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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수라는 공작에게 시집왔는데-129화 (129/150)

129화

당황스럽기는 셀리아가 가장 당황스러웠다.

나디아에게 쏘아붙이고 뒤를 돌아선 순간부터 셀리아는 후회했다. 계획대로였다면 셀리아는 나디아를 밀어낼 게 아니라 적당히 어르고 달래어 자신을 동정하게 만들어야 했다. 완벽한 관계를 그녀가 망치고 있다고, 스스로 물러날 수 있게끔. 그건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셀리아는 평생 ‘말’이 전부인 세상의 정점에 군림했다.

교묘한 말, 찰나간의 눈빛 따위로 사람을 지배하는 세상에서.

소문대로 랭커스터 남작의 막내딸은 무르고 여렸다. 상냥하게 웃어주고, 사연 몇 마디를 읊으며 눈물 몇 방울을 흘려주기만 했다면 분명 셀리아는 바라던 결과를 얻을 수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입 밖으로 튀어나간 말은 계산되지 않은 진심이었다.

한 번도 상처받은 적 없는 듯 순진무구한 이 사람을 상처입히고 싶다는 충동을 이기지 못했다.

“뻔뻔하기도 하지. 주인공처럼 홀 중앙을 차지하다니요.”

“브릿 부인을 어찌 구워 삶았는지 몰라도….”

“스테이턴 가와 브릿 부인은 연이 깊으니 차마 외면할 수 없으셨던 게 분명해요.”

목소리를 낮추어 속닥거리는 험담은 우울한 황녀의 기분을 풀어주기 위한 것일까. 아니면 한낮의 자신처럼 치밀어오르는 충동을 견디지 못하고 뱉어낸 진심일까. 이도 저도 아니라면 그저 자신들은 보지도 못했던 보물을 차지한 행운아가 꼴보기 싫을 뿐일 것이다. 셀리아가 할 말은 아니지만? ‘루크 리처드 스테이턴’이 멀쩡한 인간일 뿐만 아니라, 태자 레너드와 나란히 서도 손색이 없는 미남이라는 사실을 알았다면, 고작 남작의 딸이 차지하도록 내버려두지 않았을 것이다. 남작의 딸이 무사하도록 두지도 않았을 테다.

그러나 그들이 험담을 늘어놓았다는 것은 나디아가 성공을 거두었다는 반증이었다. 상대할 가치도 없다고 무시하는 데 실패했다는 뜻이었다.

셀리아의 주변에는 나디아에게 다가가지 않을 사람들이 모여 있었다. 스테이턴 가를 싫어하거나, 셀리아의 기분을 신경쓰는 사람들이었다. 나디아가 먼저 다가오지 않는 이상 멀리 떨어져 다가갈 리가 없는 사람들. 셀리아도 마찬가지였다. 가볍게 인사나 나눈다면 모를까.

그리 노골적으로 쏘아붙였으니 다시는 다가오지 않겠지. 셀리아는 홀에서 춤을 추는 나디아를 보며 생각했었다. 직접 그녀를 움직일 수 없다면 달리 어떤 수를 써야 할까 머리를 굴리면서, 어쩐지 가라앉은 기분으로 보았던 것 같다. 뾰족한 수가 떠오르지 않는데도 의욕이 나지 않았다. 시간이 없는데, 이러다가는 제 꾀에 제가 넘어간 꼴밖에 되지 않을 텐데도 초조해지지 않아 이상했다.

생각을 해야 하는데 머릿속에는 어떤 얼굴만 가득했다. 놀라서는 눈을 동그랗게 뜬 얼굴. 녹색 눈동자에는 혼란한 감정이 선명했다.

‘울었을까?’

울었든, 아니든 무슨 상관이람. 상처 입히려고 일부러 말한 주제에 왜 그런 걸 신경쓰고 있는지 모르겠다. 울기를 바랐는지 아닌지도 이제는 확실하지 않았다. 다만 기분이 좋지 않았다. 질퍽한 진흙탕을 구둣발로 밟고 만 것처럼….

‘어?’

눈이 마주쳤다. 마침 느리게 흘러가던 곡이 끝났고, 나디아는 제 오라비에게 무어라 속닥거렸다. 그리고 그를 두고서 혼자 셀리아에게 걸어왔다. 점점 가까워지는 거리와 마주친 시선만 보아도 제게 오는 것이 확실했다.

나디아는 분명 작지 않았다. 셀리아 자신과 비교해도 눈높이 차이가 크지 않을 것이다. 그럼에도 셀리아는 그녀가 작은 강아지처럼 보였다.

‘눈이 이상해졌나?’

눈을 질끈 감았다 떴다. 시야가 아주 조금 맑아졌을 뿐 달라지는 건 없었다. 보기 좋게 붉어진 뺨과 반짝거리는 녹색 눈동자. 녹을 듯이 달콤한 미소는 여전히 호의로 가득했다. 손을 뻗으면 잡힐 것 같았다. 셀리아는 떨떠름하게 말했다.

“스테이턴 부인….”

“나디아라 불러 주세요, 전하.”

“…….”

“다행이에요. 혹시 브릿 후작부인처럼 컨디션이 나빠지신 게 아닌지 걱정했어요.”

“…걱정했다고요….”

“네, 안색이 안 좋으셔서? 계속 신경이 쓰였거든요.”

주의 깊게 얼굴을 살피더니 이내 안심한 얼굴로 웃는다. 셀리아는 기가 막혔다. 근처에 다른 사람들이 없었다면 너는 자존심도 없느냐고 쏘아붙였을 것이다. 하지만 검술 대회의 관람석 때와는 달리, 지금 제 곁에 있는 사람들은 셀리아가 본성을 드러낼 수 없는 사람들이었다. 지금이야 셀리아의 편인 양 굴지만, 상황이 바뀌면 언제라도 태도를 뒤집어 험담을 늘어놓을 사람들이었다.

“오라버니와 춤을 추다 셀리아 전하를 보았어요. 혹 무리하고 계신 게 아닐지 걱정이 되어서 인사를 드리러 가고 싶은데 괜찮을지 몰라서 망설이느라 오라버니의 발을 세 번이나 밟았지 뭐예요.”

“…….”

“괜찮으신 것 같으니 안심이에요.”

뭐라 대답을 하기는 해야 할 텐데, 적당한 말이 떠오르지 않았다. 화술은 그녀의 특기 중 하나였는데도 누군가 입을 틀어막은 것처럼 말 한 마디 할 수가 없었다. 직전까지 나디아를 흘겨보며 험담했던 이들이 당황한 것이 느껴졌다.

그러고 보면 그들의 험담에도 셀리아는 대꾸해주지 않았다. 혹시 실수한 게 아닐지 걱정스러울 것이다. 그리고 자신의 남편과 스캔들을 터뜨린 황녀에게 먼저 다가와서는 걱정했다, 뭐다 말을 거는 해맑은 이 여자가 무슨 의도인지, 왜 이러는지 이해할 수 없어서 당황스러울 테다.

그러나 그들보다, 이 홀의 그 누구보다 가장 당황스러운 사람은 셀리아였다.

“방해해도 되겠나?”

“?오라버니.”

“셀리아, 그리고 공작 부인. 멀리서 보아도 화기애애한 분위기더군. 무슨 대화를 그리 나누는지 궁금해 끼어들지 않을 수가 없었네. 나도, 스테이턴 공작도.”

“……황녀 전하를 뵙습니다.”

낮게 가라앉은 목소리에 불편한 심기가 여과없이 드러났다. 거창한 인사는 기대도 하지 않았지만, 고작 턱만 까딱거리는 걸 인사랍시고 받기도 싫었다. 나디아에게 대꾸할 말을 찾지 못해 당황스러웠던 셀리아는 레너드의 개입이 반가웠지만, 그가 끌고 온 원수까지 반갑지는 않았다. 우선 무례한 태도를 지적할 작정이었던 셀리아가 입을 열기 직전, 나디아가 루크의 팔을 찰싹 때렸다.

“루크, 태도가 그게 뭐예요.”

“내가 뭘.”

“인사를 하면서 사람을 그리 노려보는 게 어디 있어요.”

“하지만.”

“다시 해요, 다시.”

“…….”

“어서.”

위협적으로 눈을 부릅떠봤자 조금도 무섭지 않았다. 딴에는 위협이겠지, 저게…. 셀리아가 말했다.

“익숙하니 괜찮아요, 부인. 스테이턴 공작의 태도가 나쁜 거야 하루 이틀의 일이 아닌걸요.”

“네? 늘상 이랬다고요?”

나디아가 깜짝 놀라며 루크를 쳐다보았다. 비난이 담긴 눈길에 루크는 항변했다.

“늘 이라고 할 만큼 자주 만나지도 않았잖습니까!”

“적어도 얼굴을 볼 때마다 이보다 태도가 좋은 적도 없었죠.”

“…….”

“그러니 신경쓰실 것 없어요, 부인.”

어느 쪽이냐 하면, 태도가 나빴던 건 셀리아 자신이었다. 루크는 고개만 까딱거릴지언정 인사는 했지만 자신은 그를 사람 취급도 하지 않았다. 제 시야에 털복숭이가 걸리는 게 짜증나서 모르는 척 외면했다. 셀리아는 루크를 올려다보았다. 그는 자신을 비난하는 부인을 섭섭하다는 듯 애절하게 바라보고 있었다.

“내 말은 안 믿는 거요? 자주 만나지도 않았다니까.”

“믿어요, 믿는데…….”

“믿는다면?.”

“하지만 방금 태도가 좋지 않았던 건 사실이잖아요. 저 다 봤어요. 인상 쓰는 거.”

“…….”

고작 인사였다. 쌍방 태도가 좋지 못한 건 사실이었으나 굳이 깍듯한 인사를 차려 받을 사이도 못 됐다. 셀리아는 루크가 나디아의 말을 듣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다. 다음부터는 이러지 않겠다고 지키지 않을 약속을 해 주면 나디아는 넘어가줄 것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루크는 미간을 깊이 찡그린 채로 셀리아를 돌아보았다.

‘진짜 하려고?’

나디아가 엄격하게 눈을 부릅뜨고 그를 감시했다.

“……황녀 전하를 뵙습니다.”

마지못한 기색을 완전히 지우지는 못했지만, 인상을 찡그리거나 부루퉁한 목소리가 아닌, 그럭저럭 온전한 인사였다. 형편없이 짧고 투박했지만, 뭐, 루크치고는 봐줄 만했다. 애초에 나디아가 문제 삼은 건 말이 아니라 인상이다. 그는 인사를 하고서 셀리아가 아닌 나디아를 쳐다보았다. 나디아는 기다렸다는 듯이 손을 뻗어, 그의 뺨을 쓰다듬었다.

“참 잘했어요.”

셀리아는 제 눈을 의심했다. 누군가가 터뜨린 작은 탄성이 들렸다. 루크가 저보다 작은 부인이 쓰다듬기 쉽도록 허리를 숙여 주었을 뿐만 아니라, 어린애나 개한테 할 법한 칭찬을 듣고도 세상을 다 가진 양 행복하게 웃었기 때문이다. 나디아는 그걸 또 자랑스럽다는 듯이 보고 있다가 셀리아를 쳐다보았다.

뭐지 이건. 남편과 자신의 사이가 이만큼 좋다고 비꼬는 건가? 끼어들 틈은 원래 없었다고? 아니면 과거야 어찌 되었든 지금은 내 손에서 꼼짝도 못 하니까 신경쓰지 않는다는 선언인가. 대체 이걸 어떻게 해석해야 좋을지 알 수가 없었다. 셀리아 자신이라면 당연히 과시고 비아냥거릴 의도였을 것이다.

하지만 저건. 마치 ‘우리 개가 덩치가 크고 크게 짖지만 사실 나쁜 개는 아니에요’라고 어필하듯 보는 저 눈은 뭐란 말인가.

‘나보고 뭘 어쩌라고….’

무슨 말을 해 주길 바라는지 알 수가 없다. 셀리아는 나디아를 이해하려는 시도를 포기하기로 했다. 먼저 다가와 염려를 건넨 순간부터, 그녀는 자신이 이해할 수 있는 상식의 범주를 뛰어넘었다. 시작부터 그랬으니 비아냥거림이든, 과시든 알아들을 수 있을 리가 없었다. 말은 몇 마디 하지도 않았는데 너무나 지치고 피로했다. 그녀는 뭐라 말하는 대신 레너드에게 도움을 청하기로 했다.

숨을 죽여 어깨를 떨며 웃던 레너드는 기분이 좋았으므로 여동생의 말 없는 구조 요청을 받아주었다.

“부인께서는 내 여동생이 무척 마음에 드셨나 보군.”

“네!”

“무척 기쁜 일이야. 그렇지 않나, 루크?”

루크는 대답하지 않았다. 셀리아는 자신을 살벌하게 노려보는 루크를 어이없다는 듯 쳐다봤다. 성추행을 했을 때보다 더 살벌한 눈길이었다. 내가 대체 뭘 했다고. 레너드가 이어 말했다.

“하지만 나도 여동생이 시집가기 전 마지막 축제를 제대로 즐기고 싶어서 말이야. 겨우 인사나 나눈, 크흡, 참이라 미안하지만….”

“아….”

“한 곡 추고 싶은데, 셀리아.”

도중에 웃음을 터뜨릴 뻔했으나 레너드는 그린 듯한 ‘왕자님’답게 춤을 청했다. 셀리아는 그의 손에 제 손을 얹으며, 나디아에게 눈짓으로나마 인사를 했다. 나디아는 싱긋 웃으며 치맛자락을 들어 인사했다. 레너드가 작게 속삭였다.

“달변가였던 내 동생은 어디로 가고.”

“시끄러워요…. 저 여자 대체 뭐야, 대체 왜 나한테 와서?.”

셀리아는 레너드의 팔꿈치를 세게 잡아 끌며 말했다.

“무슨 생각이지? 왜 날 좋아하지? 왜 저러지? 저게 어떻게 가능하지? 머리가 어떻게 된 건가? 아니, 분명 의도가 있을 거야.”

“글쎄다.”

“그러지 않고서야 어떻게 저래요. 사람인데, 개도 아니고 사람인데….”

잠깐 강아지처럼 보인 순간이 떠올랐다. 제 머리도 이상해져 가는 게 틀림없었다. 사람이 개로 보이다니, 정상이라면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내가 너한테 무슨 짓을 하려고 했는데. 비록 제대로 성공한 건 아무것도 없었지만, 그 시도와 의도만으로 만들어진 말들이 많았다. 자신에게 잘 보이려 나디아의 험담을 속살거리던 사람들처럼.

모르는 것도 아니면서, 상처 받지 않은 것도 아니면서 말이다.

“내가 무슨 짓을 했는데, 내가 자길 어떻게 하려 했는지도 모르고, 아….”

“아, 어쩐지 이해가 돼서 싫군.”

“네?”

레너드는 괴로워하는 셀리아를 보며 쓰게 웃고 말았다. 당연히 비비 꼬여 있어야 할 사람 속이 그러지 않으니 참 당황스럽지, 당황스럽고말고…. 레너드도 그녀와 비슷한 경험이 있었다. 심지어 현재진행형이었다.

“저 집안에 약한 건 우리 집안의 내력일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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