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0화
칭찬을 듣고 기분 나쁜 사람은 없다.
그러나 셀리아에게 칭찬은 무척 당연한 것이었다. 사람이 숨을 쉬듯이, 해가 지면 밤이 오는 것처럼 모두 그녀를 칭찬하고 잘 보이고 싶어 노력했다. 어렸을 때는 황제의 사랑을 담뿍 받는 황녀의 환심을 사고 싶어서, 어느 정도 자란 후에는 그녀의 사랑을 받고 싶어서.
이유가 무엇이든 셀리아에게 ‘아름답다’고 칭찬하는 사람들은 무척 흔했다. 오늘도 레너드가 나타나기 전까지 “아름다우세요.”, “아무리 제국이 넓다고 해도 우리 황녀 전하보다 아름다운 분이 계실 리가 없어요.”, “누구라도 반하지 않을 수 없을 거예요.”라는 칭찬을 즐기고 있던 참이다. 그녀의 곁을 오래 지킨 사람들은 아름답다는 칭찬을 수백 가지 변주를 줘 가며 쏟아낼 줄 알았다.
하지만 그렇기 때문에 그 어떤 미사여구도 없는 ‘아름답다’는 말로는 그 어떤 감흥도 느낄 수 없었다. 셀리아에게 ‘아름답다’는 말은 칭찬이 아니라 당연한 사실이었기 때문이다. 낮은 밝다, 밤은 어둡다와 같은 수준이었다.
“제국에서 가장 아름다운 분이시라는 소문은 들어 알고 있었지만, 소문 이상이네요!”
“그, 그래요?”
“네!”
활짝 웃으며 대답하는 이의 녹색 눈동자가 반짝반짝 빛났다. 여기서는 어휘력이 형편없다고 비아냥거려주는 것이 정답일 텐데. 당연한 말을 한다고, 실례를 저질러놓고 뻔한 변명을 둘러댄다고 해 주어야 하는데.
‘뭐, 뭐지. 기분 좋아….’
셀리아는 어떤 표정을 지어야 할지 혼란스러웠다.
“여기 계신 브릿 후작부인께서 전하에 대한 말씀을 해주신 적이 있었어요. 여러 모로 귀감이 삼을 만한 분이라고 하셨죠.”
“…제가 그런 말을 했나요?”
“네.”
브릿 후작 부인은 눈을 빠르게 깜박여 당황을 숨겼다. 셀리아 황녀에 대한 이야기를 꺼내기는 했다. 그러나 어디까지나 겉모습과 태도를 말했을 뿐, 셀리아 황녀 자체를 귀감으로 삼으라는 말은 한 마디도 하지 않았다.
“후작 부인께서 어째서 그런 말씀을 하셨는지 이해가 돼요.”
나디아는 마치 동경하던 기사를 만난 수줍은 소녀처럼 두 손을 모았다.
“마치 여신 같으신 걸요!”
대화를 듣고 있던 사람들의 표정이 미묘하게 일그러졌다. 어느 때고 말문이 막힌 적이 드물었던(최근에는 좀 잦았다) 셀리아는 무슨 말이든 꺼내보려고 했으나 입술만 달싹일 뿐,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저 진심 가득한 얼굴을 대체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 것인가?
놀리나? 놀리는 건가? 솔직한 감탄과 칭찬을 곧이곧대로 받아들일 수 없었던 셀리아는 논리적으로 가장 들어맞는 이유를 찾아냈다. 그렇게 보이지는 않지만 고도로 비꼬려는 속셈인지도 모른다.
‘남편과 나에 대해 어떤 소문이 돌고 있는지 모를 리가 없을 텐데?’
스테이턴 공작부인, 나디아 마샤 스테이턴은 황녀 셀리아에게 절대 호의를 품을 수 없었다. 남편 스테이턴 공작을 사랑한다면 말할 것도 없었고, 사랑하지 않는다고 해도 그녀를 무시하고, 그녀의 자리를 빼앗으려는 여자를 좋아할 수 있을 리 없을 것이다.
‘설마, 진짜 모르나?’
셀리아는 눈을 부릅뜨고 브릿 후작 부인을 노려보았다. 브릿 후작 부인은 셀리아가 무엇을 묻고 싶은지 아는 듯, 가만히 시선을 피했다. 이어서 일리야, 안나도 마찬가지로 미묘한 표정으로 시선을 피하기만 했다.
“루크도 참, 이렇게 아름다운 분이었다고 말해주었다면 좋았을 텐데.”
“…….”
“루크가 부러워지네요. 종일 이렇게 아름다운 분을 뵐 수 있었다니.”
“…….”
아냐, 이건 아냐……. 얘는 진짜 몰라, 진심이야……!
루크에게 붙은 야수 공작 소문을 지우고 없던 스캔들을 만들어내기 위해 수많은 돈을 풀었는데 정작 당사자는 까맣고 모르고 있었다.
셀리아가 기대했던 만남은 이런 게 아니었다. 웃는 얼굴로 비아냥거려주면서, 제 우위를 확인시키고 기를 죽여 물러나게 할 참이었다. 한 가닥 숨겨둔 성질이 있다면 잠깐이나마 불꽃 같은 신경전을 벌일 테다. 그녀를 지키려는 주변인들과 기싸움을 할 수도 있었다. 브릿 후작 부인은 꽤 만만치 않지만, 이쪽도 절박하므로 지지 않을 각오를 다지고 왔다.
이런 웃지도 못할 상황에 처하기 위해 그 돈을 쓴 게 아니었다. 그 돈을 쓰고, 그 모욕을 당하고…….
“응?”
기묘한 침묵을 눈치챈 나디아가 셀리아를 보며 눈을 깜박거렸다. 실수한 것일까. 셀리아는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 나디아는 저도 모르게 안나를 먼저 보았다. 안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그렇다고 나무라는 기색도 아니었다. 안나, 일리야, 브릿 후작 부인뿐만이 아니라 근처에 앉은 다른 사람들도 그녀를 보고 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나디아의 뺨이 서서히 달아오르기 시작했다. 역시 너무 떠들었다. 설레서 저도 모르게 그만, 어느 때고 침착하고 여유로워야 한다는 지침을 잊고 만 것이다….
“풋!”
“……오라버니.”
셀리아가 뒤를 돌았다. 레너드는 손바닥으로 입을 틀어막고 고개를 푹 숙이고 있었다. 어깨가 간헐적으로 떨렸다. 나디아는 당황해 주춤거리다, 치맛자락을 잡고 인사했다.
“태자 전하를 뵙습,”
“아니, 거창한 인사는 그만두시오. 나와 루크는 친구이니, 편하게 대해주시면 고맙겠소.”
“하지만….”
“사실 부인과 난 초면이 아니기도 하고.”
“예?”
“결혼식도 참관했고, 최근에도.”
레너드는 씩 웃으며 눈을 찡긋거렸다. 나디아는 그제서야 기억해내고는 고개를 끄덕거렸다.
“기회가 닿지 않아 대화를 나누지는 못했지만, 사실 난 부인의 오라버니와도 친분이 있다오. 그러니 부담을 가지지 않으셨으면 하오.”
“그, 그러시군요. 전혀 몰랐어요….”
언니는 알았어? 아니 나도 몰랐지. 나디아와 일리야가 당황스러운 시선을 교환했다. 레너드는 그것을 알고도 무시한 채로 말을 이었다.
“셀리아, 인사를 나누었다면 이만….”
“이제 막 인사만 나눈 참이에요. 이대로 헤어지기도 아쉬우니, 동석할까요?”
셀리아가 레너드의 말을 잘랐다.
“부인과 더 이야기를 나누고 싶어 그래요. 괜찮겠죠?”
“그럼요! 아….”
선뜻 대답해버리고는 브릿 후작 부인의 눈치를 살핀다. 브릿 후작 부인은 어쩔 수 없다는 듯 눈을 내리깔았다. 이미 뱉어버린 말을 취소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고, 애초에 부탁을 거절할 수도 없었다.
“셀리아. 황족에게는 지켜야 할 자리가 있다.”
“오라버니 혼자 가세요. 어차피 저는 곧 타국으로 시집갈 몸이니 하고 싶은 대로 하겠어요.”
셀리아가 코웃음을 치며 나디아의 옆자리에 앉았다. 연무장을 둘러싼 좌석은 튼튼하게 만들어놓기는 했지만, 완벽히 편안한 자리는 아니었다. 등받이도 없는 좌석에 허리를 꼿꼿하게 펴고 앉은 셀리아가 레너드를 올려다보았다. 나디아는 새초롬한 셀리아를 보며 감탄했다. 어쩜, 버릇없이 말해도 예뻐. 예쁘고 귀여워……. 앗, 좋은 향기도 난다.
“……그럼, 나도 동석하도록 하지.”
“그러셔도 되겠어요? 제국의 황태자되시는 분께서. 지켜야 할 자리가 있으시잖아요.”
셀리아가 비아냥거렸다. 레너드는 환히 웃으며 기어코 셀리아의 옆자리를 차지했다.
“오늘은 축제다. 잠시 즐긴다 한들 아바마마도 탓하지 않으실 테지.”
“글쎄요, 어떨지.”
“……앞을 봐라. 시작하는 모양이다.”
네가 무슨 짓을 할 줄 알고 내버려두나. 방해하지 말고 꺼져요. 너 같으면 그러겠냐. 셀리아는 어울리지도 않게 방해를 거는 레너드를 노려보았다. 대체 무슨 바람이 불어 이러나. 루크를 싫어하고, 그를 놀리기 위해 최선을 다하던 레너드답지 않았다.
‘도와주지 않을 거면 방해라도 하지 말든지….’
셀리아는 레너드를 노려보던 시선을 거두고 정면을 보았다. 주변에 앉은 사람들은 대화에 끼어들지는 않았지만, 흥미진진하게 그들을 관찰하고 있었다. 남편의 연인이었다는 황녀와의 대면인데도 긴장감이 하나도 없어, 소문 자체를 의심하는 사람도 있는 듯하다. 당연히 스테이턴 공작부인이 자신을 적대하거나, 최소한 경계라도 할 줄 알았던 셀리아로서는 첫 단추부터 어긋난 셈이었다.
‘이게 뭐야. 계산대로 흘러가는 게 하나도 없어. 그 고자도, 고자 부인도….’
뺨에 흘긋거리는 시선이 닿았다. 셀리아는 옆을 보았다. 나디아가 볼을 발갛게 붉히고 있었다.
“…제 얼굴에 뭐라도 묻었나요?”
“아, 아뇨.”
“조금 더 다가오셔도 괜찮아요.”
“아뇨, 괜찮아요!”
“…….”
“싫은 게 아니에요! 오해하지 마세요!”
나디아는 말을 더듬지 않으려고 최선을 다했다. 황녀 앞에서도 말을 더듬었다가는 브릿 후작부인이 자신을 용서하지 않을 것이었다. 그녀는 제가 지나치게 어수룩해보이지 않길 바라며, 신중하게 단어를 골랐다.
“너무 예쁜 분이 옆에 오시니까 두근거려서요….”
“…….”
“이 정도 거리는 두어야 심장이 터지지 않을 거예요….”
셀리아는 겨우 입 꼬리를 당겨 미소를 만들었다. 그리고는 작게 “고마워요.”라고 대답했다. 그들이 나란히 정면을 보자, 레너드는 혼자 하늘을 보며 손바닥으로 입을 틀어막았다. 셀리아의 귓바퀴가 새빨갛게 달아올라 있었다.
“첫 번째 시합! 흑곰 기사단의 카넬로 알바즈 경! 그리고 상대로는 달로트 백작가의 기사, 디오 란슬롯 경!”
나디아가 귀를 쫑긋 세웠다. 흑곰 기사단도 검술 대회에 참전한 줄 몰랐다. 그녀는 반가운 마음에 카넬로 알바즈라고 소개된 기사 쪽을 보았다. 낯선 이름이었지만 흑곰 기사단에는 그녀가 모르는 기사가 더 많았으니 이상하지 않았다. 그녀는 일단 손이 부서져라 박수를 치며 기사를 응원했다.
흑곰 기사단의 상징 같은 검은 갑옷과 투구를 뒤집어 쓴 기사는 키가 무척 컸다. 그에 어울리는 대검을 쥐고 있었는데, 멀리서 보기에는 나디아 자신만큼 커다란 검이었다. 체격도 루크만큼 두껍고, 키도 루크만큼 크고, 허리와 다리도 루크….
“어?”
루크잖아.