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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수라는 공작에게 시집왔는데-136화 (136/150)

136화

이번만큼은 나디아가 반대해도 의견을 굽힐 생각이 없었다. 라 먼스트로드가 지긋지긋했다.

“성급한 결정이십니다, 각하.”

안나는 나디아가 편안하게 잠든 얼굴을 확인했다. 화장을 지우고 잠옷으로 갈아입은 나디아는 간단한 식사를 하고서 잠이 들었다. 단순히 놀라서 기절한 것뿐이라 괜찮다고 말하는 데도 루크는 절대 안정을 외치며 그녀가 침대 밖으로 나오지 못하게 했다. 한 걸음을 뗄라치면 업어안기 일쑤라 물리적으로 반항할 수가 없었다. 나디아는 과보호라고 혀를 내둘렀지만 결국 안나가 내미는 안정제를 얌전히 받아 마셨다. 숙면과 회복을 도와주는 약이었다.

“뭐가?”

“귀환 결정을 말씀드리는 겁니다. 당연히.”

“조금도 성급하지 않아. 오히려 늦은 감이 있지.”

“예정은….”

“애초 목적은 나디아가 가족들을 만나는 것뿐이었어.”

그뿐이었던 방문이 길어지고 만 것은 루크 자신의 결정이었다. 자신을 경계하는 랭커스터와 친밀해지기 위해서는 긴 시간을 투자해야 할 거라 판단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운 좋게도 앙큼한 피오나의 도움으로 예상보다 더 빠르고 순조롭게 가까워질 수 있었다.

‘그대로 돌아갔으면 좋았을 것을.’

가족들과 헤어지는 것을 아쉬워한다면 모두를 스테이턴 성으로 초대하는 방법이 있었다. 당장 돌아가려면 나디아는 또다시 가족들과 헤어져야 하므로 루크는 랭커스터 전원을 스테이턴 성으로 초대했다. 랭커스터 남작이나 앤더슨, 조지는 일이 있는 만큼 오랜 시간을 내지는 못하겠지만 그래도 스테이턴 영지의 좋은 점을 알려주기에는 충분할 것이다.

진작 떠났어야 했다. 진작. 루크는 이를 악물었다.

“스테이턴은 라 먼스트로드와 안 맞아.”

“각하….”

“어지간한 악연이 아니고서는 이럴 수 없지. 부모님도 이겨내지 못했잖나.”

스테이턴은 명줄이 길다. 손이 귀해 자식을 하나, 둘밖에 보지 못했지만 긴 세월 대를 이어올 수 있었던 비결은 오로지 죽여도 죽지 않을 그 질긴 명줄이었다. 예외는 거의 없었다. 수없이 많은 이유로 사람이 죽는 세상에서 스테이턴은 대개 여든을 넘겼다…….

단 하나, 라 먼스트로드에 터를 잡았던 루크의 부모님을 제외하면.

루크는 부모님의 죽음에 대해 크게 생각해본 적이 없었다. 다만 그들이 조부처럼, 선대 스테이턴 가의 사람들처럼 영지 안에 머물렀다면 그런 사고를 당하지는 않으리라 생각해본 적은 있었다. 마차 전복이라니, 스테이턴의 남자들은 체격이 좋고 힘이 세다. 루크의 부친 역시 현재의 그 못지않게 강한 기사였다.

죽음에 그 어떤 의혹도 없었다고는 말할 수 없다. 하지만 조부가 직접 매듭을 지은 사건은 아무런 물증이 남아있지 않았다. 그래 봬도 자식을 지극하게 아꼈던 조부이니, 모자라지 않은 복수를 해주었으리라 짐작할 뿐이었다.

물론 개인적으로도 이 도시가 싫었다. 하지만 스테이턴의 저주가 나디아에게까지 미치는 것이라고 생각하면 견딜 수가 없었다.

자신은 괜찮다. 비정상적으로 튼튼한 몸을 가지고 있으므로 이겨낼 자신이 있었다. 만약 이겨낼 수 없는 상황이 오더라도 상대방의 팔 한두 개는 물어뜯어 줄 수 있다. 그러나 나디아는…….

고작 뒤로 넘어가 떨어지는 것만으로도 죽을 수 있었다.

겨우 매달린 나디아의 팔을 붙잡은 순간 루크는 끔찍한 상상을 하고 말았다. 당연히 그리 두지 않겠지만 이대로 그녀가 땅으로 떨어져 피투성이가 되는 장면이 머릿속을 스치고 지나갔다. 그녀가 떨어지게 둘 리 없지만, 자신이 함께 몸을 던져 받침대가 되어주겠지만, 떠오른 장면을 지울 수도 없었다.

부모님도 이겨내지 못한 스테이턴의 저주를 감당하기에 나디아는 너무 연약했다. 자신과 얽히기 전에는 이 끔찍한 도시에서 23년을 살고도 안전했는데, 그와 결혼하자마자 이런 일이 생긴다는 건.

“나 때문이다. 나디아가 이런 일을 겪은 건. 그러니 어서 떠나버려야 한다. 이딴….”

“…아냐….”

잔뜩 잠긴 목소리였다. 안나도 깜짝 놀라서 뒤를 돌아보았다. 안정제를 마시고 잠들었던 나디아가 그렁그렁 눈물이 고인 눈으로 루크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약 기운이 벌써 가신 것인지 그녀의 녹색 눈동자에는 졸음기라고는 없었다. 그녀가 상체를 일으켜 앉으며 말했다.

“루크 잘못이 아녜요. 제임스가 달려든 건 걔가 이상해져서 그런거지….”

“하지만 지금까지는.”

“지금까지는 내가 제임스 말에 토를 달지 않았으니까요! 걔가 말하는 게 다 맞는 줄 알고, 걔가 말하는 대로 착하게 굴어야 레이나가 날 싫어하지 않을 거라고 생각해서 말을 잘 들었으니까요. 이러면 다른 사람들이 싫어해, 나디아. 내 말을 잘 들어야지, 이건 안 좋은 버릇이야, 네가 이러니까 다들 싫어하지! 그런 말들을 마냥 듣고만 있었으니까!”

역시 그 새끼는 살려둘 수 없다, 고 루크와 안나가 생각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 거리를 두고 보니 제임스 말은 다 틀린 거였어요. 나는 제임스의 말대로 착하게 굴려고 했는데 사람들이 날 좋아하거나 좋게 봐주는 일은 없었고, 레이나도 날 계속 싫어했으니까요. 노력할 필요는 분명 있었지만 제임스가 하던 말과는 달랐어. 그걸 알게 돼서 더 보고 싶지 않다고 말했고, 그래서 걔가 화를 낸 거예요.”

“…보통 사람들은 화가 난다고 무기를 들고 덤벼들지 않습니다.”

안나가 지적했다.

“걔는 보통이 아닌 거겠죠. 어쨌거나 제임스가 그런 건….”

“당신이 화를 냈기 때문이라고 말할 셈은 아니겠지, 내 사랑.”

“……당연히 아니죠.”

화가 난 듯이 굳은 얼굴이라도 ‘내 사랑’에는 두근거렸다. 나디아는 빨갛게 달아오른 뺨으로 부정했다.

“그래도 내가 뿌린 씨앗이고, 내가 가지고 있던 인연이에요. 루크와는 아무 상관이 없어요.”

“내가 당신과 아무 상관이 없다는 말이오?”

“…왜 삐딱하게 들어요. 제임스는 당신과 관계가 없다고요.”

“그 새끼는 당신과 관계가 있지만 나랑은 관계가 없다?”

“아이 참! 내 말이 그게 아닌 거 알잖아요! 속상하게 왜 이래요!”

듣다 못한 나디아가 왈칵 성질을 부렸다. 그렁그렁 맺혀 있던 눈물도 짜증 때문인지 쏙 들어갔다. 다 알아들었으면서도 심술을 부리며 시치미를 떼는 루크가 얄미웠다. 나디아는 그를 노려보며 이불을 당겨 입가를 가렸다.

루크가 나디아의 옆에 앉았다. 나디아의 몸이 그에게로 기울었다.

“난 당신의 모든 것과 관련되어 있소.”

“…알아요, 나도 그래요. 하지만 제임스가 그런…… 그런 건 당신 탓이 아니에요. 내가 말하려던 건 이거예요.”

“…….”

나디아가 팔을 벌려 그의 머리를 끌어안았다.

“라 먼스트로드를 이렇게 싫어하는 줄 진작 알았다면, 다른 방법을 생각해보자고 했을 거예요……. 미안….”

“…당신이 사과할 일은 없소, 나디아.”

“미안해요, 루크. 내가 고집을 부리는 바람에 괴로운 생각을 하게 했어….”

“……그게 아니오, 나디아. 나는 정말….”

“루크, 바보. 그냥 안겨 있으면 돼요. 내가 안아주고 싶어서 안는 거니까.”

그리고는 마치 동물의 등을 쓰다듬듯이 상냥하게 머리칼을 쓸었다.

아내의 품에 안겨서 꼼짝도 못하는 꼴이라니. 안나는 쓰게 웃었다.

루크는 자신도 모르게 말한 것이겠으나 그가 라 먼스트로드를 싫어하는 이유 중 한두 가지는 분명 부모의 죽음도 있었다. 나디아가 생각하는 것처럼 트라우마씩이나 된 것은 아니어도 분명 마음속 깊은 곳에는 흉터가 남았다. 조부와 안나가 틈 없이 채워주었다고 해도 부모의 그림자는 크다. 부모를 허무하게 잃어버린 도시를 사랑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겠지만.

“몰랐습니다, 각하.”

“…안나, 아직 있었나?”

“각하께서 트라우마 때문에 이토록 힘들어하고 계셨는지….”

“안나, 너까지. 아니라는 걸 알지 않나.”

“부인께서 이렇게까지 말씀해주시니 저도 고집을 부릴 수가 없군요. 안타깝지만 힘들어하시는 각하를 위해 채비를 서두르도록 하지요.”

“아니라고….”

루크가 이를 악물었다. 그를 품에 안고 머리칼을 쓰다듬던 나디아가 거리를 벌려 얼굴을 들여다보았다.

“나디아, 난 정말 트라우마 같은 건 없소. 말했다시피 옛날 일이오.”

“부인, 정말 죄송하지만 라 트에빌레는 중도에 포기할 수밖에 없을 것 같군요. 불행히도 부인께서 쓰러지신 후 밀리언 씨를 발로 걷어차고?.”

나디아가 숨을 들이켜며 루크를 보았다. 정말 그랬어요, 루크? 루크는 떨떠름하게 입을 다물었다. 안나가 자신을 몰아가는 줄 뻔히 알면서도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무시무시하게 화를 내시며 소리를 지르시는 바람에, 없어질 뻔했던 ‘야수 공작’의 소문이 다시 퍼지겠지만.”

“…루크….”

“모두 어쩔 수 없는 일이지요. 각하께서 힘드시다는데 어쩌겠어요.”

“…….”

나디아의 눈동자가 가늘게 떨렸다. 루크에 대한 소문이 나빠지는 것은 싫지만, 그가 이 도시에 머물기가 힘들다는데 강요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여러 가지 일을 겪고 나니 이제 소문 따위 어떻게 나든 그게 무슨 상관이냐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중요한 것은 진실이고, 주변 사람들이 휘둘리지 않는 것이다. 평판이 좋으면야 좋겠지만 그렇지 못하다고 해도 무리해가며 노력할 일은 아니었다.

때로는 질투와 욕심으로 터무니없는 말이 만들어지기도 한다는 걸 이제는 아니까.

나디아가 부드럽게 루크의 뺨을 어루만졌다.

“미안해요, 루크. 당장 돌아가요, 우리.”

“아니, 그러지 않겠소.”

“……무리하지 않아도 돼요. 오기 부리지 않아도….”

“마음이 바뀌었소. 아직 처리해야 할 일들도 많이 남았고.”

일단 제임스 밀리언을 제 손으로 처리해야만 했다. 루크가 태도를 바꾸자 나디아는 걱정스럽게 그를 보았고, 안나는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싱긋 웃었다.

“정말 무리하지 않아도 된다니까요. 당신보다 중요한 건 없….”

“자는 게 좋겠소, 나디아.”

“안 졸린데….”

그러나 나디아는 얌전히 베개 위에 머리를 누였다. 루크가 깊은 한숨을 쉬며 그녀의 머리칼을 정리해주는 동안, 나디아는 그의 어깨 너머로 안나와 시선을 마주쳤다.

나디아가 씩 웃었다. 안나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가, 이내 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스테이턴 부인은 제 남편을 다루는 방법을 완벽히 숙지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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