자면 우스웠다.
딸을 무시하던 밀리언 부인이 그제야 레이나를 죽일 듯이 노려보았다. 나디아는 자연스럽게 레이나 앞을 가려, 밀리언 부인의 시선으로부터 레이나를 차단시켰다.
“그럴 리가 있니? 그 애가 얼마나 건장한데 단순히 부딪쳤다고 날아가?!”
“제 남편이 더 크니까요. 아주머니도 아시잖아요, 제 남편에 관한 소문. 얼마나 강하고 멋있으면 야수라는 별명이 붙었겠냐고요.”
강하고 멋있어서 붙은 별명이 아니라는 것도 당연히 알고 있었다. 태연하게 “제 남편의 장점은 그뿐만이 아니긴 하죠.”라고 덧붙이는 나디아에게 경악한 시선이 쏟아졌다. 루크를 떠올리며 저도 모르게 웃고 있던 나디아의 얼굴이 밀리언 부인을 향하며 차갑게 얼어붙었다. 브릿 부인은 저 표정을 어디서 보았는지 기억해냈다.
그거야. 이건 그거다. 제 부인을 볼 때엔 녹아내리게 웃다가, 남을 볼 때면 한 대 때려주고 싶을 만큼 밉살스러운 무표정으로 돌아가는 꼴이, 딱…….
‘제 남편과 똑같구만….’
열받은 루크 리처드 스테이턴이었다.
“그보다 아주머니, 레이나에게 할 말 없으세요?”
“……무슨 말을 해야 하니. 레이나도 나한테 듣고 싶은 말 따위 없을 게다. 그 자리에 같이 있어놓고도 제 오라비가 끌려가도록 아무것도 못한 애에게 무슨….”
비난하고 싶은데, 사람들의 눈이 있으니 참겠다는 듯이 밀리언 부인이 혀를 찼다. 레이나는 기대도 하지 않았으므로 실망하지 않았다. 다만, 누가 봐도 죄를 저지른 아들을 구해내겠답시고 피해자를 찾아와 소란을 피우는 건 어지간히 남의 눈을 의식한 결과겠다 싶을 뿐이다. 뭐가 부끄러운 짓인지 구분을 못한다는 사실을 세상에 굳이 알려줄 필요는 없지 않았나, 하고.
나디아의 가슴이 크게 들썩거렸다. 그녀의 녹색 눈동자는 이제 선명한 분노를 숨기지도 않았다. 나디아가 레이나의 손을 잡은 채로 말했다.
“레이나가 절 구해준 덕분에 제임스가 아직 살아있는 거예요.”
“뭐, 뭐?!”
“아주머니 말씀대로 제 남편이 화가 나서 이성을 잃고 공정함을 잃어버릴 사람이라면 제임스는 그 자리에서 죽었어야죠.”
“…….”
“레이나가 절 구해줘서 제가 무사했고.”
“…….”
“제 남편이 공정한 사람이라 제임스가 살아서 재판이라도 받을 수 있는 거라고요. 아까부터 레이나가 여기에 있었는데도, 제임스의 잘못을 막아주어 고맙다는 말 한 마디 없이, 오히려 책망만 하시다뇨….”
밀리언 부인의 얼굴이 창백하게 질렸다. 나디아는 그녀에게서 고개를 돌리며 말했다.
“상황 파악은커녕 현실 파악도 못하는 분께 제가 해드릴 수 있는 말은 없네요. 이만 가세요.”
“…나, 나디아….”
나디아는 듣지 않겠다는 듯 아예 눈까지 질끈 감아버렸다. 레이나는 사람들 앞에서 망신을 당한 모친이 불쌍했지만, 여기서 또 나서보아야 다시 그녀의 감정 쓰레기통 신세가 된다는 걸 알고 있었다. 남편과 아들에 대한 불평불만을 들어주면서도, 정작 그들을 탓하면 오히려 비난을 받는 신세 말이다. 결혼하고서야 겨우 벗어날 수 있었던 그 굴레 속으로.
레이나는 고개를 숙였다. 나디아는 쭉 자신의 손을 잡아주고 있었다.
‘제법인 걸.’
브릿 부인은 단호한 나디아의 옆얼굴을 보고는 비식 웃었다. 그리고 밀리언 부인 뒤에 서 있는 사람들 몇 명에게 눈짓을 보냈다. 그들은 브릿 부인과도 친분이 있는 사람들로, 나디아에게도 호감을 가지고 있는 편이라 언제 도와줄 수 있을지 기회를 엿보고 있는 사람들이었다.
마냥 순하고 만만하다는 인상이 조금은 달라졌을까. 브릿 부인은 밀리언 부인과의 다툼이 나디아에게는 오히려 호재라 판단했다. 끼어들지 않기를 잘했다.
화를 내는 방법이 루크와 똑같다는 사실은 마음에 걸리지만……. 병아리 같이 보여도 스테이턴은 스테이턴이라는 것이다.
브릿 부인은 참지 못하고 소리내어 웃음을 터뜨렸다.
“와아아아!”
결승전의 막이 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