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3화
레이나는 몇 번이나 상상해보았다. 사랑스러워 죽겠다는 듯이 꿀이 뚝뚝 떨어지는 눈으로 바라봐주는 가족들이 있다면 무엇이든 못할 일이 없었을 텐데. 얼마나 행복할까. 하루하루 구름 위를 걷는 기분이 아닐까.
“내가…….”
나디아가 고개를 들었다. 물기 없는 녹색 눈동자가 똑바로 레이나의 얼굴을 향했다.
“내가 불행해지길 바랐어?”
“응.”
질투가 자라날수록 나디아를 보는 것이 더욱 괴로워졌다. 자신이 가지고 싶은 모든 것을 가지고 있는 주제에 얼마나 행복한 줄도 모르는 그녀가 얼마나 보기 싫었는지 모른다. 이따금 네가 부럽다느니, 너처럼 되고 싶다느니 말하는 꼴을 보고 있노라면 배알이 뒤틀려 견딜 수가 없었다.
나디아 마샤 랭커스터가 되고 싶었다. 그녀가 가진 모든 것이 탐이 나고 부러웠다.
“…그랬구나….”
나디아는 조용히 중얼거리며 시선을 내렸다. 레이나가 미간을 찌푸렸다.
“그게 다야?”
“으응?”
“그랬구나, 그게 전부냐고.”
“그야…….”
“너는 화도 안 나? 아니면 화를 낼 가치도 없다는 거야?”
“그게 무슨….”
레이나가 무슨 소리를 하고 있는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친구가 사실은 자신을 싫어했고, 불행해지길 바랐다는데 더 무슨 말을 할 수 있다는 말인가. 화가 나지 않느냐니……. 나디아는 입술을 깨물었다. 목구멍 아래에서 요동치는 감정은 심장을 거칠게 할퀴며 날뛰었다. 마구 소리를 지르고 싶기도 하고 엉엉 울고 싶기도 했다. 하지만 끝내 눈물은 나오지 않았다.
세상이 끝난 것처럼 슬프고 절망스러웠다. 사실은 자신을 싫어했는데 그걸 조금도 눈치채지 못한 스스로가 멍청해서, 그리고….
“끈질기게 편지를 보내길래 보러 와 줬더니.”
“…편지, 받았어?”
“받았어. 읽지는 않았지만. 네가 보내는 편지야 뻔하지. 인사 같지 않은 인사만 길게 늘어놓고서 정작 하고 싶은 말은 하지도 못했을 거야, 안 그래?”
“…….”
“그런 걸 내가 왜 읽어야 해.”
레이나가 나디아에게 한 발 앞으로 다가갔다.
“할 말 있으면 지금 해. 얼굴 보고 하라고. 내용 없는 편지를 계속 받는 것도 성가시니까, 할 말이 있는 것 같아서 들으러 온 거야.”
“…….”
“제임스 말대로 불행해졌다면 더 좋았겠지만.”
“…내가, 뭘 잘못했어?”
어렸을 때에는 아무 문제가 없었던 것 같다. 함께 정원에서 뛰어놀다 간식을 먹고, 낮잠을 잘 때에는 분명 즐겁고 행복했다. 빠르게 뛰어가던 레이나가 뒤처진 나디아를 위해 돌아와주고, 손재주가 좋은 나디아가 레이나의 머리에 화관을 만들어주었을 때에는 분명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
대체 언제부터 자신을 싫어했는지, 자신이 무얼 잘못했는지…. 나디아가 주먹을 꽉 움켜쥐었다.
“내가, 싫었으면, 말해줬으면 좋았잖아. 이런 점이 싫다고, 말해주지 않을 거면 친하게 지내주지라도 말지. 난 아무것도 모르고, 분명 너도 즐거운 줄 알고….”
“우리 대화가 겉돌았던 건 훨씬 예전부터야. 나도 네 말을 안 들었고, 넌 내가 하는 말을 이해하지 못하고.”
“말해주지 그랬어. 고칠 수 있었을지도 모르는데, 나는….”
단점을 고쳐보려고 노력할 수 있었다. 노력하고 싶었다. 오해라면 대화해서, 필요하다면 며칠이라도 대화해서 풀고 싶었다. 하지만 레이나는 단 한 통도 답해주지 않았다. 나디아는 숨을 몰아쉬며 빠르게 말을 뱉었다.
“화나지 않느냐고? 안 났을 리가 없잖아. 화, 났어. 지금도 화가 나. 어렸을 때부터 쭉 함께였는데 한 마디도 해주지 않았고, 그렇게 오랜 시간을 함께 보냈는데 한 순간에 뚝 관계를 끊어버리고?.”
“…….”
“기회 한 번 주지 않고 날 끊어내버렸어!”
“…이걸 왜 그때는 말하지 않았어?”
“어떻게 말해? 내가 싫었다는데, 그랬다는데 뭐라고 말해!”
오해를 풀 시간도, 기회도 주지 않았다. 나디아는 그게 너무 화가 나고 슬펐다. 자신에게는 너무나 중요했던 사람인데, 그 사람에게는 제가 아무것도 아니라는 걸 증명받은 것만 같았다. 사실은 그 어떤 오해도 없기 때문에? 싫어한다는 사실만이 진실이라서 그런 거라고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왜 말 못해?!”
레이나가 울컥 소리질렀다. 나디아는 놀라서 그녀를 쳐다보았다.
“너도 나 같은 거 싫었다고 하면 되잖아! 뒤에서 욕을 하던 걸 알게 된 건데 화나는 게 당연하지!”
“…….”
“화를 내야 싸울 거 아냐?! 화도 내지 않고 그랬구나, 하고 돌아서버린 건 너잖아! 나도 사실 잘난 척하는 너 같은 거 싫었다, 싫었으면 말을 안 걸면 되지 뭐하러 찾아오고 친한 척 굴었냐고 따졌어야지!”
“하지만….”
“나를 속인 거냐고, 뻔뻔하다고! 먼저 편지 같은 걸 왜 보내? 답장도 안 보내는 사람한테 왜 자꾸 편지를 써? 넌….”
“레이나!”
나디아가 말을 끊고서 레이나의 양팔을 붙잡았다.
레이나는 입술을 깨물었다. 이 바보 같은 친구는 사실 제가 싫었다는 자신의 뒤틀린 진심에 깊이 상처를 받았다.
나디아는 낯을 많이 가리고, 제임스의 멍청한 세뇌 때문에 움츠러들지만 사실은 마음 깊은 곳까지는 상처입지 않았다. 무슨 일이 있어도 사랑해줄 가족들 덕분인지 나디아는 사실 쉽게 상처입는 사람이 아니었다. 다쳐도 금방 이겨내고, 달콤한 것을 먹으면 쉽게 행복해졌다.
걸핏하면 우는 울보 주제에 끝까지 울지도 않고.
충동을 이기지 못하고 나디아를 상처입힌 직후에도 레이나는 후회하지 않았다. 너도 좀 아파봐야지, 어차피 앞으로는 볼 일이 없는 사이인데 뭐 어때. 너는 좀 불행해져도 돼. 더 많이 아파했으면 좋겠다. 속이 시원했다. 당장은 좀 힘들어할지 몰라도 금방 괜찮아질 걸 알고 있었다. 그녀에겐 가족들이 있으니까.
“레이나.”
“왜 네가 편지를 써. 네가 다 해버리면 나는 할 수 있는 게 없잖아….”
후회하지 않는다고 생각했는데, 사실은 어찌해야 할 줄 몰라서 오기를 부린 거였다. 레이나는 나디아가 울 거라고 생각했다. 울면서 원망할 줄 알았다. 거기에 대고 뭐라고 말해줄지도 생각해봤었다. 그러나 나디아가 울지 않고 그렇구나, 하며 뒤돌아설 거라고는 생각해본 적이 없었다.
차라리 원망을 받았다면 깨끗하게 잊어버릴 수 있었을 것이다. 원망을 받을 각오를 하고서 저지른 일이었는데, 원망조차 돌아오지 않았다. 상처를 준 건 확실한데 아무런 반항도 돌아오지 않았다.
미워하는 것도, 상처를 주는 것도. 속이 시원했던 건 아주 잠시였다.
결혼을 하고 남편과의 생활이 행복해질수록 나디아가 생각났다. 후회가 스멀스멀 올라와서 숨이 막혔다. 나디아가 끝까지 울지 않았던 것, 그리고 간간이, 그러나 끊임없이 날아드는 편지. 혹시라도 편지에 사과가 쓰여있을까 봐 겁이 났다. 차마 내용물을 볼 용기까지는 없었지만 다른 사람들에게서 온 편지처럼 불태워버리지도 못했다. 편지는 그녀의 서랍에 차곡차곡 쌓여 있었다.
“저기, 레이나. 혹시….”
“…….”
“사과하러 온 거야?”
“…….”
“제임스가 불러서 왔다는 거 거짓말이지.”
“……제임스가 알려줘서 네가 수도에 와 있다는 걸 알기는 했어.”
말도 안 되는 소리를 지껄이며 도와달라고 난리를 부렸다. 부모님까지 편지를 보내서 움직이지 않을 수 없게 만들었다. 레이나에게는 마침 적당한 핑계였다. 나디아는 여전히 레이나의 양팔을 붙잡은 채로 시선을 마주했다.
“어쨌든 사과하려고 온 거 맞지?”
“…….”
“나 들을 준비 됐는데.”
“……너…… 짜증나…….”
“응?”
“…….”
레이나는 후, 하고 길게 숨을 내쉬었다. 발코니 문을 잠가 두었으니 아직 시간이 있었다. 그녀는 제임스가 무얼 바라고 자신을 불렀는지는 관심이 없었다.
“…해.”
“응?”
“너, 다 들어놓고….”
“안 들렸어.”
“누구한테 물들었어, 이런 뻔뻔한….”
“네가 나한테 뻔뻔하다고 하는 거야?”
“…….”
“알았어, 듣고 있을게.”
“미안해! 미안하다고! 네가 싫었던 건 사실이지만! 내가 더 싫었어!”
화내듯이 버럭 소리를 지른 레이나가 숨을 들이켜며 입술을 깨물었다. 이렇게 말하려던 게 아니었다. 조금 더 차분하고 조용하게 말하려고 했다. 레이나는 나디아를 노려보았다.
“네가 부러웠어. 부러워서 견딜 수가 없었어. 그런데도 행복한 줄 모르고 배부른 소리나 하는 게 짜증나고 화가 나고 싫었어.”
“…그랬구나.”
“……하지만 바보같고 답답한 넌 싫지 않아….”
바보 같은 나디아, 착한 나디아. 레이나는 눈을 질끈 감았다. 사실은 나디아가 싫은 게 아니라 자신이 싫었다. 나디아는 아무것도 잘못하지 않았다. 조금 눈치가 없지만 싫을 정도는 아니었다. 질투심으로 나디아를 똑바로 볼 수 없는 자신이 싫고, 그래서 괴로웠다. 그래서 상처를 입히고 도망쳐버렸다.
“넌 불행해질 수 없어. 넌 불행해지지 않을 거야….”
그럼에도 불구하고 편지를 보내주는 친구를, 어떻게 싫어할 수 있을까.
아무리 불행한 사고가 생겨도 나디아는 끄떡없을 테다. 그녀는 스스로를 불행하게 두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어쩌면 차이는 그것뿐이었을지 모른다.
“어쩌면 네가 밀리언 가에서 태어났어도 행복해졌을 거야. 제임스같이 멍청한 오빠를 두었어도 너라면. 누구라도 널 불행해지게 내버려두지 못했을 거야….”
“…나도 네가 부러웠어. 널 질투했어, 레이나.”
“…….”
나디아는 레이나를 제 품에 끌어당겨 안았다. 어깨 부근이 젖어들었다.
“멋있는 네가 부러웠어. 네가 날 싫어한다고 해도…… 난 네가 좋았는 걸.”
“…바보 아냐….”
“바보 맞나 봐.”
“…….”
“아무렴 어때. 오해가 잘 풀렸으면 된 거지.”
그렇게 쉽게 정리하기에는 해묵은 감정이 아직 남아 있었지만, 그건 앞으로 풀어갈 문제였다. 레이나는 나디아가 이제 와서 무슨 소리를 하느냐고, 뻔뻔한 소리를 하고 있다고 말하지 않아 안도했다. 쉽게 용서해주지 않을 거라고 각오하고 있었던 만큼 긴장하고 있었다.
나디아는 제 어깨에 완전히 이마를 기댄 레이나의 머리를 살짝 쓰다듬었다.
그때였다.
쿵, 와장창! 챙!
“악!”
데구루루.
발코니 창이 깨어지며 제임스가 굴러들어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