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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수라는 공작에게 시집왔는데-130화 (130/150)

130화

“루크, 삐졌죠.”

“아니오.”

“삐진 거 맞는 거 같은데요.”

“아니라니까.”

“삐진 거 아니면 왜 여길 안 봐요?”

“…….”

“이거 봐, 삐진 거 맞네.”

재미있다는 기색이 역력한 목소리는 평소보다 톤이 높았다. 루크는 순순하게 대답하여 제 좁은 속내를 인정하는 대신 나디아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겨우 제게로 향한 그의 얼굴이 기쁜 듯 나디아는 싱긋 웃었다. 그녀는 무척 기분이 좋아 보였다. 그걸 보니 제 기분이야 아무렴 어떠랴 싶다.

셀리아를 데리고 떠나던 레너드가 실룩거리며 웃었든 말든, 셀리아가 자신을 어이없이 쳐다보았든 말든……. 남자들의 시선이 나디아에게 달라붙어 제 짜증을 돋웠든 말든.

‘중증이군….’

그러나 기분이 상한 이유를 솔직하게 말할 생각도 없었다. 자신이 아니라 셀리아에게 웃어주어서, 라는 이유를 어떻게 제정신으로 말할 수가 있겠는가. 그는 아직 나디아에게 멋있는 남자로 보이고 싶은 욕망을 포기하지 못했다.

나디아가 지금처럼 웃어주기만 한다면 무엇이든 할 수 있다. 그녀를 위해 루크는 이미 한 번도 해보지 않은 일들을 아주 많이 했다. 말끔하게 차려입고 파티장에 와서 사람들과 인사를 나누었고, 앤더슨과 춤을 추는 그녀를 보며 흉내라도 낼 수 있게 춤을 배워두면 좋았을 거라는 후회도 했다.

루크는 제게 이름을 말했던 많은 사람들을 단 하나도 기억하지 못했지만, 나디아는 한 사람 한 사람을 기억하려는 듯이 입안으로 열심히 이름을 외워주었다. 단 한 번의 통성명으로 완벽히 이름과 얼굴을 외우리라고는 상대방도 기대하지 않을 텐데도 적당히 흘려보내는 법이 없었다. 가만히 내버려 두었다가는 밤새 인사를 나누고 있을 것 같아서 브릿 후작 부인이 나서서 그들을 쉬게 해준 것이다.

춤을 출 수 있었다면 자연스럽게 끊어낼 수 있었겠지만? 남편이 춤을 추지 못하니 억지로 내쫓는 수밖에 없었다.

발코니는 사람이 없었고, 루크는 아무도 들어오지 못하게 아예 잠금장치를 걸어두었다. 밀려드는 사람들이 지긋지긋했다. 똑같이 생긴 인형이 끝도 없이 쏟아져 들어오는 듯해 멀미가 날 지경이었다.

질투로 기분이 상하기도 했지만 컨디션이 좋지 않은 것도 사실이었다. 멀미는 체력과는 상관없는 것이다.

“루크? ……정말 기분이 안 좋은 거예요? 화 났어요…?”

“아니라니까. 파티는 익숙하지 않아서 피로해졌던 것뿐이오. 바깥바람을 쐬니 나아졌고.”

“저도 그런 적이 많아요. 밀폐된 공기 때문에 속이 답답해지고 멀미가 나죠. 속은 괜찮아요? 어지러우면 기댈래요?”

나디아는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곧장 그가 발코니 난간에 기대도록 이끌었다. 그리고 자신은 그의 앞에 서서 씩씩하게 제 어깨를 두드렸다. 이 커다란 몸을 저 작은 어깨에 어떻게 기대라는 건가. 기댈 데가 어디 있다고….

“여기에 기대라고?”

“자, 어서요.”

“…무거울 텐데.”

“저 힘 세요.”

“…….”

기댈 데가 없지만? 당당하게 그녀를 끌어안고 살갗에 뺨을 비빌 수 있는 기회를 놓치기는 또 아까웠다. 오늘은 그녀의 냄새를 한 번도 맡지 못했으니까. 루크는 변명을 속으로 주워 삼키며 허리와 목을 구부렸다. 목덜미와 어깨 사이에 이마를 묻자 그녀의 살 냄새가 났다.

코가 눌릴 만큼만 무게를 싣고, 킁킁거리는 소리가 나지 않게 숨을 들이마셨다.

‘아, 제기랄….’

살 냄새와 약간의 체온만으로 아랫도리가 팽팽하게 부풀었다. 여긴 왜 바깥이라서…. 잠금장치를 걸어두었지만 투명한 유리문 너머로 사람들이 보였다. 그들도 바깥을 볼 수 있을 것이다. 야외고 실내고를 떠나서 너무 개방적이었다. 이건 어떻게 숨긴담. 불쑥 솟은 그것의 존재를 루크는 신경쓰지 않을 수 있었지만? 나디아는 부끄러워할 것이다.

“후….”

“어떡해…. 루크, 열도 오른 거 아니에요?”

뜨거운 숨이 목덜미를 간지럽히자 나디아가 깜짝 놀랐다. 그녀가 손바닥으로 루크의 뒷목을 쓸었다. 뜨거운 피부에 약간의 땀이 묻어났다. 난 아픈 사람을 놀렸던 거야…? 나디아가 그의 어깨를 살짝 밀었다. 얼굴을 확인하기 위해서였지만, 루크는 꼼짝도 하지 않았다.

“루크? 얼굴 좀 봐요.”

“안 돼.”

“왜요…. 아픈 건 부끄러운 게 아니에요. 사람이 아플 수도 있지….”

“아픈 게 아니라 부끄러운 거요.”

“……?”

루크가 고개를 틀어 나디아를 올려다보았다. 늘 저보다 아래에 있던 녹색 눈동자를 올려다보고 있으니 기분이 또 묘했다. 나디아는 아래에서 봐도 위에서 봐도 옆에서 봐도 예쁘다. 갸웃거리던 나디아가 깜짝 놀란 것은, 그가 그녀의 허리를 끌어당겨 제 아래에 밀착시킨 직후였다. 덕분에 어깨와 등이 굽었지만 견딜 만했다.

“여, 여, 여긴 밖이에요!”

“알고 있소. 그러니 참고 있는 거요.”

“윽.”

“다른 놈들이 보고 있는 데서 당신을 벗길 수는 없지….”

“버, 벗, 벗?.”

“…….”

“?놀리지 마요….”

뚫어져라 자신을 쳐다보는 눈에서 장난기를 읽어낸 나디아가 부루퉁하게 투덜거리며 루크의 목덜미를 살짝 때렸다. 하나도 아프지 않아서 루크는 소리내어 웃었다.

“왜 지금 웃어요?!”

“아니, 당신에게는 맞아도 기분이 좋은 게 신기해서.”

“네?!”

조금만 더 세게 때려줬으면 좋겠다거나, 섹스할 때 뺨을 때려줬으면 좋겠다거나. 솔직한 바람을 얘기할 수 있게 되기까지는 앞으로 얼마나 걸릴까. 루크가 하고 싶은 말을 꾹꾹 누르고 웃기만 하자, 나디아가 “또 놀린 거죠!”라며 팔뚝을 찰싹찰싹 때렸다. 루크 자신은 맞으며 흥분하는 부류가 아니었으므로 그냥 나디아는 뭘 해도 좋게 받아들이는 거라고 해석하기로 했다.

흥분을 가라앉히려면 나디아를 떼어놓는 게 가장 빠르겠으나 제 손으로는 할 수 없는 일이었다. 루크는 자신을 밉지 않게 흘기는 그녀를 가만히 들여다보았다.

나디아는 마치 버거운 숙제를 끝낸 아이처럼 홀가분해 보였다. 공작 부인으로 서는 이 자리를 그녀가 얼마나 부담스럽게 여겼는지를 잘 알 수 있는 부분이었다. 신경쓰지 않아도 된다고, 루크 자신부터가 이 제국의 귀족의 규격에는 들어맞지 않는 인간이라고…… 그가 아무리 말해도 나디아는 납득해주지 않았다.

자신이 ‘제대로 된’ 귀족이라면 고작 두어 시간 만에 사람 멀미에 괴로워하며 도망쳐오지는 않았을 텐데도.

라 먼스트로드로 향할 때에도 루크에게 중요한 건 오로지 나디아와 그녀의 가족들이었다. 그 외의 다른 사람들이 어떻게 생각하든 그건 알 바가 아니다. 그의 조부가 그랬듯이 스테이턴 가는 외골수적인 기질이 강했다. 선 안의 것들을 소중히 여기는 대신, 선 밖의 것들은 어떻게 되든 신경도 쓰지 않았다.

하지만 나디아는 다르다. 그녀는 스쳐 지나가는 사람일지라도 기꺼이 마음을 써주었다.

거리에 쓰러진 부랑자에게도 손을 내밀어주었듯이.

루크는 나디아가 육체적으로는 저보다 연약할지언정, 그녀가 나약한 사람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어이가 없어! 자네 봤나? 응?”

발코니 아래에서 사람들의 목소리가 들렸다. 나디아가 바싹 긴장하며 숨소리를 죽였다. 딱히 긴장할 만큼 나쁜 짓을 하고 있는 것도 아니건만. 그러나 나디아가 숨고 싶다면 당연히 협력해줄 것이었다. 그러니 루크가 손바닥으로 그녀의 등을 쓸어올린 것은 맹세컨대 흑심이 있어서가 아니었다.

얇은 드레스 차림으로는 춥지 않을까 걱정이 되어서였고, 제 체온을 나누어주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어차피 나디아가 소리를 내지 않을 거라면 조금 더 쓰다듬어도 괜찮을 것 같았다.

“잘나면 얼마나 잘났다고, 뻣뻣하게 서서. 보았나? 태자 전하 앞에서도 그 뻣뻣한 고개는 숙여질 줄을 모르더군. 태자 전하께도 그리 오만방자하니 우리 같은 아랫것들은 얼마나 하찮아 보였겠나.”

“공작이라고 해도 고작 변방의 촌뜨기 주제에.”

“야만인에게 셀리아 전하라니, 말도 안 되지. 그 새끼가 제 입으로 퍼뜨린 헛소문임이 틀림없어….”

목소리로 미루어보건대 그들은 꽤 젊은 축에 속하는 청년들인 듯했다. 사정을 모르는 것들이 뭐라 떠들든 알 바가 아니었고, 착각은 비웃어주면 그만이었다. 대충 들어도 셀리아의 껍데기에 속아 홀려버린 불쌍한 놈들이다. 안나의 말처럼 명확한 진실을 코앞에 들이밀어 주어도 저 보고 싶은 것만 보고, 저 좋을 대로만 해석하는 사람들은 어디에 있는 법이었다.

루크는 피식 웃으며 나디아의 목덜미에 입술을 가져다댔다. 여기에 자국을 남기면 나디아가 화를 내겠지…….

“잘난 겉가죽을 뒤집어썼어도 말똥 냄새나는 야만인의 습성이 숨겨질 리 없는데 말이야.”

이 와중에도 겉가죽이 잘났다고 해 주니 고맙다고 해야 할까…. 웃음이 날 것 같아 어깨를 들썩이는데, 나디아가 팔을 뻗어 그의 귀를 막았다. 루크는 눈을 크게 떴다. 그녀는 눈물이 그렁그렁한 얼굴로 입술을 달싹거렸다.

듣지 마요.

고작 귀를 덮는다고 발 아래에서 떠드는 목소리가 들리지 않을 리 없다. 지금도 루크는 남자들이 무어라 떠들었는지는 기억도 나지 않는데다, 그녀의 손가락이 제 귓구멍을 파고든 감각이 야릇해 피가 몰리고 있었다. 손가락 끝이 조금 차가웠고, 생각보다 깊은 곳까지 막았다. 딱딱한 손톱 끝이 귓구멍 안쪽을 긁는 것까지 느껴졌다. 고작 귓구멍을 막는 것도 야하게 느껴지는 걸 보아 자신은 나디아 한정 일상생활이 불가능할 수준의 변태인 게 또 한 번 증명되었다.

하지만 그는 ‘괜찮다’고도 말하지 못했다.

고작 저런 말을 듣고 그가 상처를 받았을까 봐 눈물을 글썽거리는 나디아가 사랑스러워서, 눈을 뗄 수 없었기 때문이다.

자신이 누가 떠드는 말 따위에는 신경도 쓰지 않는다는 걸 나디아도 안다. 나디아는 자주 루크를 걱정하고 염려하지만, 그가 누구보다 강하다는 사실 자체를 의심하지는 않았다. 알면서도 염려하는 거다. 저보다 강한 줄 알면서도, 다칠까 봐. 지금과 마찬가지로.

그는 저 좋을 대로 자유롭게 살아가고 있었으므로 타인이 무어라 부르든 알 바 아니었다. 다만 그렇기 때문에 이 직감을 갖게 된 거라면, 기꺼이 짐승이 되어도 좋았다. 한눈에 나디아를 알아보고 그녀에게 빠지게 해 준 이 직감이 그 덕분이라면 말이다.

스스로 개가 되기로 한 적도 있으니, 네 발로 달리는 시늉이라고 못할까. 루크는 제 귀를 감싼 나디아의 손을 끌어내려 손바닥에 입술을 대었다. 가리지 않으면 나디아에게 들키고 말 것이다. 귀에 걸릴 것 같이 활짝 웃고 있는 입술을. 맞고도 웃고, 욕을 듣고도 웃는 놈은 좀 이상해 보일 것이다.

누가 그녀를 욕한다고 해도 화내지 않을 걸 안다. 하지만 그를 향한 험담에는 억울한 듯 입술을 사리물고 눈물을 글썽거렸다. 저 눈물은 그를 위한 것이며, 그의 것이었다.

내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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