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1화
22. 행복의 조건
마리아 달리 랭커스터의 아침은 이르다.
동이 채 트기도 전에 눈을 뜬 그녀는 가장 먼저 남편의 찌푸려진 미간에 입을 맞추었다. 그는 다정하고 성실한 사람으로 훌륭한 아버지이자 남편이었지만, 아주 조금 소심한 부분이 유일한 단점이었다. 마리아는 그조차 사랑했지만, 이따금 악몽을 꾸거나 습관적으로 찌푸린 미간을 볼 때면 어쩔 수 없이 안타까웠다. 혼자 끌어안고 괴로워하지 않아도 좋을 텐데 제 남편은 미련하고 듬직하게도 아직까지 걱정을 끼치지 않으려 했다.
‘귀엽긴.’
손가락으로 미간을 살살 문질러주면 이내 거짓말처럼 숨이 편안해졌다. 마리아는 고른 숨을 내쉬는 남편의 얼굴을 잠시 쳐다보다 조심스럽게 침대를 빠져나왔다. 그녀에게는 해야 할 일이 많았다. 가장 먼저 도톰한 숄을 걸치고 초에 불을 밝혔다. 남편이 깨지 않게 살금살금 침실을 나와, 걸음을 재촉했다.
“부인, 좋은 아침이에요.”
“밀라, 좋은 아침. 카모마일 차 한 잔 부탁해도 될까?”
“이미 준비하고 있지요. 이리 앉으세요.”
“고마워.”
금세 따뜻한 차가 준비되었다. 일찍 일어나 하루를 시작하기 전에 따뜻한 차 한 잔을 마시는 것이 마리아의 오래된 습관이었다. 따뜻한 찻물이 몸속에 퍼지는 감각을 즐기며 마리아가 눈을 감았다 떴다. 밀라가 말했다.
“더 쉬셔도 좋을 텐데요…. 아직 완전히 회복하시지 않았잖아요.”
“충분히 회복했어. 더 누워 있다가는 없던 병도 생길 걸. 그리고 할 일이 많은데 어떻게 가만히 누워있을 수가 있겠어? 하루가 너무 짧아.”
“막내 아가씨, 에그머니나, 나디아 님께서 초대하셨다고요.”
마리아는 고개를 끄덕거렸다. 정확하게는 스테이턴 공작의 초대였지만 굳이 정정해줄 필요가 없는 정보였다. 주인이 없는 저택은 밀라가 든든하게 지켜줄 것이니 걱정하지 않아도 좋겠지만, 그렇다고 안주인의 역할이 필요하지 않은 건 아니었다. 쉬고 싶은 사람들에게는 넉넉하게 휴가를 주고, 미리 채워놓은 식료품도 적당히 처리해야 했다. 근래 군식구가 늘어나 넉넉하게 사놓는 바람에 저장기간이 짧은 음식들도 많이 남게 됐다.
“그래도 공작의 성이라니, 얼마나 멋있겠어요.”
“같이 갈래?”
“어휴, 전 됐어요. 다 늙어서 무슨….”
“섭섭하게. 날 혼자 보내도 돼?”
“걱정할 게 무어 있겠어요? 안나가 잘 돌봐드릴 텐데.”
밀라는 마리아가 랭커스터 남작과 결혼한 그 해부터 저택에서 일을 시작해 오랜 시간 가장 가까이에서 마리아를 도와주었다. 대범하고 시원시원한 성격만큼 손이 크고, 호탕하게 웃는 사람이었다.
“하지만 모두 떠나버리면 쓸쓸해지겠어요. 한동안 북적거렸잖아요. 일리야 님은 이전에도 자주 방문하셨지만 밤이 되면 돌아가버리셨고, 막내 아가씨께서 가버리신 후에는….”
“…….”
“…정말 다행이지 뭐예요. 모두 좋은 사람들이라.”
“…그래, 다행이지….”
마리아는 찻잔을 입술로 가져가며 고개를 끄덕거렸다.
현재의 평화와 신뢰는 스테이턴의 부단한 노력 덕분이다. 약자는 강자 앞에서 필요 이상으로 조심스러워질 수밖에 없기에 랭커스터는 다가오려는 루크와 안나, 제스의 노력에도 쉽게 마음을 열지 못했다. 어쩌면 선입견이었겠지만 마리아는 조심스러운 가족들이 잘못되었다고도 생각하지 않았다. 라 먼스트로드에서 살아남기 위해 랭커스터는 조심스럽고 신중해야만 했다.
남을 해치지 않고 살아가는 건 많은 노력이 필요했다. 발밑을 내려다보면 짓밟을 수 있는 약자가 얼마든지 있다. 더 많이 가진 자가 살아남는 게 당연하다는 논리 앞에서는 누구도 해치지 않겠다는 신념은 바보 취급을 당하기 일쑤였다. 비웃음을 사면서도 지켜온 신념은 때로 지나친 방어와 조심성으로 발휘되었다.
세상에 스테이턴 같은 대귀족이 얼마나 있겠는가. 단 하나의 예외를 보았다고 태도를 고치는 것은 위험했다.
그러나 눈앞에 두고도 사람의 본질을 보지 못한 것은 변명의 여지가 없었다. 스테이턴은 매우 독특하고 괴상한 집단이었다. 비단 루크만이 아니라(물론 루크가 가장 독특했다) 안나와 제이도 직선적이고 솔직한 사람들이었다. 특히 안나는 랭커스터 저택에 머무르며 식솔들을 많이 도와주었는데, 밀라는 과감하고 유능한 안나에게 홀딱 반한 모양이었다. 입만 열면 칭찬을 쏟아내는 것을 보면 말이다.
마리아 역시 안나가 무척 좋았다. 그녀는 말이 많지 않았지만 한 마디, 한 마디가 재치 있었다.
사랑할 수밖에 없는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이따금 랭커스터를 보며 “신기하다”라고 말하지만 그건 오히려 그들이 들어야 할 말이었다. 물론 어떤 사람들이었더라도 그들이 나디아를 진심으로 아껴주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 이상 사랑하게 되었겠지만 말이다.
“스테이턴은 무척 좋은 사람들이지만 확실히 라 먼스트로드와는 맞지 않는 것 같아.”
“랭커스터도 만만치 않아요, 부인.”
“…칭찬이라 받아들일게.”
“아무렴 칭찬이지요. 한 잔 더 드릴까요?”
“아니, 됐어. 곧 일리야가 일어날 시간이야. 일리야와 비비안은 아이들 짐까지 챙겨야 하니 여행 준비는 내가 도맡아야지. 도와줄래, 밀라?”
“저 없이 무슨 일을 하시려고요?”
그 마른 팔로 짐을 직접 옮기기라도 하겠느냐고 꼬집으며 밀라가 빈 찻잔을 치웠다. 두 여인은 바쁘게 움직이며 아직 어두운 저택을 밝히기 시작했다.
라 트에빌레의 마지막 날, 검술 대회의 결승을 앞둔 새벽이었다.
*
제이드 앨런은 투구를 뒤집어쓴 주인과 무얼 하는지는 몰라도 분주한 안나의 뒷모습을 응시했다. 그의 팔에는 루크가 벗어던진 코트가 걸려 있었다. 흑곰 기사단의 모피와 갑옷은 보는 것만으로 목이 턱 막히는 기분이었다. 게리 노스는 멋있지 않느냐며 껄껄 웃었지만 제이는 꼭 필요한 경우가 아니라면 저 둔하고 무거운 무구를 사용하고 싶지 않았다. 그는 게리 노스나 루크와 달리 짐승 같은 힘을 가지고 있지 않았기에, 비록 견고하지 않아도 민첩하게 움직일 수 있는 쪽을 선호했다.
“투구를 쓴 이상 아무리 털을 다듬어봐야 단정해지진 않을 텐데, 안나.”
“가만히 있으세요. 털이 날리잖아요.”
“답답하다고.”
“결승에 나가는 이상, 스테이턴의 명예가 걸려 있습니다. 단정치 못한 꼴로 내보낼 수는 없어요.”
그래 봐야 안나와 헤어지는 순간 들판을 달린 직후처럼 헝크러지고 말 텐데 말이다. 소용없는 짓이라는 걸 알면서도 안나의 고집은 꺾을 수 없던 루크는 얌전히 서서 그녀가 하고싶은 대로 내버려두었다. 이걸 위해서 굳이 나디아를 먼저 보내고 남았으니, 안나의 집념도 알아주어야 했다.
“여기까지 와서 꼴사납게 패배하진 않으시겠지요.”
“글쎄, 모르지.”
루크가 심드렁하게 대답했다. 그는 결승을 앞두고서도 사라진 의욕을 되찾지 못했다. 이러고 있을 게 아니라 나디아 옆에 찰싹 달라붙어 있는 게 낫지 않나, 수십 번 고민했다. 우승하지 못하면 그간의 고생이 헛것이 되겠으나 낮 동안 떨어져 있어야 하는 건 고통스러웠다. 하필 오늘의 나디아는 남에게 보여주기 아까울 정도로 예뻤다. 하긴 나디아가 언제는 안 예쁜 순간이 있었나. 언제는 안 아까운 순간이 있었나.
“꽃을 받고 기뻐하실 부인의 얼굴을 상상해보세요. 의욕이 솟아날 겁니다.”
“나디아는 내가 옆에 있는 걸 가장 기뻐하지 않을까.”
“자기자신을 지나치게 높이 평가하고 있는 게 아닌지 의심해보세요.”
“…….”
“뭐, 부인께서는 각하께서 뒤구르기를 해도 좋아해 주시겠지요….”
루크는 그를 키우다시피 한 시녀장의 따가운 조언과 시니컬한 평가에 복잡한 심경이 되었다. 뒤구르기와 검술 대회 우승이 동급이 되어버렸지만 나디아에게 있어서는 정말 비슷할 것이다.
“…나디아를 행복하게 해 주는 방법은 이런 게 아닌 것 같단 말이다.”
“그건 아마 평생 고민하셔야 할 문제일 겁니다. 지금 당장 결론이 날 문제도 아닐 거고요. 자, 됐습니다.”
루크가 보기에는 별반 차이가 없었지만 안나는 만족한 듯이 물러섰다. 제이도 나름 외모를 가꾸는 데 관심이 있는 편이었지만 그로서도 도통 차이를 알 수가 없었다. 하지만 이 시점에 솔직함은 도움이 되지 않았다. 제이는 최근 인내를 배운 혓바닥으로 다른 말을 꺼냈다.
“떠나기 전에 폐하께 인사드리지 않아도 됩니까? 부인께서도 한 번은….”
“됐어. 어차피 건국제 때에는 싫어도 봐야 돼.”
루크는 생각도 하기 싫다는 듯 잘랐다. 사실 머무르는 동안 한 번은 나디아와 황제를 알현할 예정이었다. 그러나 라 트에빌레가 시작된 후에 황제는 건강상의 이유로 황태자에게 모든 책무를 넘겼다. 딱히 운동을 하진 않지만 타고나길 건강한 황제를 아는 사람이라면 ‘건강상의 이유’가 그저 허울 좋은 핑계라는 걸 알 테다.
황태자에게 큰 행사를 하나둘씩 넘기려는 의도일 것이다. 황제 자리를 물려주기에는 아직 이르지만 유능한 아들을 놀게 내버려두는 것도 아까운 일이었다. 루크는 거기에 더해 ‘공작 부인의 건강 문제’를 핑계로 급히 떠날 예정이었다. 마침 몸이 안 좋아질 만한 사건도 있었으니.
“나디아를 귀찮게 하고 싶지 않아. 황제를 만나라고 하면 얼마나 부담스럽겠어?”
“…예전이라면 몰라도 요즘은 그리 부담스러워하지 않으실걸요.”
안나가 어깨를 으쓱거렸다. 황태자와도 꽤 편안하게 수다를 떨 정도로 친해졌으니 나디아도 많이 대범해졌다. 루크는 그것도 불만이었다. 레너드가 혓바닥이 잘 돌아가는 줄은 알았지만 나디아 앞에서 그리 내숭을 잘 떨 줄은 몰랐다. 앤더슨 앞에서 착한 척하는 걸 보고 알았어야 했는데 말이다.
“내가 이딴 걸 뒤집어쓰고 막대기나 휘두르는 동안….”
“검입니다, 각하.”
“레너드 새끼는 내 마누라와 햇빛을 받으며 웃고 있겠지….”
안나는 그 자리에 브릿 부인이나 일리야, 어쩌면 셀리아 황녀나 자신이 있을 거라는 말을 굳이 더하지 않았다. 알고도 저러는 것이다.
“안나. 제이.”
낮은 목소리는 얼핏 진지하고 우울하게 들렸다. 그러나 안나는 속지 않았다. 제이도 마찬가지였다. 그들은 주인이 또 무슨 헛소리를 하는지 인내심 있게 들어줄 요량으로 다음 말을 기다렸다.
“너희는 행복한가?”
“…….”
“…….”
말을 뱉은 직후 루크는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침묵이 이어지자 더욱 참담한 심정이었다. 안나와 제이는 숫제 미친놈을 보는 눈으로 그를 보았다. 루크도 비슷한 심정이었다.
“혀를 잘라내고 싶군. 미안했다.”
안나는 그대로 나가버렸고, 제이는 “조금이라면 잘라도 좋지 않겠습니까?”라고 말했다가 한 대 맞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