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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수라는 공작에게 시집왔는데-140화 (140/150)

140화

저녁에는 무도회 대신 브릿 저택으로 향했다.

나디아의 목적은 루크가 검술 대회에서 우승하는 걸 보는 거였으므로 무도회까지 참여하겠다고 고집을 부리지는 않았다. 애초에 사람이 많은 장소를 좋아하지도 않았고, 루크에 대한 소문을 없앨 수 없다면 굳이 좋은 인상을 주려고 노력해봤자 소용없을 거라는 계산도 있었다.

‘말 걸어줄 사람도 없을 거고….’

브릿 부인을 보고 다가와주던 사람들이 거짓말처럼 뚝 끊겼다. 브릿 부인과 안나, 일리야가 있어 외롭지는 않았지만 이렇게까지 차이가 나면 기분이 상할 수밖에 없었다.

루크에게 어울리는 사람이라고 인정을 받고 싶었다. 그러나 누구에게 인정을 받고 싶었는지를 누군가 묻는다면 대답하기 힘들었다. 나디아의 목표는 막연한 것이었다. 자기혐오가 극에 달해 있어서 어울리지 않는다는 말까지 듣고 싶지 않다, 에 가까웠다. 그러나 레이나와 화해를 하고, 제임스에 대해 다시 생각해보며 나디아는 깨달았다.

공작부인으로서도 잘 해내고 싶었다. 브릿 부인에게 배운 모든 것은 거름이었다. 무엇보다 엄격한 부인의 시험을 제 힘과 노력으로 통과했다는 사실 자체가 자신감이 되어줄 것이다. 나디아는 다른 누구보다 자기자신에게 인정을 받고 싶었다. 누가 뭐라고 하든 스스로에게 떳떳할 수 있길 바랐다.

하지만 그보다 중요한 게 있었다.

‘어떻게 해야 루크를 더 행복하게 해줄 수 있을지를 생각하고 노력해야 했어….’

루크 덕분에 행복해진 만큼 그를 행복하게 해주고 있는지 자신이 없다.

‘루크를 만나고 난 너무 행복해졌는데…….’

루크는 한없이 주기만 해서, 무얼 어떻게 돌려줄 수 있을지 감도 잡히지가 않았다. 사랑은 간직하기만 해서는 안 된다. 표현할수록 크고 단단해진다고 배웠다. 랭커스터 남매가 성인이 되고 난 후에도 서로에게 사랑한다는 말을 자주 하는 이유였다.

말도, 행동도 자주 한 것 같기는 한데 행동이 지나치게 밤에 한정돼 있었다.

사랑을 표현하는 행동이 섹스뿐이라는 건 지나치게 동물적이지 않은가. 나디아는 루크에게 어떻게 사랑을 표현해주어야 할지 진지하게 고민해봐야겠다고 생각했다. 지금 당장 할 수 있는 고민은 아니었다.

“그 남자 어디가 좋아?”

“음….”

나디아는 시선을 흘렸다. 레이나는 진심으로 궁금한 얼굴이었다. 다짜고짜 이런 질문을 받을 줄은 예상하지 못했다. 제임스가 잡혀간 원망을 들을 거라고 생각한 건 아니었지만 그래도.

레이나가 인상을 찌푸리며 말을 이었다.

“넌 기절해서 그 뒤를 못 봐서 그래. 얼마나 무서웠는지 알아? 왜 야수 공작이라고 하는지, 오, 미안. 이건 내가 잘못했어.”

도중에 나디아가 눈살을 찌푸리자 레이나가 재빨리 사과했다.

“많이 바뀌었다, 너. 예전엔 듣기 싫은 말 들어도 싫은 내색 안 하더니.”

“…그랬나?”

나디아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레이나가 고개를 끄덕거렸다. 이래도 좋고 저래도 좋대서 짜증이 났던 순간이 한둘이 아니었다. 나디아가 말했다.

“결국 아무래도 좋아서 그랬을 걸. 잠깐 듣기 싫었을지 몰라도 네가 더 좋아서 괜찮았어.”

“…….”

“레이나, 얼굴이 빨개.”

“……너 언제부터 그런, 부끄러운 말을 술술 하게 됐어….”

“사랑은 표현하는 거랬어.”

예전에는 안 그랬으면서. 레이나는 붉어진 얼굴을 손바닥으로 가렸다.

“예전에는 표현하지 못해서 오해가 생긴 것 같으니까 이제 안 그러려구.”

“……정도껏 해. 그리고 얼른 대답해 봐. 어디가 좋은 거야?”

“…왜 다들 그런 걸 묻는지 모르겠어.”

브릿 부인도 같은 질문을 한 적이 있었다. 아마 루크도 비슷한 질문을 수없이 듣지 않았을까. 나디아는 입술을 비죽거렸다. 레이나가 말했다.

“네가 좋아할 만한 구석이 어딘지 잘 모르겠어. 넌 위협적인 사람 싫어하잖아.”

“…그랬나….”

“폭력적인 사람 질색이라며?”

“루크는 폭력적이지 않아.”

“제임스 다리를 가차없이 걷어차던데?”

“그건….”

“화가 날 만한 상황이었고, 그 자리에서 죽이겠다고 달려들지 않은 게 다행인 건 알지. 어쨌거나 넌 부드럽고 상냥한 사람이 취향일 거라고 생각했어.”

“루크는….”

“너한테 부드럽고 상냥한 거 말고 말이야.”

“…….”

“너 바보는 아니잖아. 상당히 폭력적이고 거친 사람이라는 거 다 알지?”

“……폭력은 아냐. 원칙을 두고 무력을 쓰는 사람인 거지…….”

“어쨌든.”

사람을 때린다, 다치게 한다는 점에서는 마찬가지였다.

레이나의 지적은 날카로웠다. 타인의 고통에 예민하게 공감하는 나디아는 이유를 불문하고 힘으로 갈등을 해결하려는 사람들을 이해할 수 없었다. 루크를 사랑하는 지금도 이해가 되는 건 아니었다. 그녀는 누구든 다치는 게 싫었고, 피가 끔찍했다.

“어디가 좋은지, 그런 거 이제는 몰라. 계기는 있을지 몰라도 사랑하게 된 이유를 꼽을 수는 없는 거잖아. 안 그래?”

“…뭐어. 그렇지….”

레이나는 마지못해 인정했다. 그녀 역시 저보다 나이도 많고, 그리 잘생기지 않은 남편을 사랑하지만 그 이유를 전부 꼽아 말할 수는 없었다. 다정해서, 배려가 깊어서, 말을 잘 해서, 도피처가 되어줘서…… 전부 맞지만, 어쩌면 그 어느 것도 아니었다. 원래 그런 거였다.

모든 것이 사랑의 이유가 되지만 그 어떤 것도 정확하지는 않다.

“언제 백작령으로 돌아갈 거야?”

“나야 갈 수만 있으면 당장이라도 가고 싶지…. 하지만 제임스의 재판이 끝날 때까지는 머물러야 하지 않을까. 남편에게도 편지를 보냈어.”

“……꼭 네가 있어야 해?”

“어머니에게 무슨 원망을 들으려고.”

레이나가 혀를 차며 고개를 저었다.

“제임스를 도와주려고 널 도운 건 아냐, 알지?”

“당연하지…. 구해줘서 고마워, 레이나. 오늘은 이 말을 하려고 왔어.”

“……진지하게 감사하지 마. 내 오빠가 널 죽이려는 걸 막았을 뿐이니까.”

레이나가 입을 비죽 내밀며 차갑게 말했다. 나디아는 이제 그게 부끄러운 걸 숨기기 위한 거라는 걸 알았다. 알고 보니 귀여웠다.

“너는? 언제 돌아가는데?”

“아마 라 트에빌레가 끝나면 바로 돌아가지 않을까.”

“그렇게 빨리?”

원래 봄까지는 머물 예정이었다는 이야기는 굳이 하지 않았다. 나디아가 말했다.

“여름이 되면 스테이턴에 초대할게. 남편과 같이 꼭 방문해 줘.”

“……뭐, 생각해볼게.”

“편지도 보낼게. 답장해주고.”

“당연하지….”

레이나는 배시시 웃는 나디아를 빤히 쳐다보았다. 셀리아 황녀가 친구 후보라던 이야기는 어떻게 된 걸까. 반말을 할 리가 없으니 농담이라 치고 넘겨도 되겠지만, 그러기에는 걸리는 점이 있었다. 레이나는 원래 셀리아 황녀처럼 속이 시꺼먼 타입이 싫었지만, 자신을 도와준 은인이니 개인적인 호불호는 접어두기로 했다.

“나디아.”

“으응?”

“우리가 싸우기는 했지만….”

레이나는 손을 뻗어 나디아의 손등을 덮었다. 나디아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아직 제일 친한 친구는 나지?”

“응! 당연하지!”

“그래, 그거면 됐어.”

멍청한 제임스보다, 사랑하는 만큼 증오하는 부모님보다 상처를 줘도 결국엔 용서하고 좋아해주는 친구를 얻었다. 제 편이 되어줄 사람이 둘은 있었다. 남편과 친구.

그거면 충분했다.

*

“진짜 속상해….”

나디아는 입술을 비죽 내밀었다. 기회를 놓치지 않고 예쁘게 모인 입술을 쪽 삼킨 루크가 뒤늦게 그녀의 말을 되새겼다. 뭐라고 했지, 아, 속상하다고. 부드럽고 촉촉한 입술이 천천히 떨어지는 감각에 집중하느라 사고가 느리게 흘러갔다.

“루크, 듣고 있어요?”

“음?”

그야 듣고 있다, 속상하다고 했지. 그러나 주름이 잡힌 나디아의 미간이 귀여워서 또 집중력을 잃었다. 그렁그렁하게 젖은 눈동자는 또 어떻고. 루크는 대충 고개를 끄덕거리며 나디아의 입가와 턱에 잘게 입을 맞췄다. 키스로 넘어가고 싶었지만 그녀는 그럴 생각이 없어 보였다.

얇은 슬립 아래로 손을 밀어 넣었다. 나디아의 피부는 체온이 높고 매끄러워서 손바닥에 착 달라붙는 것만 같았다. 유난히 말랑거리는 살결은 말할 것도 없이 유혹적이었다. 통통한 허벅지를 쓰다듬다가 둥근 엉덩이를 쥐었다. 나디아가 콧잔등까지 찡그렸다.

아, 혼나겠군. 루크가 직감하기 무섭게 나디아가 그의 양뺨을 감쌌다.

“내 말 안 듣고 있죠!”

“아니, 듣고 있었소. 속상하다고….”

“왜 속상한지는 안 물어봐요?”

“지금 물어보려고 했소….”

진짜였다. 나디아의 피부가 너무 달콤해서 입을 뗄 수가 없었을 뿐, 그는 정말 물어보려고 했다. 그녀를 속상하게 만든 게 무언지 알아내서 아주 없애버려야지….

나디아는 느릿하게 대답하면서도 제 손을 피해 연신 입을 맞추는 루크를 얄밉게 노려보았다. 엉덩이를 주무르던 손이 어느새 슬금슬금 다리 사이를 쓸었다. 긴 손가락 끝이 안쪽 허벅지를 스치고 지날 때마다 절로 다리가 움츠러들고 허리가 떨렸다. 싫지 않았지만, 오히려 좋았지만, 나디아는 제 엉덩이를 아쉽게 어루만지는 그의 손을 떼내어 허리에 얹었다.

허리라고 가만히 놔둘 수 있을 줄 아나. 루크는 나디아가 시키는 대로 그녀의 허리를 잡았지만, 가만히 있을 생각은 없었다. 엄지를 올려 풍만한 가슴을 밑에서부터 쓸어 올렸다. 예민한 유두가 슬림 너머로 단단해진 것이 보였다. 아, 이건 또 입을 가져가지 않을 수가 없지. 루크는 슬립 위로 튀어나온 유두를 핥기 시작했다.

“아으응, 루크….”

“누가 당신을 속상하게 했소?”

얇은 슬립이 금세 젖어서 착 달라붙었다. 옅은 진주색 슬립의 일부가 짙은색으로 물들었다. 루크는 참지 못하고 또 슬립 아래로 손을 집어넣었다. 이번에는 나디아도 말리지 못했다.

“말해봐요.”

“전부요. 전부….”

루크가 아프지 않게 살짝 가슴살을 깨물었다. 잇자국은 살짝 날 정도로만.

“루크가 화 좀 냈다고, 이때다 하고 루크 욕만 하잖아요….”

“…그랬소?”

“언제는 셀리아 황녀 전하하고도 잘 어울린다면서, 언제는, 앗!”

“그 이름은 금지요.”

이번에는 아주 조금 아팠다. 나디아가 루크를 살짝 노려보았다.

“사람이 화 좀 낼 수도 있지, 루크가 얼마나 대단한지 하나도 모르고….”

“난 별로 대단하지는 않은데.”

눈앞에서 흔들리는 유혹을 조금도 떨쳐내지 못하는 인간이 대단할 리가 없었다. 루크는 가슴을 잘근거리며 깨물수록 달콤하게 무너지는 나디아의 허리를 가까이 끌어당기며 그녀의 엉덩이를 제 허벅지에 문질렀다. 아, 젖었다. 그녀가 무엇 때문에 속상해하는지는 알았지만 사실 공감은 잘 안 됐다.

뒤에서 뭐라고 떠들든 당사자 앞에서 말할 수 있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제게 직접 말할 수 없는 의견까지 신경써줘야 할 가치는 없다.

하지만 나디아는 그저 루크가 안 좋은 소리를 듣는 것이 속상한 것이다.

고맙고, 귀엽고, 사랑스럽게도.

“두고 보자….”

“아하핫.”

나디아가 이를 악물고 전형적인 악당의 대사를 읊조렸다. 루크는 크게 웃으며 그녀의 입술을 삼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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