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5화
21. 사랑스러워
다 너 때문이야, 멍청한 나디아 마샤 랭커스터.
너 때문에 다 망쳤어!
눈을 번들거리는 제임스는 한 번도 본 적 없는 얼굴을 하고 있었다. 비명을 지르기도 전에 몸이 뒤로 기울었다. 다리를 무겁게 휘감은 치맛자락 탓에 움직일 수가 없었다. 눈앞을 가로막는 레이나의 뒷모습을 보고 저도 모르게 그녀를 밀어냈다. 제임스는 피에 젖은 손으로 깨진 유리조각을 쥐고 있었으며, 여동생조차 눈에 들어오지 않는 것 같았다. 무서웠다. 낯선 제임스의 얼굴에 가득한 살의와 원망이.
자신을 붙잡은 레이나의 팔은 가냘프고 연약해서 금방이라도 떨어질 것만 같았다. 어깻죽지가 빠질 듯이 아팠다. 무섭고 아프다. 올려다본 레이나의 얼굴이 고통으로 일그러져 있었다. 제 무게를 저 팔 하나로 감당하고 있을 그녀도 아플 테다. 그럼에도 제 손을 붙잡은 레이나의 손은 믿을 수 없는 힘으로 바들바들 떨렸다. 절대 놓지 않겠다는 듯이.
치맛자락 사이로 보이는 땅이 꺼멓고 아득했다. 이대로 떨어지면 죽고 말 것이다. 왜? 내가 왜 죽어야 해. 왜 내가 제임스에게 저런 말을 들어야 해? 내가 뭘 잘못했지? 나디아는 억울했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제임스는 자신을 원망할 수 없었다.
그러면 안 돼, 나디아. 그러면 모두가 널 싫어할 거야. 어린애 같구나. 귀엽지만 이제 우리는 어린애가 아니잖아. 다른 사람 앞에서는 이러지 않도록 해. 그건 나쁜 버릇이니 고쳐야지. ……부끄러운 줄 알아, 나디아.
부끄러운 줄 알라고, 제임스가 말했다. 나디아는 친구들에게 부끄럽지 않은 사람이 되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제임스의 말대로 따르지 않으면 다른 사람들이, 레이나도 자신을 싫어할 것 같았다. 레이나가 점점 멀어지고 있다는 걸 느꼈기 때문인지 모른다. 레이나의 오빠인 제임스의 말대로 따르면 레이나가 다시 자신을 좋아해 줄 거라고 여겼던 것일지도 모른다.
나디아는 제임스가 말하는 대로 따르려고 최선을 다했다. 다른 사람이 싫어할 만한 짓을 하지 않으려고 했고, 부끄러운 모습을 보이지 않으려고 감추었다. 적어도 결혼하기 전까지는 제임스의 심기를 거스르지 않으려 했었다. 제임스에게 원망을 받을 만한 짓은 그 무엇도 하지 않았다.
왜 다 내 탓이야. 나디아는 제게서 문제를 찾지 않았다. 찾고 싶지 않았다. 제임스의 일방적인 원한까지 떠안을 수는 없었다. 이제는 그러고 싶지 않았다.
-이제 제임스 말은 듣지도 않는다더니, 겨우 걔가 멍청하다는 걸 깨달았나 해서.
레이나가 말했다. 걔가 멍청하다는 걸……. 레이나와 제임스는 서로를 헐뜯으며 싸우지는 않았지만 랭커스터 남매처럼 애틋한 사이도 아니었다. 남을 보는 것처럼 데면데면했다. 당연히 남매이니 사이가 좋을 거라고 생각했던 게 착각이었던 거다. 나디아의 세상에서는 가족들 간 사이가 좋은 게 당연했기 때문이다. 제임스가 레이나에 대해 잘 알 거라고 생각했던 게 우스웠다.
제임스는 아무것도 몰랐다. 레이나에 대해서도, 나디아에 대해서도…… 자기자신에 대해서도.
다 너 때문이야.
아니야, 내 탓이 아니야.
멍청한 나디아 마샤 랭커스터.
멍청한 건 너야, 제임스 밀리언…….
나디아는 이를 악물었다. 자신을 향해 달려드는 제임스를 피하려고 뒤로 물러나서는 안 됐다. 억울했다. 도망칠 게 아니라, 번들거리는 그 눈을 찔러주었어야 했다. 엇나간 원망으로 일그러진 그 얼굴을 힘껏 때려주었어야 했다. 다른 사람을 때리고 싶다는 충동에 휩싸인 건 처음이었다.
손바닥이 아니라 주먹으로, 힘껏, 이렇게…….
퍽 소리가 났다.
“……?!”
나디아가 눈을 반짝 떴다. 손에 무언가 닿은 감각이 분명했다. 뭐지? 뭐가 닿은 거….
“……일어났소?”
“루크!?”
말아쥔 주먹이 루크의 손에 닿아 있었다. 나디아가 당황하며 손을 거두려고 했지만 루크가 꽉 쥔 채라 그럴 수 없었다. 루크는 나디아의 손을 끌어당겨 입술로 가져갔다. 손등에 도장을 찍듯이 꾹 입술을 눌렀다. 부드럽고 따뜻한 피부의 감촉. 제 손을 감싸쥔 거친 손바닥의 익숙한 체온이 남아있던 긴장감을 몰아냈다. 나디아는 어깨와 목에서 힘을 풀고 베개에 머리를 묻었다.
커튼 사이로 어슴푸레 밝아오는 하늘이 보였다. 새벽이 밝은 모양이다. 나디아는 루크를 보았다. 손등에 입술을 누른 루크는 그대로 굳어버리기라도 한 듯이 한참이나 움직이지 않았다. 나디아 역시 긴장이 풀려 그런지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았다. 앗, 나 화장도 안 지우고 자고 있었던 걸까. 피부 안 좋아지는데…. 다른 사람 이야기처럼 느긋한 감상이 흘러갔다.
한참 뒤에야 루크가 입을 열었다.
“악몽이라도 꾼 거요?”
“…아뇨….”
솔직하게 말해도 될까, 잠시 망설이던 나디아가 이내 걱정을 떨쳐냈다. 루크에게는 아무것도 숨기고 싶지 않았다.
“제임스를 때려주는 꿈을 꿨어요.”
“고작 이걸로?”
루크는 제 손 안에 쏙 들어오는 나디아의 주먹을 내려다보았다. 제법 다부지게 쥐기는 했지만 작고 연약해 보였다. 희고 부드러운 피부는 잘못 스치기만 해도 쉽게 상처가 날 것이다. 그가 마뜩찮게 미간을 찌푸리자 나디아가 항의했다.
“루크에 비하면야 형편없겠죠. 그래도 맞으면 아플 거라고요.”
“아프진 않던데.”
“악, 그러고 보니 아까 때렸잖아요! 괜찮아요?!”
“아프지 않았다니까. 당신 주먹을 쓸 정도라면 차라리 내가 대신 때려주겠소.”
“…….”
마치 이 주먹과 자신의 주먹은 똑같은 것이라는 양 말하는 루크가 어이없었다. 얼핏 보아도 크기가 제 두 배는 된다. 크기만이 아니라 힘도 다를 것이다. 제 주먹으로 맞으면 아프기만 하고 말 테지만, 그의 주먹으로 맞으면 분명 단순한 고통으로는 끝나지 않는다. 틀림없이 부상으로 이어질 것이다. 그것도 한 대로 끝났을 경우의 이야기였다.
“응? 어떻소?”
“……루크가 때렸다가는 제임스는 뼈가 부러질 걸요….”
“설마. 그래 봬도 남자니 뼈는 튼튼할 거요.”
“제임스가 다치기라도 했다가는 밀리언 부인께서 가만히 있지 않으실 걸요. 아, 제임스의 어머니요. 우리 어머니와 친하시거든요. 얼마나 말이 많으신지, 한 번 수다를 시작하면 끊을 수가 없어요.”
“가만히 있지 않아도 이번에는 어쩔 수가 없을 거요.”
밀리언 부인의 수다가 얼마나 끔찍한지 떠올리며 진저리를 치던 나디아가 눈을 천천히 깜박거렸다. 평화롭던 분위기와 어울리지 않게 루크의 목소리가 싸늘했다. 어둡게 가라앉은 눈동자가 매섭다. 나디아는 덜컥 겁이 났다. 제게 맞추어 농담을 해주고 있었지만 그는 그녀가 깨어나기 전부터 무척 화가 나 있었던 것이다.
“루크, 화….”
“화가 났냐고?”
“어, 아니, 음….”
화가 났느냐고, 당연한 걸 묻느냐는 듯이 루크가 강한 어조로 되묻자 나디아는 말문이 막혔다. 화가 안 났을 리는 없었다. 나디아 자신도 루크가 위험할 뻔했다면 그 원흉에게 당연히 화가 났을 것이다. 그러니까 당연한 질문이었지만, 나디아는 재차 묻지 않을 수가 없었다.
“……제임스는 무사한 거죠?”
“…….”
“살아있죠……?”
“…….”
루크가 인상을 확 찡그렸다. 나디아 앞에서 그가 인상을 쓰는 일은 거의 없다. 나디아는 그가 무섭게 인상을 쓴 얼굴을 처음 보았지만, 겁이 나지는 않았다. 그보다 제임스가 죽었을까 봐 걱정이 됐다. 제임스 자체가 걱정이 되는 건 아니었다. 하지만 제임스는 그래도 레이나의 오빠이고, 어머니의 친구인 밀리언 부인의 아들이며, 브릿 후작 부인의 먼 친척이었다. 루크가 끝까지 대답하지 않자 나디아는 초조해졌다.
“아니죠? 무사한 거죠? 설마 죽, 죽인, 아니죠? 걔가 그래도 귀족인데, 결투도 아닌데 죽이면 어떻게 해요! 아무리 신분이 높아도 살인죄는?.”
“대체 날 뭘로 보는 거요. 살아는 있소.”
“…휴….”
나디아가 진심으로 안도한 듯해 루크는 다소 빈정이 상했다.
“당신을 죽이려고 했던 새끼라도 걱정해주는 거요?”
“누가 걜 걱정한대요? 저 그렇게까지 바보는 아니에요. 내가 걱정한 건 괜히 걔 때문에 루크가 손해 보는 거였단 말이에요. 걔 때문에 그 어떤 손해도 당해서는 안 되니까. 그건 너무 억울하잖아.”
“……살아는 있는데, 발로 걷어차 주긴 했소. 그러니 당신 주먹은 아껴놔도 좋아.”
루크가 옅게 웃으며 손등에 입을 맞췄다. 이러다 손등 피부 닳겠다……. 나디아는 루크가 가볍게 언급하고 지나간 ‘발로 걷어찬 상처’가 결코 얕지 않으리라 확신했다. 제임스는 건장한 체격을 가지고 있었지만 루크에 비하면 종잇장처럼 얇았다. 힘도, 체격도 비교가 되지 않는다. 루크에게 익숙해져 제임스를 재회한 직후 왜소하다고까지 느끼지 않았나. 그러나 왜 때렸냐고 따질 입장도 아니었다. 그는 자신 때문에 화를 낸 거고, 자신 또한 그를 때려주고 싶다고 말한 상황이었다. 어딜 맞았든 분명 뼈는 부러졌겠지…….
“하지만 제임스 밀리언은 여러 사람이 지켜보는 가운데 공작 부인을 살해 시도한 범죄자요. 황태자도, 황녀도 목격했지. 아무 일 없이 넘어갈 수는 없을 거요.”
“살해 시도…?!”
“무기도 들고 있었고, 정확히 당신을 향해 달려들었잖소.”
“그건? 그렇지만….”
“당신이 착한 건 알고 있지만.”
“…….”
“이번만큼은 동정심을 발휘하지 않길 바라오. 그는 지은 죄에 응당한 벌을 받아야 해.”
동정심 따위는 없었다. 제게 향했던 살의를 나디아는 분명히 느꼈다. 애먼 자신을 원망하는 그에게 한 방 먹여주고 싶은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제임스가 죽거나 무너지는 꼴을 보고 싶었던 건 아니었다. 나디아는 머뭇거리다 입을 다물었다. 살해 시도는 분명 엄벌로 다스려야 할 중죄였다. 목격자도 너무 많았다. 제임스가 예뻐서 봐주자는 건 아닌데, 내버려 두기에는 마음에 걸린다. 복잡한 표정이 어린 나디아의 뺨에 루크가 입을 맞추었다. 그가 말했다.
“당장 이 얘기는 됐소. 당신은 푹 쉬도록 해.”
“……응.”
“당신이 몸을 추스르고 나면 돌아갈 준비를 하겠소. 랭커스터도 다 같이 갈 거요.”
“네? 돌아갈 준비요?”
어디로?! 나디아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루크는 전에 없이 단호한 목소리로 말했다.
“스테이턴 성으로 돌아갈 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