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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수라는 공작에게 시집왔는데-124화 (124/150)

124화

제임스는 브릿 후작 부인을 모시고 돌아가기 위해 왔다고 했다. 정확히는 근처에서 기다리고 있었던 그가 휴게실로 향하는 브릿 후작 부인을 발견하고 따라온 거였다. 브릿 후작 부인은 제임스를 뿌리치며 말했다.

“되었다고 하지 않았니. 날 환자 취급하지 마라.”

“하지만 조모님.”

“도움을 바라지 않는다고 했다. 돌아가.”

제임스가 곤란한 듯이 물러섰다.

“계속 괜찮다고, 내버려 두고 가라고 고집을 부리고 계셔.”

일리야가 속닥거렸다. 그녀의 작은 목소리를 들었는지 브릿 후작 부인이 날카롭게 노려보았다. 일리야가 찔끔 어깨를 떨었다.

“고집이 아니라니까. 잠시 쉬기만 하면 되는 걸 우르르 몰려와서 이 난리를 치다니….”

자존심이 상했는지 미간에 주름이 깊게 잡혔다. 제임스도, 일리야도, 안나조차 괜찮다고 우기는 브릿 후작 부인을 이길 수가 없었다. 그러나 나디아가 보기에, 아니, 이 자리에 있는 모든 사람이 보기에 브릿 후작 부인이 괜찮지 않은 건 자명했다. 그녀의 낯빛은 아주 창백하고, 얄팍한 가슴도 밭게 오르내렸다.

하지만 환자 취급은 죽어도 싫은 브릿 후작 부인이 순순하게 제 상태를 인정할 리는 없어 보였다. 나디아도 브릿 후작 부인을 조금은 알게 되었다. 그녀는 자존심을 다칠 바엔 콱 혀를 깨물고 죽어버릴 사람이었다. 나디아는 두 주먹을 꽉 움켜쥐고 각오를 다졌다. 좀 창피하지만 이 상황을 부드럽게 넘길 방법은 딱 하나뿐이었다. 다행히 이 자리에는 아주 낯선 사람도 없었다.

“아!”

“나디아?”

“어, 어지러워. 어떡하지, 언니.”

“…….”

“아, 어지러워라….”

비틀거리며 저에게 기대어오는 여동생을 부축한 일리야는 미묘한 표정으로 콧잔등을 찡긋거렸다. 나디아는 정말…… 사랑하는 여동생은 정말, 연기에는 재능이 없었다. 일리야는 나디아는 “배우는 데 오래 걸릴 뿐, 못하는 게 없는 아이다!”라고 주장하고 있었지만? 연기만은 연습조차 지켜봐줄 수 없을 것 같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나디아가 갑작스럽게 잘하지도 못하는 연기를 시도하는 이유는 알 것 같았다. 일리야는 터지려는 웃음을 꾹 눌러 참고 말했다.

“그래? 안 되겠다. 돌아가야겠어. 쓰러지면 어떻게 하니!”

“지금 돌아가시면 컨디션도 회복하고, 준비도 완벽하게 할 수 있을 거예요. 더 늦으면 시간이 모자랄 거예요.”

안나가 재빨리 맞장구를 쳤다.

브릿 후작 부인에 이르러서는, 어설픈 연기를 벌이는 나디아를 어이없게 바라보고 있었다. 저걸 지금 속으라고 하는 짓인가, 싶었다. 기대는 척했지만 저보다 체구가 작은 자매를 배려해 자신의 두 다리로 서 있었고, 우울한 척을 하고 있지만 혈색은 매우 건강했다. 부끄럽기는 한지 뺨이 붉어져 있다. 어이가 없어서 헛웃음이 나오려고 했다.

‘대범하다고 해야 할지, 멍청하다고 해야 할지. 저 뻔한 수작을 모르리라 믿는 건 순진한 건가.’

나디아가 말했다.

“그럴까요? 그럼 후작부인, 혹시 괜찮으시다면….”

“…처음부터 부인과 동행했으니 저만 남을 수는 없죠….”

“배려해주셔서 감사해요!”

누굴 위한 누구의 배려야. 아픈 척하던 걸 까맣게 잊었는지, 힘차게 말한 나디아가 눈을 반짝거리며 안나를 보았다. 안나가 잘했다는 듯 부드럽게 웃어 주었다. 그리고 제임스 대신 브릿 후작 부인을 부축해 일으켜주었다. 안나는 내밀어진 청년의 손을 보았지만 의도적으로 무시했다.

“스테이턴의 마차를 쓰시지요.”

“거기까진 정말….”

“기왕 배려해주시는 김에.”

내가 널 어떻게 이기겠어. 브릿 후작 부인이 작게 속삭이고는 순순하게 안나에게 기대었다. 제임스는 내밀었던 손을 무안한 듯이 거두었다. 이 와중에도 브릿 후작 부인은 제임스를 신경도 쓰지 않았다. 일리야가 휴게실의 문을 열어주었고, 브릿 후작 부인과 안나가 나갔다. 나디아도 그 뒤를 따라가려 했으나, 뒤에 남은 제임스가 마음에 걸려 뒤를 돌아보았다.

나디아를 보며 반갑게 말을 걸었을 때만 해도 제임스는 퍽 밝게 웃고 있었다. 그러나 대놓고 무시할 가치도 없다는 듯이 없는 사람 취급을 당한 제임스의 얼굴은 안쓰럽게도 일그러지고 말았다. 브릿 후작 부인은 의식하지도 못했을 뿐이었다. 부른 적도 없는 먼 손자가 엉겨붙어 일을 성가시게 만들어 짜증스럽다, 정도로는 생각했을까.

나디아는 그 얼굴이 낯설어 잠시 응시했다. 제임스가 문득 그 시선을 눈치채고 쓰게 웃으며 말했다.

“……고집을 부리시니 어쩔 수가 없네.”

성마른 기질이 고스란히 드러난 민낯. 제임스가 저런 얼굴도 했던가? 잠시 과거를 돌아보던 나디아는 자신이 제임스에 대해 아는 게 그다지 없다는 걸 깨달았다. 유년기에는 많은 시간을 보냈지만 각자 자라고 난 후에는 짧은 대화만 나눌 뿐이었고, 그나마도 레이나가 함께였다.

제임스는 사교성이 좋은 사람, 주변으로부터 신뢰를 받는 사람, 그녀를 생각해 충고를 아끼지 않는 사람이었다. 잘 웃고, 밝은, 자신과는 다른 사람. 닮고 싶은 사람? 이었지만.

그게 전부인가? 그가 무엇을 좋아하는지, 사실은 어떤 성격인지, 식성은 어떤지. 하나도 모른다.

레이나와 어긋난 후로 나디아는 이제 친구라고 부를 만한 사람은 제임스밖에 남지 않았다고 생각했으면서도, 레이나에게는 답장이 오지 않을 편지를 몇 통이나 보낸 데 반해 제임스에게는 한 통도 보내지 않았다. 생각도 떠올리지 못했다.

“잠깐 이야기 좀 할 수 있을까, 나디아.”

“지금? 하지만….”

“잠시면 돼. 우리 그동안 제대로 대화를 나누지도 못했잖아.”

확실히 일방적으로 떠들었던 10여 분의 시간은 대화라고 하기에는 무리가 있었다. 아무리 정신이 없었다고 하지만 그를 성가시다고까지 생각하고 말았던 나디아는 죄책감을 느꼈다. 일리야가 따라나오지 않는 나디아가 마음에 걸리는 듯 뒤를 돌아보았지만, 차마 제임스를 무시할 수도 없었다.

‘하지만 장소가 적당하지 않은데. 휴게실이라고 해도 밀폐된 공간이고, 단 둘이면 말이 나오기도 쉽고….’

하지만 브릿 후작 부인에게 외면을 당해 상처를 받은 듯한 제임스를 이대로 뿌리치기도 여의치가 않았다. 나디아가 뒤를 흘긋거렸다. 휴게실 문은 완전히 닫히지 않았다. 나디아는 문틈 사이로 안나가 입은 드레스 자락을 발견했다. 나디아는 그제야 안도하고 제임스를 보았다.

안나가 기다려주고 있지만 시간을 오래 끌고 싶지는 않았다. 나디아가 얼른 말하라는 듯 그를 올려다보자 제임스가 미묘한 표정으로 그녀를 보았다. 그가 말했다.

“……달라졌네, 나디아.”

“정말?”

“그래. 훨씬 예뻐졌고….”

“많이 노력했어!”

정말 많이 노력했기 때문에 제임스의 칭찬이 무척 기뻤다. 제임스는 눈이 높았고, 언제나 아플 만큼 정확한 진실을 지적하는 친구였으므로 그의 평가는 믿어도 좋을 거였다. 장밋빛으로 물든 뺨을 보던 제임스가 문득 이를 악물었다.

“잘 어울리는 것처럼 보여. 저 사람들과.”

목소리에 스민 적의가 따갑다. 나디아는 눈을 깜박거렸다. 제임스는 영문을 모르는 듯이 순진한 소꿉친구가 가증스럽게 보였다.

“봤지. 핏줄인데도 자작가인 날 어떻게 취급하는지.”

“작위가 무슨 상관이야. 후작 부인께서는 몸이 안 좋으셔서 여유가 없으셨을 거야.”

“평소에도 날 심부름꾼으로나 취급하는 분이야.”

“그건….”

애초에 브릿 후작 부인께서 부른 게 맞기는 한가? 나디아는 난감한 듯이 제임스를 응시했다. 나디아는 매일 제임스와 마주쳤었다. 그러나 수업 시간 동안 브릿 후작 부인이 제임스에 대해 언급하는 일은 단 한 번도 없었고, 아주 조금 알게 된 부인은 사람을 매일 불러낼 만한 사람은 아니었다.

‘애초에 심부름 정도는 시킬 만한 사람이 많을 텐데….’

제임스는 딱히 어떤 일을 맡고 있는 것 같지 않았고, 심부름이라도 시켜주는 건 자신을 찾아온 손자를 일 없이 돌려보내기는 미안했기 때문일 것이다. 무엇이라도 도와줄 수 있게 해달라고, 오늘처럼 먼저 찾아와 조르는 데에야 달리 무슨 일을 시킬까. 나디아가 원하지 않았는데도 데려다주겠다고 굳이 찾아왔던 그 며칠처럼.

안나가 제임스의 이야기를 듣고서 흘러가듯 “야심이 큰 청년이군요.”라고 말했던 게 떠올랐다. 그가 브릿 후작 부인을 끈질기게 찾아오는 이유를 아는 듯했다.

“본의가 아니실 거야.”

“……넌 그렇게 말할 수 있겠지. 무슨 수를 썼는지 몰라도 조모님은 네가 무척 마음에 드신 것 같아. 나와 달리.”

“그 정도까진 아니야. 아무렴 친손자인 너하고 비할까….”

“아니, 정말 그래. 믿기지가 않는군. 네 어설픈 연기를 모르는 척해주시는 걸로도 모자라 웃기까지 하셨으니.”

“…비웃으신 거 아닐까.”

웃었다면, 어이가 없어서 비웃었던 게 틀림없었다. 나디아의 뺨이 홧홧하게 달아올랐다.

“저 사람들과 우리 사이에는 선이 있어. 너는 이제 모르겠지만.”

“…….”

음울하게 읊조리는 남자는 마치 처음 보는 사람처럼 낯설었다. 나디아는 무슨 말을 해야 할지 가늠할 수가 없었다. 그렇지 않아도 말재주가 모자란 나디아에게, 낯설기까지 한 남자와 대화를 나누는 건 너무나 어려운 일이었다.

브릿 후작 부인에게 상처를 많이 받았구나, 조모님에게 사랑을 받고 싶었구나. 하지만 어떻게 위로를 해야 할지 모르겠다. 나디아에게는 조모도 없었고? 가족에게는 늘 지나치게 사랑을 받아 고민이었다. 아무리 머리를 쥐어짜봐도 이 경우 제가 할 수 있는 말이 아무것도 없었다.

“네게 꼭 말하고 싶은 게 있어서 불렀어.”

“응! 뭔데?”

할 말을 찾지 못한 나디아는 바뀐 화제를 반갑게 덥석 물었다.

“네게 말해주어야 할지 한참 고민했어. 너에게는 너무 잔인한 소식일 테니까. 널 지극히 아끼는 가족들이 말해주었을 리도 없고, 네 남편 측이야 말할 것도 없겠지…. 하지만 너에 대한 일을 너만 모르고 있는 건 역시 불합리하잖아?”

“…아.”

“넌 그들 사이에 끼어 보겠다고 이렇게 노력하는데. 이래서야 네가 너무 비참해.”

나디아는 제임스가 무슨 말을 하려는지 눈치챘다. 제임스는 비통한 어조로 말을 이었다.

“네 남편은 사실?.”

“그거 알아.”

“뭐?”

“루크와 셀리아 황녀 전하의 스캔들 말하는 거지.”

나디아는 담담하게 말했다. 목소리가 떨리지도, 표정이 일그러지지도 않았다.

“?알고 있다고?”

“얼마 안 됐지만, 응….”

“그걸 알고도 노력했다고? 자존심도 없어? 부인인 네가 있는데도 스캔들이 났다는 게 뭘 뜻하는지 몰라서?.”

“으음, 무시당하는 건 익숙하거든….”

레이나와 다니면 대놓고 방해물 취급을 받는 경우가 많았다. 브릿 후작 부인에게 무시당한 제임스를 무시할 수 없었던 것도 제게 그런 경험이 무척 많기 때문이었다. 아마 이 말을 루크에게 했다면 왜 화를 내야 할 때까지 웃느냐며 잔소리를 들을 거였다. 그리고 자신보다 더 화를 내주겠지. 겁을 먹을까 봐 염려해서 티를 내지 않으려고 하지만 굳은 얼굴까지 숨기지는 못하고….

“내가 있어도 아무도 신경쓰지 않았다는 거겠지.”

“그래, 그리고 스캔들이 날 만큼 두 사람의 사이가?.”

“그건 아니야.”

나디아는 드물게도 강한 어조로 말했다. 제임스로서는 처음 듣는 목소리였다. 그는 눈을 깜박거리며 나디아를 보았다. 그녀는 단단하게 빛나는 녹색 눈동자로 제임스를 똑바로 쳐다보며, 말했다.

“루크는 그럴 리 없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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