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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수라는 공작에게 시집왔는데-125화 (125/150)

125화

세상 모든 남자가 다 바람을 피워도 내 남편은 그럴 리가 없다는 어리석은 확신일까.

세상에는 랭커스터 남작처럼 절대 바람을 피우지 않는 남자도 있기는 하겠지만, 거의 대부분은 부인과 애인을 따로 생각했다. 부인과 애틋하기 짝이 없는 사이라고 하더라도 정부 여럿을 두는 데 거리낌이 없었다. 죄책감을 가질 필요가 없는, 아주 당연한 일이기 때문이다.

제 주변도 그런데 하물며 공작이야 말할 것도 없었다. 그런데 이렇게도 철석같이 믿다니….

브릿 후작 부인의 환심을 살 정도로는 영악해졌다고 생각했던 나디아가 순식간에 멍청했던 과거의 모습으로 돌아갔다. 좋게 봐 주려고 작정한다면 순진하겠지만, 제임스에게는 멍청해 보일 뿐인 반응이었다.

“남편을 믿고 싶은 마음은 이해해.”

멍청하고 가엾은 소꿉친구.

“믿고 싶겠지. 네 남편만은 그럴 리가 없다고.”

“…….”

“하지만 이유 없이 스캔들이 나진 않는다는 걸 알잖아. 그리고 황녀와 결합하면 공작이 얻을 이득을 생각해 봐.”

제임스는 올라가려는 입꼬리를 감출 수가 없었다. 나디아가 스테이턴 공작 부인이 되었을 때부터 가슴 깊은 곳에 자리잡았던 열등감이 희열이 되어 끓어올랐다.

예상과 다른 것이 너무 많았다. 브릿 후작 부인과 셀리아 황녀, 레너드 황태자까지 동석한 나디아를 멀리서 보았을 때부터 제임스는 불안했다.

제임스에게 한 번도 웃어준 적이 없던 브릿 후작 부인은 멀리서 보아도 알 수 있을 만큼 따뜻한 눈으로 나디아를 보았다. 황태자도 표정이 밝았다. 그는 아직 아무것도 하지 않았으므로 일이 잘못되어도 잃을 것은 아무것도 없었지만, 당연히 제가 주워 가질 거라 여겼던 물건을 예상외의 사람들이 버리지 않아서 초조했다.

심지어 나디아는, 그래, 인정하기는 싫지만, 저들과 제법 잘 어우러졌다. 얼굴이 빨개진 채로 입을 다물고 고개를 숙이거나 울지도 않았다. 수줍어 보이기는 했어도 비굴해 보이지는 않았다. 제 말처럼 필사적으로 노력한 결과였다. 진작 저랬다면 레이나도 자신도 조금은 덜 답답했을 텐데.

“잘 모르지만 대충은 알겠어. 하지만 그래도 루크는 아니야.”

“나디아.”

“셀리아 황녀 전하를 만났어. 나조차 두근거릴 만큼 아름다운 분이었어. 누구라도, 루크라도 눈길을 빼앗기지 않았을 리 없다고 생각해.”

나디아는 또박또박 말했다. 그녀가 이토록 확신에 차서 말한 적이 있었던가. 적어도 제임스가 기억하는 바로는 처음이었다.

“하지만 루크는 절대 바람을 피우지 않아.”

“…….”

“셀리아 황녀 전하를 사랑하게 되었다면, 나하고 이혼부터 할 거야.”

“…….”

“내가 셀리아 황녀 전하보다 매력이 있어서가 아니고, 설레는 게 당연하다고 생각하지만…. 그래도 루크가 나한테 잔인한 짓을 하지 않으리라는 건 분명히 알아.”

“…….”

나디아는 셀리아에게 스캔들이 있었다는 걸 직접 들었으면서도 어째서 담담할 수 있었는지 깨달았다. 루크가 절대 자신을 상처입히지 않으리라는 믿음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건 자신에 대한 연약한 믿음과는 달리 무척 견고했다. 설령 제게서 마음이 떠났다고 하더라도 기만은 하지 않을 거라고 믿었다.

루크는 그럴 리가 없으니까 불안하지 않았던 것이다. 어차피 아니라는 걸 아니까.

“그걸 어떻게 확신해. 나디아, 사람은 태연하게 거짓말을 해.”

“…알아….”

레이나를 떠올린 나디아가 우울하게 대답했다.

“네 남편이 속삭이는 듣기 좋은 말만 믿어서는 안 돼, 나디아. 여러 가능성을 생각해 봐야지. 내가 말했잖아? 네가 믿고 싶은 것만 믿어서는 안 돼.”

“그래도 루크는 아냐.”

“남자라는 동물이 얼마나,”

“루크는 아냐.”

“네겐 그럴지 몰라도,”

“?할 말은 그게 전부야?”

마지막 말이 차갑게 뚝 떨어졌다. 나디아는 제가 이런 목소리를 낼 수 있을 줄 몰랐다. 제임스도 마찬가지였다. 자신과 눈도 잘 맞추지 못했던, 답답하도록 말을 더듬던 소꿉친구가 한 번도 본 적 없는 얼굴로, 한 번도 들은 적 없는 목소리로.

네까짓 게.

제임스는 웃으려고 애를 썼다. 나디아는 부들거리는 제임스의 입매 근처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왜 이제야 보이는 걸까.’

제임스는, 자신과 다른 종류의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레이나처럼? 사람들의 중심에 자연스럽게 서는 사람, 타인의 의지가 되어줄 수 있는 사람이라고 말이다. 모자란 소꿉친구를 챙겨주려 하며, 다른 사람은 해주지 않는 충고를 해주는 거라고. 나름대로는 내가 소중하기 때문에.

아니었어. 나디아는 깨달았다. 제임스의 단정한 얼굴에는 해갈되지 못한 열등감이 스쳤다. 억누르고 있지만 부들거리는 입매, 억울한 분노가 도사린 눈동자.

제임스는 나디아의 생각보다 어리고 어설펐다.

‘예전이었다면 눈으로 보고도 몰랐을 텐데. 차라리 몰랐다면 좋았을 걸.’

아니다. 예전이었더라도 저렇게 노골적이라면 알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리고 지금처럼? 담담할 수도 없었겠지. 제임스도 자신을 싫어한다는 사실에 끝없이 우울해졌을 테다.

결혼 후 재회한 제임스가 어째서 불편했는지 알 수 있었다.

그에게 매달릴 필요가 없다는 걸 깨달아 거리를 두어 보니, 제임스의 말, 눈빛 그 어디에도 우정이 없다는 게 보였기 때문이었다.

레이나와 어긋난 후에도 제임스를 찾지 않았던 건 나디아도 어느 정도 알고 있었기 때문일지 모른다. 제임스가 레이나와 마찬가지로 자신을 친구라고 생각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그리고 아쉬운 듯이 말하고 있지만 나디아 자신도 제임스를 친구라고 생각하지는 못했던 것 같았다.

친구라기보다는 교본, 혹은 동경하는 이상형이 아니었을까.

“제임스.”

“…….”

“난 비참하지 않아.”

너만 아무것도 모르고 노력하면, 네가 너무 비참하잖아. 나디아는 그 말을 꼭 부정하고 싶었다. 진실을 알면 사라질 거짓된 소문까지 전해주지 않은 건 배려였다.

“가족들은 나처럼 루크를 아니까 스캔들을 알고도 말해주지 않은 거야. 나만 모르는 채로 바보 취급하려는 게 아니야.”

말도 해주지 않은 건 역시, 부정할 수 없는 과보호라고는 생각한다. 하지만 과보호에는 이력이 나서 이 정도쯤은 아무렇지 않았다. 무시당하는 데 익숙하고, 과보호 받는 데에도 익숙하다니, 스스로 생각해도 참 모순된 단련이었다. 나디아는 내심 웃고는 부드럽게 말했다.

“걱정해줘서 고마워. 이만 가볼게.”

“…잠, 잠깐.”

“?다시는 안 봤으면 좋겠다.”

우정 한 조각 없던 수많은 충고들은 나디아의 영혼에 고스란히 상처로 남았다. 수많은 거짓말과 얇은 우정 속에 숨긴 짜증이 가장 큰 상처가 되었지만, 그들의 마음에 들기 위해 노력했던 시간들이나? 그들의 말에 자신을 혐오했던 시간들이 아무렇지 않은 건 아니었다.

제임스는 레이나와 다르다.

레이나와는.

“잘 지내. ……가요, 안나. 기다려줘서 고마워요.”

제임스가 손을 뻗었지만, 사각에서 모습을 드러낸 안나를 보고서 손을 거두었다. 나디아는 그럴 줄 알았다는 듯 흘긋 보고는 미련없이 걸어나갔다.

*

그리운 사람이 눈에 들어오자마자 나디아는 뒤를 돌아보지 않고 뛰었다.

“마차가 멈추기도 전에, 부인!”

“넘어지면 어쩌려고, 나디아!”

에스코트를 기다리기는커녕 마차가 채 멈추기도 전에 문을 열고 뛰어나가는 공작 부인에게 잔소리가 떨어졌지만 나디아의 귀에는 들리지도 않았다.

“루크!”

“나디아!”

속도를 줄이지 않고 달려든 나디아를 루크는 가볍게 안아 올렸다. 사람을 들어 올렸다고는 믿기지 않는, 아주 조금의 힘도 들어가지 않는 듯 가뿐한 얼굴로. 나디아가 그의 목을 끌어안았다.

“보고 싶었어요, 루크.”

“오늘 새벽에도 보았잖소.”

“루크만 봤죠. 비몽사몽할 때 입만 맞추고 가버렸으면서.”

“당신도 대답했는데.”

“잠에 취해서 기억도 잘 안 난단 말이에요. 그러니까 오늘은 처음 보는 거예요.”

어리광을 부리듯이 그의 목덜미에 이마를 비빈 나디아가 투덜거렸다. 사실 어렴풋하게 기억이 나긴 했으나 희미하게 흐려진 얼굴을 종일 그리워하는 건 무리였다. 깨우지 않고 갔다가는 인사하지 않고 갔다고 투덜거리고, 억지로 깨워 인사를 하면 기억나지 않는다고 투정이다. 어이없는 트집에도 루크는 웃을 뿐이었다.

“그렇군, 처음 만나는 셈이군. 좋은 아침이오, 나디아.”

“이미 3시가 넘었는데.”

“당신을 보아야 하루가 시작되니까 아침이 맞소.”

루크의 어깨 너머에서 누군가 구역질을 하는 소리가 들렸다. 한심해하는 눈길도 따갑다. 이쯤이면 쑥스러워하며 슬그머니 떨어졌을 테지만, 나디아는 꿋꿋하게 루크에게 안겨 있었다.

‘목과 어깨의 비율, 허리, 몸 길이, 팔, 두께.’

눈으로 보는 것보다 직접 손으로 만져보는 게 확실했다. 제 몸을 더듬거리는 손길에 루크가 화들짝 놀라며 숨을 들이켰다.

“아침, 이오만, 부인….”

“네?”

“……밤이 아니어서 아쉽다고.”

루크는 느릿하게 숨을 뱉으며 말했다. 나디아는 가까이에 있는 루크의 눈을 빤히 보다가 저도 모르게 입술을 가져갔다. 가볍게 닿았다 떨어진 입맞춤에 루크는 얼떨떨한 얼굴을 했다. 수줍음이 많아서 누가 보는 앞에서는 먼저 키스해주지 않는 나디아가….

“지금은 왜 밤이 아니지.”

루크가 통탄했다. 나디아는 그 입술에 또 입을 맞췄다. 쪽, 쪽. 나디아가 입을 맞출 때마다 루크가 목 아래로 앓는 소리를 냈다.

“이제 아침이라면서요”

“큭….”

“너무 좋아, 루크.”

“…….”

“사랑해요. 너무 좋아요, 진심으, 읍?”

넘쳐흐르는 사랑스러움을 견디지 못하고 고백을 쏟아내던 나디아의 입을 루크가 손바닥으로 틀어막았다. 손바닥을 쓰려면 한손으로 안아 올리고 있다는 건데? 검술 대회에도 나가야 하는 팔이 걱정되어 나디아가 미간을 찌푸렸다.

“루크, 내려줘요. 팔이 아플 거예요.”

“납치하고 싶어.”

“예?”

“이대로, 납치하면.”

나직한 중얼거림은 진심이 가득 묻어 있었다. 나디아는 무서운 얼굴로 진지하게 범죄 계획을 말하는 남편이 사랑스러워서, 소리 높여 끌어안으며 웃었다.

나중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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