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1화
라 먼스트로드는 겨울이라고 해도 그리 춥지 않았다. 드물게 눈이 내리기도 하지만 새벽 나절 잠깐 내리고 말 뿐이다. 싸라기눈이 땅을 촉촉하게 적셔 놓은 흔적을 보고서야 간밤 다녀간 눈을 깨닫는다. 그렇기에 해가 넘어가는 겨울철에 야외에서 검술 시합 따위를 열 수 있는 거였다.
라 먼스트로드에서 나고 자란 사람에게는 온화한 겨울이 익숙했다. 그러나 스테이턴 영지에서 온 흑곰 기사단에게 수도의 겨울은 겨울이 아니었다. 고작해야 쌀쌀한 초겨울 정도일까.
흑곰 기사단은 정체성에 걸맞게 털가죽을 걸친 갑옷을 입고 있었는데, 보기만 해도 땀이 날 무장이다. 눈발이 흩날리는 산속에서도 체온을 유지할 수 있어야 하므로 당연했다. 나디아는 황궁까지 호위해 준, 이제는 마부인지 기사인지 헷갈리는 로렌스 하버의 “더워 죽겠는데 벗지도 못하게 하신다”던 볼멘소리를 떠올렸다. 차마 루크에게 직접 불만을 말하기는 무서워 그는 종종 혼잣말인 척 불만을 중얼거리고는 했다.
이번에는 함께 마차를 타고 있던 안나가 그의 목소리를 듣고 “그렇게 불만이면 기사단을 때려치면 된다”고 상냥하게 대신 답해준 덕분에 나디아는 아무 말도 할 필요가 없었다. 하지만 다시 보니 불만이 나올 만했다.
“정말 더워 보인다.”
“응? 무슨 소리니. 지금은 한겨울이야. 요즘 날씨가 포근하다고 해도 겨울바람을 얕봐서는 안 돼.”
“코트가 너무 두꺼웠나요? 다른 코트를 준비할까요?”
작은 혼잣말도 흘려듣는 법이 없다. 일리야에 이어 안나까지 대답하자 나디아는 무안한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내 얘기가 아니구, 기사님이요.”
“아. …알바즈 경, 말씀이시군요.”
안나가 이름을 말하기 전 잠깐의 시간을 두었다. 나디아는 철두철미한 안나의 생각이 읽히는 드문 순간을 매우 좋아했다. 모르는 사람이라면 보고도 모를 순간이지만 최근 그녀의 표정 변화와 감정이 읽히기 시작했다. 그러고 보면 브릿 후작 부인은 안나를 두고 “성질이 급해 라 먼스트로드에서는 살 수 없었을 사람”이라고 말한 적이 있었다. 여유롭고 차분해 보이는 인상과 달리 사실은 다혈질이라는 걸 이제는 알았다.
안나는 자신을 뚫어져라 쳐다보는 나디아에게 상냥한 미소를 지어주며 말했다.
“다정하시군요. 걱정해주지 않으셔도 흑곰 기사단이라면 고작 더위 따위에 지지 않을 거랍니다.”
“안나, 지금은 여름이 아니라 겨울이에요….”
일리야가 지적했다.
“여름이라도 마찬가지예요. 땀 좀 난다고 죽진 않으니까요.”
“탈수가 오면 위험할.”
“탈수 정도는 근성으로 이겨내야죠.”
상냥한 미소와 달리 냉정하기 짝이 없는 태도였다. 나디아는 웃고 말았다. 저리 말해도 기사단원을 누구보다 아끼고 있다는 걸 다 알고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기사단이 어머니 따르듯, 할머니 따르듯이 그녀를 사랑하는 것이다. 일리야도 안나가 솔직하게 걱정해주지 않으리라는 걸 깨닫고서 말을 돌리기로 했다.
“카넬로 알바즈 경은 승승장구하고 있지요.”
“다행스럽게도 조기 탈락의 창피는 면했지요.”
“조기 탈락은요. 제 주변에는 카넬로 알바즈 경을 우승 후보로 생각하고 있는 분도 많아요.”
“그런가요…?”
나디아는 눈을 가늘게 떴다. 안나의 입꼬리가 실룩거리는 게 보였다. 모르는 척하고는 있어도 루크가 자랑스러운 게 틀림없었다. 혹은 “당연하지요”라고 말하고 싶었을지도 모른다. 안나에게 말하면 화를 낼지도 모르지만 표정이 읽힐 때 그녀는 무척 귀여웠다. 어른에게 귀엽다는 표현이 적절하지 않을지는 몰라도.
‘귀여운 건 루크도 마찬가지지만.’
카넬로 알바즈 경의 정체를 이미 알고 있고, 직접 몸을 만져봐서 확인까지 했는데? 제 앞에서 ‘검술 대회 관람을 같이 하지 못해서 미안하다’는 둥, ‘황태자 전하께서 맡기신 임무가 있어서 어쩔 수 없다’는 둥, ‘무슨 일이 있으면 달려갈 수 있는 거리에 있다’는 둥…….
‘루크도 진짜 거짓말은 못 한다니까….’
주절주절 변명을 늘어놓는 동안 루크는 나디아를 똑바로 쳐다보지 못했다. 시선을 맞추려고 끈질기게 그의 얼굴을 쳐다보았지만 끝끝내 눈을 맞춰주지는 않았다. 나디아는 그게 참 귀엽게 보였다. 커다란 사람인데도 불구하고 날이 갈수록 귀여워 보이는 기이한 현상을 어쩌면 좋을까.
나디아는 그의 변명에 속아 넘어가주는 척을 하며 어릴 적 만들어두었던 묵주를 그에게 선물했다. 건강을 바라며 만든 묵주였지만, 무사와 건강은 일맥상통하니까 괜찮을 것이다. 나디아는 목걸이로 썼던 묵주는 그의 팔목에 두 번 감으니 딱 맞았다.
“그럼요! 한 번도 지지 않은 기사님이 알바즈 경밖에 없는 건 아니지만 다섯 합이 넘어가기도 전에 경기를 끝내버리시는 실력자는 거의 없어요. 남편에게 들으니 경기를 즐길 새도 없이 끝나버려서 신사분들은 그리 좋아하지 않으신다지만요.”
“실력의 차가 확실한데 쓸데없이 시간을 끄는 건 상대에게도 실례니까요.”
“그건, 견해의 차이가 있을 수 있겠어요.”
일리야는 모호하게 웃었다. 안나의 말이 정론이긴 했지만 그렇다고 단숨에 제압당해버리면 체면이 구겨진다. 아무리 실력의 차이가 커도 열 합 정도는 검을 맞댄 후에 승부를 가리는 것이 암묵적인 예의였다. 카넬로 알바즈에게 처참하게 패배한 기사들은 입을 모아 야만인이라 상식이 통하지 않는다고 비난하고 있었다. 당사자에게 따지러 간 기사도 있었다고 들었지만 그는 신경도 쓰지 않았다고 한다.
남의 말을 잘 듣지 않는 건 주인이나 기사나 똑같은 모양이다. 시녀장도 포함해서 말이다. 일리야가 말했다.
“벌써 라 트에빌라도 열흘째잖아요. 이대로 간다면 우승도 꿈이 아니에요. 적어도 5위 안에는 무난하게 들 수 있지 않을까요?”
“벌써 열흘이나 흘렀나요.”
“네…. 예상보다 조용하고 순탄하게 흘러가고 있어 얼마나 다행인지….”
“일리야 님께서는 대체 무얼 상상하고 계셨기에.”
안나는 가볍게 웃었다. 일리야 대신 나디아가 대답했다.
“제가 실수하거나, 넘어지거나, 비난을 받거나, 창피를 당하거나….”
생각만 해도 전신의 피가 발바닥으로 빠져나가는 기분이 들었다. 잠깐 상상했다가 소름이 끼친 나디아가 어깨를 바르르 떨었다.
“춤을 추다가 넘어지거나 걷다가 치맛자락을 밟고 넘어지거나 계단에서 구르거나….”
“각하께서 넘어지기 전에 잡아드렸을 겁니다.”
만약 놓쳤다면 그동안 단련에 쏟은 시간과 정성이 아까워진다.
“그렇겠죠. 그래도 제가 실수해서 일어날 수 있는 수만 가지 상상을 다 해봤어요. 일리야 언니도 라 트에빌레는 처음이니까….”
“결혼 후에 남편과 참여해보려고 했는데 역시 아버지가 반대하셔서.”
“가보려고 했어? 언제?”
“피오나가 태어나기도 전이야.”
어쩐지 배신감이 느껴진 나디아가 입술을 삐죽거렸다. 사람 많은 곳을 싫어하는데다 낯선 장소에 가는 건 질색이었으니 같이 가자고 했어도 거절했겠지만, 당연히 자신을 빼놓을 예정이었다는 게 마음에 들지 않았다. 제멋대로라는 건 알고 있었지만 원래 막내는 형제들 사이에서는 다소 제멋대로여도 용서받는 법이었다. 특히 나이 차이가 많이 나고, 막내를 제 자식처럼 아끼는 형제 사이에서는. 일리야는 나디아의 손등을 두드려 달래주었다.
“그런데 생각 외로 실수 하나 없이 잘 해내고 있지.”
“실수 하나 없는 건 아니지….”
“이 정도면 완벽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에요. 그렇죠, 일리야 님.”
“그럼요, 안나.”
과장된 칭찬은 삐친 어린애에게는 특효였다. 나디아는 자신을 달래주려는 일리야의 속셈을 훤히 알았지만 어른스럽게 모르는 척해주기로 했다.
“그, 그런가? 브릿 부인께서도 잘하고 있다고 위로해주셨으니까….”
“브릿 부인의 입에서 그 정도면 엄청난 칭찬이에요.”
“헤헤… 핫, 흐음.”
저도 모르게 풀어진 웃음을 흘리다가 재빨리 얼굴 근육을 정리해 표정을 가다듬었다. 아무래도 제 사람들 사이에 있으면 쉽게 풀어지고 말아서 긴장을 유지하는 것이 가장 어려운 점이었다.
“체력이 좋지 않으셔서 낮에는 동석하지 못하고 계시지만, 무도회에서는 브릿 부인께서 꼭 함께 다니며 인사도 시켜주시고 때때로 주의를 주셔서 다행히 아직까지 실수는 하지 않을 수 있었어요.”
“각하와 브릿 부인이 같은 자리에 있는데도 비아냥거리지 않고 싸우지 않는 것도 부인의 공이지요.”
“하, 하하….”
사이가 좋지 않은 것도 아닌데 왜 자꾸 시비가 생기는 걸까. 그나마 나디아가 붙어있어 불이 붙지는 않았지만 오가는 신경전은 날이 갈수록 날카로워졌다. 둘 다 진심으로 싸울 생각은 아니었기에 망정이지, 아니었다면 나디아는 두 사람을 화해시키려고 이리 뛰고 저리 뛰었을 것이었다.
*
어쨌거나 열흘이 넘어가는 동안 라 트에빌레는 그 어떤 사고도 없이 무사히 흘러가고 있었다.
예전부터 알던 사람들보다 새로 알게 된 사람들이 훨씬 많았다. 헷갈리는 얼굴도 몇 명 있지만 대부분 이름과 얼굴을 잘 외울 수 있었다. 셀리아 황녀를 그날 이후로 만나지 못한 건 아쉬웠지만, 원래 고귀한 황녀의 얼굴을 그리 쉽게 볼 수 있는 것은 아니니 그녀가 자신을 싫어해서, 혹은 불쾌하게 여겨서 피하는 게 아니라 위안 삼았다.
‘그래도 라 트에빌레가 끝나기 전에 한 번쯤 뵐 수 있었으면….’
반말을 하면 정말 편지를 보내줄까?
마지막으로 보았을 때도 눈동자가 흔들리고 많이 혼란스러워 보여서 걱정스러웠다. 셀리아 황녀는 브릿 후작 부인이 견본으로 삼으라고 말했을 만큼 자세가 아름다운 사람이었지만, 나디아는 그녀의 어깨가 움츠러든 느낌을 받았다. 이유는 몰라도 안 좋은 일을 겪었거나 상처를 입은 게 아닐까.
나디아는 상처를 입은 사람을 지나치지 못했다. 누군가 아파하고 있으면 제 심장도 찢어질 듯이 아팠다. 너무 아플 거 같은 상처를 보면 눈물이 먼저 났다.
‘이런 생각도 루크가 바람을 피우지 않았다는 확신이 있어서, 여유가 있어서 할 수 있는 거겠지만…….’
나디아는 셀리아를 생각하며 자연스럽게 레이나를 떠올렸다. 그녀가 가진 또래 동성 친구는 레이나뿐이었기 때문이다. 라 먼스트로드에 돌아온 이후 어딜 가도 레이나 생각이 자연스럽게 따라붙었다.
-내가 사과해야 되니?
-네가 날 싫어하는 게 네가 사과할 일은 아니니까….
-네가 그렇게 말할 줄 알았어.
그렇게 말할 줄 알았다는 그 말이 모래처럼 꺼끌거렸다. 물어볼 걸, 왜 내가 그렇게 싫었냐고, 언제부터 날 싫어했냐고……. 무엇이 싫은지 물었다면, 그 점을 최대한 고쳐보거나, 그럴 수 없다면 조심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랬다면 아직 레이나와 친구 사이로 남아있을 수 있었을지 모른다.
‘이런 미련한 점을 싫어했었나 봐.’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일까.
나디아는 지난 열흘간 그랬듯이 일찌감치 루크와 발코니로 빠져나왔다. 브릿 후작 부인이 허락해주면 몰래 빠져나가 둘이서 파티 음식과 가벼운 술을 즐겼다. 살이 다시 오르고 있는 것 같아서 걱정스러울 만큼 행복한 시간이다. 나디아는 루크가 음식을 가지러 간 사이, 발코니로 들어서는 낯익은 얼굴을 넋을 잃고 쳐다보았다.
“레이나….”
탁.
발코니 문이 닫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