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2화
오랜만에 만난 ‘친구’는 몰라보게 달라져 있었다.
레이나는 발코니 문의 잠금장치를 걸고서 뒤를 흘긋 보았다. 제임스가 초조한 기색으로 주변을 두리번거리다 그녀를 보았다. 우스운 꼴이었다. 제까짓 게 무얼 막을 수 있다고.
‘도와달라더니.’
도와줄 게 있어야 돕지. 하나뿐인 오라비의 높은 자의식은 하루이틀 일이 아니었으나 오랜만에 보니 더욱 비웃길 뿐이었다.
모친이 심어주고 부친이 키워준 그의 자의식은 이제 망상 수준으로 성장한 듯하다. 그가 주절주절 늘어놓는 이상적 계획은 한동안 라 먼스트로드를 떠나 있었던 레이나가 듣기에도 허황되고 어리석었다. 그 계획이 이루어지리라 믿고 있는 제임스는 제정신이 아니었다. 어쩌다 그가 이 지경까지 오게 되었을까.
‘도와줘, 레이나. 그 계집애는 이제 내 말은 듣지 않아.’
‘걔가 왜 오빠 네 말을 들어야 해?’
‘왜기는….’
그야 내가 옳으니까, 라고 제임스는 눈으로 대답했다. 공고한 믿음은 스스로에 대해 무엇도 의심하지 않았다. 숨이 턱 막혔다.
도망치듯 결혼을 하면서 레이나는 두 번 다시 라 먼스트로드에는 돌아오지 않을 생각이었다. 제임스에게 편지를 받고서도 처음에는 무시하려고 했다.
남편이 다스리는 땅은 조용하고 심심했지만 평화로웠고, 그녀는 이 지루한 생활이 마음에 들었다. 팽팽하게 당겨져 있던 신경이 느슨하게 풀리는 듯했다. 심심찮게 날아드는 편지는 모두 무시하고, 가족에게서 오는 편지만 내용을 확인하고 간단히 답장했다.
밀리언 자작 부부는 자식을 지극하게 사랑하므로, 제때 안부를 알리지 않으면 어떤 짓을 벌일지 모른다. 딸의 안부를 핑계삼아 백작령에 눌러앉을 수도 있었고, 눌러앉은 김에 하나뿐인 아들의 사업을 도와달라고 사위를 설득할 수도 있었다. 레이나는 부모님들이 결혼한 제 인생에까지 끼어들길 바라지 않았다.
결혼 전까지 레이나는 아무것도 선택할 수 없었다.
함께 다닐 친구, 참석할 모임, 취미, 말투나 태도, 하다못해 그날 입을 드레스의 색깔까지도 지정되었다. 밀리언 자작부인은 쓸모없는 딸이 적어도 괜찮은 집안에 시집갈 수 있도록 완벽하길 바랐다. 그녀의 야망은 고작해야 시골 땅을 다스리는 백작은 아니었겠지만, 레이나는 나이가 좀 많지만 수도에서 먼 땅을 다스린다는 친절한 백작의 청혼을 거절하고 싶지 않았다.
레이나는 백작에게 운명적인 이끌림이나 사랑 따위를 느끼지는 않았지만, 그가 영지를 다스리고 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 청혼을 받아들였다. 지긋지긋한 삶에서 도망칠 기회였기 때문이다.
처음에는 제임스만큼 사랑을 받아보려고 노력도 했다. 제임스는 우수한 아이였으므로 그만큼 해낸다면 자신도 돌아봐 주리라 부질없는 기대를 품었다. 그가 읽는 책을 읽어보고, 외국어 공부도 시작했다. 그러나 모친은 상냥하게 웃으며 그녀의 손에서 책을 빼앗았다.
‘너는 여자아이잖니. 이런 건 보지 않아도 된단다.’
‘하지만 어머니….’
‘쓸데없이 똑똑한 척하면 신사 분들이 부담스러워해.’
‘…….’
‘아, 살이 좀 올랐더라, 얘. 오늘 저녁은 굶는 게 좋겠다.’
‘예….’
모친이 바라는 딸의 역할은 정해져 있다. 모친은 딸이 똑똑하거나 영리해지길 바라지 않았다. 아들에게 거는 기대와는 달랐다. 아들을 도와줄 수 있는 아주 좋은 집안으로 시집을 가면 좋겠지만, 그러지 못한다면 적어도 아들에게 민폐를 끼치지는 않을 남자에게 시집가길 바랐다. 그녀의 사고는 오로지 아들을 중심으로 돌아갔다.
고작 그런 걸 차별이라 투정부리는 거냐고 말하고 싶을지 모른다. 그러나 레이나는 숨이 막혔다. 부모님이 지정해준, 자신을 둘러싼 모든 것이 끔찍하고 답답했다.
나디아 마샤 랭커스터 또한 마찬가지였다.
‘랭커스터는 평판이 좋으니 데리고 다니도록 해. 나디아는 착하잖아.’
‘하지만 다른 애랑 가기로 약속했단 말이에요!’
‘페넬로페 말하는 거지? 걔는 안 돼, 뒤에서 문란하게 논다고 말이 많아. 너도 똑같은 부류라고 소문이라도 나면 어쩔 거니?’
‘그런 건 다 거짓말이에요!’
‘거짓이든 아니든 말이 돈다는 게 중요한 거란다.’
‘…….’
‘너는 나디아와 함께 다니는 게 가장 돋보여. 네가 평판이 좋은 게 다 뭐 때문인데. 사람들과 잘 어울리지 못하는 랭커스터 가의 막내를 챙기고 돌본다고 칭찬이 자자해.’
바보 같은 나디아, 착한 나디아.
나디아는 정말 착했다. 집안이 가까운 덕에 아주 어렸을 때부터 알고 지낸 사이이니 오래된 사이이기도 했다. 그러나 레이나는 그녀를 도저히 좋아할 수가 없었다.
나디아를 보면 레이나는 불행해졌다.
나디아는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괜찮았다. 우스갯소리로, 랭커스터는 막내가 숨만 쉬어도 박수를 치며 칭찬한다는 말이 있을 정도였다. 오라비에게 민폐를 끼치지 않아야 한다는 당부도 들은 적이 없을 테고, 살이 올랐다고 굶어야 하지도 않았을 테다. 숨만 쉬어도 박수를 친다는 건 좀 과장이었지만 잘 걸어다니기만 해도 기특해하는 가족들을 두었다.
랭커스터가 나디아를 얼마나 사랑하는지 레이나는 아주 잘 알았다. 일리야도, 앤더슨도 이따금 그녀에게 선물을 주며 동생을 잘 부탁한다고 말했다. 친남매만이 아니라 그들의 배우자인 조지, 비비안도 그랬다.
그에 비해 제임스는 여동생 생각을 해본 적이 있기나 한지 의문이었다. 여동생이라고 생각하기는 할까. 태어났을 때부터 주어진, 이용하라고 주어진 도구로 취급하지나 않으면 다행이었다. 너는 날 위해 희생하는 게 당연하다고, 내 말이 옳으니 들어야만 한다고. 제임스는 모친의 말을 한 치의 의심없이 받아들여 믿고 있었으니까.
나디아를 볼수록 그녀를 향한 질투와 박탈감을 견딜 수가 없었다.
‘결혼? 음, 언젠가 해야 하겠지만 아직 잘 모르겠어….’
백작의 청혼을 받고 넌지시 결혼에 대해 물었을 때 나디아는 머뭇거리며 대답했다.
‘부모님이 독촉하지 않으셔? 우리 이제 어린 나이가 아니잖아.’
‘전혀…. 오히려 일찍하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언젠가 사랑하는 사람이 생기면 그때 해도 늦지 않다고 하시던 걸.’
‘…….’
‘그런데 결혼은 왜? 좋아하는 사람이라도 생긴 거야?’
결혼은 사랑하는 사람과 하는 거라는 순진한 상식. 나디아에게는 당연한 상식이 세상 대부분의 여자에게는 당연하지 않았다. 레이나는 나디아와 대화를 할수록 그녀를 상처입히고 싶어서 견딜 수가 없었다. 자신은 랭커스터가 아니라서, 순진하게 웃는 얼굴을 마냥 사랑해줄 수 없었다.
나디아가 제임스의 멍청한 말에 휘둘려 점점 움츠러든다는 건 알고 있었다. 원래 낯을 많이 가리기는 해도 누군가 자신을 싫어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그녀의 머릿속에 심어둔 건 제임스가 틀림없었다. 레이나는 그것을 알면서도 내버려두었다.
누군가 널 싫어할 수도 있다는 걸 이제는 알아야지. 나도 사실은 널 싫어한다는 걸, 알아야지.
잘난 것 하나 없는 네가, 너무나 축복받은 환경에서 태어난 덕분에, 사랑만 받고 자랐다는 걸 알아야지.
그건 네가 잘나서가 아니라는 걸 알아야지.
네가 가진 걸 내가 가지지 못한 게 내가 못나서가 아니듯이. 내가 잘못했기 때문은 아닌 것처럼.
정이 들지 않았다면 거짓말이다. 좋았던 순간이 없었다고 한다면 그것도 거짓말이었다. 하지만 긍정적인 감정이 부정적인 감정을 이길 수는 없었다.
결혼하기 전 진심을 털어놓았던 건 충동에 휩쓸린 결과였다. 조용히 결혼해 라 먼스트로드를 떠난 후 연락을 끊을 수도 있었다. 굳이 제 진심을 알려줄 필요도 없었고, 그걸 직접 들려주지 않아도 끊어낼 수 있던 인연이었다. 나디아는 먼 백작령까지 올 용기는 없을 게 분명했고, 답장을 하지 않는다고 해서 직접 찾아올 성격도 아니었다. 결혼을 계기로 끊어지는 관계는 수없이 많다. 그중 하나가 될 수도 있었다.
나디아는 울지 않았다.
상처를 받아 녹색 눈동자가 촉촉하게 차올랐지만, 울보 주제에 그녀는 끝내 울지 않았다. 싫어하는 게 잘못은 아니라고만 말했다.
“…행복해 보이네.”
“레, 레이나. 오랜, 오랜만이야….”
긴장하면 말을 더듬는 습관은 아직 고치지 못했나 보다. 레이나는 나디아를 빤히 쳐다보았다.
제임스가 그랬다. 공작과 결혼해 신분이 높아지니까 저도 대단해진 줄 안다고, 돈이 좋기는 좋은지 얼굴이 피었다고 말이다. 멍청한 제임스는 착각할 만하다. 나디아는 확실히 예뻐졌지만 그건 좋은 걸 먹고 좋은 걸 입어서 생긴 변화가 아니었다. 밀리언 자작가에도 돈은 많았다. 웬만한 자산가들이 할 수 있는 관리는 레이나도 받아봤다.
나디아가 달라졌다면 그것은 내면에서부터 차오른 자신감과 행복이 드러난 것이다. 레이나 자신이 그렇듯이.
“제임스가 불러서 왔어.”
“……아.”
“이런, 멍청한 제임스. 너에게도 들켰나 봐?”
“으응?”
“이제 제임스 말은 듣지도 않는다더니, 겨우 걔가 멍청하다는 걸 깨달았나 해서.”
나디아가 눈을 깜박거렸다. 레이나는 제임스와 사이가 좋은 게 아니었나. 그녀의 눈에 차오른 의문을 읽고 레이나가 픽 웃으며 말했다.
“사이가 안 좋진 않아. 오히려 좋은 편이지. 내가 제임스를 싫어하는 것뿐이야.”
“한쪽이 싫어하는 사이를 좋다고 하지는 않잖아….”
“우리처럼?”
“…….”
나디아는 조개처럼 입을 딱 다물었다. 레이나가 어깨를 으쓱거리며 그녀를 향해 걸어갔다.
“결혼했다는 소식은 한참 나중에 들었어.”
“으, 으응….”
“야수 공작에게 강제로 시집가게 되었다고, 어머니는 그래도 공작 가문에 시집가는 거니 잘된 일이라고 편지에 쓰셨지만 랭커스터는 그렇지 않았겠지. 아버지는, 랭커스터는 네가 마치 죽으러 가는 분위기였다고 표현하셨어. 실제로 그랬겠지.”
“…….”
“난 네가 드디어 불행해졌다고, 기뻤는데.”
나디아가 고개를 떨구었다. 레이나는 금발로 덮인 나디아의 정수리를 내려다보며 입꼬리를 비틀었다.
“너는 불행해지지도 않는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