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야수라는 공작에게 시집왔는데-121화 (121/150)

121화

몸통의 두께, 팔의 길이, 다리 길이. 머리와 허리와 다리의 비율까지.

갑옷을 입고 있어 모양은 정확하지 않았으나 서 있는 자세가 무척 익숙했다. 조금 오른쪽으로 기운 몸, 다리를 내민 각도까지. 오늘 새벽에도 그는 저렇게 창가에 서 있었다. 나디아는 잠에서 깨어, 저보다 먼저 일어난 남편이 창가에 서 있는 뒷모습을 몰래 훔쳐보는 걸 좋아했다.

오래도록 구경할 수 있다면 좋았겠지만, 아주 잠깐 구경하고 있다 보면 루크는 어떻게 안 것인지 그녀가 깨어났다는 걸 눈치채고 뒤를 돌아보았다. 나디아는 그가 자신을 돌아볼 때의 표정도 좋아했다.

보면 볼수록 루크가 틀림없다.

‘카넬로 알바즈 경이라고 했는데?’

소개가 잘못되었을까. 나디아는 무언가 착오가 생긴 게 아닌지 조심스럽게 추측했다. 다른 문제라면 제 판단부터 의심해 보았겠지만 이번만큼은 그러지 않았다. 루크를 잘못 볼 리가 없었고, 그만큼 확신이 있었다. 그녀는 옆을 흘긋 보았다. 안나라면 마찬가지로 루크를 알아보았거나, 어떻게 된 일인지 파악하고 있을 것이다.

“왜 그러세요, 부인?”

“저 기사님?.”

“알바즈 경 말씀인가요.”

“네, 알바즈 경…….”

“검술 대회 출전을 위해 뽑힌 인재이지요. 게리 노스 기사단장이 후계자로 점찍었다고 하더군요.”

어, 아닌가? 안나는 나디아가 무엇을 묻고 싶은지 모르는 것 같았다. 안나는 입술을 달싹거리는 나디아에게 상냥하게 웃어주고는 태연하게 부연했다. 정말 모르는 걸까? 아니면 자신이 착각한 것일까. 나디아는 경기장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여전히 나디아의 눈에 카넬로 알바즈는 루크로만 보였다. 이상하다, 정말 이상하다….

“근위대 쪽에서 강력한 요청이 있어 급히 결정을 하게 되었어요. 흑곰 기사단과 근위대 간에 친분이 있다는 건 알고 계시죠?”

“친분이라고 해야 하나, 그걸….”

듣고 있던 레너드가 쓴웃음을 지었다.

“각하께서는 근위대의 숙소에도 종종 머무르셨던 것으로 압니다. 그 정도면 친분이지요.”

“들이닥쳤다고 쫓아낼 수 있는 신분이 아니니까 어쩔 수 없었던 거겠지.”

“ 근위대도 스테이턴 성에 방문해주신 적이 있으시지요. 흑곰 기사단원들은 근위대 분들을 꽤 좋아하고 있다고 들었는데 안타까운 엇갈림이네요.”

“……사이가 좋은 걸로 해 두지.”

일방적인 친분도 친분이긴 했다. 그러나 놀려먹길 좋아하는 게 순수한 호의라고는 말할 수 없을 것이다. 물론 안나도 다 알면서 하는 말이었다. 실제로 강력한 요청은커녕 예정에 없던 참가가 알려진 후 근위대에서는 항의가 빗발쳤다. 감히 황태자에게 대놓고 말하는 자는 없었으나 투구로 얼굴을 가린 루크에게는 적잖이 시비를 걸었던 것으로 알고 있다.

정작 루크는 소가 엉덩이에 붙은 파리를 꼬리로 떼어내듯 귀찮아한 것 같지만 말이다.

근위대는 승리자의 여유를 뽐내며 호탕하게 웃는 흑곰 기사단을 무척 질색했다. 질색이라는 말로 다 표현할 수 없을 만큼 싫어했다. 그러나 이 자리에서 진실을 밝히기란 요원한 듯하다. 그는 무리하게 진실을 밝히는 대신 영리하게 화제를 돌리길 택했다.

“알바즈 경은 나도 기억하고 있지. 셀리아, 너도 좋아할 만한?.”

“제가 뭘요, 오라버니?”

“?전도유망한 기사라고.”

전도유망할 뿐만 아니라 몸이 두껍고 얼굴도 준수하게 잘생긴 기사였다. 신분을 빌린다고 해도 체격 조건이 아예 다르면 근위대의 의심을 살 것이기 때문에 최대한 비슷한 조건을 가진 단원을 골랐다. 셀리아가 좋아할 만한 스타일인 건 분명했다. 셀리아는 제게 관심을 두지 않는 척하는 남자에게 가장 관심을 두었지만, 기본적으로 건장한 체격과 말끔한 얼굴을 가지고 있지 않으면 대상에도 넣지 않았다.

가장 좋은 조건을 갖춘 루크를 오랫동안 거들떠도 보지 않았던 것처럼.

셀리아는 레너드의 말에 유심하게 기사를 주시했으나 금세 흥미를 잃어버렸다. 루크에게 호된 창피를 당한 이후로 스테이턴 관련 인물은 꼴보기도 싫어진 것 같았다. 레너드가 호기심 어린 시선으로 나디아를 관찰했다.

‘눈치챈 건가?’

무언가를 깨달은 듯 말하려고 하던 나디아는 이제 입을 다물고 경기장을 뚫어져라 바라보고 있었다. 붉게 상기된 뺨이 차가운 겨울바람 때문인지, 뜨거운 열기와 환호에 휩쓸린 탓인지는 알 수 없었다. 다만 흑곰 기사단원을 바라보는 녹색 눈동자가 유난히 반짝거리고 있다는 것만은 알 수 있었다.

‘흑곰 기사단이라는 걸 듣고 손이 부서져라 박수를 치더니.’

다행히 아직 들킨 건 아닌 모양이었다. 서프라이즈는 시작도 하지 않았는데 벌써부터 들켜버리는 건 재미없을 것이다.

‘신분을 숨기고 참가한 건가 봐.’

레너드의 예상과 달리 나디아는 장신의 기사가 루크라 확신하고 있었다. 스테이턴 공작의 신분으로 참가를 하면 루크가 싫어하는 시끄러운 상황이 생겼을 테니, 조용히 검술 대회에만 집중하기 위해 신분을 빌렸을 거라고 짐작했다. 안나도 모르고 있다는 것은 의외였지만, 그녀는 랭커스터 저택과 스테이턴 저택을 오가며 바쁘게 생활하고 있었으니 부담을 안겨주고 싶지 않았을 것이다. 루크는 제 입으로 하는 말과 달리 상냥하니까.

‘그래서 바빴던 거구나.’

셀리아 황녀의 호위를 그만둔 직후에는 하루 종일 달라붙어 떨어지지 않을 것처럼 굴었던 루크는 이후로도 여전히 바빴다. 해가 저물 무렵에는 꼬박꼬박 돌아오게 되기는 했으나 어째서 그리도 바쁜지는 말해주지 않아 의아하게 여겼던 참이다. 나디아는 흑곰 기사단이 여전히 황녀의 호위에 반수가 차출되었으니 그들을 훈련시키느라 바쁜 것이겠거니, 짐작했을 뿐이었다.

어째서 바쁘냐고 물었다가는 루크가 기뻐하며 일을 모두 취소해버릴까 봐 차마 물을 수가 없었다.

‘아프다는데 어쩌겠느냐고, 웃으며 뼈 한두 개는 부러뜨릴지 몰라. 아무리 생각해도 꾀병으로 황명을 거부하겠다던 그 말은 진심이었어……. 황명은 둘째치더라도 루크가 괜히 다치면 안 되니까.’

황명을 둘째친다는 발상은 이미 나디아도 루크를 닮아버렸다는 증거였지만 안타깝게도 스스로는 인지조차 하지 못했다.

나디아에게 루크는 공작령 영주라는 이미지가 강했으나, 루크 리처드 스테이턴은 귀족보다는 기사에 가까웠다. 나디아가 보기에도 루크에게는 멀끔한 재킷과 셔츠보다는 쇠 비린내가 나는 검과 두꺼운 갑옷이 더 잘 어울렸다. 라 먼스트로드에 온 이후로 어딘가 답답해보이는 루크가 마음이 쓰이던 차였다.

마음껏 실력 발휘를 했으면 좋겠다. 기왕이면 우승까지 해버렸으면!

‘할 수 있을 거야! 루크니까!’

나디아의 머릿속에는 이미 루크가 우승하여 환호를 받는 광경으로 가득했다. 불가능하거나 어려울 거라는 생각은 깃털만큼도 하지 못했다. 루크니까.

*

“이겼어요, 안나!”

“그렇군요. 이겼네요.”

안나는 심드렁한 어조로 대꾸했다. 들떠서 어쩔 줄 모르는 나디아와는 대조되는 반응이었다.

‘허약한 애송이에게 질 리가 없지.’

흑곰 기사단의 듬직한 체구에 익숙해진 안나에게 웬만한 장정은 모두 허수아비로 보였다. 사실 상대였던 디오 란슬롯도 체격이 좋았지만, 아무래도 흑곰 기사단이나 그보다 더 큰 루크에 비하면 허약해 보일 수밖에 없었다. 몇 합 나누지도 않고 금세 끝나버린 시합이 시시하기도 했다.

만약 루크가 졌다면 그게 더 놀랄 일이었을 것이다. 돌아가신 선대가 무덤에서 뛰쳐나와 손자를 두들겨 패실 테니까.

카넬로 알바즈의 정체를 알고 있는 레너드도 놀라지 않기는 마찬가지였다. 그들은 신이 나기는커녕 시시하다는 듯 담담하게 경기장 아래로 내려가는 자칭 카넬로 알바즈를 보며 말했다.

“역시 흑곰 기사단이로군. 여전히 산악 훈련을 하고 있나?”

“예. 주기적으로 시행하고 있습니다.”

“그런 훈련을 하다보면 괴물이 되는 게 당연하겠지.”

“아직 사망자는 한 명도 나오지 않았습니다.”

“아직 나오지 않았을 뿐이겠지.”

레너드는 코웃음을 쳤다. 근위대조차 버티지 못하는 훈련 강도는 정상이 아니다. 루크가 어떤 남자인지 몰랐다면 수많은 사상자가 나온 게 틀림없으며, 그 사실을 은폐하고 있다고 의심했을 것이다. 근위대는 아직도 그 의심을 떨치지 못했다.

“잠시 자리를 비우겠다. 첫 시합의 패자를 위로해주어야겠지.”

레너드가 말했다. 잠시 틈을 보아 셀리아에게 경고를 전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셀리아가 무슨 말을 할지 불안했으나 나디아의 주변에는 든든한 아군들이 있으니 잠깐 사이에는 큰일이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레너드가 자리를 뜨자 안나가 말했다.

“부인, 음료를 가져다 드릴까요? 목 마르지 않으세요?”

“그러고 보니 조금….”

나디아는 무안하게 웃으며 인정했다. 조금이라고 하기에는 목소리 끝이 갈라지기 시작했다. 브릿 후작 부인의 눈치를 보아 다소 세게 박수만 치다, 루크- 카넬로 알바즈 경이 승리하는 순간 저도 모르게 환호성을 내질렀기 때문이다. 일리야가 혀를 찼다. 목만 쉰 게 아니라 손바닥도 아주 빨갛게 달아올랐다.

“너무 열심히 응원했잖아. 잘 들리지도 않았을 텐데.”

“하지만 이기길 바랐는 걸.”

왠지 루크는 멀리서도 제 목소리를 들어주었을 것 같았다. 못 들었어도 응원하지 않을 수 없었으니 어쩔 수 없었다. 안나가 부드럽게 웃으며 말했다.

“알바즈 경에게도 큰 힘이 되었을 겁니다. 그럼 여기서 기다려주세요.”

“잠깐, 안나. 나도 같이 가.”

브릿 후작 부인이 일어서는 안나의 팔꿈치를 잡았다. 안나가 말했다.

“기다려주시면 제가 가져올 텐데요.”

“흙먼지 때문에 속이 좋지 않아. 잠시 맑은 공기를 쐬어야겠어.”

“세상에, 부인, 안색이….”

일리야는 깜짝 놀라며 브릿 후작 부인을 부축했다. 한참 전부터 말이 없다 했더니, 브릿 후작 부인의 안색이 형편없이 창백했다. 나디아도 놀라며 일어서자, 브릿 후작 부인이 손을 휘저어 만류했다.

“일어날 필요 없어요.”

“하지만 부인, 언니보다는 제가 더 힘이 셀 거예요.”

이럴 때 힘부터 자랑하는 건 남편과 비슷한 부분이다. 브릿 후작 부인은 다소 복잡한 눈으로 염려 가득한 나디아의 얼굴을 보다가, 일리야에게 손을 내밀었다.

“일리야, 부축해주겠어?”

“예, 부인.”

“세 사람이나 달라붙어 부축해야 할 환자는 아니에요. 호의만 감사하게 받겠어요.”

거절하는 말과 달리 브릿 후작 부인은 옅게나마 웃어주었다. 나디아는 걱정을 지우지는 못했으나 덕분에 조금은 안도할 수 있었다.

안나와 일리야, 브릿 후작 부인까지 모두 일어나자 꽉 찼던 자리가 텅 비어버리고 말았다.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