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야수라는 공작에게 시집왔는데-123화 (123/150)

123화

*

루크와 셀리아와 스캔들.

나디아는 사교계에 떠도는 스캔들 몇 가지를 알았다. 어느 부인이 남편을 두고 애인과 도망을 쳤다느니, 결혼하지 않은 아가씨가 유부남과 지나치게 친밀하게 지내 의심스럽다느니 하는 소문들이었다. 레이나와 아직 친하게 지낼 무렵까지는 그녀가 떠드는 이런 이야기들을 흥미롭게 듣는 척이라도 해야만 했다.

지금 생각하면 레이나는 나디아와의 대화가 지루하기 짝이 없었던 것이었다. 레이나는 스캔들의 내용을 풀어놓으면서 종종 “그렇지? 너무하지?”라고 물어볼 때가 있었는데, 정작 나디아가 대답을 하면 싸늘하게 식어서는 재미없어했다. 아마 나디아의 대답이 그녀가 원하던 종류가 아니었거나, 애초에 대답을 바라고 한 말이 아니었기 때문일 테다.

이제 와서는 어느 쪽인지도 알 수 없지만, 나디아는 레이나가 눈을 반짝거리며 재미있어하는 게 좋았기 때문에 바보처럼 웃으며 고개만 끄덕거려 주었다. 딱 그 정도가 레이나가 바라는 반응이었다.

‘핫, 아니지. 지금은 레이나를 생각할 때가 아니었어.’

나디아는 앓는 소리를 내며 미간을 찌푸렸다. 최근 레이나를 자주 떠올리게 된다. 사이가 벌어진 후로는 우울해지기만 하는데도 그만둘 수가 없었다. 아무래도 라 먼스트로드에 돌아왔기 때문이리라. 그 애와 가장 많은 곳을 다녔으니까. 하지만 그녀는 아직 바깥에 있었고, 비록 주변에는 아무도 없다지만(그러니까 말을 걸 만한 사람 말이다)? 시선을 의식해야만 했다.

‘생각하자, 생각…. 셀리아 황녀 전하, 루크, 스캔들….’

스캔들, 루크, 셀리아 황녀…. 나디아는 제가 아는 몇 가지 스캔들을 참고해 세 단어로 조합할 수 있는 가장 끔찍한 상상을 해보려고 노력했다. 셀리아 황녀와 루크가 사랑하는 사이였다거나, 최근 황녀의 암살 위협을 계기로 재회했다거나, 알고 보면 둘이 무척 애틋한 사이였다거나, 나디아에게는 바쁘다고 얼굴 한 번 보여주지 못하는 사이에 그들은 밀회를 즐기고 있었다거나…….

“…….”

굳이 상상을 하려니 기분이 좋지는 않았다. 하지만 딱 거기까지였다. 머릿속을 떠도는 세 단어는 서로 붙으려고 하질 않았다. 루크는 루크, 셀리아 황녀는 셀리아 황녀, 스캔들은 스캔들. 상상력이 발휘되지 않으니 심각하게 와닿지도 않았다.

‘그보다는 셀리아 황녀 전하가 걱정인 걸….’

남편에게 몰랐던 스캔들이 있었다는 걸 알게 되었고, 그 스캔들의 또 다른 주인공을 부인이 걱정한다는 건 역시 이상하다. 그러나 나디아의 머릿속에는 두 사람이 엉킨 장면이 아니라? 제게 스캔들을 말하던 셀리아의 얼굴만 가득했다. 왜일까. 나디아에게는 셀리아가 더 상처를 받은 듯이 보였다.

그 말은 분명 자신을 상처입히기 위한 것이었는데도.

“부인.”

“…안나, 왔어요?”

안나가 돌아왔다. 안나는 당황스러운 듯이 텅 빈 주변을 훑었다. 웬만해서는 표정이 변하지 않는 그녀가 당황한 얼굴이 재미있어서 나디아는 음료가 담긴 잔을 건네받으며 슬쩍 웃었다.

“셀리아 황녀 전하와 함께 계시지 않았나요?”

“음.”

“…혼자 계실 줄 알았다면 가지 않았을 텐데….”

“아니에요. 목이 말랐는 걸요. 황녀 전하께서 일어나신지 얼마 안 됐고요.”

사실이었다. 이제 겨우 두 번째 시합을 준비하고 있었으므로 고작해야 10여 분이었을 테다. 나디아는 아쉬운 듯이 대기석을 흘긋거렸다. 루크를 볼 수 있다면 좋을 텐데, 그녀가 앉은 자리에서는 대기석 자리까지는 보이지 않았다.

“끝까지 자리를 지켜야만 할까요?”

“…브릿 후작부인께서 컨디션이 좋지 않으시니 모시고 돌아가셔도 좋을 거예요. 지루하신가요?”

“그건, 아닌데….”

“솔직하게 말씀하셔도 괜찮습니다.”

나디아는 무안한 웃음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루크가 이기는 걸 보았으니, 봐야할 건 다 봤다는 생각이 들어 남은 시합에는 그다지 흥미가 가지 않았다. 그녀는 기사를 동경하는 소녀가 아니었고, 검같이 무서운 물건을 사람에게 향하는 장면은 썩 재미있지 않았다.

‘루크는 이길 거라 확신하기도 했고, 응원해주고 싶었고, 혹시 다치기라도 하면 안 되니까 봐야 했지만….’

날붙이가 스치는 쇳소리가 귓가에 들리는 듯하다. 사람을 상처입히는 소리는 언제나 무섭고 소름이 끼쳤다.

“어차피 앞으로 2주나 남았어요. 첫 시합은 관람하셨고, 저녁 무도회도 준비해야 하니 이만 가시죠.”

“루크는 랭커스터 저로 돌아올까요?”

“……늦지 않으실 겁니다. 만약 늦으신다면 제가 따끔하게 혼내드릴게요.”

고작 시녀장이 무려 공작을 혼내주겠다는 선언에도 공작부인은 아무런 위화감도 느끼지 못했다. 나디아는 여전히 안나가 제게 깍듯하게 구는 게 어색했다. 그녀에게 많이 의지하고 있긴 했지만 시중을 받을 때에는 어쩔 수 없이 마음이 불편했다. 루크와 제이드 앨런을 비롯, 흑곰 기사단원들도 안나를 마치 조모처럼 여기고 있다는 걸 알게 된 후로는 더욱 그랬다. 시중을 들어주어야 할 것 같은데 시중을 받고 있으려니….

안나는 이제까지 보지 못했던 차림새였다. 수수하지만 우아한 맵시를 잘 살린 드레스를 입은 그녀는 여느 귀부인과 다르지 않았다. 라 트에빌레에 따라오기 위해서는 이쪽이 더 낫다는 브릿 후작 부인의 의견을 반영한 결과였다.

‘예쁘다.’

나디아의 눈길을 눈치챈 안나가 부드럽게 웃었다. 훔쳐보다 들킨 것 같아 쑥스러워진 나디아는 배시시 웃었다. 그러다 퍼뜩 정신을 차리고 표정을 고쳤다.

“브릿 후작부인께서 이 자리에 계셨다면 혼이 났겠죠, 으으….”

“글쎄, 제 눈에는 귀엽기만 했는데요.”

“안나도 제 어리광을 너무 받아줘서 그래요.”

짐짓 원망스러운 말투였으나 안나를 올려다보는 눈에는 밉지 않은 투정뿐이었다. 안나는 나디아의 옷매무새를 가볍게 고쳐주고는 손을 잡아 일으켰다. 나디아가 뺨을 붉혔다. 그녀는 안나를 따라 걸어나가며 속삭였다.

“가끔 안나한테 설레는 거 알아요? 너무 멋있어….”

“과찬이세요, 부인.”

여유로운 태도조차 멋있다. 나디아가 눈을 반짝거리자 안나는 웃고 말았다.

“부디 각하 앞에서는 숨겨 주세요, 부인. 다 늙어서 각하의 성가신 질투를 받는 건 버거울 테니까요.”

“네! 철저하게 숨길게요!”

고개를 끄덕거리며 의욕을 불태우는 나디아가 귀여웠다. 숨긴다고 해 봐야 감정을 숨기는 데 서툰 나디아는 금세 들켜버릴 게 틀림없었다.

“브릿 후작부인은 괜찮으세요?”

“휴게실에서 쉬고 계실 거예요. 기관지가 약하셔서 옛날부터 흙먼지에 약하셨죠. 그래서 야외 활동도 거의 못 하셨고….”

“그럼 오늘도 관람은 처음부터 무리였던 게?.”

“말려도 듣지 않으셨거든요.”

그랬을 것 같기는 했다. 나디아는 현명하게 말을 아끼기로 했다.

별 것 아닌 이야기를 나누며 걸으니 먼 거리도 금방이었다. 나디아는 카넬로 알바즈 경에 대해서 물어보고 싶은 충동을 참느라 여러 번 혀를 깨물었다. 루크가 안나에게도 말을 하지 않은 것은 그만의 이유가 있을 거라 여겼다. 그렇다면 제가 먼저 발설해서 그를 곤란하게 만들 수는 없었다.

루크 본인에게도 모르는 척을 해주어야 할까? 나디아는 거짓말을 못 했지만, 타인의 비밀을 지켜주는 것이라면 아무 말도 하지 않는 것쯤은 할 수 있었다. 직접적으로 추궁당하지 않는 이상에는.

‘황궁은 크구나….’

나디아가 참석한 파티는 부모님의 지인이거나 일리야, 앤더슨의 지인이 여는 파티가 대부분이었다. 황궁에서는 일 년에 두 번 커다란 무도회를 열었지만 한 번도 참석해본 적이 없다. 작은 규모의 파티에도 심장이 떨리는데 황궁까지 가는 건 무리였다. 심장이 터져서 죽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레이나는 바보 같다고 놀리며 그래서야 시집도 갈 수 없다고 말했다. 레이나는 황궁 무도회에서 지금의 남편을 만나 백작 부인이 되었다.

라 먼스트로드에서 태어나 자랐으니 황궁은 언제나 눈에 보이는 거리에 있었지만, 나디아는 죽을 때까지 이 호화롭고 무서운 장소와는 인연이 없을 줄 알았다.

그런데 이렇게 들어와, 값비싼 드레스를 걸치고, 우아한 귀부인과 함께, 좋은 자리를 차지하다니.

세상 일은 정말 알 수 없는 거였다.

안나는 시종을 붙잡아 브릿 후작 부인이 사용하는 휴게실로 안내를 명령했다. 나디아는 안나의 자연스럽고 고압적인 명령을 흉내내고 싶어서 유심하게 관찰했다. 턱을 들고, 눈을 내리깔고? 그러나 흉내를 낸다고 한들 안나처럼 우아하게 해낼 수 있을 것 같지는 않았다. 브릿 후작 부인이 여러 번 말했던 것처럼 나디아는 지나치게 겸손하고 다정해서, 고압적이고 오만한 분위기는 가지지 못했다. 흉내를 내 보았자 우스울 뿐일 테다. 나디아는 금세 단념했다. 브릿 후작 부인이 안 된다는 데에는 다 이유가 있었다.

‘그래도 오늘은, 음, 셀리아 황녀 전하께 실수한 거 말고는 실수한 거 없지.’

셀리아와 단둘이 남겨놓고 가면서도 브릿 후작 부인은 제게 웃어주었다. 감시하지 않아도 잘 해낼 거라고 믿는다는 뜻 같아서, 나디아는 내심 기대에 부풀었다. 비록 셀리아 황녀 전하 앞에서는 말까지 더듬었지만, 단둘이 있었을 때의 일이고? 스캔들을 말한 셀리아 황녀가 브릿 후작 부인에게 그 실수를 이를 것 같지는 않으니까 안심해도 될 것이다.

그러니까 칭찬을 바랄 수 있다는 거지. 나디아는 휴게실 안으로 들어섰다. 일리야가 가장 먼저 그녀를 반겼다.

“어머, 나디아. 너도 왔구나. 계속 구경하고 있지.”

“후작부인께서 편찮으신데 어떻게 그래. 오늘은 이만 모시고 돌아가려고….”

“그건 내 역할인데, 나디아.”

응? 나디아는 일리야의 어깨너머를 보았다. 브릿 후작 부인이 소파에 기대어 쉬고 있었고, 남자가 그녀에게 물잔을 건네고 있었다. 그는 이 자리에서 볼 거라고는 생각지도 못한 사람이었다.

“제임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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