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6화
납치 계획은 아쉽게도 무산되었지만 대신 잠깐의 여유 시간이 주어졌다.
루크는 나디아를 끌어안은 채 대문 밖으로 도망치는 대신 저택 안으로 들어갔다. 긴 다리를 활용해 성큼성큼 걷되 안겨있는 나디아가 흔들리지 않도록 세심하게 신경을 썼다. 나디아는 그의 목덜미에 이마를 묻고서 헤실헤실 웃고 있었다.
‘술이라도 마신 건가?’
안나가 대낮부터 술을 마시게 두었을 리가 없는데. 하지만 웃음이 새어나오는 얼굴을 보고 있으니 아무렴 어떠랴 싶었다. 술이야 마시고 싶을 때 마시면 되는 거지, 낮이든 밤이든 무슨 상관인가. 긴 다리를 활용해 나디아의 방으로 들어선 그는 문을 닫기 무섭게 제 목을 끌어내리는 약한 힘에 순응했다. 얼굴을 아주 조금 내리는 것만으로 부드러운 입술이 닿았다.
입매, 턱, 뺨, 광대, 눈꺼풀, 눈썹…. 간지러운 키스가 잘게 쏟아졌다. 루크는 나디아가 땅에 발을 디딜 수 있게 내려주며 물었다.
“기분 좋은 일이라도 있었소?”
“으음. 네.”
“어떤 일?”
깃털처럼 가볍게 닿았다 떨어지는 입술이 아쉬웠다. 루크는 그녀의 입술을 따라가 키스하려 했지만 나디아는 기다려주지 않았다. 땅에 발을 딛고도 체중은 그에게 기댄 채, 그의 뺨을 감싸고 잘게 키스를 이었다. 루크는 그녀가 하고 싶은 대로 내버려두기로 했다.
“어떤 일이었는지 될 수 있으면 상세히 말해주겠소?”
루크의 콧잔등에 입술을 가져대 댄 채로 나디아가 눈을 깜박거렸다. 루크가 말했다.
“당신이 어떨 때 행복해하는지 알아두고 싶어서.”
“음….”
나디아는 어떻게 대답해야 할지 고민하는 듯이 앓는 소리를 냈다. 골몰하듯 찌푸린 미간에 입을 맞춘 루크는 느긋하게 대답을 기다렸다.
“고민해왔던 문제가 별 거 아니었다는 걸 알게 되어서?”
“고민?”
“별 거 아니라고 생각할 수 있게 된 게 기뻤어요.”
“별 거 아니라고…?”
“루크를 만난 거 자체로도 기분은 좋아졌고요.”
나디아는 그 말을 끝으로 입을 다물었다. 더 자세히 묻고 싶었지만 나디아가 그것으로 충분하다는 듯이 그의 허리에 팔을 둘러 끌어안는 바람에 더 묻지 못했다. 나중에 안나에게 캐물어보는 수밖에 없었다. 요즘 들어 안나는 나디아에게 위협적인 일이 아닌 한 말해주려 하지 않아서 쉽지 않을 것 같지만? 남의 눈을 의식하는 그녀가 먼저 안겨들어 키스해줄 만큼 기쁜 일이 무엇인지 반드시 알아낼 작정이었다.
‘그래야 또 받지.’
자신을 만난 것만으로 좋다면 한시도 안 떨어지고 그녀 앞에서 얼쩡거려 줄 자신이 있는데 말이다.
루크는 그녀의 등을 끌어안지 못하고 허공에 팔을 든 채 미간을 찌푸렸다. 마음 같아서는 당연히 안고 싶었지만, 그랬다가는 거기서 만족하지 못할 것이다.
안으면 키스하고 싶고, 키스하면 만지고 싶을 게 뻔했다. 나디아의 포옹에는 색정적인 뉘앙스가 없었고? 될 수 있으면 행복해하는 그녀를 방해하고 싶지 않았다.
게다가 시간이야 어떻게든 조절해본다고 해도 관계가 끝난 후에 바닥날 나디아의 체력이 문제다. 무도회는 새벽까지 이어질 테니까.
‘그렇다고 적당히 안을 자신은 더 없고….’
결국 먼저 손을 대지 않는 수밖에 없었다.
항복하는 사람처럼 양팔을 들고 있는 루크를 발견한 나디아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루크는 구구절절한 제 심정을 설명해주는 대신, 그대로 머리만 내려 사랑스러운 코끝에 입을 맞췄다. 나디아는 허리에 둘렀던 팔을 풀어내며 상체를 뒤로 밀고 그의 얼굴을 올려다보았다.
말을 하지 않고 가만히 눈을 마주치고 있는 것은 생각보다 어색하다. 나디아가 자고 있을 때 그 얼굴을 가만히 바라본 적은 많았다. 눈이 마주치면 키스를 하거나 웃거나, 그도 아니면 말이라도 하고는 했는데. 그러나 나디아는 입을 맞추거나 말을 꺼내기는커녕 웃지도 않았다.
맑은 녹색 눈동자에는 어딘지 얼이 빠진 남자가 보였다. 그녀에게 어떻게 보일까, 지나치게 의식한 나머지 표정이 형편없이 굳었다. 한 번 의식하자 자연스러운 표정이 무언지 알 수가 없어졌다. 눈썹을 어떻게 두었는지, 입술은 벌리고 있었는지 닫고 있었는지…. 평생 한 번도 생각해본 적 없던 것들이 헷갈렸다. 잠시 그 이상한 표정을 감상하던 나디아가 풋 하고 웃었다.
“왠지 오랜만인 것 같아요.”
“…이제부터는 꼭 잠이 깨길 기다렸다가 인사를 하고 가겠소….”
역시 화가 난 건가. 기분이 좋았다가 제 얼굴을 보다 보니까 화가 났나 보다…….
“아니, 그게 아니라요.”
“……?”
“여기 온 이후로는 루크하고 편안하게 대화한 적이 없는 것 같아서요….”
나디아는 배시시 웃으며 그의 가슴에 뺨을 기대었다. 루크는 가만히 그녀의 둥근 뒤통수를 쓰다듬었다. 매끄러운 머리칼이 손바닥을 기분 좋게 스쳤다. 나디아는 그 손길이 퍽 마음에 드는지 나른하게 숨을 내쉬었다. 햇빛 아래에 누운 고양이처럼.
돌이켜보면 그랬다.
스테이턴 성에서 영주로서 업무를 볼 때는 더 바쁘고 여유가 없었다. 그럼에도 루크는 아주 조금이라도 여유가 생기면 나디아에게 달려갔고(그중 한두 번은 달려가다 시간이 다 되어서 만나지 못하고 돌아갔다), 나디아도 그를 찾아왔다. 그럴 때에는 시답잖은 것들을 말하고는 했다. 무얼 했는지, 기분이 어떤지 뭐 그런 시시콜콜한 이야기들이었다.
지금보다는 서로가 조금 더 조심스러워서 말 한 마디에도 심장이 터질 것처럼 두근거렸다. 하도 시끄러워서 나디아의 목소리를 듣지 못할까 봐 심장을 터뜨려버리고 싶은 적도 있었다.
아무리 그래도 심장이 터지면 죽을 거라서 시도해보지는 않았지만.
그러나 라 먼스트로드에 온 후로는 그러지 못했다. 이번에는 루크가 나디아를 내려다봤다.
착각이 아니라면, 나디아는 라 먼스트로드에 돌아온 후부터 우울했다. 긍정적이고 건전한 사고방식에 반해 그녀는 사람 간의 관계에 있어서는 무척 부정적이고 겁이 많았는데, 그리워하던 가족들 품에 돌아왔음에도 밝아지기는커녕 점점 더 우울해했다. 원래 자신감이 넘치는 스타일은 아니었다지만 위축된 게 보일 지경은 아니었다.
루크는 어디까지 물어도 되는지 가늠하고 있었다. 어디까지 참견해도 되는지를. 남편이라고 해서 멋대로 상처를 헤집을 권리가 있는 건 아니었다. 게다가 자신은 말재주도 없다. 말을 잘못 꺼냈다가 달래주기는커녕 상황을 악화시킬 수도 있었다.
“…돌아갈까?”
“네?”
“당신이 아쉽지 않다면 지금 당장이라도.”
“아뇨!”
루크는 눈을 깜박거렸다. 그래도 조금은 망설일 줄 알았다. 라 먼스트로드를 떠나면 공작부인 자리에 어울리지 않는다고 불안해할 필요도, 쓸데없는 소문으로 마음을 다칠 일도 없다. 안나를 필두로 한 스테이턴 성의 사람들은 나디아가 맨손으로 고기를 집어 먹어도 “어휴, 배가 얼마나 고프셨으면!”하고 안타까워하거나 “뜨거운 고기를 맨손으로 집었다가는 손가락에 화상을 입으실 텐데!”하고 걱정만 할 것이다.
인자한 척하지만 알고 보면 냉혈한 집사 그렌트조차 “허우대만 멀쩡한 라 먼스트로드 남자들이 나디아 님의 마음을 훔치려 할 수 있으니 방심하지 말라”는 충고를 했었던 것만 봐도, 스테이턴 성이 얼마나 나디아에게 푹 빠져있는지 알 수 있다. 물론 가장 푹 빠진 사람은 영주인 루크 리처드 스테이턴이다.
“…당신은 여기 와서, 그다지 기뻐 보이지 않았는데.”
“음….”
“잘못 본 거라면 미안하오.”
“…아니에요. 잘못 본 것도 아니고요. 나름 티를 안 냈다고 생각했는데 다 들켰다는 게 민망해서 그래요.”
나디아는 무안한 듯 어설프게 웃었다.
“돌아오기 전에는 가족들이 너무 보고 싶어서 생각을 못 했는데……. 결혼하기 전까지 저, 음, 사람들하고 그리 잘 지냈던 건 아니라서….”
“누가 시비를 걸었소?”
그 사람을 찾아가 패주기라도 할 기세로 루크가 물었다. 나디아는 고개를 저었다.
“아뇨. 그럴 리가요.”
“누가 괴롭히면 살짝 말해주시오.”
“……어쩌시려고요…….”
“별 건 안 할 거요.”
그 대단한 얼굴을 구경해주고, 감사하게도 시비를 걸어준다면 내친김에 몇 대 패줄 생각이었지만 그게 뭐 대단히 큰일은 아니니까 별 거는 아니었다. 음, 아니고 말고. 루크는 제 선량한 의도를 어필하며 근엄하게 대답했지만, 나디아의 녹색 눈동자에는 불신이 가득했다.
신뢰로 반짝이던 녹색 눈동자가 어느새 변해버렸다. 루크는 탄식했다. 물론 이 따가운 눈길도 매력적이다.
“…루크, 폭력은 안 돼요.”
“오해요, 나디아. 난 민간인은 때리지 않소.”
먼저 덤벼오지 않는 한은 말이다. 먼저 덤비면 그는 방어할 수밖에 없으므로, 그건 정당방위일 뿐이다. 생각을 이어가던 루크가 문득 물었다.
“당신 친구라는, 제임스 밀리언은 기사인가?”
“루크가 제임스를 어떻게 알아요?”
“할머님 댁에서 잠깐 마주쳤었지. 친구라고 소개하기에 인사를 나누었소.”
“…기사는, 아닌 걸로 알아요. 검을 배운다고 했던 것 같기는 한데…. 레이나한테 들은 거라 정확하진 않구요.”
착실하게 아는 대로 대답하면서도 나디아는 떨떠름한 기색을 감추지 못했다. 루크는 그녀가 제임스의 이름을 들었을 때 잠깐 스쳐지나간 감정을 읽었다. 짜증도, 분노도 되지 못한 그것은 껄끄러운 감정의 찌꺼기였다. 기분이 좋아지기 시작했다.
“친구는 맞고?”
“으으음. 한 시간 전까지는 일단….”
지금은 친구도 아니라는 뜻이다. 루크는 대답하지 않고 나디아의 어깨를 토닥거렸다. 기사는 아니어도 검술을 익혔으니 아주 민간인은 아니고, 한 시간 전부터는 나디아의 친구도 아니었다. 루크는 활짝 웃었다. 자신이 나디아를 만나지 못하는 동안 무려 1시간이나 그녀를 독차지한 남자를 봐줄 필요가 없어진 것이다. 개소리를 들어주는 인내를 발휘할 필요도 없어졌다.
루크에게 안긴 나디아가 웅얼거리며 말을 이었다.
“…오랜만에 돌아오니까 자꾸 그런 게 생각이 났어요. 스테이턴 성에서는 감사하게도 나를 좋게 봐주었지만 원래 다 나를 싫어했는데, 날 싫어하는 사람들이 나 때문에 루크도 안 좋게 보면 어쩌나. 나 때문에 피해를 보면 안 되는데. ……내가 이렇게 보잘것없는 걸 보고, 루크가 날 싫어하면 어쩌나…. 이렇게 못나서, 실망하면….”
“…….”
“……그래서 조금.”
배시시 웃는 얼굴이 귀엽지 않은 건 처음이었다. 루크는 대답 대신 말랑한 그녀의 볼을 한 손으로 쥐었다. 살이 움푹 들어가며 나디아가 놀란 얼굴이 되었다. 붕어처럼 모인 입술을 무표정하게 보던 루크가 말했다.
“곤란한데.”
“모, 모가요….”
볼이 눌린 탓에 발음이 뭉그러졌다. 루크는 웃지 않으려고 턱에 힘을 주었다. 아냐, 역시 귀여워….
“라 먼스트로드 사람들은 나를 더 싫어하지 않소? 그럼 당신도 날 싫어할 거요?”
“아, 아니에여! 그럴 리가 업짜나여….”
“나도 마찬가지요. 다른 사람이 뭐라고 하든 평생 당신을 싫어하게 될 리는 없어.”
“우….”
“그런 걸로 고민씩이나 하고 있었다니. 또 그런 소리를 하면….”
루크는 눈을 가늘게 떴다. 나디아는 그가 제게 해를 끼치지 않을 거라는 걸 알면서도 불안한지 그의 손에 붙잡힌 머리를 뒤로 슬금슬금 밀었다. 그래 봤자 조금도 움직일 수 없었지만 시도는 해 봤다. 적당히 놓아주려던 루크는 애를 쓰는 나디아가 귀여워서 잠시만 더 붙잡고 있기로 했다. 혹시 아플까 봐 손에는 힘을 주지 않고 팔에만 힘을 주어서 고정시켰다.
“르크!”
힘을 주어서 그런지 눈가가 빨개졌다. 화를 내도 될 텐데 그러지는 못하고 일그러진 눈으로 노려만 보는 게 귀여웠다. 루크는 잠시 넋을 놓을 뻔했다가 겨우 정신을 차렸다. 말하던 중이었지.
“내가 당신을 얼마나 사랑하는지 모두가 알게 해 주겠소.”
나디아의 눈이 “어떻게요?”라고 물었다. 루크는 흐뭇하게 웃으며 대답했다.
“두어 달 침실에 박혀 나가지 않으면 자연스럽게 세상이 알게 되지 않을까?”
“안대….”
“좋은 생각 같은데. 당장?.”
나디아는 결연하게 고개를 뒤로 젖혔다. 말하다 보니 너무 기가 막힌 아이디어라 혹해버렸지만, 더 놀렸다가는 정말 화를 낼 것 같아 루크는 순순하게 손을 풀어주었다. 씩씩거리며 화를 내려던 나디아는 얼굴을 놓아주기 무섭게 쏟아지는 입맞춤에 타이밍을 놓쳐 버렸다.
“안심해도 좋소. 당신에게 반하기 전에도 후에도, 당신밖에 안 보여.”
좀 심각하지…….
관자놀이부터 시작해 콧잔등, 눈가, 뺨, 귓바퀴. 루크는 조금 전 그녀가 했던 대로 입을 맞추었다. 뾰로통한 얼굴로 입맞춤을 받아낸 나디아가 뾰족하게 말했다.
“그래서 셀리아 전하와 스캔들이나 났고요?”
“윽, 어떻!”
마침 입술에 닿은 그의 입술을 나디아가 콱 깨물었다. 루크가 놀라며 뒤로 물러났다. 나디아가 어떻게, 누가. 너무 당황한 나머지 머릿속으로도 문장이 이어지지 않았다. 얼마나 세게 물었는지 입술이 욱신거렸다. 피가 나는 게 틀림없었다. 루크는 그 와중에 피가 났다는 걸 나디아가 알면 놀랄까 봐 손으로 입가를 가렸다.
“나디아, 잠깐! 아니, 그런 거 아니, 아니?.”
“…….”
“뜬소문, 아니, 오히려 원수요! 그 여자하고는 아무런 일?.”
루크가 도중에 말을 멈췄다. 성추행은 당했는데 이걸? 아무 일이 없다고 할 수는 없고, 뭐라 말해야 하지?
“그 여자라뇨. 여신처럼 아름다운 셀리아 전하를 어떻게 그렇게 부를 수가 있어요!”
“아니, 나디아, 그게….”
움직여라, 입. 일해라, 언어 능력…. 나디아의 녹색 눈동자가 차갑게 식었다.
“아무 일도 없었던 게 아닌가 봐요….”
“…접촉이 조금.”
“…….”
“내가 당한 거요! 내가 피해자요! 믿어줘요. 폐하께 가서 확인해봐도 돼, 정식으로 사과도 받았으니까?.”
이 덩치를 하고서 당했다고 실토해야 하다니. 루크는 난생처음 울고 싶어졌다. 냉랭한 얼굴로 그를 잠시 쳐다보던 나디아가 나직하게 한숨을 쉬었다.
“……다행이다.”
“으응?”
내가 당해서……?
“당신이 셀리아 전하보다 내게 먼저 반해서.”
나디아는 배시시 웃으며 루크의 목을 끌어안았다. 화난 게 아닌가 보다. 그녀는 그가 놀린 걸 돌려준 거였지만? 진심으로 놀랐다. 혼날 만하다고 생각해서 더 그랬다.
“놀랐잖아…….”
지옥에 떨어졌다가 겨우 현세로 돌아온 루크가 끙 신음을 삼켰다. 그는 자신을 놀린 아내를 약간의 보복을 겸하여 힘주어 끌어안았다. 두 번 다시 놀리지 말아야지 다짐했다. 나디아가 정색하면, 그게 진심이든 아니든 무서워서 울 수 있을 것 같았다. 안 그래도 꼴사나운데 울기까지 하면 정말 얼굴을 들 수가 없을 거다.
나디아는 빠르게 뛰는 그의 심장 위에 입을 맞췄다.
“내가 먼저 당신이랑 결혼해서, 다행이에요.”
미인은 선착순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