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2화
나디아는 황녀와 단둘이 남겨져버리고 말았다는 걸 그들이 보이지 않게 되고 나서야 깨달았다.
‘어, 어쩌지. 긴장돼서 땀이 날 것 같아.’
땀이 나면 땀 냄새가 나겠지. 셀리아는 너무 가까이 앉아 있어서 그녀가 땀 냄새를 맡을 수 있을 것 같았다. 나디아는 괜한 짓이라고 생각하면서도 엉덩이를 슬금슬금 옆으로 밀었다. 아직 땀도 나지 않았는데 지레 겁을 먹고 도망가는 꼴이었다. 그래봐야 얼마 못 가기도 했지만 말이다.
태도를 조금 더 신경을 쓰고 있었지만, 일리야가 함께 있어서 그런지 결혼 전 여느 파티에 참석한 것만 같은 기분에 빠져 있었다.
나디아는 제 편이 아무도 없다는 걸 깨달은 순간부터 뱃속이 우그러드는 긴장감을 느꼈다. 가족들이 어쩔 수 없이 자리를 비웠을 때, 제임스가, 레이나가 다른 친구들과 떠나버렸을 때가 떠올랐다.
모두 한 걸음 물러서서는 제게 다가오지 않았다. 악의도, 호의도 담기지 않은 눈으로 흘긋거리기만 하면서.
나디아는 그 눈들이 너무나 무서웠다. 차가운 공기가 제 주변을 둘러싸고 사람들과의 사이에 벽을 세웠다. 먼저 한 걸음 다가가는 것이 불가능하게 느껴졌다. 그녀는 언제나 그 벽 앞에서 아득한 절망에 빠지고는 했다. 옴짝달싹할 수 없는 자신이 무력하고 한심해 스스로를 용서할 수 없었다.
‘언제까지 의지할 수는 없어. 혼자서도 잘 해내야 해….’
혼자서도 잘 해내기 위해서 그동안 노력해오지 않았나. 나디아는 지금이야말로 자기자신을 사랑할 계기를 만들 기회라고 생각했다. 제 편과 함께 다니는 건 든든하지만, 그들에게만 의지해서야 자립할 수 없었다. 검술 대회에서 당당하게 우승한(나디아의 머릿속에서 이미 루크의 우승은 기정사실이었다) 루크에게 부끄럽지 않은 사람이 되기로 했으니까.
말 한 마디라도 걸어 보았다면, 벽이 얼마나 높은지라도 알 수 있었을 텐데.
하지만 한 걸음 내딛기 직전에는 언제나 제임스와 레이나의 목소리가 귓전을 떠돌았다. 어렸을 때부터 아는 사이가 아니었다면 너와 친해질 일은 없었을 것 같아. 안 좋은 습관이야, 나디아. 사람들이 보면 뭐라고 생각하겠니? 어디 가서 이런 건 하지 마. 네 가족들을 부끄럽게 만들 거야….
누가 널 좋아하겠어.
레이나는 뾰족한 말을 하고는 했지만 그래도 꾸준히 그녀를 챙겨주었다. 같이 다녀주었고, 이따금 기분이 좋을 때면 손을 잡고 이끌어주기도 했다. 나디아는 제임스가 고마웠고, 레이나가 고마웠다. 같이 다니려면 답답했을 텐데도 자신을 잊지 않는 남매는 그녀에게 무척 소중한 친구들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와 가깝게 지내주어서 그들이 소중했던 것인지, 소중했기 때문에 친하게 지내고 싶었던 것인지…. 이제 와서는 나디아도 알 수가 없었다.
레이나는, 그렇게 멀어지고서는 연락조차 되지 않았고? 제임스는 어딘가 불편해지고 말았다.
나디아는 마른 목으로 침을 꿀꺽 삼켰다.
“위험한 일이 있으셨다고 하던데….”
긴장으로 쉬어버린 목소리가 튀어나왔다. 나디아의 얼굴이 발갛게 달아올랐다. 하지만 말을 꺼낸 이상 돌이킬 수 없었다. 셀리아가 그녀를 빤히 보고 있었다.
“다치지 않으셔서 다행이에요.”
“……고마워요.”
셀리아는 떨떠름하게 대답했다. 죽이려고까지 했던 상대에게서 진심 어린 찬사와 염려를 받는다는 건 매우 이상한 경험이었다. 실질적으로 해를 끼치지 못했다지만 그것은 결과일 뿐이다. 셀리아는 루크를 유혹하려는 동안 나디아의 존재를 신경도 쓰지 않았고, 지금도 그녀를 꼬드겨 이혼을 종용할 속셈으로 만만했다.
살의를 포함했던 악의가 새삼 검게 도드라졌다.
고작 남작 딸보다 내가 못할 리 없다고, 유혹하려는 남자 앞에서 이성을 잃고 소리를 질렀던 것이 고작 며칠 전이었다. 셀리아에게 나디아는 여전히 고작 남작 딸이고, 루크가 제 계획을 완전히 망쳐놓지 않았다면 제아무리 진심 어린 찬사가 기뻤다고 해도 이리 말랑하게 굴지는 않았을 것이다.
루크와의 결혼, 안타까운 과거의 연애 스캔들로 쌓아 올릴 이득에 비하면 남작 딸은 먼지 같은 존재일 뿐이었다.
아무런 세력도 없이, 강제로 결혼하여 공작부인이 된 남작의 딸. 아무것도 모른 채로 감금 같은 보호를 받으며, 짐승 같은 남자의 사랑을 독차지한 사람.
‘그건, 어떨지….’
부인에게 정절을 지키는 드문 남편인 건 좋지만, 눈을 가리고 귀를 막는 건 결코 옳지 않았다. 그녀가 조금이라도 그간의 이야기를 알았다면 제게 호감을 보일 리가 없었으니까.
자길 죽일 마음을 먹고서 남편을 유혹한 여자를 앞에 두고서 웃을 리도 없었다.
‘바보 같아.’
어느 쪽이 바보 같으냐 하면, 지금 와서 그런 걸 신경 쓰고 있는 자기자신이었다. 이 여자가 감금 같은 과보호를 당하고 있든지 말든지, 저 혼자 아무것도 모르고 있어서 바보 같은 꼴이 되든지 말든지, 그녀는 제게 필요한 일만 챙기면 됐다.
이혼을 종용하고, 루크와의 사이를 찢어놓는 것 말이다.
‘나와 스캔들이 있었다는 것만 알려줘도 울 것 같은 걸.’
온 도시를 떠들썩하게 휩쓸었던 소문을 아직까지도 모르고 있다면 뻔하다. 상상도 못 하고 있었을 것이다. 남편이 일을 한답시고 나가서는, 전 연인을 만나 애틋한 추억놀이나 하고 있었을 줄은.(어디까지나 만들어낸 소문에 의한 전제다.)
“…힘들지 않으세요?”
나디아는 가다듬은 목소리로 물었다. 갈라지지는 않았지만 무척 작았다. 셀리아는 한 마디 한 마디 용기를 쥐어짜 말하는 듯 버거워 보이는 그녀가 차라리 입을 다물길 바랐다. 입을 열수록 이상했다. 기분이 좋기도 하고, 가슴께가 답답하기도 하고, 어쩐지 나디아의 눈을 똑바로 볼 수가 없고….
“라 트에빌레에는 익숙하니 새삼 힘들 일은 없지요.”
“아뇨, 곧 결혼을 하시잖아요. 멀리, 가족도 친구도 없는 나라로요.”
“…….”
“외국은 아니지만 멀리 시집가게 되었으니까 기다리는 동안 얼마나 무섭고 초조할지 조금은 짐작할 수 있어요. 아는 사람이 아무도 없는 곳으로 간다는 게 얼마나 무서울지….”
“……무섭다고는 생각해본 적이 없군요.”
“용감하시네요.”
아름답다는 찬사는 익히 들었으나 용감하다는 말은 처음 들었다.
“전 사실 지금도 무척 긴장되고 무서워요.”
“?그래 보이는군요.”
“그러지 않으려고 하는데 낯선 사람과 이야기할 때면 긴장하고 말아요. 긴장하면 자꾸 실수를 하고요.”
“…지금까지는 아무런 실수도 하지 않았어요.”
“전하께서 잘 들어주셔서 그래요. 제 쓸데없는 말까지 싫은 기색 하나 없이 들어주고 계시니까요.”
셀리아가 눈을 깜박거렸다. 나디아는 조심스럽게 눈을 마주치며 웃었다.
“…….”
평생 보호만 받으면서, 사랑만 받고 자라면…… 저렇게 웃을 수 있는 걸까? 티 한 점 없이 깨끗한 호의만 담긴 눈으로 다른 사람을 볼 수 있을까. 셀리아는 눈살을 찌푸렸다. 저와 비교하면 볼품없는 저 얼굴이 문득 눈부셨다.
“먼 곳으로 가시면, 아무리 용감하신 전하라고 해도 이따금 외로워질 때가 있을 거예요. 전하께는 분명 많은 사람들이 있겠지만, 조금이나마 공감할 수 있는 입장으로, 정말 용기를, 용기를 쥐, 쥐어짜내서?.”
한 번도 말을 더듬지 않았던 나디아가 혀를 씹을 것처럼 더듬거렸다.
“용기 있는 자가 미, 미인을 얻는다고 하니까!”
얼마나 긴장했는지 무릎 위에 올린 주먹 쥔 손등이 하얗게 질려 있었다. 앞은 보고 있었으나 초점이 흐렸다.
“저와 편, 편지?.”
“싫어.”
“?여, 역시, 그렇, 그렇죠….”
필사적으로 쥐어짠 용기가 무소용이 되었다. 나디아는 조금 울 것 같았다. 각오를 하고 있었다고 해서 상처를 받지 않는 건 아니었다. 익숙한 거절이라도 똑같이 아팠다.
‘아니야, 그래도 용기를 냈어. 용기를 낸 것만으로도 첫 단추로는 충분히 힘냈어. 실망할 것 없고, 날 탓할 것도 없어. 자책은 하면 안 돼…. 그래서는 도와준 사람들에게 미안하니까….’
셀리아는 울 듯이 울지 않는 나디아의 얼굴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녀가 손을 뻗어 나디아의 뺨을 세게 쥐었다.
“전하?!”
“난 친구가 아니면 따로 편지 안 해.”
“예…?”
“꼭 써야하는 편지는 필체가 예쁜 시녀를 뽑아서 시키고 있지. 내 친필 편지를 받은 사람은 아바마마뿐이야.”
“그러시군요…?”
제국을 통틀어 황제밖에 받은 적이 없는 편지를 바랐으니 거절 당하는 게 당연하다는 뜻일까? 나디아는 뺨을 붙잡힌 채로 셀리아의 말을 이해하려 애를 썼다. 나오려던 눈물이 쏙 들어갔다.
“내 편지를 받고 싶다면 반말부터 해.”
“예…?”
기운이 쭉 빠졌다. 뺨을 붙잡히고도 빠져나가려는 노력은커녕 어리둥절한 눈으로 보고만 있다니. 셀리아는 잡았던 뺨을 놓아주고는 신경질적으로 벌떡 일어났다. 나디아는 셀리아의 갑작스러운 태도 변화를 따라가지 못하고 눈만 깜박거렸다. 그 순한 얼굴을 보고 있노라니 가만히 있기가 힘들었다.
가슴 안쪽이 쿡쿡 쑤시기도 하고, 견딜 수 없이 짜증이 치솟기도 했다. 자신을 죽이려고 했다는 건 알지도 못하는 의심 한 점 없는 녹색 눈동자.
아무런 잘못이 없다는 걸 알면서도 상처를 입히고 싶어서 참을 수가 없었다.
“네 남편과 스캔들이 난 사람한테도 편지를 쓰고 싶다면 말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