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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수라는 공작에게 시집왔는데-138화 (138/150)

138화

제임스 밀리언은 근위대에 체포되어 독방에 갇혔다. 곧장 감옥에 갇히지 않을 수 있었던 것은 여동생 레이나의 공이었다. 셀리아 황녀는 공작부인을 구한 레이나의 공을 참작해야 한다고 주장했고, 그것이 받아들여진 것이다. 제임스는 정신을 잃은 채로 질질 끌려갔고, 웅성거리는 사람들 틈바구니에 남은 레이나를 챙긴 것은 셀리아였다.

레이나는 부모님의 자랑이자 밀리언 가의 미래가 질질 끌려가는 꼴을 눈도 깜박이지 않고 지켜봤다. 자멸할 줄이야 알았지만 이런 식이라고는 상상하지 못했다. 그 어떤 예상보다 허무하고 초라해서 비웃음도 안 나왔다.

“멍청한 놈.”

제정신이었다면 황녀 앞에서 뱉을 만한 언사가 아니었지만 셀리아는 너그럽게 용서해주었다.

“오라비는 대부분 여동생보다 멍청하지.”

셀리아가 말했다. 레너드가 들었다면 억울했을 발언이지만, 그는 이 자리에 없었다. 레이나는 그제야 셀리아의 존재를 눈치채고 허둥지둥 일어나려 했다. 그러나 다리에 힘이 풀렸는지 자꾸 미끄러지는 그녀에게 셀리아가 손을 내밀었다.

“당신은 스테이턴 부인의 친구지?”

“……아마, 아직은….”

셀리아는 경계 어린 눈으로 제 손을 노려보는 레이나를 비웃었다.

“잡아. 잡고 일어나. 난 나디아의 친구 후보야.”

“……전하께서요…?”

“소문을 들어 아는 모양이네. 헛소문이야.”

“…….”

“내가 퍼뜨렸지.”

어떤 기준에서인지는 모르나, 그 말 직후에 레이나는 셀리아의 손을 잡았다. 그러나 체중을 싣지 않고 제 힘으로 일어났다. 레이나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친구 후보라는 건….”

“반말을 하면 친구가 되어주기로 했어.”

“…영원히 후보로 남겠네요.”

나디아 성격에 황녀에게 감히 반말을 할 수 있을 리가 없다. 셀리아가 웃음을 터뜨렸고, 레이나는 복잡한 표정으로 그녀를 보았다. 레이나는 나디아처럼 소문에 어둡지 않으므로(그나마 나디아가 아는 소문은 죄 레이나가 말해준 것이었다) 황녀에 관한 뒷소문도 어느 정도는 알았다. 유부남이나 약혼녀가 있는 남자, 공략하기 어렵기로 소문난 남자들만 노려 가지고 논다는 이야기였다.

제국에서 가장 아름답다고 칭송받는 황녀는 의외로 깨끗하게 웃으며 말했다.

“스테이턴 부인이 복귀하기 전까지는 내 뒤에 숨어있는 게 좋을 거야.”

“저는 잘못을 저지르지 않았어요.”

“오, 알아. 오해한 모양인데, 근위대에 잡혀갈 거라는 뜻이 아니라 저기….”

황녀의 손가락이 웅성거리는 사람들을 향했다.

“저들에게 붙잡힐 거라고.”

“…….”

“관심사가 다른 사람에게 갈 때까지 기다려. 스테이턴 부인의 복귀를 기다릴 것도 없겠군. 당장 내일이면 충분할 걸. 밤이 지나면 사람들은 너희 남매를 기억도 못할 거야.”

셀리아는 레이나를 브릿 부인에게 부탁했다. 브릿 부인은 아주 어린 시절에나 몇 번 보았던 레이나를 기꺼이 맡아주었다. 그리고 셀리아의 예언은 정확히 적중했다.

24시간도 채 지나기 전에 사람들의 관심은 ‘나름 기대를 받았던 청년의 돌발 범죄’에서 ‘황태자 앞에서 난동을 피운 스테이턴 공작’에게로 넘어갔기 때문이다. 사람의 몰락은 사교계가 사랑하는 주제였지만, 그래 봤자 스테이턴 공작을 이길 수는 없었다.

제임스 밀리언을 제 손으로 처리(“처리는 무슨. 죽이기밖에 더하나?”라고 레너드가 비아냥거렸다.)할 테니 넘겨달라고 난리를 피우는 스테이턴 공작은 포악하고 무례했다.

잘생기면 뭐하나. 성질이 저 지경인데…….

지위가 높고 명문이면 뭐하나, 제어가 안 되는데.

본디 닿지 않는 포도는 신 법이고, 가질 수 없는 보물은 먼지만도 못하다. 사람들은 잠시 잊었던 본분을 금세 되찾았다. 침이 마르고 닳도록 스테이턴 공작을 욕하기 시작한 것이다. 그 과정에서 제임스와 레이나는 완전히 잊히고 말았다.

물론 잊혔다고 해서 없었던 일이 될 수는 없다.

“밀리언 부부는 아들 교육을 잘못 시켰어요. 망나니 손자를 둔 내가 할 말은 아니겠지만 적어도 그 애는 주제파악 정도는 할 줄 아니까. 사실 너무 잘 알아서 탈이지….”

브릿 부인은 부채를 펼쳐 입가를 가렸다. 나디아는 이제 그것이 욕설을 하는 입 모양을 가리기 위한 행동이라는 걸 알았다.

“허황된 꿈을 꾸는 줄은 알았지만 저런 짓을 벌일 줄은…….”

“레이나는 그럼 지금….”

“내가 돌보고 있어요. 그 애를 지금 밀리언 저택에 보냈다간 차마 두 눈 뜨고 못 볼 꼴이 될 테니까. 그 사람이라면 괜히 그 애를 탓할 게 틀림없어, 그렇지 않아도 날 찾아왔던 걸.”

브릿 부인이 눈살을 찌푸렸다.

“물론 셀리아 전하께 부탁받아 돌보고 있으니 넘겨줄 수 없다고 못을 박았지. 레이나의 의사를 존중해 만나게 해주지도 않았어. 네가 거기 있었으면서 말리지 않고 뭘 했냐, 네가 다 뒤집어 썼어야지, 같은 소리나 들었을 걸.”

“…….”

“평생 도움이 안 될 거라 무시했던 딸에게 아들이 구명받은 상황에서도.”

나디아는 밀리언 자작부인의 얼굴을 떠올렸다. 제임스에 대한 자랑은 한정없이 늘어놓던 그녀가 레이나에 대해서는 한 마디도 한 적이 없다는 걸 이제야 알았다. 가장 친한 친구라고 말은 했으면서도 레이나가 나디아를 모르듯, 나디아도 레이나에 대해 잘 몰랐던 것이다. 가족 간 사이가 좋지 않을 수 있다는 걸 나디아는 예전에는 생각도 못했었다.

하지만 이제부터는 다르다. 앞으로는 서로에 대해 더 많이 알아갈 수 있을 것이다. 레이나는 답장을 해줄 테니까.

“?어쨌거나.”

브릿 부인이 분위기를 환기시켰다.

“본인 탓은 하지 말아요. 듣기도 안 좋으니.”

“…네, 알겠습니다.”

“당신은 루크가 제임스를 재판 도중에 빼내서 습격하지 않도록 감시나 해요. 그 애라면 그러고도 남아….”

남편 사랑이 지극한 나디아조차 그럴 리 없다고는 말하지 못했다. 나디아가 어설프게 웃자 브릿 부인이 혀를 내두르며 고개를 저었다.

‘결국 이용하려던 사람만 당한 꼴이로군.’

제임스는 꼴사납게 자멸했고, 셀리아는 제가 휘두르던 소문에 당하고 말았다. 어느 쪽이든 나디아에게는 그 어떤 타격도 주지 못했다. 어떤 의미로든 계산이 통하지 않았으니 열심히 머리를 굴린 쪽은 허무해질 수밖에 없다. 누구보다 허무한 사람은 셀리아일 것이다.

‘아는 건지, 모르는 건지….’

나디아는 보기보다 예민하고 생각이 많았지만 여전히 사람의 음습한 속성에 대해서는 둔감했다. 제가 당한 만큼 돌려주어야 한다는 오기도 없었다. 손가락으로 찌르면 찌르는 대로 푹 구멍이 뚫리는 폭신한 카스테라처럼. 그렇다고 상처가 오래 가지도 않는다. 금세 흔적없이 사라지고 말았다.

레이나와 대화를 나눈 후에 브릿 부인은 나디아보다 오히려 레이나에게 공감했다. 아무것도 돌려주지 않으니 누군가는 억울해지고, 누군가는 만만하게 여기는 것이다. 레이나가 서서히 연락을 끊어 버리기보다, 상처를 주고 절교하는 쪽을 택한 이유를 어렴풋이 알 수 있었다.

중심이 단단하기 때문에 웬만해서는 ‘진짜’ 상처를 받지 않기 때문이다.

나디아를 상처입힐 수 있는 사람은 지극히 적었다. 레이나는 아닌 줄 알았지만 그중 하나였고, 랭커스터 가족들, 이제 루크와 그 주변의 몇몇…….

‘사람들이 싫어하는’ 자신을 혐오한다던 순간에도 나디아는 그 어떤 소문을 두려워한 게 아니라, 그 탓에 사랑하는 사람에게 폐가 되거나 미움을 받을까 봐 겁을 냈다. 상관도 없는 불특정다수의 시선을 의식해서가 아니었다.

‘루크 못지않은 마이페이스 아냐? 사실은….’

브릿 부인의 끈질긴 시선에 나디아가 뺨을 붉혔다. 브릿 부인은 배시시 웃어 버리는 나디아의 미소가 우아하지 못하다고 지적하는 대신, 저도 함께 웃어버리고 말았다.

마이페이스든 뭐든, 역시 망나니에게는 아까웠다.

*

셀리아는 느지막이 검술 대회 관람석으로 향했다.

‘망했어, 다 망했어….’

라 트에빌레가 끝나면 셀리아는 몰브티 왕국으로 출발하기로 되어 있었다. 마지막 축제라 열심히 준비했지만 이제는 모든 의욕을 잃어버렸다. 새로운 디자인의 아름다운 드레스도 흥미롭지 않았고, 뻔한 찬사도 지루했다. 깃털을 다듬은 공작새처럼 미모를 뽐내는 일도 더는 재미가 없었다.

그래 봐야 곧 떠나야 하는데. 작은 왕국에 처박혀서, 잘생기지도 않은 남자를 남편으로 삼아야 하는데 다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

‘웃기지도 않은 연애담이나 달고….’

그나마도 이제는 믿는 사람도 없다. 이걸 불행 중 다행으로 여겨야 할지 셀리아는 혼란스러웠다. 결국 그녀는 무엇에 그토록 열을 올렸단 말인가? 정작 타깃이 됐던 부부는 나란히 셀리아를 안중에도 두지 않았다. 그녀는 언제나 화제의 중심이고 관심의 대상이었지, 이토록 철저하게 논외 취급을 받은 적은 없었다.

소문은 믿는 사람에게만 효과를 발휘한다. 사람은 사회적인 동물이라 타인의 시선을 의식하지 않을 수 없기에, 터무니없는 거짓이라도 믿는 이가 많으면 그것은 쉽게 진실로 탈바꿈했다. 셀리아에게는 그것이 상식이었다.

상식이 통하지 않는 사람을 둘이나 상대하려니, 힘이 빠질 수밖에.

관람석에 앉아있던 레너드가 고개를 돌렸다.

“늦었구나?”

“준비할 게 많거든요. 곧 먼 길을 떠나야 하니까.”

“밀리언 가의 딸을 수습해 브릿 부인에게 맡겼다면서?”

“그대로 둘 수는 없잖아요?”

레너드가 피식 웃었다. 언제부터 오지랖이 넓었다고.

“싫으면 여름까지 늦춰주마.”

“……됐어요. 어차피 늦든 빠르든 갈 거라면 빠른 게 나아요.”

무엇보다 레너드의 동정은 질색이었다.

“겨울에는 움직이기 힘들 텐데.”

“언제부터 저를 그리 걱정하셨다고…….”

“지금부터 해보려고.”

“됐거든요.”

앤더슨처럼 굴어보려고 했지만 실패했다. 친절도 받아주는 사람이 있어야 발휘할 수 있는 거라는 걸 깨달은 레너드가 어깨를 으쓱거렸다.

“다행인 줄 알아. 루크가 어제 난동을 부려준 덕분에….”

“난동 정도인가요?”

자칫하면 때릴 기세던데.

“어쨌거나 스테이턴 공작의 평판이 다시 나빠진 덕분에 네 수작이 묻힌 셈이니까. 아바마마께서도 결국 스테이턴을 완전히 끌어들일 수 없다면 이대로 중심에서 밀어내고, 계속 든든하고 먼 아군으로 남겨두는 게 최선이라고 하셨으니 네게 불이익이 가지는 않을 거란다.”

“……난 뭘 한 건지….”

“스테이턴은 딱 이 거리가 좋다는 데에는 나도 공감해. 사실 난 루크를 수도로 끌어들이고 싶었지만….”

레너드가 혀를 내둘렀다.

“그런 걸 평생 상대할 자신은 없어.”

“무서웠죠?”

“…….”

“겁 먹은 거 다 알아요.”

레너드는 대답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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