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4화
등으로 유리창을 깨부수며 굴러 들어온 제임스는 요란한 소리만큼이나 처참한 몰골이었다. 쓰러진 채 배를 감싸고 몸을 웅크렸던 그는 제 주변에 흩어진 유리조각을 발견했는지 소스라치게 놀라며 벌떡 일어났다.
생각한 대로 벌떡 일어날 수 있었다면 좋았으련만, 안타깝게도 제임스는 비틀거리며 넘어지고 말았다. 다리에 힘이 풀려 제자리에 주저앉은 그의 머리 위로 낮은 목소리가 떨어졌다.
“그러게 비키랄 때 비켰어야지.”
“이게 무슨, 야만적인?.”
루크는 비식 웃으며 보란듯이 귀를 후비적거렸다. 그리고 제임스를 내려다보았다.
“어차피 난 야만인이라 그런 말은 들어봤자 간지럽지도 않아.”
“공작이나 되시는 분께서 다짜고짜 폭력이라니!”
“비키라고 세 번은 말하지 않았나. 경고를 알아듣지 못하고 버틴 건 너다.”
그렇지 않느냐고, 루크는 동의를 구하듯 옆을 보았다. 그를 따라 시선을 옮긴 제임스의 안색이 희게 질렸다. 루크의 옆에는 황태자 레너드와 황녀 셀리아가 서 있었다. 그들 뿐만이 아니었다. 인적이 드물었던 발코니 근처로 무도회를 즐기던 사람들이 모여들고 있었다.
“라 먼스트로드에서는 말을 알아듣지 못하는 사람을 어떻게 상대합니까?”
“글쎄, 난 말이 통하지 않는 멍청이와는 대화를 나눠본 적이 없어서. 셀리아, 알고 있나?”
“세 번이나 반복해 말해주어도 알아듣지 못하는 게 사람인가요?”
“문화가 달라 사용하는 언어가 다른 경우라면 그럴 수 있지.”
상대하는 방법을 안다, 모른다를 떠나 말을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을 사람으로 취급해야 하느냐는 질문이 돌아왔다.
“지켜보았던 바, 스테이턴 공작은 끈기있고 정중하게 비켜달라 청했어요. 그걸 알아듣지 못하고 무시한 건 저 신사분이었죠. 말이 통하지 않아 몸으로 밀어냈다고 해도 문제는 없을 것 같군요. 뭐, 스테이턴 공작이 다소 크고 튼튼했고, 저 신사분이 지나치게 왜소해 요란하게 밀려나고 말았지만.”
“밀다뇨! 전하, 각하께서는 저를 발로 걷어차셨습니다!”
“어머, 이걸 어쩌면 좋죠. 전 거기까진 못 봤어요.”
“여기, 여기에 분명 구둣자국이….”
“글쎄, 안 보이네요.”
셀리아는 비죽 입꼬리를 올렸다. 무릎을 꿇은 제임스가 다급한 눈으로 주변을 둘러보았다. 그의 재킷에는 선명한 발자국이 찍혀 있었지만 그와 눈을 맞춰주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를 위해 목소리를 내어주는 사람도 없었다. 레너드가 말했다.
“누군가 그대에게 야만적이라 모욕한 건 들었는데, 루크.”
“그게 모욕입니까?”
“그렇다고 칭찬은 아니잖나.”
나디아에게도 말했지만 루크는 고작 그런 걸 모욕이라 받아들이지는 않았다. 야만적이라는 말 자체가 아니라 그와 스테이턴을 까내리려는 의도가 기분 나쁜 것이었다. 얼마나 안온하고 평화로운 삶을 살면 고작 야만적이라는 표현을 욕이라고 하는 건지. 애초에 야만적인 게 뭐가 나쁘다는 건지도 모르겠다.
“전, 전하, 그, 그 말씀은….”
제임스가 뻐끔거리며 입술을 열었다 닫았다. 레너드의 무감한 눈길이 그에게 닿았다가 순식간에 떨어졌다. 협박처럼 꺼낸 모욕 발언을 파고 들어가지 않으리란 뜻이었다. 그럴 만큼 제임스에게 신경을 쓸 가치도 없다는 뜻이기도 했다.
“루크?”
“나디아, 놀라게 해 미안하오. 평화적으로 해결해보려 노력은 했는데.”
“놀라지는 않았어요. 아니, 놀라기는 했는데….”
“잠깐, 유리조각이 떨어져 있소. 내가 갈 테니 거기서 기다려요.”
“구두 신고 있는데….”
레너드만이 아니었다. 루크도, 나디아도 바닥을 구른 제임스에게 신경을 쓰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제임스는 주변을 둘러보았다. 황태자와 황녀, 그토록 닿고 싶었던 ‘다른 세상’을 사는 사람들이 그의 눈앞에 서 있었다. 그러나 제임스가 꿈꿔왔던 것처럼 그는 그들과 나란히 서 있지 않았다. 배를 걷어차여 바닥을 구르고, 무릎을 꿇은 채로 주저앉아 있었다.
의식하지 못했던 시선들이 무겁게 어깨를 짓눌렀다. 제임스는 자신을 둘러싼 사람들 가운데 몇몇 낯익은 얼굴들을 보았다. 밀리언 자작가와 긴밀한 관계를 맺고 있던 사람들, 브릿 후작 부인의 심부름으로 알게 된 사람들……. 싹싹하고 영리한 청년을 알게 돼 기쁘다고 말했던 사람들은 그와 눈도 마주쳐주지 않았다.
오히려 경악과 경멸이 담긴 얼굴. 제정신이 아니라고, 어떻게 저런 짓을 벌일 수가 있느냐고.
제임스의 뺨이 후들후들 떨렸다. 자신이 무얼 잘못했나. 왜 아무도, 폭력을 가한 스테이턴 공작에게는 아무런 비난도 하지 않지? 이것이야말로 신분의 차이다. 부당한 차별이었다!
‘내가 왜 이런 꼴을 당해야 해?!’
순조로운 인생이었다. 위로 올라가기에 부족함 없는 인재로, 계기만 있으면 얼마든지 날아오를 수 있는 사람. 영리하고, 사교성이 좋고, 찾는 사람이 많은……. 대부분의 열등한 인간들과 다르게 우수한 인간.
그런데 왜 이런 꼴이 되었나. 어디서부터 무엇이 잘못되었나.
시간이 멈춘 듯한 감각 속에서 제임스는 기억을 거슬러 올라갔다. 언제부터였지. 스테이턴 공작과 결혼한 나디아가 웃으며 브릿 후작저택에 있는 걸 발견했을 때, 스테이턴 공작과 셀리아 황녀의 스캔들을 처음 들었을 때, 브릿 후작 부인이 “이제 적당한 구실도 다 떨어졌으니 지금까지 엮어준 사람들 중에 만족할 만한 인연을 찾도록 하라.”고 말했을 때….
나디아. 제임스가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나디아는 제임스를 보지도 않고 앞만 바라보고 있었다. 그녀의 옆에는 레이나가 겁을 먹은 얼굴로 그를 쳐다보고 있었다.
뭐라고 그랬더라. 두 번 다시 안 봤으면 좋겠다. 안 봤으면 좋겠다고. 감히 네까짓 게 나에게. 그는 이를 사리물었다. 어렸을 때부터 늦되고 모자라 그가 챙겨주지 않으면 한 사람 몫도 제대로 해내지 못할 아이였다. 그는 호의를 베풀어 나디아를 올바른 길로 이끌어주고자 했다. 아무것도 모르는 무지가 부끄러우니 친절하게 충고해주어 조금이라도 나은 사람이 될 수 있게 해주려고 말이다.
‘그렇게 호의를 베풀었는데 네가 날, 쓰레기 취급해?’
이건 다 나디아 마샤 랭커스터 탓이다. 제임스는 주먹을 움켜쥐었다.
네가 주제도 모르고 그곳에 있어서. 순순히 제 처지를 파악하고 내 옆으로 내려왔으면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 널 빌미로 내가 날아오르게 도와주기만 했으면, 적어도 레이나에게 설득되어 지금이라도 깨달았다면? 이건 전부 나디아 마샤 랭커스터가 모자라고 멍청하기 때문에 일어난 일이었다.
“…때문에….”
제임스가 작게 중얼거렸다. 그의 목소리를 들은 사람은 레이나뿐이었다. 제임스가 이상하다는 걸 눈치챈 레이나가 미간을 찌푸리며 그에게 다가가려 했다. 그 순간 제임스가 비틀거리며 일어났다.
“제임스, 괜찮….”
“너 때문이야, 멍청한 나디아 마샤 랭커스터!”
레이나를 무시하고 일어난 제임스가 순식간에 나디아를 향해 달려들었다. 그의 손에는 손바닥만 한 유리조각이 들려 있었다. 레이나가 비명을 지르며 저도 모르게 나디아의 앞을 가로막았다.
“으아아!”
“꺄악!”
레이나가 나디아의 앞을 가로막는 것과, 나디아가 레이나를 밀어버린 것, 그리고 루크가 제임스를 발견하고 몸을 날린 것은 거의 동시였다.
제임스는 나디아에게 닿지 못하고 루크에게 발목을 잡혔다. 그러나 이미 발코니 끝까지 물러나 있던 레이나와 나디아는 놀라 뒷걸음질을 치고 있었다. 심지어 레이나를 밀어버린 반동으로 나디아의 몸은 뒤로 기울고 있었다. 나디아가 손을 허우적거리며 중심을 잡으려 했지만 이미 늦었다. 레이나가 손을 뻗었다.
“안 돼, 나디아!”
“제기랄!”
유리조각이 흩어진 바닥에 몸을 날려 제임스의 발목을 붙잡은 루크가 욕설을 뱉으며 빠르게 몸을 일으켰다. 뒤로 넘어가는 나디아를 레이나가 겨우 붙잡았지만, 한 사람의 무게를 레이나가 혼자 감당하기는 무리였다. 결국 레이나까지 밑으로 떨어지기 일보 직전의 상황.
“나디아!”
루크가 팔을 뻗어 나디아의 팔을 잡았다. 한쪽 팔이었지만 붙잡았으니 떨어뜨리지 않을 것이다. 나디아는 겁을 먹었는지 희게 질려서는 위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루크가 제 옆에 서서 난간에 매달린 레이나에게 소리쳤다.
“비켜, 방해만 된다!”
“싫, 싫어….”
“제기랄, 고집부릴 때가 아니야!”
“싫어! 안 놓을 거야! 못 놔! 떨어진단 말이야!”
레이나가 방해되어 힘을 쓰기에는 더 불편한 상황이었지만 그녀는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는 듯이 눈을 감고 악을 질렀다. 더는 지체할 수 없었다. 한쪽 팔만 당겨서는 아플 텐데, 어쩔 수 없었다. 루크는 이를 악물고 나디아를 끌어올렸다.
거짓말처럼 쑤욱 올라온 나디아가 바로 손을 뻗어 루크의 목을 끌어안았다. 레이나는 여전히 벌벌 떨면서도 나디아의 손을 놓지 않았다.
“루, 루크….”
“나디아?!”
발이 땅에 닿지 않는 공포. 무도회가 열린 황궁의 홀은 지대가 높았고, 떨어졌다면 그대로 죽을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루크의 품에 안기자 그제야 안도와 공포가 몰려왔다. 나디아는 제 손을 붙잡은 레이나와, 저만큼 더 희게 질린 루크의 얼굴을 보며 눈을 감았다. 한계까지 몰렸던 신경이 뚝 끊겼다.
축 늘어진 나디아의 몸을 루크가 끌어안았다. 그는 무사한 나디아와 그녀의 팔을 잡은 레이나, 그리고 얼굴부터 넘어져 아직 쓰러진 채로 누워있는 제임스를 순서대로 응시했다.
“저 빌어먹을 새끼….”
“저건 우리가 가둬둘테니 우선 의사에게 데려가.”
당장 죽여도 모자랄 저 새끼 때문에 나디아가 죽을 뻔했다. 이를 악무는 그를 셀리아가 만류했다. 그녀 역시 놀라서 예의상의 존대도 잊어버리고 있었다.
“내가 죽인다.”
“알았어, 네 먹이 안 건드려.”
루크는 욕을 삼키고 나디아를 안아올렸다. 셀리아의 말처럼 나디아가 우선이었다. 저 빌어먹을 새끼는 어디로 도망갈 수도 없고, 도망간다고 해도 지옥 끝까지 쫓아갈 테니 당장 급한 문제는 아니었다.
그러나 부글거리는 울분을 당장 어쩌지 못해서, 루크는 성큼성큼 걸어가는 와중에 엎드린 제임스의 다리를 세게 걷어찼다. 퍽 소리가 났지만 제임스는 신음만 낼 뿐, 일어나지는 않았다.
“자, 그럼…….”
셀리아는 한숨을 쉬었다. 저 남자는 말하지 않아도 레너드가 근위병을 시켜 가둬둘 테니 신경쓰지 않아도 좋았다. 그녀는 난간에 기대어 주저앉은 채로 바들바들 떠는 레이나에게 시선을 주었다.
‘저것도 잘 챙겨놔야겠지.’
나디아의 ‘친구’인 모양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