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9화
솔직히 티를 내지 않았다는 것만으로도 칭찬받을 만하다고 생각한다. 레너드는 뻔뻔하게 자신을 추켜세웠다. 살벌하게 제임스 밀리언을 내놓으라 으르렁거리는 루크에게 어떻게 겁을 먹지 않을 수 있단 말인가? 그래도 거절도 하고? 모르는 사람이 보면, 난동을 부리는 스테이턴 공작을 제법 잘 제어하는 것처럼 보였을 테니 만족스러운 결과였다.
아무리 날카로운 검이라도 쓰지 못하면 소용이 없다. 실상이야 어떻든지 다루는 것처럼 보이기만 하면 되는 것이다.
지금도 레너드는 루크를 다루기 어려울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그는 적당히 물러날 줄 알았으니 선만 지킨다면 뜻대로 움직일 수 있을 거라 여겼다. 하지만 그건 그에게 소중한 것을 건드리지 않았을 경우다.
‘그나마 부인이 목줄이라 여겼는데, 이제 보니 목줄이 아니라 기폭제였어.’
라 먼스트로드에게 소중한 걸 잃거나 멋모르는 것들에게 위협당해 루크 리처드 스테이턴이 진심이 되면, 그때는 아무도 말릴 수 없다.
“이대로 스테이턴 영지로 돌아가서, 예전처럼 꼭 필요한 경우에나 얼굴을 비춰주면 돼.”
부왕의 방식이 합리적이었다는 걸 인정하기 싫다. 셀리아는 포기한 양 말하면서도 언짢아 보이는 레너드의 옆얼굴을 보다 시선을 돌렸다. 그 끝에는 나디아의 뒷모습이 걸렸다. 다행히 그녀는 건강한 듯했다. 애초에 건강하지 않았다면 루크가 가만히 있었을 리가 없었지만.
“솔직히 당장 짐을 챙겨 돌아갈 줄 알았어요. 무슨 바람이 불었대요?”
레너드가 비식 웃었다. 바람 빠지는 웃음소리를 듣고 셀리아가 인상을 찌푸렸다.
“아, 됐어요. 안 들어도 알 것 같아.”
루크의 고집을 꺾을 수 있는 사람이 단 하나밖에 더 있겠는가? 그러나 그렇다고 하더라도 이해가 안 되는 부분이 남아 있었다. 셀리아가 덧붙였다.
“그래도 그런 사건 직후인데 혼자 내버려 둘 줄은….”
“아아. 그럴 수밖에 없는 사정이 있지.”
“……?”
“지금쯤 짜증나서 미칠 지경일 걸.”
상대의 명복을 빌 따름이었다.
*
루크는 이를 악물었다. 레너드의 장담대로 그는 짜증이 나서 미치기 직전이었다.
정체를 감추려 투구를 뒤집어쓰고 있기에 망정이지, 그렇지 않았다면 기세가 아니라 얼굴만으로 사람을 얼어붙게 만들었을 것이다. 그는 흡사 지옥에서 올라온 악귀 같았다.
‘이깟 웃기지도 않는 짓을 하느라 나디아를 혼자 둬야 하다니.’
시작은 낯선 여자에게 성희롱을 당하고 만 일을 사과하기 위해서였다. 멋지게 우승해서 꽃을 주고 싶다는, 갸륵하고 기특한 계획이었다. 그러나 이 계획이 이다지도 성가시고 귀찮고 거슬릴 줄 알았다면 루크는 시작도 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에게 무엇보다 중요한 건 나디아와 함께 있는 시간이었다.
잠을 잘 때는 당연히 나디아와 함께여야 하고, 밥도 웬만하면 같이 먹어야 하고, 일할 때도 틈만 나면 나디아를 보러 가고 싶었다. 나디아를 만나기 전에는 어떻게 살았는지 이제 기억도 나지 않았다. 나디아를 중심으로 사고와 생활이 돌아가는 게 너무 당연해졌다.
나디아의 설득에 못 이겨 라 트에빌레 참석에 동의했을 때만 해도 루크는 자신이 카넬로 알바즈의 신분으로 검술 대회에 참여하고 있다는 걸 까맣고 잊고 있었다. 알고 있었다고 해도 나디아의 곁에 있기 위해 당연히 포기했을 테니 달라지는 건 없었다. 하지만 나디아에게 미리 늘어놓았던 변명이 문제였다.
낮에는 바빠서 시간이 나지 않을 거라고 말했었다. 어떤 일인지는 자세하게 얘기하지 않았지만, 나디아가 맑은 눈을 반짝이며 “바쁘다고 하지 않았어요?”라고 묻는 말에는 과연 할 말이 없었다. “황태자 전하께서 맡긴 임무가 있다면서요.”라고도 했다. 그런 말을 했었나. 기억도 나지 않았다.
당신보다 중요한 일은 없다고 말하기에는, 이제까지 내버려 두었던 날들이 있었다. 루크는 스스로 찧은 제 발등을 부여잡고 관심도 없는 검술 대회 준결승전에 참가해야만 했다.
이제는 이딴 시합, 어찌 되어도 좋다.
나디아는 뭘 하고 있을까. 오늘은 바람이 어제보다는 차가운 편인데 혹시 춥게 입지는 않았을까. 눈은 제대로 박혔지만 간이 비대한 놈이 작업을 걸고 있지는 않을까…. 역시 자신이 옆에 있어야 한다. 지금이라도 투구 따위 벗어던지고 나디아에게 가는 게 좋지 않을까….
“이봐.”
“……?”
나란히 앉아 준결승전을 기다리고 있던 기사가 말을 걸었다. 루크가 눈만 돌려 그를 보았다.
“흑곰 기사단이라면 스테이턴 부인을 가까이서 뵌 적이 있겠지?”
“…….”
뭐야, 이 새끼는…. 그렇지 않아도 나디아에게 누가 껄떡대고 있지는 않을지 걱정하고 있던 루크는 기사를 아래위로 훑었다.
기사는 꽤 멀끔하게 생겼다. 갈색 머리칼을 깔끔하게 뒤로 넘긴 얼굴은 기가 막히게 잘생기지는 않았지만 깨끗한 편이었다. 굳게 다문 입술에서 고집스러운 성격이 엿보였다. 흑심이 있는 거라면 시합에서 합법적으로 패주려고 했던 루크는 판단을 미루었다. 견실하게 빛나는 눈빛이 앤더슨의 것과 닮아 있었기 때문이다.
루크가 말없이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 분은….”
루크가 인상을 찌푸렸다.
“행복하신 것 같나?”
“…….”
“아니, 내 말은, 그러니까, 행복하게 지내고 계신 것 같냐는……. 제기랄, 남이 봐서는 알 수 없는 일이지만.”
기사는 신음을 흘리며 제 머리를 마구 헝클었다. 하고 싶은 말이 혓바닥 위에서 꼬인 것 같았지만, 그럭저럭 하고 싶은 말은 전달이 되었다. 다만 그 질문은 루크가 대답할 수 있는 게 아니었다.
나디아는 입버릇처럼 행복하다고 말했다. 고맙다고도 말해주었다. 루크는 그녀를 더 행복하게 해주고 싶었지만, 사실 그녀 덕분에 자신이 행복해지는 게 더욱 큰 것 같아서 자신있게 말할 수가 없었다. 제가 그녀에게 주는 것보다 그녀에게서 받는 게 더 컸다.
“그 분이 랭커스터일 때부터 일방적으로 알고 있었거든. 멀리서 몇 번 뵌 게 전부이긴 했어. 말 한 번 걸어보질 못해서 아는 사이라고는 말할 수가 없군. 다가가기에는 너무…… 넘어야 할 벽이 많았거든. 랭커스터가 막내딸을 싸고 돌았다는 건 자네도 알지?”
“…….”
“갑자기 결혼해버릴 줄 알았다면 말이라도 한 번 걸어볼 걸 그랬어….”
혼잣말처럼 중얼거린 기사가 정신을 차리고 말을 이었다.
“우리끼리니까 하는 말인데, 말 한 번 걸어보지 못했지만 그 분을 마음에 담아두었던 남자가 나 말고도 꽤 많을 걸. 말은 안 해도 말이야. 오, 노려보지 마. 미련이 남아서 물어보려는 게 아니니까.”
역시 흑심이 맞다. 루크는 기사의 눈만 빼고 때려주기로 마음먹었다. 눈은 제대로 박혔으니까.
“가족들의 가드가 조금만 덜했더라도 데이트 신청 한 번은 해봤을 텐데. 랭커스터의 막내딸은 구애 한 번 받아보지 못했다고 유명했지. 구애할 남자가 없었던 게 아니지만 결과적으로는.”
하고 싶은 말이 뭔데. 루크는 앤더슨을 닮았다는 판단을 철회했다. 과묵한 인상과 다르게 무척 수다스러운 남자였다.
“기왕이면 행복하시길 바라는 마음에서 물은 거라고. 네 주군을 모욕하려는 게 아니라. 알지?”
알긴 뭘 알아.
“착한 사람은 행복해져야 맞는 거잖아, 안 그래?”
“…….”
“그러기가 어려운 세상이니까.”
“…….”
기사가 씩 웃었다. 루크는 고개를 끄덕였다.
카넬로 알바즈는 준결승에서 승리했다. 그러나 앞선 시합과 달리 그는 상대와 열 합이 넘게 검을 맞춰주고, 부상을 입히지 않고 정중하게 승리를 취했다.
착한 사람은 행복해져야 한다. 그러기 어려운 세상이므로.
*
“?그래서 지금 뭐가 문제인 겁니까?”
제이는 머리를 감싸쥔 루크를 의아하게 내려다봤다.
자초지종은 대강 들었다. 잔챙이를 상대로 왜 그렇게 시간을 끌었는지 겨우 이해할 수 있었다. 상대는 준결승에 오른 만큼 아주 약골은 아니었지만 루크는커녕 제이를 상대로도 이길 수 없는 실력이었다. 실력은 볼 게 없었지만 착한 사람 운운하는 낭만주의는 나쁘지 않았다.
그러나 이 대화의 흐름 어디에서 제 주인이 머리를 감싸쥐어야 하는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부인을 사모하는 남자가 많았다는 부분?”
루크는 고개를 저었다.
“내가 그렇게 속이 좁은 줄 알아?!”
아니었단 말인가. 그게 더 놀라웠다. 하지만 나디아에 관한 한 루크에 대한 예상이 빗나가는 것은 이제 일상적인 일이다.
“…데이트 한 번 해보지 못한 부인께 다짜고짜 청혼해 기회를 앗아가버린 부분입니까, 설마…?”
“제기랄, 그건 다행이지….”
“…….”
“데이트는 이제부터 나와 많이 하면 돼.”
루크는 푹 숙이고 있던 고개를 들고 눈을 부라렸다. 제이는 횟수가 아니라 다양성이 중요하지 않냐고 딴지를 걸고 싶었지만 애써 참았다. 진실의 혓바닥은 인내를 배워 나대야 할 타이밍을 가늠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럼 뭐가 문젭니까? 아, 역시 제임스 밀리언을 납치할까요?”
“……됐다.”
구체적인 납치 계획까지 세워놨지만 나디아를 생각하면 차마 실행에 옮길 수가 없었다. 그녀는 레이나와 화해하여 매우 기쁜 듯했다. 아무리 사이가 안 좋아도 나디아 친구의 오라비를 죽일 수는 없고? 무엇보다 나디아가 슬퍼할 것이다. 그녀는 정이 떨어진 친구의 불행도 슬퍼할 사람이었다.
나중에, 세상의 관심과 나디아의 관심이 멀어졌을 때를 노린다면 또 몰라도.
“그럼 뭐가요.”
제이는 슬슬 짜증이 났다.
“요즘 말본새가 아주 건방지다?”
“…….”
맹세컨대 충심은 여전했다. 존경심이 닳아 사라지기 직전일 뿐이다. 제이가 입을 다물고 재촉하자 루크가 마지못해 대답했다.
“?까.”
“예?”
제이는 귀를 의심했다. 너무 작은 목소리라 잘 안 들리기도 했거니와, 희미하게나마 들은 말을 믿고 싶지 않기도 했다. 루크는 세상에서 가장 심각한 갈등을 끌어안은 사람처럼 굳은 얼굴로 말했다.
“내가 제대로 나디아를 행복하게 해주고 있는 걸까.”
내가 그걸 어떻게 알아. 존경심이 티끌 하나 남기지 않고 사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