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7화
나디아는 그로부터 꼬박 하루가 지난 다음에야 침실 밖으로 나올 수 있었다.
단순히 놀라 기절한 것뿐이라고 아무리 말을 해도-유능한 안나의 보증이 붙어도- 루크는 물론이고, 과보호에 일가견이 있는 랭커스터 전체가 협력해 막아섰기 때문이다. 식구들이 바쁜 한낮에는 감시가 붙지 않을 거라 여기고 침실 문을 열었던 나디아는, 문에 기대어 심드렁한 얼굴로 책을 읽고 있는 피오나와 펠릭스를 발견하고 깜짝 놀랐다.
“거기서 뭐하니, 피오나?”
“보면 몰라요?”
“…알 것 같기는 해….”
피오나는 특유의 시니컬한 표정으로 나디아를 쏘아보고는 혀를 차며 다시 책으로 눈을 내렸다.
“엘릭, 복도에 드러눕지 마. 이모는 들어가.”
“피오나, 답답해서 그런데 잠깐 산책만….”
“펠릭스, 문 밀어.”
“앗, 잠깐만, 펠릭….”
쾅.
펠릭스는 이모의 반항은 들은 척도 하지 않는 훌륭한 아이로 자랐다. 피오나의 머리카락에는 예쁜 공단 리본이 묶여 있었고, 펠릭스가 들고 있는 책에는 금으로 장식된 책갈피가 꽂혀 있었다. 엘릭은 복도를 구르며 새로운 장난감을 가지고 노느라 여념이 없었다. 이모를 향한 사랑보다는 물질에 넘어가버린 조카들이 원망스러웠지만 효과적인 방법이라는 데에는 이견이 없었다. 나디아는 피오나에게 가장 약했지만, 펠릭스와 엘릭에게도 마찬가지로 약했다.
그리고 아이들은 선물 공세에 약했고……. 다수의 경험으로 제이드 앨런과 안나는 그들의 취향을 잘 알았다.
아무리 그래도 아이들을 내세워 감시를 하다니. 나디아는 하릴없이 꾸물꾸물 침대 속으로 기어들어 가야 했다.
갇혀 있는 것도 답답하고 좀이 쑤셨지만 답답함이 더 컸다. 바깥 상황을 알고 싶은데 아무도 알려주지를 않았다. 거창한 죄목을 뒤집어쓰게 된 제임스가 어떻게 되었는지, 레이나가 많이 놀랐을 텐데 괜찮은지, 제임스 때문에 화를 냈다는데 누가 또 루크를 안 좋게 말하고 있지는 않을지……. 하나같이 그런 건 걱정하지 말고 쉬라고 했지만, 신경이 쓰이는데 어떻게 걱정을 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말도 안 돼. 답답하게 해놓고 어떻게 쉬라고. 잠도 너무 많이 자서 더 잘 수도 없는데. 너무해….’
그래놓고 정작 침대에 누워서는 베개에 머리를 기대자마자 잠에 빠졌다. 본래 잠이 많기는 했지만 그간 피로가 누적되었던 탓인지 깨지도 않고 곯아떨어지고 말았다. 안나는 안정제 때문일 거라고 위로해주었지만, 나디아는 자신이 둔감한 사람이 된 것 같아서 살짝 자괴감에 빠졌다.
라 트에빌레는 단 나흘을 남겨놓았고, 나디아는 루크를 어르고 달래 겨우 참석 동의를 얻어냈다.
‘고작 기절한 거잖아. 고작 기절인데 그걸로 루크의 결승전을 놓치다니, 그게 말이나 돼?’
아직 준결승이 남아 있었지만 나디아는 루크가 당연히 결승전에 출전하리라고 확신했다. 남편의 우승을 믿어 의심치 않는 건 너무 팔불출처럼 보일테니 준우승으로 혼자 타협을 봤다.
‘겨우 준결승까지 올라가놓고 영지로 돌아가다니 말도 안 되는 소리….’
루크가 우승하는 모습까지 다 보고, 그를 축하해준 다음에, 그때는 돌아가도 좋았다. 스테이턴 영지에는 식구들에게 보여주고 싶은 것들이 정말 많았다. 하지만 그건 라 먼스트로드에 사는 사람들 모두 루크가 얼마나 강하고, 대단한지 알게 된 다음이다.
나디아는 루크가 제가 얼마나 대단한지 내세우지 않는 사람인 게 참 좋았지만, 때로 답답했다. 얼마나 대단한지 알게 된다면 함부로 말하고 다니는 사람은 없어질 테다. 그는 좀 더 잘났다고 콧대를 세우고 다녀야 했다. 그가 얼마나 강한지, 착한지, 배려가 많은지, 또….
다 알려주지 못할 거라면 차라리 아주 무서운 사람이 되어서, 어느 누구도 함부로 말하지 못하게 만드는 건 어떨까. 누구더러 야만인이래. 나디아는 발코니 아래에서 속닥거리던 사람들의 입을 틀어막거나 찢어버리거나 둘 중 하나는 꼭 해주고 싶었다.
알면 놀라서 입을 틀어막을 테고, 무서우면 입이 찢어질까 무서워서 닫겠지.
“정말 괜찮은 거니? 어지럽거나, 춥거나, 힘들다 싶으면 당장 말해야 해. 알겠니?”
“몇 번을 말해. 그냥 기절한 것뿐이잖아….”
“건강한 사람이 놀랐다고 기절을 해?”
“기절할 수도 있지….”
첫날밤에 딸꾹질하다 기절했다고 실토했어도 믿어주지 않았겠네…. 나디아는 우울하게 생각했다.
결혼식, 재회, 오해를 거치며 아주 살짝 나아졌던 랭커스터의 과보호는 제임스의 습격을 기점으로 완전히 부활했다. 거기에 스테이턴의 과장까지 더해지니 아주 기막힌 시너지를 일으켰다. 나디아는 이러다가 제 발로 한 걸음도 걷지 못할 신세가 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안나, 안나도 말해줘요. 저 진짜 괜찮잖아요.”
“안정제를 약하게 타기는 했지만 약효가 전혀 듣지 않았던 건 이상해요. 안정제 없이 오래 주무신 건 피로 누적 탓이지만….”
“안나?”
괜찮다고 말해줘야지, 그런 의문은 지금 전혀 도움이 되지 않아요…. 믿었던 아군에게 배신을 당한 나디아가 원망스럽게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 안나가 겨우 정신을 차리고 덧붙였다.
“심각하게 아픈 곳은 없는 게 분명하죠, 네.”
“가볍게 아픈 곳도 없어요.”
“그건 모르는 일이죠. 제대로 진료하게 해주지 않으셨잖아요, 부인. 전 의사가 아니랍니다.”
“안나가 제일 믿음직스러워요.”
의사한테 진료받는 게 무서워서 그러는 건 아니고요. 정말 아니에요.
“전 증상에 효과적인 약을 조제해드릴 뿐이에요. 의사가 아니니까 제대로 진료를 받으셔야 해요.”
“예. 다 끝난 다음에요.”
나디아는 집요하게 자신의 얼굴을 살펴보는 안나의 시선을 피해 고개를 기울였다. 일리야만으로도 잔소리는 충분한데, 평소라면 적절하게 끊고 제 편을 들어주었을 안나까지 합세하니 견디기가 힘들었다.
‘내 편이 없어….’
루크를 설득했더니 앤더슨과 일리야가 기다리고, 두 사람을 설득했더니 비비안과 조지가 기다리고, 또 두 사람을 설득했더니 부모님이, 부모님을 설득했더니 이제는 안나가 기다렸다. 끊임없이 이어지는 고리 같았다. 시선을 흘린 방향 끝에 낯익은 사람이 걸렸다. 거리가 꽤 있었지만 틀림없이 눈이 마주쳤다. 그녀가 손을 번쩍 들고 흔들었다.
“브릿 부인!”
일리야가 펄쩍 뛰며 손을 흔들지 말라느니, 갑자기 소리를 지르면 위험(어디가?)하다느니 잔소리를 더했지만 나디아는 듣지 못한 척 브릿 부인을 향했다. 브릿 부인은 불만스럽게 나디아의 뒤를 따라오는 일리야와 안나를 보며 기묘한 표정을 지었지만, 이내 태연하게 나디아의 인사를 받았다.
“안색은 좋아 보이는군요.”
“전 건강해요!”
“글쎄, 루크 그 녀석이 떨었던 호들갑을 보면….”
브릿 부인이 안나를 흘긋 보았다. 안나는 태연한 안색이었다. 그녀가 안심하고 말을 이었다.
“어디 크게 잘못된 게 아닌가 했는데.”
“루크도 랭커스터에게 과보호가 옮았나 봐요….”
나디아가 민망하다는 듯 중얼거렸다. 브릿 부인은 생각만으로도 골치가 아픈 듯 미간을 찡그렸다.
“어제 그 녀석이 벌인 미친 짓을 당신이 보았어야 했는데.”
“루, 루크가 무슨 짓을….”
“황태자 전하께 제임스 밀리언을 내놓으라고 난리를 피웠죠. 하필이면 모두가 보는 앞에서요. 축하해요. 이제 아무도 당신에게 자격 운운하지는 않을 거예요. 라 먼스트로드 사람들은 자신들이 왜 그를 야수 공작이라 부르며 두려워했는지 잊어버리고 있다가 겨우 떠올린 것 같거든요….”
“…….”
겨우 스테이턴의 위엄과 체면을 되찾은 것 같았는데 그것은 한순간의 꿈이고 해변가의 모래성이었다. 브릿 부인의 눈빛이 아련하게 흐려졌다.
‘그동안 사람처럼 보였던 건 전부 이 애가 목줄을 쥐고 있었기 때문이었어.’
그것을 모두가 깨닫기까지는 단 하루면 충분했다.
브릿 부인은 마치 첫 겨울 나들이를 나온 아이처럼 꽁꽁 싸맨 나디아를 잠시 응시했다. 라 먼스트로드의 겨울은 따뜻하니 뭐니, 포근한 날씨 때문에 사람들도 연약해진 거라고 욕할 때는 언제고…. 따뜻한 겨울 바람이라도 쐬면 큰일이라도 나는 양 사람을 아주 꽁꽁 싸매어놨다. 공을 들여 고쳐놓은 자세도 두꺼운 코트에 가려 보이지 않았다.
아니다. 가려서 보이건 말건 상관없었다.
아무도 나디아 마샤 스테이턴에게는 다가가지 못할 테니까.
‘아깝게….’
브릿 부인이 혀를 찼다. 자신을 올려다보는 녹색 눈동자가 순한 강아지처럼 보였던 건 정이 들었기 때문이지만 그래도 스테이턴과의 깊은 인연을 이길 수는 없었다. 하지만 어제의 난장판을 보고서는 회의감이 들고 말았다. 그 망나니 새끼에게는 눈앞의 귀여운 아이는 너무 아깝지 않을까….
다소 무른 감은 있지만 나디아는 노력할 줄 알았고, 자질도 나쁘지 않은데다, 착하고 깊은 배려심을 가졌다. 게다가 기억력이 무척 좋아서, 인사를 나눈 사람들의 얼굴과 이름을 잘 외웠다. 헷갈리는 경우가 가끔 있었지만 외울 생각도 없어 보이는 어떤 망나니에 비하면 아주 우수하지, 우수하고 말고….
그러고 보니 루크가 갑작스럽게 결혼식을 올려 자신을 찾기 전까지 그녀가 그를 어찌해볼 생각도 하지 않았던 건 다 그가 글러먹은 망나니였기 때문이었다. 사람이란 참 간사해서 조금의 희망이 보이고, 번듯해 보인다고 그가 얼마나 심각한 망나니였는지를 홀랑 까먹고 말았다.
“브릿 부인, 죄송해요….”
“……? 뭐라고요?”
나디아가 작지만 분명하게 말했다.
“저 때문에 제임스가….”
“……당신은 피해자 아니었나요?”
“……그렇기는 한데.”
“피해자가 ‘때문’이라고 말하는 건 적절하지 않아요. 당신이 그 애더러 미쳐 날뛰라고 사주했나요?”
“…아뇨….”
“그럼 뭐가 당신 때문이죠?”
“…….”
입을 꾹 다문 얼굴에는 속내가 쓰여 있었다. ‘제가 없었다면 이런 일도 없었을 테니까요.’라고. 브릿 부인이 한숨을 내쉬며 나디아의 손을 잡았다.
“이제 알았어요.”
“네?”
“당신은 스테이턴의 보물이에요….”
“예…?”
“당신이 없으면 스테이턴은 안 돼요. 그렇지, 안나?”
“그렇고 말고요.”
한치의 망설임도 없이 확답이 돌아왔다. 나디아가 쑥스러운 듯이 안나를 보았다가 일리야를 보았다. 어디에 눈을 돌려도 ‘너는 소중한 존재야, 자신을 가져’라는 듯한 얼굴이라 민망함이 배가 되었다.
“제임스는 자신이 저지른 죄만큼의 벌을 받을 거예요. 당신이 없었다고 그 애가 옳은 길을 찾아갔을 거라고는 생각할 수가 없군요. ……부모가 그 지경이었으니 말해 뭐 하겠냐마는.”
브릿 부인이 혀를 찼다.
“레이나, 그 애만 불쌍하게 됐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