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7화
20. 그래서 네가
루크는 미인이다. 나디아는 새삼스러운 사실을 다시금 깨달았다.
‘외모가 중요한 게 아니지만….’
사람은 외모로 판단해서는 안 된다. 어린 시절에 배웠던 가르침대로 나디아는 사람을 외모로 판단하지 않으려 했다. 물론 사람이다 보니 시각적인 영향에서 완전히 자유로울 수는 없지만, 적어도 외모 하나를 가치 기준으로 삼는 일은 없었다.
이것은 어디까지나 평균적인 이야기로, 번개 치는 밤 극악한 소문을 달고 다니는 야수 같은 남자에게 겁을 먹은 것은 특수한 경우였다. 상황 때문에 놀랐을 뿐, 실제로 그녀는 금방 수염 덥수룩한 얼굴에 익숙해지고, 거기서 좋은 점까지 찾아내 반한 이력이 있었다.
누구나 미인을 좋아한다. 미를 추구하는 것은 인간의 본능이라고 한다. 셀리아 황녀가 제멋대로 구는데도 불구하고 평판이 좋은 것은 그 반증이었다. 반하지 않더라도 무의식 중에 너그러워지게 된다.
나디아는 셀리아가 제 뺨을 때리는 상상을 해 보았다. 그녀가 바로 사과해준다면 그다지 화가 나지 않을 것 같았다. 외모가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해왔지만, 사실은 그게 아닐지 모른다.
‘생김새를 떠나 청결도나 의상, 표정은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 가르쳐주는 기준이 되기도 하니까, 어느 정도는 휘둘릴 수밖에 없는 지도….’
타당한 것 같으면서도 어딘지 변명 같았다.
‘너무 멋있어….’
연회복을 차려입은 루크가 너무 멋있어서 넋을 놓고 만 자신에 대한 변명이 맞기 때문이다.
“언제까지 서로 바라보고만 있을 거니?”
웃음기 스민 목소리가 정적을 깨뜨렸다. 일리야는 눈동자가 몽롱하게 흐려진 나디아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죄 꿰뚫어보기라도 한 듯이 입가를 가리고 웃었다. 나디아가 깜짝 놀라 눈을 깜박거렸다. 겨우 정신이 든 모양이었다.
“자, 거기 서 계시지 말고 들어오세요.”
“큼. 크흠.”
문가에 어정쩡한 자세로 서 있던 루크가 어색하게 헛기침을 했다. 그는 삐걱삐걱 소리가 날 것처럼 걸어서 딱 두 걸음을 떼었다. 그는 다시 멈추었다. 뒤에 서 있던 안나가 성가시다는 듯이 그의 뒤통수를 노려보고는 몸을 기울여 옆에 섰다. 일리야가 말했다.
“어머, 멋지네요. 역시 안나예요.”
“살다 보니 각하께 연회복도 다 입혀 드리고…. 역시 오래 살고 볼 일이에요.”
“아직 그리 나이 들지 않으셨으면서….”
일리야는 말 한 마디 하지 않는 여동생을 돌아보았다. 정신을 차린 것 같더니 또 눈이 몽롱하게 흐려져 있었다.
그건 루크도 마찬가지였는데, 그는 겉으로 봐서는 티가 나지 않았다. 오히려 딱딱하게 굳어 있는 표정은 화라도 난 사람 같았다. 그를 한심하게 쳐다보며 안나가 싸늘하게 말했다.
“각하, 부인께 한 마디 칭찬도 해주지 않으실 참입니까?”
“뭐? 아, 그래. 그렇지….”
말만으로 끝나진 않았다. 안나는 일리야와 나디아에게 보이지 않게 루크의 발을 세게 밟았다. 그래 봐야 아파하기는커녕 누가 살짝 어깨를 두드리기라도 한 반응이었지만 빠져버린 정신을 되돌리는 데에는 주효했다.
루크는 나디아를 응시했다. 무어라 말을 하려 입술을 달싹거리던 그가 손바닥으로 얼굴을 쓸었다. 입가에서 멈춘 손바닥 뒤에서 깊은 한숨이 흘러나왔다.
“이, 이상해요? 마음에 안 들어요?”
루크가 멋있다고, 미인이라고 넋이 빠져있을 때가 아니었다. 그의 반응에 불안해진 나디아가 안나와 일리야를 보았다.
안나가 준비해 준 물건들은 너무나 훌륭했다. 결혼을 한 후로 가지게 된 물건들은 모두 손대기 무서울 정도로 훌륭했지만? 오늘은 제 몸에 걸치기도 황송할 지경이었다. 하나하나가 가격을 책정하기 어려운 고급품인 것은 당연했고, 주문을 넣기까지 반년은 걸린다는 의상실과 보석공방에서 특별 주문한 물건들도 많았다.
안나의 안목이야 말할 것도 없었으므로, 창피하지만, 황송한 작품들의 도움으로 꽤 괜찮다고 생각했는데.
루크가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안 가면 안 되나.”
“…….”
라 트에빌레에 데려가기도 부끄러운 수준이란 말인가? 상냥한 루크가 저렇게 말할 정도면 얼마나 대단한 착각을 하고 있었던 건가. 그녀가 뭘 해도 예쁘다, 잘한다 해주던 루크가 저렇게 말할 정도면….
나디아는 울고 싶어졌다. 일리야가 정성 들여 해준 화장이 지워지겠지만 뭐 어떤가. 어차피 루크가 보기에는 이상하다는데….
“솔직하게 말해도 괜찮아요, 루크….”
태연하게 말하려 했지만 목소리가 조금 떨렸다. 그래, 루크도 눈이 있을 텐데. 맨날 거울을 보고, 자신의 얼굴에 익숙할 테니까 기준이 엄청 높은가 보다….
“솔직히 말해도 되겠소?”
“네. 괜히 거짓말로 달래주려고 하지 말고….”
“아까 납치할 걸 그랬다고 후회하고 있소.”
“네?”
“이렇게 아름다운 모습을 다른 남자들이 본다고 생각하면….”
“…….”
“누군가 당신에게 홀려 바라보는 꼴을 참아낼 수 있을지 모르겠소. 그 눈? 을 파내버리고 말 것 같은데.”
과격한 표현이 섞여 있었지만 루크로서는 아주 많이 순화한 결과물이었다. 눈깔을 터뜨려버릴 거라고 말하고 싶었다.
“……루크도 참. 과장스럽긴.”
“진심인데.”
놀랍지도 않겠지만 순도 백 퍼센트의 진심이다. 나디아는 웃어넘겼지만 안나와 제이, 일리야조차 심각한 낯으로 고개를 저었다. 그랬다가는 나디아가 놀라는 정도로 그치지 않는다. 기절할 테니 그만두라고, 눈으로만 나무랐다.
“고마워요. 루크도 멋있어요. 너무 멋있어서 잠깐 꿈을 꾸는 줄 알았어요.”
나디아는 주먹을 불끈 쥐고 의욕을 불태웠다.
“이제부터가 중요하네요.”
“음?”
“오늘부터 잘해야 사람들이 오해를 풀죠.”
“?아.”
루크는 미묘한 눈으로 나디아를 바라보았다.
“스캔들이 가짜라는 것도 알려주고, 루크가 어떤 사람인지도 알려주고요. 애초에 사람에게 야수라니 너무하잖아. 수염 좀 길렀던 것뿐인데….”
“…….”
“그야 저도 처음에는 놀랐지만….”
루크의 침묵을 책망이라 오해한 나디아가 도둑이 제 발 저리듯 변명을 늘어놓았다.
“놀, 놀라긴 했어도 싫은 건 아니었어요! 수염을 기른 루크도 멋있어요!”
“부인, 아무리 그래도 그건 좀 아니지 않습니까?”
오랜만에 제이의 정직한 혓바닥이 바른말을 했다. 루크가 매섭게 노려보았지만 무섭지 않았다. 루크는 사실을 지적했다고 해서 혼을 내는 윗사람이 아니었다. 그랬다면 제이는 벌써 몇백 번쯤 목이 잘려야 했다.
“정말인데. 그야 지금이, 음, 누가 봐도 미인이다 싶긴 하지만 예전부터 루크는 멋있었어요.”
“그게요……?”
아무리 제이라도 차마 본인을 앞에 두고 “사람 꼴은 아니었는데요.”라고 말하지 못했다. 죽일 듯이 자신을 노려보는 루크의 눈빛이 살벌했다. 제이는 근질거리는 입을 겨우 다물었다. 이미 그의 안면근이 채 뱉지 못한 말을 대신해 나불거리고 있었던 덕분이었다.
분위기가 이상해진 걸 깨달은 나디아가 서둘러 덧붙였다.
“멋, 멋있었잖아요! 듬직하고 야, 야성적이고, 또…. 아니, 그렇다고 지금 아니라는 건 아니고….”
“난 아무 말도 안 했소, 나디아.”
진정하라고 꺼낸 말이었지만 그의 목소리에서도 웃음기가 묻어났다. 나디아는 토마토처럼 빨갛게 달아오른 뺨을 숨기지 못하고 어물거리며 고개를 떨어뜨렸다. 당황한 나머지 그가 눈앞에 있었다는 사실조차 잊고 있었다. 루크는 잘게 웃으며 나디아의 허리를 끌어당겼다. 그리고 애써 다듬은 머리칼이 흐트러지지 않도록 이마에 가볍게 입을 맞추었다.
“어떻게 되었든 당신 눈에만 괜찮아 보이면 만족하오.”
“안 돼요…. 다른 사람들도 알아줘야지….”
기어들어 갈듯이 작은 목소리였지만 퍽 단호했다. 나디아는 얼굴에 오른 열이 식길 바라며 루크를 올려다보았다.
‘거짓말한 거 아닌데. 진짜인데….’
수염이 없어졌을 때에는 잠깐이지만 아쉽다고 생각했을 정도였다. 그러나 제이, 안나, 일리야는 물론 루크 본인도 별반 믿는 눈치 같지는 않아서 나디아는 조금 풀이 죽었다. 말끔한 모습이 보기 좋다는 사실까지 부정할 수는 없었지만 말이다. 루크가 미끈한 턱을 매만지며 말했다.
“당신이 그리 말한다면 다시 수염을 길러볼까.”
“정말요?”
“아까도 말했듯이 당신이 좋다면 난 어쨌든 좋으니까.”
셀리아가 스캔들을 조작하며 야수 공작에 대한 소문도 거의 사라졌지만, 루크는 그에 대해 나디아에게 말해주고 싶지 않았다. 자신을 위해 노력해주겠다는데 찬물을 끼얹을 수는 없지 않은가. 너무 기특하고 귀엽고 고마워서 입이 헤벌쭉 벌어지려 했다.
한 입에 삼켜버릴 수 있었다면.
“아, 하지만….”
가만히 루크에게 안겨있던 나디아가 뒤로 조금 물러나며 말했다.
“이따 사람들 앞에서는 너무 붙어있지는 말아줘요.”
“스캔들이 가짜라는 걸 알려주겠다면서?”
“그래야 하지만, 그건 우리가 사이가 좋기만 하면 되는 거고….”
안나가 끼어들었다.
“안 됩니다, 부인. 최대한 평소처럼 계셔 주세요.”
“안나도 저리 말하고.”
“각하께서는 조금 자중하시고요….”
무섭기는커녕 조금 한심해 보이니까요. 안나가 이어 말했다.
“조심성 없이 나불거릴 자들은 두 분이 서 계시는 거리까지 계산해가며 이야기를 만들어낼 테니, 각하께만 좋을 일을 권장해드리고 싶지는 않지만 노력해주시기 바랍니다.”
“그렇다고 하니까, 응? 나디아.”
“그렇지만 루크가 너무 가까이 있으면 두근거려서 말을 제대로 할 수가 없을 거예요.”
“…….”
“손잡고 싶을 거고, 끌어안고 싶어질 텐데. 그러면 힘이 빠져서 자세도 나빠지고….”
점점 차가워지는 사람들의 시선을 깨닫지 못한 채 나디아가 길게 한숨을 쉬었다.
여동생을 사랑하는 일리야조차 이번만큼은 변명을 해줄 수가 없었다. 안나와 제이는 좋아서 죽으려고 하는 루크와 수줍게 그를 쳐다보는 나디아가 진심으로 꼴보기가 싫어졌다. 이 부부를 사람들 앞에 내놓아도 될까. 스테이턴 공작가의 긴 역사에 누를 끼치는 게 아닐까….
차라리 야수 공작이라는 오명이 근엄해서 좋지 않은가. 진지하게 걱정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