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8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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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는 행복했는데.’
고작 두어 시간 전인데도 꿈만 같았다. 꿈처럼 환상적이기는 했지……. 나디아는 누더기를 걸쳐도 예쁘겠지만 오늘 그녀는 마치 신부처럼 아름다웠다. 정작 그녀가 웨딩드레스를 입어 주었을 때는 너무 긴장해서 제대로 살펴보지도 못했던 게 떠올랐다. 물론 눈을 감으면 선명하게 그려낼 수 있지만, 아까운 건 아까운 거였다.
다시 웨딩드레스를 입어 달라고 하면 들어줄까. 싫다고 할까…. 제대로 보지 않았다고 섭섭해할까? 섭섭해하는 것도 귀엽겠지…. 역시 납치를 강행했어야 했다. 이깟 무도회가 다 무어라고. 나디아도 안나에게 미안할 뿐이지 싫은 건 아니라고 말해주었다.
‘설렌다고 했지. 두근거린다고….’
그의 어떤 모습도 멋있었다고, 해주었다. 좋다고, 사랑한다고 말하는 것이 반복되면 지겨울 만도 하건만 말할수록 자라나는 감정이 신기했다. 깊어지고, 또 다른 의미를 가지고, 자라난다. 나디아는 무의식 중에 그러는 거겠지만? 그녀가 자신을 사랑해준다는 걸 당연하다는 듯이 말해줄 때마다 루크는 문득문득 견디기가 힘들었다.
안나와 제이에게 말했다가는 또 짐승 같다고 하겠지만(인간에게는 감정을 표현하는 다양한 방법이 있다는 둥, 고릴라냐는 둥, 혹시 인간끼리 소통하는 방법을 잊어버린 거냐는 둥…. 무례하기 짝이 없다), 마구 날뛰며 소리를 지르고 싶었다. 그녀를 끌어안고 빙글빙글 돌고도 싶고, 세상에 자랑하고도 싶고….
생각을 이어가던 루크는 문득 눈살을 찌푸렸다.
‘여전하군.’
시선이 자석에 달라붙는 철가루처럼 모여들었다. 신경을 갉작이는 관심은 퍽 거슬렸으나 적당히 흘려넘길 만했다. 루크는 목을 죄는 타이를 풀어헤치고 싶은 욕구를 눌러 참으며 주변을 훑었다. 저와 눈이 마주치기 무섭게 다른 방향으로 돌아가는 얼굴들이 우스웠다.
두려움이든, 경멸이든, 호의이든……. 그에게는 아무런 의미가 없다.
변함없이 달콤한 도시와 지루한 인간들. 루크는 새삼 자신이 이 도시를 무척 싫어했다는 사실을 떠올렸다. 밀폐된 실내에 모여 알록달록하게 꾸민 사람들이 그에게는 어항 속 금붕어처럼 보였다.
‘지금은 나 역시 별다를 바 없는 꼴이지만.’
스스로 어항 속에 들어오게 되는 날이 올 줄이야 상상도 하지 못했다. 은근한 협박이 섞인 압박에도 그는 굴할 마음이 없었다. 꼭 필요할 때가 아니면, 이 숨 막히는 도시에는 발을 들이고 싶지 않았다. 딱히 끔찍한 기억이 있어서가 아니라 그저, 도저히 좋아지지 않았기 때문에.
“여유로운데?”
불쑥 튀어나온 목소리는 놀라울 것도 없었다. 레너드가 자신에게 다가올 때부터 기척을 느끼고 있던 루크가 지루한 감상을 숨기지 않고 그를 보았다. 무례한 반응에도 레너드는 피식 웃고 말았다.
“이제는 아는 척도 안 하나?”
“금붕어 똥처럼 달고 다니던 것들은 다 어쩌고 혼자 계십니까.”
명문가의 자제들로 구성된 금붕어 똥들은 루크만 보면 짖어대는 습성이 있었다. 인상이 희미해 얼굴을 하나하나 기억하지는 못하지만 으르렁거리는 꼴을 구경하는 재미가 있다. 능글거리는 레너드를 상대하는 것보다는 그쪽이 나은데. 루크는 혀를 찼다. 레너드는 루크가 재미있어한다는 것을 깨달은 직후부터 그를 만나러 올 때에는 늘 혼자 움직였다. 어딘지는 몰라도 지금도 이 근처에 있겠지.
“그러는 자네야말로 왜 혼자 있나? 부인은?”
“……저쪽에 있습니다.”
루크의 시선을 따라 레너드의 눈이 홀을 향했다. 느린 곡조를 따라 사람들이 춤을 추고 있었다. 딱히 기교가 필요하지 않은 느린 춤곡은 데뷔탕트에게도 어렵지 않아 홀에는 꽤 많은 사람들이 나와 있다. 레너드는 혼잡하게 섞인 사람들 틈바구니에서 공작 부인을 찾아보려 했지만 실패했다.
“저기 어딘가에 있단 말이지. 남편을 두고?”
“……형님과 춤을 추고 싶다고 해서.”
“그래도 첫 곡은…. 아.”
춤을 출 줄 알아야 춰 주겠지. 루크가 살벌하게 노려 보았지만 비식 새어나오는 웃음까지 막을 수는 없었다.
“그러게 진작 배워두지 그랬나.”
“……됐습니다. 다른 남자도 아니고 형님이시니.”
“앤더슨, 앤더슨이 저기 있단 말이지…. 아, 저기 있군. 호오.”
나디아는 찾아내지 못한 주제에 앤더슨은 쉽게도 찾아냈다. 루크는 수상쩍다는 듯 레너드를 보았다.
“전부터 느꼈습니다만…. 제 형님께 관심이 지나치지 않으십니까?”
“자네가 형님이라 부르기 전부터 우린 친했네만. 자네도 보았잖나?”
얼마 차이가 안 나기는 하지만 루크보다 먼저 친해지기는 했으므로 거짓말은 아니었다. 입에 침도 바르지 않고 뻔뻔하게 대꾸하는 레너드는 오히려 “언제부터 네 형님이었다고 잔소리냐”고 투덜거렸다. 루크가 사납게 눈을 부라리지 않아도 레너드는 앤더슨에게는 나쁜 짓을 할 수 없었다. 달리 생각하면 그를 곁에 둔다면, 언젠가 넘을지도 모르는 선을 경계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지 않아도 이제껏 곁에 둔 적 없던 타입이라 귀중하게 여기고 있다네.”
“……뉘앙스가 조금 애매합니다만….”
“……그나저나 정말 사이가 좋은 남매로군…….”
형제가 없는 루크는 물론이고, 형제들과의 사이가 좋지도 나쁘지도 않은 레너드로서는 알 수 없는 관계였다. 박자에 맞추어 나디아가 발을 딛으면 앤더슨이 그녀의 허리를 지탱해주었다. 그들은 눈이 마주치면 웃었고, 마주치지 않아도 웃었다. 웃느라 박자를 놓치기도 했지만 금세 또 웃는다. 멀리서 보아도 사이가 좋다는 게 보였다.
“평생 보았을 얼굴인데 저리 좋을까.”
“나디아 얼굴은?.”
“아, 알았네. 그만하게.”
“…….”
“자네가 호들갑을 떨지 않아도 오늘 밤의 주인공은 자네 부인이 틀림없으니까.”
둥글게 펼쳐지는 치맛자락을 보다 루크에게로 시선을 돌린 레너드가 짜증스럽게 눈살을 찌푸렸다. 그가 다가오기 전까지 누구도 다가오지 못하게 날 선 분위기를 풍기던 남자가 허물어지듯 웃고 있는 것이 보였기 때문이다. 저렇게 좋을까, 는 앤더슨만이 아니라 루크에게도 묻고 싶은 거였다.
‘사랑이 뭔지.’
그것이 무엇이기에 이 남자를 이토록 망가뜨렸는지. 레너드가 이어 말했다.
“자네에 대한 소문도 오늘로 완전히 종식될 거야. 셀리아와의 스캔들…… 은 뭐 그렇다 치고, 적어도 오늘 이후로는 그 누구도 자네를 야수라 부르지는 못할 걸세.”
“그거야 뭐 상관없습니다만.”
“자네에게는 상관없어도 자네 부인에게는 가장 중요한 목적이었을 텐데.”
“…….”
“셀리아와의 스캔들보다 더 신경을 쓰는 것 같더군.”
“결혼 직후까지 절 따라다니는 그 소문을 믿었다는 게 어지간히 미안한 모양이더군요.”
“정작 자네는 신경도 쓰지 않는데 말이지.”
“……제게 겁을 먹는 바람에 고생을 좀 하긴 했습니다만.”
“다 자네가 방치한 결과 아닌가. 그러게 진작 손을 봐두었으면 되었을 것을.”
“미안해할 것 없다는데도.”
루크는 미묘한 표정으로 턱을 문질렀다. 레너드는 그게 이 남자가 쑥스러워 짓는 표정이라는 걸 알고 싶지 않았다.
랭커스터 남작의 막내딸은 퍽 성공적으로 제 얼굴을 알렸다. 사실 그녀 자신의 힘이라기보다는 브릿 후작 부인의 영향력이 컸다. 라 트에빌레에 참석하더라도 선천적으로 기관지가 약한 탓에 검술 대회에는 거의 얼굴을 보여주지 않던 브릿 후작 부인은 그녀와 낮부터 함께 다녔다. 몸이 안 좋은 상황에서도 무도회까지 동행하여 확실히 선언해준 것이다.
나디아 마샤 스테이턴을 보호해주기로 했다는 것을.
하지만 브릿 후작 부인이 아니더라도 나디아 마샤 스테이턴은 퍽 잘해냈다. 부담스러운 시선 속에서도 의연하게 웃을 줄 알았고, 제 옆을 지키는 커다란 남자를 다정하게 이끌었다. 셀리아 황녀와 스캔들이 났을 때에도 사람들은 진실 여부를 떠나 스테이턴 공작에게 호기심을 품고 있었다. 그를 직접 보았던 이들은 사실 그가 미남이었다는, 웃기지도 않는 소문에 코웃음을 쳤으며? 보지 못한 이들은 얼마나 잘생겼으면 셀리아 황녀가 반했을까 궁금해했다.
하지만 스테이턴 부부를 앞에 두고서 셀리아의 이름을 떠올리는 자는 없었을 게 틀림없었다.
부인의 말에 귀를 기울이기 위해 기꺼이 허리를 숙여주는 남편과, 남편의 옷깃을 정리해주는 부인은 부부로서 완벽해보였다. 그리고 부인의 곁에 바짝 붙어서서 봄바람처럼 웃던 남자가, 그녀가 떨어진 순간 냉랭한 무표정이 된 걸 보았다면, 누구라도 이 부부의 사이를 의심하지 못할 것이다.
“그게 좀 이상합니다만.”
“무엇이?”
“……나디아는 스캔들이 신경쓰이지 않는 건지…….”
“…….”
“그 뒤로 한 마디도 꺼내지 않습니다.”
“……부인이 믿어준다면 다행인 거 아닌가. 그것도 불만인가?”
배부른 소리를 하고 있군, 레너드가 차갑게 말했다. 루크는 진지한 얼굴로 턱을 쓸었다. 그를 훔쳐보는 이들이 감탄하는 소리가 들렸다. 이 남자가 지금 “부인이 의심해주지 않아서 실망하고 있다”는 걸 알아야 할 텐데 말이다.
“아니, 전혀 질투를 하지도 않고.”
“이젠 질투까지 해주길 바라나? 자네 정말….”
“저였다면 못 넘어갔을 겁니다. 물론 나디아가 부정을 저지르거나 배신을 할 거란 건 아닙니다. 저도 나디아를 믿습니다만, 상대가 신경쓰이고 짜증나서 가만히 둘 수 없었을 거란 말입니다. 적어도 상대방이 어떤 수작을 부렸는지, 나디아를 꼬여내려 했는지, 어디서 어떻게 만났고, 어떤 대화를 나누었고, 어떤….”
“?그만하게. 소름 돋으니.”
“어떤 접촉이 있었는지 알아내야만 발 뻗고 잘 수 있을 겁니다. 아니, 솔직히 말하면 나디아는 믿지만 그 상대까지 믿을 수는 없죠. 나디아에게 어떤 흑심을 품었는지 알아내고, 말하지 않는다면 고문을 해서라도 실토하게 만들어서 두 번 다시 접근하지 못하도록 막을 겁니다….”
저건 진심이었다. 한 톨 과장 없는 진심. 잠깐이지만 겁을 먹었다는 걸 들키기 싫은 레너드가 애써 태연하게 대꾸했다.
“성격 아닌가? 앤더슨처럼. 타고나길 사람을 잘 믿는 것일지 모르지.”
“…….”
“아니면 자네가 그만큼 신뢰를 주었거나.”
듣기 좋은 소리를 해주기는 싫었지만 그러지 않으면 화를 낼까 봐 아주 조금, 아주 조금은 무서웠다. 팽팽하게 부풀었던 무언가가 푸시시 바람 빠지는 소리를 내며 쪼그라들었다. 루크는 어두워진 안색으로 벽에 기대고 있던 몸을 일으켰다. 레너드는 저도 모르게 뒤로 조금 물러났다.
“아무리 믿는다고 해도 저라면.”
“자네와 자네 부인은 다른 사람일세.”
“배우자의 스캔들 상대를 볼까지 붉혀가며 좋아할 것 같지는 않아서 말입니다…….”
으득. 이 가는 소리가 들렸다. 형형하게 빛나는 검은 눈동자가 살벌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